비폭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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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념
2. 원리
3. 비판
4. 관련 지식


1. 개념[편집]


비폭력주의, Nonviolent resistance

권력의 억압이나 폭력 혹은 국가의 옳지 않은 정책이나 법률에 대해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주의를 뜻한다. 따라서 비폭력주의에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저항한다는 불복종한다는 의미도 중요하다.

대표적인 인물로 마하트마 간디가 있다.

비폭력주의는 여러 예를 볼 수 있는데 아테네의 고전적 비극작품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등에도 그 예가 있으며 고대 로마유대인이나 평민들의 군역거부, 기독교도의 이교예배강제에 대한 거부 등의 예도 있다. 고대 인도에서도 힌두교도·불교도·자이나교도가 보여줬던 아힌사.[1]도 이러한 비폭력주의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11세기 이교도라고 불렸던 카다리파에도 비폭력주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폭력주의의 전통은 여성참정권운동이나 제1·2차 세계대전기의 평화운동, 반나치스 저항운동과도 이어져 있다.

현대의 비폭력주의로 유명한 사람은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를 들 수 있다. 크림전쟁 종군 무렵부터 톨스토이는 현존질서에 대한 비협력 군역·정부근무·납세·배심원 취임거부 등을 주장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톨스토이주의자들은 볼셰비키정권하에서도 무기를 들지 않고 투옥이나 처형을 받아들였다. 또 톨스토이가 그 구원에 힘썼던 두호보르 교도도 비폭력주의로 유명하다.

비폭력주의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하트마 간디다. 간디는 "무살생, 비폭력(Ahimsa)은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그것은 최상의 법칙이다. 이것만이 인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비폭력을 믿는 사람은 살아 있는 신을 믿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비폭력주의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이는 외세를 두려워만 하던 인도인들에게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고, 이 힘으로 인도는 독립을 쟁취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간디가 이러한 운동을 벌일 수 있었던 힘은 소로, 톨스토이, 러스킨으로부터 받은 영향과 인도의 아힌사 전통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기반한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스스로 정의와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여 적대자의 회심을 촉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인도의 독립운동 과정 중에 생긴 불복종·비협력·비폭력의 저항주의를 간디주의라 한다.[2]

간디주의는 이후 미국 흑인해방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 흑인 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의 대중적 시민불복종운동을 벌였다. 그는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어내기 위한 ‘공민권 운동’을 이끌면서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 등의 비폭력운동을 이끌었다.

티베트 독립 운동을 총지휘하는 달라이 라마 14세도 비폭력주의를 끝까지 고집한다. 그러나 2008년, 비폭력 저항노선을 무시하는 중국 정부의 진압 때문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위구르 독립운동이 쿤밍역 칼부림 테러로 인해 중국 민중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지지를 급격하게 잃고, 결국 중국은 위구르를 더욱 잔혹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답한 것처럼 계속 비폭력주의를 이어 가는 게 더 이득이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은 약 반년간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비폭력시위로, 결국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성공한다.

2. 원리[편집]


고전적으로 권력은 소수의 지도층이 지니고 있고, 이 권력을 사용해 대중을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며 지도층의 구성원이 바뀔 수는 있으나, 이 권력은 불변한 것이라는 이론이 받아들여졌다.[3]
그러나 이에 반하는 이론이 대두되었는데, 권력은 대중에게서 나오고 대중이 이 권력을 지도층에게 쥐어주는 것이며, 대중은 지도층이 자신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면 그 권력을 빼앗을 수 있다는 이론이 생겨났다.[4]

비폭력주의는 권력이 후자의 이론으로 인해 생기는 것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그들의 권력에 저항해 결론적으로 권력을 되찾는 것이다.

우선 비폭력주의는 주위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쉽다. 자신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피해를 줘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주위에서 지지를 얻고 직접 참여도 늘어난다. 또한, 한쪽이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다른쪽이 비폭력주의로 나선다면 선악 관계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는쪽이 주위를 인식한다면 계속 폭력적으로 나서기 힘들고, 설사 그러지 않더라도 비난 및 지지를 잃기 쉽다.

또한 비폭력주의는 거대한 심리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사실 비폭력주의는 폭력적인 상황보다 용기가 더 필요하다. 상대방은 폭력적 상황을 예상하거나 애초에 폭력적으로 상대하기로 계획하고 나오는데, 정작 본인이 할 것은 "폭력을 휘두르지 말고, 설사 자신이 맞더라도 상대방을 때리지 말고 저항해라."라는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운동에 임하는 것이기에 꽤나큰 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상대하는 입장에서도 불리한 점은 있다. 우선 폭력적인 운동을 진압하는 것과 다르게 인력과 물자를 더 넣는다고 진압 성공확률을 더 높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과잉진압을 하면 역효과만 일어난다. 빠르게 지지를 얻는다는 비폭력주의의 특성을 보면 얼마 있지 않아 집단이 매우 커질것인데 만약 이들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냐는 우려가 부상하기 시작한다.[5] 실제로 비폭력 운동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이 자주 일어난다. 정해진 시간에 집단 행동을 해서 결속력을 보여주는 행진, 집회가 대표적이고, 남아프리카아파르트헤이트 시위에선 군대에 맞서 시위대가 Toyi Toyi 라고 부르는 대규모의 춤을 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패한 비폭력주의도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목표가 명확하지 않거나 다른 이유로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로 갈팡질팡한다는 것이다. 피해를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한다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게 비폭력인데, 이때는 우리가 왜 비폭력주의를 외치는지, 결국 목표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비폭력 운동을 계속 이어나가야하고, 행여나 발생하는 양방 폭력사태도 소규모 사태로 중단시키고 비폭력주의가 주를 이끈다면 결국 성공한다. 그러나, 때에 따라 비폭력주의 운동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언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음으로 사람들의 이탈도 쉽게 일어난다. 이렇기에 대중을 이끄는 자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해지고 이에 성공한 간디마틴 루터 킹이 위인으로 묘사되는건 이 때문이다.


3. 비판[편집]


"A freedom fighter learns the hard way that it is the oppressor who defines the nature of the struggle,and the oppressed is often left no recourse but to use methods that mirror those of the oppressor. At a point, one can only fight fire with fire."

"투쟁의 방법을 정하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들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억압하는 자들이 쓰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알게 된다. 어느 시점부터는 강대강으로 나설 수 밖에 없다"

넬슨 만델라


"I believe it's a crime for anyone being brutalized to continue to accept that brutality without doing something to defend himself."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계속 잔인하게 고통당하는 것은 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믿는다."

맬컴 X


"The concept of nonviolence is a false ideal. It presupposes the existence of compassion and a sense of justice on the part of one's adversary. When this adversary has everything to lose and nothing to gain by exercising justice and compassion, his reaction can only be negative."

"비폭력주의는 잘못된 이상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동정심과 정의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동정심이나 정의감으로는 아무 소득이 없고 잃기만 한다고 판단한다면, 그(상대방)는 계속 나쁜 짓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조지 잭슨, 흑표당의 당원이자 블랙 게릴라 패밀리의 창시자


비폭력은 어떤 의미에서 최악의 폭력이다.

자크 데리다


한편 체 게바라, 레온 트로츠키, 찬드라 보스는 비폭력주의와는 강경하게 반대 입장에 있는 사상가였다. 이들은 비폭력주의가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강요하려는 시도이며 폭력은 혁명적 변화의 필수이며 자위권은 기본권이라고 주장했다. 조지 오웰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 전략이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권리"가 있는 국가에서만 효과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의문을 표했다. 만일 인도를 식민지배 하는 국가가 영국이 아닌 권위주의 독재국가였다면 씨알도 안 먹히는 운동이었다는 뜻이다.[6] 자크 데리다는 비폭력주의는 자신만의 비폭력 도덕원리를 내세워 타자의 주체적 인식을 배제하여, 나만의 진리로 중심 화하고 동일화시켜, 타자를 억압하고 속박하는 어떤 의미에선 최악의 폭력이라고 맹비판하며, '더 적은 폭력'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비폭력주의의 비판가들은 비폭력 운동의 성공적인 사례에서는 무력 또한 동원되었지만 곧 잊혀지고 말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냉정하게는 힘의 논리 앞에서 매우 무력하다는 것이 커다란 단점이다. 마하트마 간디조차 '폭력적인 사람에게 비폭력을 가르칠 순 있어도 겁쟁이에게는 비폭력을 가르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몇몇 사상가들은 비폭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무력투쟁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아힌사 사상이 짙은 인도에서도 정작 걸핏하면 유혈사태가 일어나는데, 이는 폭력을 억압하기만 한 부작용이라고 주장한다.

간디와 같은 시대였던 일제강점기의 조선 또한 1919년 3월 1일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3.1 운동이 일어났으나 일제의 폭력적인 탄압에 의해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비폭력주의는 결코 만능이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4. 관련 지식[편집]


"Nonviolent resistance(revolution)"가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라는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국어사전에도 등록되어 있고 자주 쓰이는 단어지만 엄연히 오역이다. 일단 nonviolent 자체가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을 의미하며, 그 내용 상으로도 폭력적인 수단 이외의 다른 수단으로 저항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Nonviolent resistance(revolution)"이다. 그러므로 저항하지 않는 주의라는 뜻의 무저항주의라는 용어는 매우 부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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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으로 폭력을 이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서 정치이념으로서 거론되고, 비협력 불복종의 점성이 강한 운동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정치운동의 이념으로서 안출한 〈사티야그라하(진리의 파착)〉에 기원한다. 이 비폭력의 원어는 아힌사(ahinsā)인데, 이는 원래 고대 베다의 제사의 중요한 요소로서 가축을 살해하는 것(힌사)에 대해서, 윤회와 거기에서 이 해탈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강조된 큰 덕목으로, 모든 생물을 상처를 내거나 죽이거나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가령 불교나 자이나교에서는 오계의 하나로서 간주하며 한역어로는 〈불살생〉이라고 한다.[2]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간디는 영국을 상대로 폭력적인 수단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영국에 대한 협조나 복종 일체를 거부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반드시 독립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간디의 비폭력을 조선의 친일파들이 일제에 복종하고 협조했던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일이다.[3] Monolithic power theory[4] 예를들어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권력이 지도층으로부터 나오는것이 아닌,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5] 실제로 시리아 내전, 미얀마 내전은 대규모 시위에서 시작해 내전까지 번진 것이다.[6] 실제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골머리를 앓자 '저항세력이 안 나올 때 까지 전부 죽여라'고 조언했고, 실제로 나치 독일은 유럽 점령지에 설치한 국가판무관부에서 이를 직접 실행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무장 투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