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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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42대 대통령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William Jefferson Clinton


파일:Bill_Clinton.jpg

출생
1946년 8월 19일 (76세)
미국 아칸소 주 호프
재임기간
제42대 대통령
1993년 1월 20일 ~ 2001년 1월 20일
서명
파일:빌 클린턴 서명.svg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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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친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1]
양부 로저 클린턴 시니어[2]
어머니 버지니아 클린턴 켈리[3]
형제자매
이부동생 로저 클린턴 주니어[4]
배우자
힐러리 클린턴[5]
자녀
첼시 클린턴[6]
학력
핫스프링스 고등학교 (졸업)
파일:조지타운 대학교 원형 아이콘.png 조지타운 대학교 (B.A.)
파일:옥스퍼드 대학교 아이콘.png 옥스퍼드 대학교 (중퇴)
파일:예일 대학교 미니 아이콘.png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 (J.D.)[7]
종교
개신교 (침례회)[8]
신체
188cm, 101kg[9]
소속 정당




파일:6196.t56cc6f4d.m1200.tif.pv.xbH42_m6pudq8e5aK.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정치 입문
2.2. 대통령 당선 이후
2.3. 퇴임 후
3. 평가
3.1. 미국
3.2. 한국
3.3. 국외 문제
4. 르윈스키 스캔들
5. 선거 이력
6. 어록
7. 등장 매체
8. 여담
9. 둘러보기




제42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미국정치인. 제42대 대통령을 지냈다.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대통령이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에 이어 3번째로 젊은 46세의 나이에 대통령직에 취임한 인물이다.[1]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로 평가되는 1990년대를 이끈 대통령이며, 클린턴 대통령 재임 당시의 경제 호황은 닷컴 버블로 일컬어지는 거품 경제였다는 평가가 있기는 하나, 냉전 종료 이후 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미국을 꽤나 안정적으로 통치했기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높은 퇴임 지지율[2]을 기록한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부인은 그 유명한 힐러리 클린턴.[3]


2. 생애[편집]


1946년 8월 19일 줄리아 체스터 병원에서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William Jefferson Blythe III)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중장비 운전기사였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2세(1918~1946)는 클린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 미주리주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숨지게 된다. 블라이드가 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버지니아 캐시디(Virginia Cassidy, 1923~1994)는 로저 클린턴 시니어(Roger Clinton Sr., 1908~1967)와 재혼하고, 블라이드가 15살이 되던 해에 성을 계부의 성인 클린턴으로 바꾸게 된다. 정식 이름은 윌리엄[4]인데, 그보다 애칭인 빌이 더 유명해 대개 '빌 클린턴'이라고 불린다.[5]

계부는 술에 취하면 아내와 아들을 폭행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이부동생을 보호해야 했던 클린턴은 나이에 비해 조숙하게 자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상당수를 범죄와 폭력이 들끓는 핫스프링스에서 불우하게 보냈고, 끼니를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로 때웠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시절엔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약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첫 번째 대선 운동 시절 비치료용 약물[6]을 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의 대답이 압권이다. 클린턴은 "연방이나 의 마약 금지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7]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웠으니 미국의 마약금지법을 어기지 않은 것은 맞다. 이 발언은 후술하는 '부적절한 관계'와 더불어 그의 교묘한 화술을 이야기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된다. 당연히 마리화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고 계속 이어졌다. 이에 빌 클린턴은 입에 물긴 했지만 몸에 맞지 않아서 빨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의 경쟁자였던 제리 브라운마저도 그저 사소한 문제라며 이 부분만큼은 클린턴을 감쌌으나, 마리화나 문제는 한동안 빌 클린턴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며 들썩였다.

어찌 보면 아메리칸 드림, 계층적으로 볼 땐 개천에서 용난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가난한 어머니와, 폭력적인 의붓 아버지 슬하, 그리고 우범지대 '핫 스프링스'에서 자라 비싼 미국 대학교 학비를 낼 수 없는 환경이었으나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조지타운대학교 외교정치학과, 옥스퍼드대학교, 예일대학교 로스쿨을 꾸준히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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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 모습.

조지타운 대학교를 다니고 로즈 장학생[8]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을 거쳐서[9] 예일 대학교로스쿨을 졸업했다.[10] 예일대 로스쿨 재학 시절 힐러리 로댐을 만나 1975년에 결혼하고 1980년에 딸 첼시를 두었다.

파일: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의 신혼시절.png

위 사진은 1975년 11월 촬영된 빌과 힐러리의 신혼 시절이다.

이들을 엮어준 것은 베트남 전쟁으로, 힐러리는 그 전까지만 해도 린든 B. 존슨에 대항한 공화당 소속 배리 골드워터의 지지자였다.

조지타운 대학교 재학 중에는 아칸소 상원의원실에서 서기를 지냈고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아칸소로 돌아와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2.1. 정치 입문[편집]


1974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아칸소 연방 하원 선거에 출마해 현직인 존 폴 해머슈미츠와 맞붙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다소 유리해진 정세에도 불구하고 4% 가량 차이로 낙선하였다.

2년 후 민주당 소속으로 아칸소 검찰총장에 수월하게 선출되였고 1978년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었다.[11] 주지사 때는 교육정책과 여성, 흑인 등용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빌 클린턴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한 것이, 그가 맨 처음 주지사로 선출됐을 때가 32살이었다. 그는 당시 미국 주지사 중 가장 어린 주지사였으며 역사상 어린 나이에 주지사가 된 인물 중 한 명이다.[12] 아칸소는 미국에서 작은 주이기 때문에 1992년까지도 클린턴의 인지도는 대단히 낮았다. 그러나 경선 당시 1988년도의 지루한 대선 지지 연설의 이미지를 일신한 클린턴은 컴백 키드(Comeback Kid, 돌아온 꼬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미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클린턴을 유력한 대선 후보로 점찍었고, 1992년 대선에 그가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주지사 임기를 채우겠다는 공약을 했고, 걸프전 승리로 엄청나게 치솟은 부시의 인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추었다. 아칸소 주에서 그의 출마를 지지하는 여론은 39%에 지나지 않았고 부시가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여론은 52%에 달했다. 그를 주지사로 뽑은 아칸소 주가 그 정도였으니 클린턴이 출마를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저명한 공화당 인사 로저 포터가 전화 통화에서 클린턴에게 "만약 당신이 출마한다면, 당신이 현재 민주당에서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수인 고로 당신을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파멸시킬 수밖에 없다."라며 위협했다.[13] 그러자 그때까지 출마를 망설이던 클린턴은 격노하여 "충고 고맙다. 덕분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쏘아붙였다. 이에 로저 포터는 "만약 당신이 1996년 대선에 나온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겠지만 이번 대선에 나온다면 파멸할 것이고 정치 생명도 끝날 것이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결국 클린턴은 힐러리와 논의한 끝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아이오와 상원의원인 팀 하킨 등을 제치고 승리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가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다는 사실 등이 지적되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병역 문제였는데, 그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도피성 유학을 했다는 혐의가 가해지면서 미국의 퇴역군인을 비롯한 보수층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렸고 부시는 "내가 태평양 전쟁에서 총알을 물고 있을 동안 클린턴은 영국에서 손톱을 물고 있었다!"라며 맹공을 펼쳤다.[14] 거기에 제시 잭슨 같은 급진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도 클린턴을 위협했고[15] "컴백 키드"는 그렇게 잠시 위기에 몰렸다. 말년의 리처드 닉슨은 의기양양하게 '부시가 재선할 것이고 로스 페로가 2위쯤 할 것이며 클린턴이 참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여론은 제법 흔들렸다.

파일: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그러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다 발생시킨 불경기로 당황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역사에 남을 선거 문구를 내세워 370명의 선거인단을 휩쓸며 43%의 득표율을 올려 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여하간 이 문구의 가장 대단한 점은 '냉전의 시대는 가고 경제 전쟁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단 네 단어로 압축했다는 점이다.[16][17] 클린턴은 12년 만에 공화당 집권을 저지하고 여유있게 승리했다.

로스 페로는 불출마를 번복하여 양당 후보의 뒤통수를 쳤고, 민주당 경선 과정도 초반에는 클린턴이 겨우 3위를 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정공법과 꼼수를 모두 적절히 활용해 가며 이를 돌파했다. 여기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멍청한 부통령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댄 퀘일[18]과 반대로 '미국 역사상 가장 똑똑한 부통령 후보'라는 이야기가 돌았던 앨 고어라는 부통령 후보들의 격차도 작용했다. 실제로 앨 고어를 부통령으로 올린 다음에 지지율이 꽤 많이 상승했고, 차라리 앨 고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지 않냐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게다가 부시가 1988년 선거에서 답습했던 네거티브 위주의 선거를 치러 유권자들을 질리게 하기도 했다. 어쨌든 클린턴은 매우 힘겹게 선거에서 이겼다.[19]


2.2. 대통령 당선 이후[편집]



2.2.1. 빌 클린턴 행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빌 클린턴 행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빌 클린턴이 당선되면서 구성된 행정부다.


2.2.2. 내정[편집]


당선되자 마자 미국 경제의 악의 축이었던 쌍둥이 적자, 즉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개시했다. 우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기관의 상당 부분을 전자화해 공무원 30만 명을 해고했다. 또 레이건 정부 이후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감세정책을 폐기하고 누진세를 확대해 재정 수입을 늘렸다. 빌 클린턴의 첫번째 재정 법안은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1기 전반기에도 하원에서 218:216, 상원에서 50:50으로 갈렸다가 앨 고어가 찬성표를 행사해 가까스로 통과했다.

또한 재임 직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부시 행정부 때 폐기되었던 미국 통상법 301조를 부활시켜 거의 모든 국가의 무역, 관세장벽을 무너뜨리고, 우루과이 라운드 체제를 통해 농산물, 서비스,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분의 시장개방을 강제해 미국 산업의 시장 확대를 통한 무역적자 해소를 꾀했다. 또 미래산업으로서 IT, 금융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주도의 IT 산업,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오락산업 등 첨단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앨런 그린스펀 위원장을 필두로 한 연방준비제도 주도의 경제개혁도 성과를 보여 정부 재정이 흑자로 전환되고 미국 국내 경기가 클린턴의 임기 내내 호황을 이어갔으며,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손꼽혔고,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도 막강한 경찰력을 투입하고 교도소 수감자수를 크게 늘려놓아도 해결되지 않던 치안문제도 빌 클린턴 시절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20] 허나 갑작스런 시장개방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아야 했던 여타 국가들(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반미감정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내 힐러리의 주도하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대형 프로젝트인 국민의료보험 도입이 결국 좌초하고[21] 인기가 곤두박질쳐, 1994년 중간선거에서 대패해 상하원을 공화당에게 전부 내주게 된다.[22] 뒤이어 벌어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을 신속히 해결하면서 인기를 회복했지만 그 뒤로도 여러가지 스캔들 때문에 고생했다.

파일: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그래도 첫번째 임기 당시 클린턴은 높은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47,401,185표(49.2%), 선거인단 수 379명을 얻으면서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73세 고령의 밥 돌 상원의원에 압승을 거두고 1996년 연임에 성공했다. 화이트워터 사를 통한 부동산 투기 의혹(일명 '화이트게이트')으로 공화당이 공격하고 있었고, 지퍼게이트 외에도 주지사 시절의 여자 관계 의혹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 참고로 르윈스키 스캔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98년 1월로, 클린턴이 이미 연임에 성공한 뒤다.

두번째 임기 막판에는 동생 로저 클린턴과 마크 리치로 대표되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사면하여 의회에서 퇴임 이후 청문회가 벌어지는 등 그렇게 깨끗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임기를 보냈다. # 이 때문에 비교적 괜찮고 좋은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란 준수한 이미지의 조지 부시의 당선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은 그뒤 이미지와 유능함이 무조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2000년대 내내 한숨을 푹푹 쉬어야 했다. 아예 캐나다로 도망간 사람도 있을 정도.


2.2.3. 외교[편집]



우파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으로는, 클린턴이 급부상하는 중국을 포섭하는데 너무 열정적이었으며 러시아의 부패와 파벌주의에 눈을 감았으며 유고슬라비아이라크같은 국가들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는데 너무 느렸다는 것이 있다. 반대로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은 르완다에서의 인종학살을 막는데 클린턴이 실패한 것과 발칸 반도의 유혈사태에서 너무 느렸던 것과 강력해진 국제기구에 기반한 다자간 세계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임기초 약속을 저버린 것을 한탄한다. 심지어 실용적인 중도주의자들조차 클린턴의 빈약한 외교정책이 소수민족의 로비활동과 대중 여론조사, 그리고 미디어의 반응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사교 활동"과 같았다고 지적한다.

(중략)

클린턴 정부 치하에서 미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과거 구성국이었던 3개국(폴란드, 체코, 헝가리)을 동맹으로 끌고 옴으로써 냉전의 승리를 굳건히 했다. 급부상하는 중국이 가진 미국에 대한 호감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도 동아시아에서 동맹의 기반을 마련하면고 중국의 잠재적 경쟁자를 준비시켰다. 미국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동맹을 이끌면서 동맹들에게 더 큰 부담을 전가시켰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이도 NATO 동맹국과 함께 타국의 주권 영토에까지 개입할 권리를 주장하였다. 클린턴은 미국의 정책을 "세계 질서"와 국제공동체의 보편 이익으로 포장하였을지 모르나, 그 핵심은 여전히 미국의 국력을 일방적으로 투사하는데 있다[23]

- 클린턴의 외교 정책에 대한 두 가지 격려(Two Cheers for Clinton's Foreign Policy), Foreign Affairs 79#2 (2000)#,

- 스티븐 마틴 월트(Stephen Martin Walt)[24]

,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국제 문제 교수



  • 한때의 적국이었던 베트남과 오랜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수교하였다. 또한 베트남전 당시 사망 또는 실종된 미군 장병의 수색과 유해 송환에도 베트남에 협조를 구하였다.

  • 아이티의 좌파 대통령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군사 쿠테타로 실각하자 빌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국내의 개입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아이티 군사정부를 상대로 공습을 하겠다는 위협을 함과 동시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특사로 파견하는 등으로 아리스티드를 복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배경에는 당시 빌 클린턴의 지지세력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던 민주당내 흑인 의원들의 요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클린턴의 이런 노력 결과 아이티 군사정부는 권력을 포기하였고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복귀하였다. 다만 이는 임시방편일뿐이어서 2004년 다시 군사 쿠테타가 발생하였고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다시 실각하였다.

  • 팔레스타인 자치와 이스라엘군 철수 등의 항목으로 구성된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의 체결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주도하였다. 다만 이 협정은 협정 내용에 불만을 품은 과격분자가 이스라엘 라빈 총리 암살을 일으키는 등 구체적으로 빛을 보지는 못했다.



  • 르완다 - 르완다 내전 당시 르완다 및 세계의 구호 기구들이 미국 정부 및 유엔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철저한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했고 다른 서방국가 역시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방관했다. 그리고 그 결과 르완다 인구의 약 20%, 총 80만명이 학살당했다. 빌 클린턴마저도 르완다 학살을 본인 최악의 실패로 인정했을 정도#.

  • 보스니아 전쟁 - 1992년부터 1995년까지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발생한 민족주의 세력간 분쟁에서 빌 클린턴 행정부는 약간의 제재 외에는 거의 방치에 가까운 모습으로 해당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 사실 빌 클린턴이 처음부터 이렇게 방치정책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1992년 보스니아 전쟁 초기 당시 미국이 구상했던 전략은 '해제후 공격(Lift and strike)#'였다. 보스니아 대통령에 의하여 제안된 이 전략은 1991년에 발효된 발칸반도 무기 금수조치, 즉, UN 안보리 결의안 713호(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713)를 해제(Lift)하여 무력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보슈냐크인에게 첨단 미군 무기를 지원하는 것으로 그들의 무력을 증가시켜 세르비아인에 대항하자(strike)는 전략이었다. 1991년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전운이 피어오르자 UN 안보리는 이 지역의 전쟁을 막기 위하여 발칸 반도내로의 추가 무기 유입을 막았는데 이는 시간이 지나자 무기없이 맨손이었던 보슈냐크인에 대비하여 정교회 슬라브 문화권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세르비아군의 화력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Lift and Strike 전략은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인 조 바이든도 동의하는 등 실현 가능성이 높았으나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면서 공은 빌 클린턴에게 넘어갔다. 이후 빌 클린턴도 Lift and Strike 전략을 수용하여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를 유럽에 보내 협조를 구했는데 놀랍게도 당시 유럽 수반들의 여론은 매우 나빴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전부 해당 제안을 거부했으며 특히 러시아는 보스니아 당사자들간의 일일뿐이니 자기들끼리 협상을 하도록 제3자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미국에게 역으로 제안하였다.
보스니아 전쟁 개입 문제에서 유럽의 비협조는 미국 단독으로 참전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1994년 5월 미국 상원의회는 미국 혼자서라도 발칸반도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자고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빌 클린턴은 이번에도 "유럽내 동맹의 반대"를 이유로 해당 법안을 거부한다# UN와 NATO 내 동맹들이 발칸 반도 무기 금수 해제를 반대하는데 미국 혼자서 이를 해버리면 UN과 NATO내에서의 미국 입지가 난처해진다는 것이 빌 클린턴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의 악몽 때문에 개입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국내와 해외의 반대에 부딪힌 빌 클린턴은 결국 Lift and Strike 전략을 포기했고 그 사이에 세르비아군은 무기 금수 조치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어디서'로부터 각종 중화기를 가져와 보스니아에서 일방적인 인종학살이 벌이고 만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30만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중 상당수는 전투가 아닌 '인종청소'라는 이름의 민간인 학살로 발생한 것이다. 전쟁의 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으며, 실제로 1995년 6월 빌 클린턴이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CNN의 앵커인 래리 킹과 대담을 나눴을 당시 그는 "전쟁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명이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결국 참다못한[25] 미국과 NATO는 보스니아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공습을 시작하여 데이턴 협정을 체결시켰고 보스니아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는 인도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전쟁 개념을 창설하였다[26]

  • 코소보 전쟁 - 보스니아 전쟁이 끝나고 3년뒤에 발생한 1998년 코소보 전쟁은 보스니아 전쟁과는 달리 미국이 빠른 시기에 개입하였기에 그만큼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냥 대응을 빨리한 정도가 아니라 분쟁이 시작되자마자 국내외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엎고 빠른 속도로 공습을 개시해서 실제 인종청소로 인하여 발생한 난민보다 공습으로 발생한 난민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이는 3년전 있었던 보스니아 전쟁의 실상이 점차 널리 알려지면서 미국과 유럽사회가 가졌던 트라우마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닌 유럽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독재자팽창주의적 극우 민족주의를 선동하면서 소수민족을 학살한다는 컨셉은 수십년 전 있었던 누군가어떤 사건을 떠올렸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외교적, 평화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의견은 어리석은 행동을 취급받았다. 실제로 당시 NATO의 공습을 지지하는 여론을 찾아보면 상당히 감정적인 면이 적지 않았으며 서구가 일으키는 다른 전쟁에 줄곧 반대했던 진보적 지식인들도 NATO의 코소보 전쟁만은 강도높게 지지하였다[27][28]. 이렇게 코소보 전쟁은 본래 방어적 개념이었던 NATO가 NATO와 무관한 국가를 위하여 NATO 권역 외에 위치한 국가를 선제적으로 공격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후세의 비판도 다소 있는 편[29]. 그리고 러시아는 NATO가 NATO 가입국에 위협을 가한 사실이 없는 세르비아를, 그것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를 폭격함으로써 러시아에게 적대하였다고 판단하였고 이후 NATO와의 협력관계를 점차 단절하고 만다#.


파일:borisandbill.jpg
1994년 보리스 옐친과 빌 클린턴의 미국 백악관 기자회견#

  • 러시아 - 빌 클린턴은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과 만취한 모습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시시덕대는 등 냉전시기 서로를 잡아먹으려 으르렁대던 국가의 수장답지 않게 사교적이고 친화적인 모습을 자주 연출하였다. 이 시기 클린턴과 옐친이 보여준 케미는 "보리스와 빌 쇼(The Boris & Bill Show)"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미국인들에게 탈냉전의 해빙 무드를 제대로 느끼게 하는, 클린턴 시대의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이런 대중적 이미지를 제외하면 이 시기의 미국의 대러정책은 NATO의 동진으로 요약될 수 있다. 독일 통일과 소련 붕괴 과정에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지도자들은 소련의 안보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동독 너머의 동유럽 국가들을 나토에 가입시키는 등의 확장정책을 펼치지 않기로 구두로 약속을 하였고 조시 부시 대통령 역시 1989년 몰타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나 "소련의 이익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등 서방 국가와 소련 간에는 나토의 동진을 실시하지 않겠다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30]. 하지만 1993년부터 빌 클린턴의 미국 정부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 3개국의 나토 가입을 논의하기 시작했으며 1995년 2월 미국-독일 정상회담에서는 나토 확대가 결정되었다. 1996년 10월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NATO 확대 시한을 1999년으로 설정하면서 이 문제가 급진전됐으며 NATO의 확장은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범유럽적인 집단안보기구의 창설이 목적이라는 빌 클린턴의 끈질긴 설득끝에 보리스 옐친이 동의하고# 1997년 마침내 해당 3개국을 나토에 받아들임으로써 나토는 동진을 시작한다. 당시 나토의 계획은 1999년 이전에 핀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을 가입시키고 1999년 이후에는 구소련의 일원이었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등도 NATO에 가입시킨다는 방침이었다#. 한마디로 구 소련의 영향군 내에 있는 국가들 중 태반을 NATO에 가입시킨다는 계획이었는데 보리스 옐친치하의 러시아는 1997년 헬싱키 회담과 NATO와 러시아간 협력 및 안보에 관한 기본협정(Founding Act on Mutual Relations, Cooperation and Security)[31]을 통하여 NATO내 러시아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제도적 창구의 마련과 NATO의 신규회원국 가입이 러시아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조건하에 NATO의 확대를 용인하고 만다.
하지만 이는 냉전이 끝나 세계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초강대국자리에서 내려왔을 지라도 적어도 중앙유럽, 동유럽 내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최소한 역내 패권국이 되려고 했던 러시아의 내부 구상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이 NATO의 동진이라는 사건은 러시아를 무시하고 러시아 영향력 내의 국가들을 NATO가 공습하는 사태(ex.코소보 전쟁)와 맞물려 러시아내 민족주의를 크게 자극하였고 미국 재무부, 세계은행 등 서방 기관들의 자문을 받아 실시한 보리스 옐친의 경제개혁(이른바 '충격요법')이 러시아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등의 실책이 연속되자 러시아 내부의 여론은 급격히 우경화 되어버렸다. 러시아 내에서 매국노로 낙인찍힌 보리스 옐친의 후임으로 등극한 블라미디르 푸틴은 2005년에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발언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푸틴이 언급한 그 지정학적 재앙은 빌 클린턴 시대에 시작된 NATO의 동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푸틴을 대표로 우경화된 러시아 민족주의는 훗날 2014년 크림 위기를 불렀다. 이 때문에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Politico)는 미국과 NATO에 대한 푸틴의 반응을 "복수(Revenge)"라고 부르면서 오늘날 2014년 크림 위기 등 동유럽에서 전개되는 러시아발 위협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빌 클린턴이 추진했던 NATO의 동진정책에 그 뿌리가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였다#[32][33].
물론 빌 클린턴이 처음부터 나토 확장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임기 초인 1993년 6월 10일 NATO 외무장관들과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의 대표로 나온 빌 클린턴의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는 "언젠가 적절한 시기에 나토를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의 의제는 아니다("In appropriate time, we may choose to enlarge NATO membership. But this is not now on the agenda.”)라면서 나토의 확장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나토의 확장보다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나토의 확장은 자동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나토와 러시아간 완충지대(buffer)로 설정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94년 1월 11일에 개최된 백악관 각료들과 중부 유럽 외무장관들과의 회의에서, 러시아의 팽창에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외무장관이 나토에 즉각적으로 가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지만 백악관 각료들은 이에 대해 '러시아가 개혁에 성공해서 좋은 곰(good bear)이 될지, 아니면 팽창주의적인 나쁜 곰(bad bear)이 될지 지켜보자'면서 이들 국가의 나토 가입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랬던 빌 클린턴 정부가 나토 확장론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 원인으로는 폴란드체코, 헝가리[34] 등 이미 소련 시절 러시아에 호되게 당한 중부 유럽동유럽국들이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해서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끈질기게 NATO가입을 요구하였던 점, 보스니아 전쟁처럼 러시아의 관할권에 있다고 여겨지는 국가에서 발생한 전쟁과 대량학살(인종청소) 사태에 대해서 미국과 NATO가 무력하게 아무런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없었던 점과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러시아는 오히려 뒷짐을 지면서 방치하거나 오히려 세르비아계를 지원하면서 간접적으로 민족학살을 부추겼던 점, 제1차 체첸 전쟁처럼 러시아와 그 주변국과의 갈등이 현실화되었는데 러시아가 이 갈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점, 1993년 12월 거행된 러시아 총선거에서 러시아 극우주의 정당인 LDPR가 최대 의석을 차지했던 점, 그리고 1994년 12월 실시된 미국 상원, 하원 선거에서 나토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던 미국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싹쓸이함으로써(이른바 '공화당 혁명') 나토 확장 정책을 펼치는 것은 미국 국내 정치권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점 등이 꼽힌다#. 이런 미국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은 독일의 수상 헬무트 콜이었다. 재밌는 점은 헬무트 콜 역시 처음에는 나토 확장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4년 1월 개최된 나토 회의에서 헬무트 콜은 "동유럽국들에게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나토 가입은 허용할 수는 없다#"면서 공개적으로 나토 확장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한 대량 인종학살과 그로 인한 난민 발생[35], 보리스 옐친의 통제를 점차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러시아 군부의 행각[36], 러시아 팽창주의에 대한 위기감 등으로 빌 클린턴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나토 동진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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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2019년 미국-중국간 교역 규모 출처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 우리 상품을 더 많이 수입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경제적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빌 클린턴, 2000년 3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강연


  • 중국 - 미국과 중국은 1979년부터 수교하였지만 양국간 경제적 거래나 교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에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한 근대화 정책으로 점차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중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발생한다.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 6.4 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지하였던 조지 H. W. 부시는 당시 중국에 항의하는 의미로 중국에 대한 투자와 수출입을 통제하는 조치를 발효하게 되었고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H. W. 부시의 맞상대로 등장한 빌 클린턴 역시 중국을 압박하여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은 공약에 따라 1993년 5월, 행정명령 12850호#를 발효하였는데 이는 천안문 6.4 항쟁 당시 시민 학살 책임,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 등 총 7개로 구성된 미국의 인권 개선 요구에 중국이 1994년 6월까지 유의미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박탈하겠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이에 응할리 없었고 빌 클린턴은 당초 제시한 시한이 다가오자 '중국의 인권과 경제는 별개'라는 입장으로 180도 돌아서면서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에 더하여 1999년 빌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 새로운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양국간 무역장벽을 보다 완화시키는 이 협정은 중국과 미국간 관계를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로 두는 것과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WTO에 가입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중국에 투자했던 미국 사업가들의 끈질긴 로비와 중국산 저가 수입품으로 인하여 미국의 물가가 안정되리라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계산이 있었다#, #[37]. '문제는 경제야'라는 빌 클린턴의 선거 구호가 결국 발목을 잡은 것이다.
당시 야당인 미국 공화당은 중국의 인권, 티베트 문제와 핵무기 제조기술 유출, 대규모 무역적자 등을 이유로 클린턴의 대중정책을 비판했으나 클린턴은 이를 무시하였다. 결국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던 미국이 이렇게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더이상 문제삼지 않자 중국은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견제도 받지않고 무서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경제력을 성장시켰다[38]. 미국 입장에서는 아직 경제적으로 보잘것 없었던 중국을 고립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가 날아간 셈. 결국 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2018년에 들어서 1990년대보다 유리한 상황에서 미국-중국 무역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또한 빌 클린턴 정부는 본의아니게 중국의 해군 전력과 대함 미사일 전력까지 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줬다.[39].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참조.


  • 멕시코 -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 멕시코 페소화의 가치가 급락하는 등 1995년에는 멕시코에 외환위기가 도래하였다. 이런 멕시코의 불안정함이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미국의 장래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빌 클린턴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200억 달러를 멕시코에 차관으로 제공하는 등 멕시코 외환위기 극복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경제적 불안과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보장한 역내 교역은 멕시코내 마약 카르텔의 세력을 급성장시켜[40] 결국 멕시코내 정치적 불안을 야기시켰고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내 반이민 세력형성에 기여하였다.


  • 쿠바 - 1966년 미국 의회가 채택한 쿠바 이민법(The Cuban Adjustment Act)을 개정하여 쿠바로부터의 정치적 난민 유입을 억제하였다. 1966년 제정된 쿠바 이민법은 미국의 영해에 진입한 쿠바 난민을 자동적으로 정치 난민으로 규정해 망명할 수 있는 권리와 1년짜리 영주권을 주는 법안이었는데, 빌 클린턴 행정부는 쿠바와의 협정끝에 1995년 이를 개정하여 '쿠바 난민이 바다(젖은 발)에서 미국 당국에 발각되면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아 억류후 쿠바로 송환하고, 육지(마른 발)에서 미국 당국에 발각되면 난민으로 인정한다'는 이른바 '젖은발 마른발 정책(Wet feet, dry feet policy)#'을 발효시켜 쿠바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였지만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41]. 클린턴 행정부의 이런 관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6년 쿠바 당국이 민간 비행기를 격추시켜 미국 시민 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클린턴 행정부는 쿠바에 대한 제재를 추가하는 등 양국간 관계는 오히려 악화된다.

  • 테러리즘 - 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이 폭탄 테러로 붕괴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즉시 아프가니스탄수단 공화국에 순항미사일 공격을 가하여 박살내기도 했다. 이 테러사건의 배후가 바로 그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 이때 미국의 추적망에서 벗어난 오사마 빈 라덴은 후일 9.11 테러을 일으킨다. 더불어 수단 공화국에 있는 화학무기 공장을 폭격하게 했더니만 그게 남수단의 유일한 아동 백신 제조공장이라서 많은 남수단 아이들을 죽게 한 일도 있었다. 이를 두고 자신의 성추행을 감추고자 일부러 그랬다는 비난을 들었다. 물론 이 공격으로 수단은 미국의 테러단체 지원 중단을 수용하게 되었다

  • 이라크 - 전임자의 걸프 전쟁이나 후임자의 이라크 전쟁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라크에 대해서도 별의별 이유를 들면서 심심하면 두들겨팼다. 비행금지선을 어겼다거나 쿠르드족 내전에 끼어들었다거나 UN조사관의 대량살상무기 조사를 방해했다거나(사막의 여우 작전)...가장 유명한 사례중 하나는 1993년 6월에 있었던 공습인데, 전임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의 1993년 4월 쿠웨이트 방문에 기해 이라크 정부가 조지 H. W. 부시 암살을 시도하였다는 첩보[42]를 입수한 클린턴은 대통령 권한으로 바그다드내에 있는 이라크 정보기관 건물에 순항미사일 23발 발사를 명령한다. 그런데 이 중 3발은 바그다드내 민간인 주거지역에 떨어져 무고한 민간인 9명 사망, 12명 부상이라는 실책을 기록하였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국제법 위반이었지만 늘 그렇듯 유야무야 넘어갔다. 1998년 국회 연설에서 빌 클린턴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대량살상무기 사용을 경고했다#. 훗날 이라크 전쟁으로 실현된 사담 후세인 정권 교체(regime change) 역시 1998년 빌 클린턴이 서명한 이라크 해방 법안(Iraq Liberation Act)에서 언급되었다. 다만, 이때의 이라크 해방 법안에서는 미군의 개입을 언급하지 않았다. 클린턴 정권 하에서 시행된 이라크 제재정책 역시 이라크 국내 경제, 보건 등의 영역에 타격을 줬다고 알려져있으나 구체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설이 갈린다.

  • 이란 - 이전 미국 행정부처럼 강도높은 제재와 압박을 이어갔다. 특히 1994년 이란을 가리켜 테러리즘을 후원하는 "불량 국가(rogue state)"#라고 불렀는데 이는 후임자인 조지 W. 부시보다 앞서 사용한 것으로서, 빌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중 해당 단어를 사용한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1996년 클린턴 정부는 과거(1988년) 미 해군 USS Vincennes가 이란 민항기를 격추시켜 이란인 254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보상을 이란 정부에 공식적으로 하기로 결정하였고 1997년부터 시작된 클린턴 행정부 2기는 이란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란 정부의 거부감이 여전히 심해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 다만 클린턴 행정부는 식료품과 의약품에 대한 제재 일부를 철회하였고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통해서는 1953년 모하마드 모사데크 실각에 CIA가 개입한 사실과 미국의 후원을 받았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정권이 정치적으로 억압적인 체제였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 일본 - 1980년대 레이건-부시 정부의 대일정책을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로 요약할 수 있다면, 1990년대 클린턴 정부의 대일 정책은 재팬 패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일본 무시를 뜻하는 재팬 패싱이 이때 탄생한 말이다#. 클린턴이 집권을 시작한 1993년은 이미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훗날 잃어버린 XX년으로 회자되는 일본의 디플레이션이 시작되던 타이밍이었는데 클린턴은 이에 아랑공없이 미국의 대일 적자를 줄이고자 보복 관세 등 다양한 압박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군사안보적으로 일본은 클린턴 정부로부터 많은 이득을 얻었는데 빌 클린턴은 우선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지지하였고# 1995년에 오키나와에 주둔중인 미군기지 소속 미 해병대원 3명이 현지의 12세 여자 초등학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자 빌 클린턴은 일본에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는데 일본은 이 여세를 몰아 1996년에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환 문제를 미국에게 최초로 공식 제기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일본 입장에서 가장 큰 군사안보적 진전은 1997년 하시모토 수상과 클린턴 대통령간 체결된 미일방위협력을 위한 지침, 신 가이드라인(War Manual)에 따라 일본이 '극동'외에 '주변 사태'에까지 군사적 분담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 가이드라인은 1995년 미국이 발표한 동아시아·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전략’(EASR)과 1996년 미일안보공동선언에 기반항 체결된 방위 지침으로서, 미국과 체결한 신 가이드라인에 따라 일본은 1999년 6월 주변사태안전확보법 등 ‘유사 3법’을 통과시켰고 이에 따라 일본은 전후 최초로 일본의 자위와 상관없는 사태에 대해서도 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가능하게 되어 '보통국가'화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43]

  • 북한 - 클린턴 정부 초기인 1993년부터 북한의 핵개발에 따른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초기에 강경한 이미지로 북한을 압박하였고 실제로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고려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초래될 수 있는 남한과 미군의 막대한 희생때문에 해당 선택지는 제외되었다(출처 : 빌 클린턴 본인 자서전). 결국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 북미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여 북한의 핵개발을 막으려 했으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 한국 -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미국은 한국을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세력이었으나 빌 클린턴 행정부는 통상 분쟁을 이유로 한국 지원을 거부하였다. 이에 더하여 클린턴 행정부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IMF에서 미국이 가진 거부권을 이용하여 한국이 IMF의 관리조차 못받게 하여 디폴트 상황에 처하게 만들 생각까지 하였다. 자세한 건 1997년 외환 위기 참조. 이는 한국과 미국의 이익이 어긋난 대표적 사례로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IMF가 한국에 대해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당하면서 중산층까지 실직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자본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경제 질서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를 부수기에 충분한 충격이었다[44].


2.3. 퇴임 후[편집]




퇴임을 몇달 앞둔 2000년 백악관 공식만찬 행사에서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상을 상영했는데, 제목이 Bill Clinton - The Final Days.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호평을 받았다. 중간에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케빈 스페이시가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거울 앞에서 수상소감을 읊어보는 대통령의 손에서 트로피를 뺏어가고, 힐러리가 클린턴이 챙겨준 점심까지 쌩까고 차타고 가버리는 장면과 휴 셸튼 당시 합참의장이 백악관 전쟁상황실에서 배틀십 보드게임을 하던 중 대통령이 셸튼 합참의장의 전함을 침몰시키자 셸튼 합참의장이 대통령에게 "You sunk my battleship!"하는 장면이 백미다.

퇴임 후에는 잘생긴 얼굴과 임기 중 얻었던 인기를 발판삼아 인기 강사, 연설가로 뛰고 있다. 사실 화술의 달인이기도 하다. 클린턴과 만나 10분만 이야기해보면 그를 까던 사람도 팬이 돼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라는 평가도 있다(특히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은퇴를 해도 만 54세였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본인도 대통령을 너무 일찍 그만둔 게 아쉬웠는지 국민들이 원하고 능력이 있으면 2회의 임기를 마친 뒤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거쳐 대통령을 다시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헌법 개정 과정이 험난하기로는 최고인 미국인지라 자신 대신에 아내인 힐러리를 대통령으로 밀어줬다.

미국 내부에서의 평가들도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0살에 아칸소 주의 검사총장이 되고, 32살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고 나서 사실상 30대와 40대를 주지사로 지내다가 40대 중반에 바로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 55살에 퇴임했으니 이건 무슨 일반 회사원이 회사 다니다가 정년 퇴직한 것도 아니고 50대에 정계 진출하는 사람들도 많은데[45] 이 사람은 50대에 이미 모든 정치 활동을 끝냈다.[46]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위로하러 방문했을 때도 현직 대통령인 부시보다 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보수 쪽 미디어에서 비아냥거리는 논조로 MTV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 때 정치자금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부지런히 여러 강연에 나가기도 하며 활동한 덕에, 빚 수백만 불을 고작 5년 만인 2013년 초에 다 갚았다. 이쯤 되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실감이 나서 무서울 수준.[47]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존 케리를 지지하는 영상. 당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인기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연설이다.

클린턴 재단이라는 자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9월에 첫 모임을 열었는데, 적대적 세계보다는 협력의 세계를 만들고 세계적 상호의존의 부담을 줄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자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버진 그룹[48]의 수익 30억 달러를 지구 온난화 문제에 쓴다는 약속[49]을 비롯한 73억 규모의 215개 약속을 이끈 바 있으며,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연구원 로스코프는 현시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집단이라고 평가했다.[50]

2009년 8월 자국의 여성 기자의 석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기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북한에게 현대아산 직원과 연안호 선원들의 조속한 석방을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미국 정부와는 무관한, 자연인 클린턴으로서의 개인적인 활동으로 되어 있으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당시 국무부 장관이었으며, 그 자신이 전직 대통령임을 감안하면 단순히 석방을 위한 협상만 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010년 아이티 지진의 구호활동에도 나섰는데 그해 2월 12일 심장에 통증을 호소하며 뉴욕의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 2004년에 심장 문제로 수술을 받은 전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가서 미국의 조예선 마지막 경기를 관람했는데 랜던 도노번의 극적인 인저리타임 골로 자국이 16강에 진출하자 매우 흐뭇해하는 광경도 보였다.

20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타나서 오바마 지지 연설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대선이 박빙으로 흐르면서 오바마가 클린턴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해 격전지인 스윙 스테이트들을 돌면서 오바마 지지를 호소했던 것. 여전히 민주당 정치인 중에선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라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든 밋 롬니가 당선되든 클린턴이 최후 승자일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전직인 그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민주당에서 지분이 높아지고, 롬니가 당선되더라도 야당이 된 민주당의 원로 정치인으로 민주당의 간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 심지어 클린턴이 부인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고려해서 오바마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오바마의 재선 이후 힐러리의 인기는 계속 오르고 있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그나마 낫던 롬니가 잘리고 나서는 현재 누구를 올려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막장이 되었다.

그리고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에 출마한다고 발언한 이상, 힐러리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빌은 前 대통령이자 現 대통령의 부군이 되는 셈이다. 참고로 이런 경우를 위해 영부인(First Lady)와 대등되는 First Gentleman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대통령의 남편에게는 한 번도 쓰인 적은 없었다.[51] 빌 클린턴이 최초로 대통령 남편으로서의 First Gentleman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힐러리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자 남편 빌도 전국을 돌며 유세를 도왔다. 여담으로 "아내는 내가 바람피웠을 때도 날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니 여러분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적인 지지연설과 힐러리를 적절하게 잘 띄워준 말솜씨 덕에 언론과 좌중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걸(언론의 포장과 전통적 블루 스테이트라는 점에 가려져) 보지 못해서 발생한 러스트벨트 문제, 힐러리 클린턴 자신의 이메일 스캔들, 이라크&리비아의 수렁, 월가 문제 등이 겹쳐 예상 외의 패배를 당하며[52] 클린턴 부부 대통령의 꿈은 좌절되었다. 아내 힐러리도 이젠 나이가 있고 정계 은퇴가 확실하기 때문에 빌도 그냥 전직 대통령으로만 남게 되었다. 빌은 노동자 계층과 경제를 무시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지만 힐러리가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가 그를 자문역으로 고려 중이라고 한다. 클린턴 가족의 사이가 공화당과 그리 좋지 못함을 감안할 때 공화당 입장에선 이게 성사되면 매우 충격적인 일이 될 듯. 그러나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여진다.

# 힐러리 클린턴 대선 출마 당시 민주당 성명에서 빌 클린턴이 홍보용 풍선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게 재밌다는 반응이 생기고, 한 소녀에게 풍선을 뺏기기 싫어하는 모습이 화되었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이 가까워지자 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민주당과 리버럴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심장 수술을 받은 것을 계기로, 아예 육식을 중단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2018년 미국 우편 폭탄 미수 사건에서 그의 집으로 파이프 폭탄이 배달되었다.

2019년 5월 딸 첼시 클린턴과 정치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하였다.

2020년 12월 14일, 당해 치뤄진 미국 대선의 뉴욕 주 선거인단으로서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조 바이든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를 했다. 그리고 바이든-해리스 러닝메이트가 트럼프-펜스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4년전의 복수를 간접적으로나마 이뤄냈다.

2021년 10월 15일, 패혈증 의심 증상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 있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CNN 방송이 보도했다. #


3. 평가[편집]



3.1. 미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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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한 짤로 요약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이끈 대통령으로 클린턴 집권 당시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년간 대립하던 소련의 붕괴로 인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53] 그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래 60년만에 최초로 8년 임기를 마친 민주당 대통령이 되었다.[54] 또 후임자 조지 W. 부시의 실정으로 더욱더 클린턴의 업적이 고조되는 측면이 있다. 퇴임 8년 뒤 후임 민주당 대통령이었던 오바마의 당선, 재선과 함께 보수화되었던 미국 정치판의 축을 돌리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아래에서 보듯 소수민족과 여성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폈으며, 환경 정책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미군동성애 정책을 일신한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Don't ask, Don't tell)" 정책, 즉 DADT도 큰 성과 중 하나다.[55] 로버트 라이시(노동부 장관)와 같은 젊은 관료와 로이드 벤슨(재무장관) 같은 경륜의 인물도 잘 등용했다.

사실 클린턴의 임기 자체는 대단히 번잡했다. 업적도 많았지만 눈에 띄는 실책도 많았으며, 칭송도 많았지만 비난과 잡음도 많았다. 클린턴의 결정적인 탄핵안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에서도 그야말로 박빙의 표결들이 여러차례 연출되었다. 빌 클린턴은 공화당에게는 부패하고 교묘한 사기꾼으로,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모호하고 보수친화적인 정치꾼으로 비난받았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서 제3의 대통령 당을 이끌려고 한다는 식의 규탄도 받았다.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믿기지 않을지 몰라도, 퇴임 당시 그는 그렇게 고평가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8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으니 그야말로 위기에 강하고 강운을 가진 사나이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임기를 통틀은 가장 큰 실책으로는 글래스-스티걸 법안(Glass-Steagall Act)으로도 불리는 1933년 은행법(Banking Act of 1933)을 폐지한 게 손꼽히는데,[56] 경제 대공황의 원인이기도 한 은행의 고위험 투자를 막는 법을 폐지함으로서 금융기업과 상업은행의 분리가 의미 없어지고 후임자 조지 W. 부시 시절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세계금융위기의 경제난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빌 클린턴 혼자만의 작품이라기보다는 80년대 이래로 진행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미래의 화근을 알아채지 못하고 남들과 똑같이 훗날 미국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비극의 기반을 쌓아간 것은 사실이긴 하다. # 자세한 내용

베이비 부머 세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베이비 부머들은 2차 세계 대전 승리 후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미국의 낙관주의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대단히 개인적으로 개방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온갖 성추문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누릴 수 있던 것은 동세대의 성격과도 다르지 않다. ‘공화당원은 열심히 줄을 서고, 민주당원은 사랑에 빠진다(The Republicans fall in line, The Democrats fall in love).’는 격언에 정확히 부합하는 대통령.


3.2. 한국[편집]


<시사IN>, 1997년 말, 미국은 왜 한국을 집어삼키려 했나?

한국에서는 1993년 집권 초부터 쌀개방 문제로 농민들과 한총련NL 운동권 사이에서 비난을 받아 방한 반대 시위까지 터졌고, 1997년 IMF 사태로 미국식 구조조정을 강요한 원흉이자[57] 한국 금융시장을 미국식 금융자본에 종속시켜 놓은 원흉이라 할 수 있으며, 1997년 미일가이드라인 개정으로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근거를 마련한 점에서 한국의 진보세력이 반미 강력 주장에 적극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58]

훗날 한국의 IMF 구제금융에 대해, 당시 IMF 총재로서 IMF 협상을 지휘했던 미셸 캉드쉬는 당시 조치가 가혹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는가 하면, IMF조직 자체적으로 외환위기 처방이 가혹하다며 자기반성하기도 하였다. IMF 거듭된 자기반성 - 외환위기 처방 가혹했다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59]


3.3. 국외 문제[편집]


클린턴 집권 당시 공산주의의 수장이자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있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유일 초강대국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정책을 아무 무리없이 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클린턴의 대외정책은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심지어 민주당 진보파에게는 "전쟁광"이라는 비판도 들었을 정도니...

국외에서는 1차 북핵문제와 관련된 인상 때문에 한국에서는 온건파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코소보 공습도 클린턴의 당시 업적(?) 중 하나다. 특히 코소보 공습 때 미군을 파견하여 당시 코소보 분리 독립에 반대했던 유고슬라비아를 찍소리 못하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2008년 코소보는 결국 독립하게 된다.[60]

더불어1998년 핵실험을 강행한 인도파키스탄을 중재하러 간다고 뉴델리에 방문했으나 당시 인도 총리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Atal Bihari Vajpayee, 혹은 Bajpai)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61] 미국 대통령이 인도 총리를 먼저 와서 기다리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62]

미국이 감싸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중동 지역에서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클린턴은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 목표가 되기도 했다. 클린턴 스스로도 중동 평화에 관심이 많아 당선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을 이끌어내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극단파 유대인에게 암살되고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서 미국의 아랍 공격에 항의하는 민중폭동이 이어지면서 결국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 도리어 실제적 업적은 차라리 북핵 문제와 관련된 제재의 정당성 확보 및 북아일랜드 분리독립 문제 해결 측면에 있다.[63]


일본에 대한 무례하고 압박적인 태도로 일본에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1998년 일본 방문시 일본 천황 아키히토가 클린턴을 영어를 쓰며 공손히 영접했는데 일본과 국제사회를 지나치게 압박하고 일본 천황에게도 영어를 강요하여 국제적으로 영어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 논란을 빚기도 했다.[64]

훗날 클린턴은 2000년 오키나와 방문시 오키나와 평화의 비 앞에서 뒷짐을 지고 참배를 했다.[65]


4. 르윈스키 스캔들[편집]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응답하라! 1990's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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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녀 모니카 르윈스키

클린턴은 아칸소 주지사 시절부터 여자 문제로 트러블이 매우 많았다. 1990년 9월 중순, 주지사 연임을 시도하던 클린턴을 아칸소 주 개발재정국에서 해고된 직원 래리 콜린스가 "클린턴이 아칸소 주의 재정을 유용하여 다섯 명의 여자와 간통을 했다."라고 폭로한 것이다. 클린턴은 아무 것도 모르고 출근하다가 AP통신의 기자 빌 시먼스에게 그 소식을 전해듣고 기겁했지만, 매우 침착하게 시먼스 기자에게 콜린스가 지목한 여자들과 인터뷰할 것을 요청했고 시먼스는 다섯 명 전부에게서 그런 적이 없다는 진술을 받았다. 하지만, 공화당에서 이를 놓칠 리 없었고 공화당 주지사 후보 셰필드 넬슨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면서 클린턴을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비난했지만, 여자들이 자꾸 이러면 고소하겠다고 반발했고 콜린스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터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클린턴이 주지자로 재직하던 시절 호텔에서 그에게 섹스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한 폴라 존스, 12년간 클린턴과 혼외정사를 했다고 주장한 제니퍼 플라워스, 성매매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등의 스캔들이 있었다.

제일 유명한 스캔들은 당시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1973 ~)와의 불륜 스캔들, 속칭 지퍼게이트이다. 모니카는 펜타곤의 공보직으로 근무하는 동료 린다 트립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클린턴과의 관계를 허물없이 털어놨는데, 린다가 이 내용을 녹음하고 언론에 공개하면서 시작되었다.[66]

미국에서는 주에 따라 간통죄의 존재 여부와 이에 대한 태도가 다른데, 대도시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뉴욕을 비롯한 동북부지역이나 LA를 비롯한 서부지역 등에서는 정치인들의 성문제에 있어 좀 관대한 반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지역이나 러스트 벨트 지역 등에서는 정치인의 성문제에 있어서 민감하게 대응한다. 게다가 대선에서 클린턴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공화당 지지 기반이기도 한 아칸소루이지애나에선 특히 난리가 났었고,[67] 결정적으로 클린턴이 법정에서 위증 및 위증교사를 하면서 케네스 스타 특별 검사에게 털리고, 하원에서 탄핵 의결이 통과되어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었고 연방대법원에서 '더 이상 우리 법원에서는 변호사로 활동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68] 거기다 시가를 좋아하는 클린턴이 르윈스키의 음문시가를 보관했던 일화를 비롯한 성적인 보도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TV 생중계 등을 통해 대통령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음을 주장하자 여론이 어느 정도 클린턴에게 동정적으로 돌아서고 중대한 사건이 아님에도 거짓말 한 번 잘못 했다고 탄핵은 좀 지나치다 싶었는지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면서 가까스로 대통령 자리는 지켰다. 물론 이 시기에 아내인 힐러리와의 관계는 당연히 막장으로 치달았다. 이혼을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 힐러리의 회고에 따르면 "그 때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던 가족은 우리 집 개밖에 없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한동안 빌은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고 한다. 바람을 피운 주제에 변명할 말도 없겠지만 말이다.

사실 클린턴은 첫 대선 당내 경선에서도 이미 섹스 스캔들에 한번 휘말렸으나, 아내 힐러리의 강공으로 간신히 극복한 상황이었다. 훗날 힐러리는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밉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다만 이후에 화해를 제대로 하긴 한 듯하다. 당시 백악관 직원들이 남긴 회고록 등을 보면 직원들이 침실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노크를 해야 민망한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빌과 힐러리가 매우 격렬하게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이 두번이나 바람을 피운 자신의 남편을 대변해준 덕분에 대중들에게 호감을 쌓아, 상원의원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담도 있다. 물론 힐러리도 백악관 내에 들어서면 바로 태도가 돌변해서 한성깔 하는 성질이 어디 가지않고, 물건을 마구 던져대는 바람에 그렇게 던진 물건에 빌이 맞아 다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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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로 한창 곤경에 빠졌던 클린턴을 바라보는 아내 힐러리의 모습. 이 사진은 1999년 퓰리처상 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판결문이 인터넷에 퍼져 부모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 때 미국민들 사이에서는 클린턴의 변명을 비꼬아서 "오럴섹스(구강성교)는 섹스가 아니다."[69]라는 농담이 생겼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묘사한 클린턴의 '부적절한 관계'[70]라는 표현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다. 특히 일본의 정치인들 사이에 대유행이 되어 뭔가 문제가 생기면 갖다붙이는 사과 표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고위층의 변명으로 절찬리. 우스갯소리로 미국 대통령의 사무실이라 볼 수 있는 오벌 오피스(Oval Office)가 오럴 오피스라고 불렸다.

르윈스키 사건에 대한 빌 클린턴의 대국민 사과문을 살펴보면 한국인들의 시선에서는 온통 변명뿐인데다 결론은 이건 우리 가족의 일이니까 댁들은 신경 좀 꺼 달라는 내로남불 마인드로 읽힐 수 있어서 지탄을 받기 쉬울지 모르나, 다시 말하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불륜 자체'가 아니라 '클린턴의 위증' 여부였다.

구강성교가 '성적 접촉'(Sexual relation)이 아니라는 대답을 하고 클린턴이 자기는 위증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검사가 질문을 하면서 성적 접촉의 범위를 한정했기 때문이었다. 검사는 성기나 항문, 유방 등에 접촉하는 것을 성적 접촉으로 규정하고 질문을 했다. 클린턴은 이 질문을 자신이 르윈스키의 그 부위에 접촉을 했는지 묻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그래서 자신의 입장에서 성적 접촉을 하지 않았다고 답한 것이다. 결국,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 정말 오럴섹스를 받기만 했는지는 당사자 둘과 신만이 알겠지만, 그동안 클린턴이 보여주었던 교묘한 화술로 보아 '성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이 발언이 국민들을 속인 것은 맞지만 탄핵할 만큼 중대한 위증은 아니라는 여론이 일었고, 결국 탄핵안은 부결된다. 하지만 호도하기 위한 증언(misleading testimony)으로 판결나서 이것이 유죄로 인정되어 벌금을 물고 변호자 자격이 정지되었다.

한편 내연녀 모니카 르윈스키는 이런 미국사에 길이 남을 전대미문의 추문의 당사자가 되어, 세계적으로 얼굴과 개인정보가 팔리는 건 물론 매우 적나라한 사생활까지 뉴스를 통해 까발려졌다. 이에 기자, 파파라치, 그리고 변태들에게 온가족이 쫓기며 몇년간 이사를 다니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사건 이후로도 르윈스키는 온갖 코미디언들과 래퍼들이 자주 인용하는 농담 소재가 되었고, 특히나 제이 레노의 르윈스키 괴롭히기는 그 수준이 지독했다.[71] 지금까지도 미국 편의점에서 흔히 팔리는 3류 연예계 잡지에 그녀의 이름이 간간히 보이는 정도. 세월이 흘러 지퍼게이트가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학계가 진중히 평가하는 사건이 되고 또한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더 개선된 현재에는 "아무리 쌍방간 합의해서 벌인 불륜이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22살짜리 인턴을 50대의 미국 대통령이나 되는 양반이 꼬셔서 같이 놀아난 상황이라면 그 대통령의 죄가 훨씬 중하지 않냐"는 의견도 나온다. 또한 전세계적 조롱거리가 되면서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망신과 수모에 대한 동정론이 이는 분위기. 르윈스키는 2014년에 회고록을 냈으며, TED에서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온라인 상 조리돌림의 폐해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 트위터에서 "자기가 받아본 커리어 조언 중에 최악이였던 것이 뭐냐"라는 트윗에 "백악관에서 인턴하면 이력서에 쓰기 좋은 스펙이 될 거야'라는 조언"이라고 답글하며 농담하는 등, 현재는 해당 사건에 대해 꽤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

당시 늘그막이던 전설적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클린턴의 성추문을 두고 온갖 비난을 쏟아냈다. 디마지오는 사랑하던 전 아내 마릴린 먼로존 F. 케네디와의 성추문 때문에 죽었다고 여겼기에 높으신 분들의 성추문을 혐오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마지오는 클린턴도 평생을 증오하던 케네디와 맞먹는 인물이라고 여겼다. 잘못한 것이 클린턴 본인이니 할 말도 없긴 하다. 그런데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에게 매일 야구배트로 폭행을 했던 인간 쓰레기나 다름없는 놈이라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마릴린 먼로가 이혼장을 내밀면서 했던 말이 "그가 나를 때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2021년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3에서 이 사건을 드라마화하여 방영하기도 했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당선 여부
비고
197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아칸소 3구


83,030 (48.17%)
낙선 (2위)

1976
주 법무장관 선거
아칸소
-
당선
무투표 당선
1978
미국 주지사 선거
335,101 (63.36%)
당선 (1위)
초선
1980
미국 주지사 선거
403,241 (48.07%)
낙선(2위)

1982
미국 주지사 선거
431,855 (54.71%)
당선 (1위)
재선
1984
미국 주지사 선거
554,561 (62.55%)
3선
1986
미국 주지사 선거
439,882 (63.89%)
4선[72]
1990
미국 주지사 선거
400,386 (57.49%)
5선
1992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44,909,889 (43.01%, 370명)
초선
1996
미국 대통령 선거
47,401,185 (49.24%, 379명)
재선


6. 어록[편집]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클린턴 캠프가 사용한 캐치 프레이즈. 조지 H. W. 부시의 재선을 저지하고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결정적인 구호로 꼽힌다.


“A lot of your life is shaped by the opportunities you turn down as much as those you take up.”

여러분 인생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선택하는 기회들 만큼이나 거절하는 기회들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자서전 <My Life>에서.


“I did not have sexual relations with that woman, Miss Lewinsky.”

저는 그 여자, 르윈스키양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을 부인하며 한 유명한 말. 이 말은 미국 정치 풍자 유머에서 많이 쓰인다. 스캔들을 부인하기 위해 단호하게 부인했지만, 정작 이 말 때문에 클린턴에 대한 의심을 키웠다는 의견도 있다.


“It’s arithmetic!”

그건 산수입니다!

2012년 DNC에서 하나의 전설이 된 지지 연설[73]

의 상징. # 대본[74]


“I've lived a long, full, blessed life. It really took off when I met and fell in love with that girl.”

저는 길고 꽉 찬, 축복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시작된 겁니다.

2016년 DNC에서 부인의 대선 후보 지명을 축복, 지지하며 # 연설 영상[75]



7. 등장 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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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스와 버트헤드 극장판인 미국을 먹어버리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나온다. 그렇게 멍청하거나 비꼬지 않지만 이 두 사고뭉치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칭찬해준다. 사실 이 두 녀석이 온갖 사고를 저지르면서도 도움을 준 게 있다보니.

듀크 뉴켐 3D 추가판 레벨에 우주괴물에게 잡혀 의자에 묶여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에미넴이 2013년에 발표한 노래 'Rap God'에서 로윈스키 스캔들을 가지고 강도 높은 디스를 했다.

Got a fat knot from that rap profit

Made a living and a killing off it

Ever since Bill Clinton was still in office

With Monica Lewinsky feeling on his nut-sack[76]

랩으로 얻은 돈뭉치가 꽤나 빵빵해. 그걸로 먹고 살고 죽여보기도 했지. 빌 클린턴이 집무실에서 르윈스키랑 거시기 느낌을 즐기고 있을 때부터 말야.

사우스 파크에서 르윈스키와 시가 일화를 써먹는다.

프론트 미션에 등장하는 클린턴형은 이 대통령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파생기종인 뷰렌은 미국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에서 따 왔다.

핑키와 브레인 에서도 조연으로 등장. 애니매니악스에서도 오프닝에 등장한다.

동물농장 1990년대판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마지막에 폐허가 된 농장에 새주인이 오는데 생김새가 클린턴 판박이다.

왝 더 독의 스토리는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따왔다.

존 트라볼타 주연의 영화 프라이머리 컬러스에서는 존 트라볼타가 클린턴 역할로 나온다. 개봉 당시 클린턴이 아직 현역이던 때라 미묘했는지 등장인물들 전부 가명을 쓰고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실화 영화에 가까운 작품이다.

Fate/Zero에서는 라이더의 세계정복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적으로 묘사되었다.

닉슨(영화)에서 닉슨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연설할때 나온다.

심슨 가족 시즌8 호러 에피소드밥 돌 의원과 함께 등장한다. 방영 일자는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약 1주일 앞둔 1996년 10월 27일.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미국에 숨어든 캉 & 코도스에게 밥과 함께 납치되었다.[77] 이후 호머 심슨에게 구출되자 밥 돌에게 우리가 힘을 합쳐 미국을 더욱 빛내도록 하자며 현실 미국에서도 유례없는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호머의 실수로 둘 다 사고로 죽어버리고, 빌과 밥으로 변장했던 캉 & 코도스는 지구를 정복하고 만다.

FX(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한 범죄 시리즈물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의 세번째 시즌, '탄핵: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는 르윈스키 스캔들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는 빌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스캔들, 그 이후 빌 클린턴의 정치행보와 수난을 매우 철저한 고증과 세세함으로 다루고 있다. 르윈스키 스캔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필시 시청해야 할 드라마.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전격! 돼지발굽 대작전에서는 성우 오세홍이 연기한다. 마우스신짱구 일행에게 가상의 비디오로 보여준, 부리부리자에몽이 전 세계에 바이러스 공격 및 바이러스를 통한 핵공격을 하는 과정에서 등장. 부리부리자에몽의 바이러스를 통한 미국의 핵기지를 통한 핵공격을 긴급히 저지하려다 부리부리자에몽의 방구 공격에 의해 호되게 당하여 쓰러져 굴욕을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8. 여담[편집]


  •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93년부터 2001년까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20년대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기까지의 두 시기와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긴 경제적 팽창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닷컴버블로 인했던 것으로, 그가 대통령 자리에서 퇴임한 지 두 달 만에 미국 경제는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허나 클린턴의 집권기가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전대의 황금기들이 제국주의 서유럽 국가들 혹은 소련과 세계 패권의 파이를 나눠먹었다면, 이 시기는 오로지 미국이 홀로 완벽하게 세계 패권을 주무를 수 있었던 독보적인 초강대국으로 군림했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현재의 미국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리고 90년대의 황금기는 클린턴 퇴임 이후 조금씩 하락세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호황은 후임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2006년까지 길게 이어졌으며 이는 부시 행정부인 2008년 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통해 깨지게 된다.

  • 상당한 동안으로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와 동갑이다(생일은 반대로 클린턴이 가장 늦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역 시절엔 정적이었던 조지 W. 부시랑 지금은 절친하게 지낸다. 둘이 리더십 프로젝트로 같이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고 행사에도 같이 나오고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부시가 클린턴을 지목할 정도로 친한 사이. 왜냐 하면 둘 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으로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했기 때문이다. 한쪽이 낙선했더라면 사이가 절대로 좋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둘이 정반대의 정당 출신 대통령이었어도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클린턴과 W.부시는 공적으로는 정적이었어도 사적으로는 이젠 친구가 되었다.[78]

  • 중간 이름에 나오듯이 미국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을 존경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둘 다 불륜 혐의가 있고(...) 공화당에서는 당신은 제퍼슨이 아니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 영화팬이며 한때 배우가 되려는 꿈도 가지고 있었다. 월간조선의 관련 기사에 따르면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가 개봉했을 때, 백악관에서 사람 여럿 불러놓고 본 적 있다. 꽤 만족스럽게 보았다고 하며, 특히 백악관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엄청 즐거워했다고 한다.

색소폰 불기를 좋아했으며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이 영상은 1992년 영상으로 당대 투나잇 쇼 다음으로 인기 있던 토크쇼인 아세니오 홀의 "The Arsenio Hall Show"에서 엘비스 프레슬리Heartbreak Hotel을 색소폰으로 부는 영상으로, 이 영상으로 인해 빌 클린턴의 지지율이 급상승했다.[출처] 빌 클린턴의 경제에 대한 구호가 지지율의 일등 공신이긴 했으나, 대통령 후보가 인기 토크쇼에 나와서 엘비스의 노래를 색소폰으로 부는 광경은 미국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계기로 재임 기간 내내 '색소폰 부는 대통령'이라는 기믹이 꽤 유행했다. 레슬리 닐슨의 패러디 영화에서도 닮은꼴 배우가 색소폰을 부는 장면이 나온다. 더불어 심슨 가족에서도 이런 기믹을 밀고 나온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장면에서 색소폰을 부는 식으로.

  • 몹시 어렵던 유년 시절부터 주식으로 먹었던 패스트푸드를 대통령 재임기에도 즐겨 먹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 각료들과 햄버거를 먹으며 각료회의를 하기도 했으며, 대통령 재임기에도 백악관을 나가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자주 사 먹었다고 한다.[79] 식습관이 이런데도 키가 188이다당연히 이런 식성이 클린턴의 심장질환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다.

아내인 힐러리는 이런 남편의 식성을 걱정해서 대통령 식단에 여러 야채를 올려뒀지만, 빌은 그걸 다 먹고 콜라 한 캔과 과자를 먹는 등, 그런 아내의 노력을 다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대통령 퇴임 후인 2004년 심장질환으로 수술을 받았고,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채식 위주로 식단을 바꾸고 체중을 많이 줄였다.[80]
빌이 퇴임하고 20여년 뒤 그의 아내를 대선에서 이기고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도 햄버거를 비롯한 패스트푸드를 무척 즐긴다. 도널드 트럼프는 빌 클린턴과는 달리 태생부터 상류층이지만 워낙 빠르고 간편한 걸 선호하다 보니 패스트푸드를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조간회의 때 다이어트 콜라 5-6캔 정도를 까 마신다고 하며, 아예 집무실 책상에 따로 빨간색 버튼을 설치해 이 버튼을 누르면 백악관 주방에서 다이어트 콜라를 가지고 온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그러나 바이든 집권 후 이 콜라 버튼을 치웠다.

  • 어머니 쪽 이부(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로저 클린턴은 가수로 활약하고 있고, 더럽게 재미없는 B급 호러영화 펌프킨 헤드 2에 대사 좀 있는 단역으로 출현했는데 이 영화가 국내 개봉할 당시 내한을 했다. 당연히 대통령 동생이라는 후광을 받아서. 친아버지 쪽으로는 이복형 헨리 레온 리첸탈러(Henry Leon Ritzenthaler)[81]와 이복누나 샤론 리 페티존(Sharon Lee Pettijohn)이 있다.

  • 오랫동안 정치 활동을 벌이고 있는 아내 힐러리 외에도, 딸인 첼시 클린턴(1980년)도 곧 정계에 진출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워싱턴 정계에 퍼져 있다. 첼시는 만 17살 때 대학 졸업 후[82]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금융가로 있다가, 언론 리포터와 국제관계학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다. 클린턴 부부가 설립한 대형 재단에 '빌·힐러리·첼시 클린턴 재단'이라 하여 첼시의 이름을 붙이는가 하면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 첼시를 동반하기도 했다. 단순히 부모로서 딸을 생각하는 수준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공식적이고 노골적인 형태라 벌써 정치 후계자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70대에 접어든 클린턴의 나이나, 2017년 기준 30대 중반이 된 딸의 나이를 생각하면 '벌써'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 미국의 황색 언론에서는 무남독녀 첼시 클린턴이 빌의 친딸이 아니라 힐러리가 외도로 낳은 혼외자식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돌고 있다. 이들의 '빌 클린턴은 무정자증이고, 힐러리는 옛 애인이었던 변호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고, 빌은 그 사실을 알고도 아이가 있는 쪽이 자신들의 이미지에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냥 가만히 있는 거다', '첼시는 빌과 전혀 닮지 않았다' 라고 주장한다. 으레 황색 언론의 보도들에 대한 반응이 다 그렇듯 이러한 가쉽성 보도에 대해 미국 사회에서의 반응도 이뭐병.

  • 달변가로 유명하다. 미국의 제38대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빌 클린턴을 "이미 녹아 버린 얼음도 (얼음이라고) 팔아먹을 수 있는 화술의 인물"이라 말했다. 물론 좋은 말만 한 건 아니고 "여자만 보면 눈을 두리번거리는 섹스 중독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archive wayback


  • 클린턴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며 장난스럽게 부르기도 한다. 흑인 문학가 토니 모리슨이 한 발언에서 비롯된 건데, 모리슨은 빌 클린턴이 평소 흑인들이 애용하는 색소폰을 애용한다는 점, 흑인들처럼 빈민층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이 흑인의 습관과 가깝다는 점(패스트푸드를 즐겨먹는 점 등)을 들어 그리 말한 것이다. 한 마디로 '겉은 백인이지만 속은 우리 흑인들과 같아 흑인들을 잘 이해해주는 좋은 대통령'이라는 의미에서 흑인 대통령이라 빗댄 것이다.
실제로 클린턴은 백인이면서도 흑인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다.[83] 때문에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혼혈 대통령일 뿐이고 빌 클린턴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 카더라.[84] 상기한대로 흑인 문화에 일가견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흑인 문제나 성적 소수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20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 지지 선언을 함으로서 정말로 흑인을 위한다는 이미지가 더해져 오바마 당선 이후로 사용 빈도가 더 늘어난 듯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인 힐러리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후 평판이 더욱 올라가고 있다. 그 이전에는 똑부러진 힐러리, 사고뭉치 빌의 이미지가 있었다. 빌이 대통령이 된 것은 똑똑한 힐러리의 내조 덕분이었다는 평은 덤.[85] 그러나 인기 절정의 현역 대통령을 꺾고 재선에 승리한 빌 클린턴과 달리 질 수 없는 대선이라는 평이 자자했던 선거에서 패한 힐러리 클린턴이 대조되면서 평판은 다시 완전히 역전되었다. 힐러리가 2016년 대선에서 진 것은 자신에게 크게 유리한 판이라는 자만심에 빠진 나머지 가난한 백인들(특히 러스트 벨트)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결정적 오판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때 당시 빌 클린턴은 이 러스트 벨트의 중요성에 대해 정확히 간파하고 아내에게 충고했지만 씹혔다(...). 힐러리 캠프의 이러한 대접에 이 러스트 벨트 지역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손을 들어줘 힐러리의 정치 경력에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보답했다. 좋은 충고를 가려내고 수용하는 능력은 정치인으로서(특히 대권을 노린다면 더더욱) 가장 중요한 소양임을 생각해보면...

  • 한국의 배우 노주현과 생년월일이 같으며, 그가 취임식을 가졌던 1993년 1월 20일은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였던 오드리 헵번이 사망한 날이기도 했다.

  • 1980년대 이후, 조 바이든과 함께 대표적인 공화당의 텃밭조지아 주애리조나 주에서 이긴 유이한 대통령이다. 차이점이라면 바이든은 둘 다 이긴 반면 클린턴은 조지아를 초선, 애리조나를 재선 때에만 이겼다.

  • 학창시절에는 촌스러운 옷으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했고, 클린턴을 한대 후려치는 학생도 있었다.


  • 2018년 6월, 작가 제임스 패터슨과 공동으로 '대통령이 사라졌다(The president is missing)'라는 제목의 범죄 스릴러 소설을 출간했다. 대통령 조나단 던컨이 탄핵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미국을 전복시키려는 테러 세력을 찾아나선다는 내용이다. 출간 직후 쇼타임에서 드라마화 하기로 결정했다. 북미에서만 판매량이 100만 부를 돌파하는등 미국 대중들에겐 반응이 좋았던 반면 평단의 반응은 차가웠다. 사실 작가 두 사람의 이름값을 내려놓고 본다면 소설 플롯 자체는 흔한 이야기고 반전도 예측 가능하다.

  • 미국 선거사에서 재밌는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 대선에서 43.0%, 두번째 대선에서 49.2%의 총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미국에서 두 번 다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들[86] 중 같은 민주당의 전임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과 함께 한 번도 대선에서 득표율 50%을 넘기지 못한 유이한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는 미국 대선 역사상 드물게도 빌 클린턴이 치른 두 번의 대선에서 로스 페로라는 제3후보가 등장해서 18.9% - 8.4%를 기록하며 선전했기 때문이다.

  • 아칸소 주지사 시절 유약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Ricky Ray Rector'란 범죄자를 사형시켰다. 문제는 이 죄수가 정신지체였다는 점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빌 클린턴을 공격할 때 인용하는 레퍼토리중 하나다.

  •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이후 50년 가까이 이어져왔던 직업 군인 출신 대통령의 전통이 이 사람 대에서 멈췄다.[87]

  • 대통령에 당선된지 30년이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오바마 다음으로 가장 최근에(1946년 8월) 태어난 대통령이다. 동갑내기 후자인 조지 W. 부시보다 1달 늦게 태어났고, 후후후자인 도널드 트럼프보다 2달 늦게 태어났으며, 그보다 28년 늦게 취임한 조 바이든보다 4살 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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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시스 S. 그랜트도 46세에 취임했으나 클린턴은 46세 5개월, 그랜트는 46세 10개월에 취임했기 때문에 클린턴이 더 일찍 취임한 것이다. 민주당의 후임 대통령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클린턴 대통령보다 1살 늦게 취임(47세)하고 퇴임(55세)했다.[2] 퇴임 당시(2001년 1월) 지지율은 무려 66%로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 가장 높은 기록을 세우고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두 번째 기록은 로널드 레이건이 1989년 1월에 기록한 63%. 르윈스키 스캔들로 망신당한 것을 감안하면 믿기 힘든 수치이며, 만약 르윈스키 스캔들이 없었다면 훨씬 높은 수치가 가능했을 것이다.[3]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인이 승리했을 경우, 사상 최초의 부부 대통령 기록도 세울 뻔 했었다. 남편이 워낙 인기가 많은 정치인인지라.[4] 법적 이름이 윌리엄이므로, 대통령 취임식 때 본인 입으로 낭독한 full name은 William Jefferson Clinton이다. 1기 취임식 영상 2기 취임식 영상 다만 알다시피 법안에는 Bill Clinton이라고 서명했다.[5]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이다. 정식 이름은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다.[6] 오락용 약물, 즉 마약을 뜻한다.[7] 출처는 마이클 샌델 저, 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 P187(93쇄 기준)[8] 여기에 선정돼서 받는 장학금이 영연방에서 최고로 영예로운 장학금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운 양반의 행적을 보면 다소 찝찝한 면이 있다. 자세한 사항은 세실 로즈 참고.[9] 전공은 본래 PPE(경제,정치,철학 통합 과정)을 선택했으나 정치학과로 전과했다. 영국의 주요 정치인들은 대부분 옥스퍼드 대학의 PPE 전공을 이수한다. 그러나 그가 유학하던 시기에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터라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훗날 선거 때마다 구설수에 올랐다.[10] 예일 로스쿨은 소수정예이며 성적표에 A, B, C 점수가 나가지 않는다.[11] 아칸소 주지사 임기는 2년이었는데, 1978년 당선 후 한 번 낙선했다가 1982년 재선, 임기가 4년으로 늘어난 1986년과 1990년에 두 번 더 당선되어 자그마치 12년이나 주지사를 지냈다.[12] 아칸소 주지사, 검찰총장 최연소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13] 마이클 듀카키스는 민주당 후보로 1988 미 대선에서 크게 앞서고 있었으나 공화당의 악질적인 네거티브 광고에 큰 타격을 입고 대선을 패배한 뒤 그대로 정계를 은퇴했다.[14] 총알을 물다(bite the bullet)라는 숙어를 의역하면 "내가 피똥싸게 인내하는 동안 클린턴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15] 1992년 5월, '시스터 술자'라는 힙합 가수가 '우리 흑인들은 허구한 날 서로를 죽여대는데, 이왕 사람을 죽일 거면 흑인이 아니라 백인을 죽이자'는 선동을 하였다. 이에 클린턴은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것뿐만 아니라 흑인이 백인을 차별하는 것 역시 인종차별이자 증오라고 비판했고, 제시 잭슨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클린턴에게 사죄를 요구했다.[16]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명숙이 이를 패러디한 구호 "바보야 평화가 경제야!"를 내걸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낙선했다.[17] 사실 냉전이 생기게 된 원인인 이데올로기가 왜 생겼는지 생각해보면 화폐경제 시대의 핵심을 파악한 것이기도 하다.[18] 미국 부통령은 사실 별로 권한이 없지만,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 대통령을 대신하기 때문에 만일 대통령 후보의 나이가 많다면 부통령 후보자들에 대해서도 꽤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당시 조지 H. W. 부시의 나이가 만 68세로 상당한 고령이었기 때문에 미국 유권자들로서는 댄 퀘일이 대통령이 되는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세라 페일린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결과 존 매케인의 득표가 떨어졌다는 평과도 상당부분 일치한다.[19] 여러모로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겹쳐 보이는 선거다. 보수정당 후보허버트 부시-이회창, 민주정당 후보인 빌 클린턴-김대중, 보수성향 제3후보인 로스 페로-이인제를 대입해서 봐보자.[20] 다만 이게 전적으로 빌 클린턴의 공인지는 미국내에서도 말이 많고 지역별로 차이가 많아서 디트로이트나 오클랜드같은 지역은 여전히 함부로 길거리에 돌아다니기 힘든 도시로 손꼽히며 뉴욕도 1990년대에 치안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강도짓강하기 좋은 도시였다.[21] 이후 의료보험 개선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민영적으로 전국민에게 해당될 클린턴 의료보험 개혁 내용을 축소해 무보험자들을 보장하는 데 집중하여 통과를 이루었다. 해당 항목 참조.[22] 뉴트 깅그리치가 주도한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으로 지역 이슈에만 집중하던 공화당이 자유지상주의적인 공약을 공동으로 내걸면서 40년만에 하원 다수당으로 압승을 거두게 된다. 의회 개원 후 100일 만에 상당수의 공약이 다수당이 된 공화당에 의해 통과되었으며, 심지어 "재정 균형 수정 헌법"까지(간발의 차로 부결되었지만) 통과될 뻔 했다.[23] 얼핏 보면 까는 글 처럼 보이나 사실은 빌 클린턴의 외교정책을 칭찬하는 글이다. 우파, 좌파, 중도 전부 클린턴의 외교정책을 비판하지만 방어적 현실주의자인 자기가 보기에 빌 클린턴은, 러시아 엿먹이고 중국 이용해먹고 동맹국 압박하고 UN까지 무시하면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했으니 결국 잘한게 아니냐고 칭찬하는 내용. 물론 철저히 미국의 현실주의 지식인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이 글이 쓰여진 2000년 당시는 중국의 경제대국화에 따른 중국 위협론이 주목받지 않았고 러시아의 강경파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이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24] 방어적 현실주의에 속하는 정치학자로서 위협균형(Balance of threat)이론으로 유명하다[25] 미국 내 여론#은 양분되어 있었고 로널드 레이건이나 밥 돌, 마거릿 대처같은 서구의 보수파 정치인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보스니아 전쟁에 개입하고 인종청소를 막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빌 클린턴은 일단 보스니아가 NATO 관할권이 아닌데다 전통적으로 발칸반도는 한참 우호적 관계를 쌓아가고 있던 보리스 옐친러시아의 영역이라는 점,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모가디슈 전투의 여파가 미국 사회에 아직 남아 반전여론이 높았던 점 등을 고려하여 UN과 NATO을 통한 간접적 지원(비행금지 구역 설정, 안전지대 설정 등)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빌 클린턴 입장에서 무력감을 주었으며 이후 헬무트 콜과의 회담 기록에 따르면 이는 범유럽적인 안보기구로서 NATO를 확장시키는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26] 하지만 빌 클린턴 정권의 국무장관이자 NATO확장 반대론자였던 윌리엄 페리는 미국이 보스니아 전쟁 뒷처리를 위하여 미군을 보스니아에 상륙시켜 러시아의 전통적 영향권을 침범하고 보스니아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서부터 바로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가 시작되었다고 비판적으로 회고한바 있다.# 이전까지 NATO와 러시아는 합동 군사훈련을 4차례나 수행했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27] 예를 들어 온건 진보파 지식인의 거두로서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였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담론"의 주창자였음에도 코소보 전쟁이 시작된 후 모두의 예상을 깨고 NATO의 공습을 지지하여 서구 지식인 사회에 센세이셔널한 충격을 주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당시 NATO의 공습을 '인도적 개입’이며, 새로운 세계질서 정치의 시작이라고 봤다. 일어날지도 모를 끔찍한 인권 침해 상황을 국제사회가 앞서 막았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크리스토퍼 히친스 역시 당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미국의 코소보 전쟁 개입과 NATO의 공습을 지지한 대표적인 경우이다.[28] 반대로 연극 관객모독으로 유명한 페터 한트케는 당시 NATO 공습을 반대하고 세르비아와 밀로셰비치에 동조적인 시선을 보냈다는 이유로 이후 수십년간 '인종청소 옹호자'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29] 예를 들어 놈 촘스키는 공습이 오히려 발칸 반도의 민족갈등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국제법을 무시한 당시 NATO의 공습은 잘못된 선례로서, 앞으로도 인권침해는 자주 일어날 것인데 그 때마다 외부적인 무력개입을 일삼는다면 국가간 무력행사를 막을 법질서는 무너지고 만다고 비판하였다#(인도적 개입 참조). 그 외에도 당시 나토 공습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이 대거 희생되었음과 공습의 명분인 인종청소의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는 이유로 반전주의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도 코소보 전쟁을 줄곧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편##[30]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1990년 1월 31일 한스-디트리히 겐셔 당시 독일 외무장관은 “동부 유럽의 변화와 독일 통일 과정은 결코 소련의 안보 이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며, 나토는 동쪽 소련 국경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고 2월9일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우리가 나토 일원인 독일에 미군을 배치하더라도, 나토 관할권(jurisdiction)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나 나는 일방적인 이익을 취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으며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존 메이저는 “우리는 나토의 확장을 거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냉전 구도가 해체될때만 하더라도 나토의 확장은 커녕 동독 지역을 나토의 관할범위로 포함시킬 것인지 말것인지만을 두고도 서방국가 내부간 심각한 의견차가 있었다#[31] 참고로 이 협정은 1998년에 일어난 코소보 전쟁에서 미국과 NATO의 세르비아 공습을 러시아에 대한 적대행위라고 판단한 러시아 정부가 이후 협조를 거부함으로써 무의미해지고 만다. 세르비아러시아와 동일한 슬라브족으로서 러시아의 후원을 강하게 받았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1997년 체결된 협정에 따르면 NATO와 러시아는 영구적 합동 본부(Permanent Joint Council)를 운영하면서 상호협의하에 의사결정해야 하고 러시아와 NATO는 공동 군사 훈련도 같이 해야하고 모스크바내에 NATO와 군사연락임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하고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군사 훈련을 제한하여야 하는 여러가지 수행사항이 많았으나 1998년 코소보 전쟁 이후 러시아는 이러한 NATO와의 협력과 군사제약을 전부 거부하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2001년의 NATO는 러시아가 1997년에 체결된 해당 협약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32] 빌 클린턴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한 윌리엄 페리가 폴리티코에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윌리엄 페리 본인은 이러한 NATO의 동진 정책이 장차 러시아 수뇌부로부터 반발을 부를 것을 예상하고 해당 정책을 재고하기를 요청했지만 빌 클린턴은 이러한 조언을 무시하며 그대로 밀어부쳤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발트 3국, 유고슬라비아 국가 등 다른 20여개 동유럽, 중앙유럽 국가들의 NATO 가입도 빌 클린턴이 짜놓은 계획때문이라는 것이 윌리엄 페리의 전언. NATO의 동진 자체는 조지 W. 부시버락 오바마에 의해서도 추진되었지만 이들은 전부 빌 클린턴의 짜놓은 계획을 따라갔을 뿐이다.[33] 참고로 당시 나토 확장에 반대했던 윌리엄 페리는 아직도 나토 확장 정책을 계속 까고 다닌다#[34] 이들 나라가 소련(러시아)에 원한을 가지게 된 계기는 큰 사건만 대충 살펴봐도 카틴 학살, 프라하의 봄, 부다페스트 공방전, 헝가리 혁명 같은 것들이 있다[35] 1994년 12월 5일 헬무트 콜과 빌 클린턴 사이의 진행된 회담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 등 유고슬라비아에서 촉발된 분쟁과 민족학살로 인하여 독일에는 이미 40만명의 난민이 온 상태였다고 한다. # 동유럽의 위기는 곧 나토 최전선에 위치한 독일의 위기였기도 한 것이다[36] 헬무트 콜이 빌 클린턴과의 회담에서 얘기한 에피소드 중 하나는 이렇다. 러시아가 분쟁중인 국가에 폭격을 계속하자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에게 전화를 걸어 폭격을 중지하라고 요청한다. 보리스 옐친은 이에 응하여 폭격을 당장 멈추었지만 24시간이 지나자 폭격은 다시 시작되더라는 거다. 헬무트 콜은 보리스 옐친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러시아 군부가 보리스 옐친의 통제를 점차 이탈하는 것이 명백해 보였던 것이다.#[37] 빌 클린턴 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로렌스 소머스는 1998년 미국과 중국이 새롭게 체결한 무역협정을 두고 "역사상 최대의 세금 감면 정책(the largest tax cut in the history of the world)"이라고 평가하였다. 중국산 저가 수입품은 결국 미국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이다.[38] 1990년대는 중국 경제 입장에서 중요한 시기다. 1990년대 들어서 대미 무역이 급격히 증가하였고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통해서는 동아시아 역내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이 대폭 상승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 쌓아올린 체급과 무역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은 결국 2001년 WTO에 가입하여 말그대로 폭풍 성장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중국 경제의 성장력은 대부분 이때 기틀을 잡아놓은 것이다[39] 실제로 미국 육군참모대학교(United States Army War College)가 2021년에 발간한 보고서 '깨진 둥지 : 대만 침입으로부터 중국 억제하기(Broken Nest: Deterring China from Invading Taiwan)'에서도 빌 클린턴이 제3차 대만 해협 위기 당시 시전한 미 해군 무력 시위는 중국 군수뇌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어 대함 미사일 전력에 막대한 투자를 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오늘날 미해군의 대만 방위 작전에는 제약이 많아지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40] NAFTA가 미국-멕시코간 마약 밀수에 크게 기여하고 미국 남부 국경의 안전을 위협하였다는 논문이나 보고서, 기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41] 독재국 쿠바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찾으러온 사람들을 임의적 기준(육지 상륙 여부)로 내버렸다는 보수주의적 비판(특히 플로리다주는 쿠바로부터 피난온 쿠바계 미국인들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부터 쿠바 난민들이 무리하게 상륙을 시도하고 사망하는 등의 안전성 비판, 쿠바인들이 기존의 느린 배 대신 빠른 속도의 쾌속정으로 망명함에 따라 무의미한 정책이라는 실효적인 비판 등을 받았다. 결국 해당 정책은 수년후 버락 오바마 정부에 의해 폐기된다[42] 참고로 이 '암살 시도'는 가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미국이 제시한 암살시도 근거는 2가지인데 첫째는 쿠웨이트 정부가 확보한 관련 용의자의 진술이었고 둘째는 쿠웨이트 시내에서 발견된 175파운드 짜리 차량폭탄인데 이런 규모의 차량폭탄은 이라크에서밖에 못만든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구타나 고문이 용인되는 경찰과 정부에서 확보된 '용의자의 진술'이라는 엄밀한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고 증거로 제시된 175파운드짜리 차량폭탄은 이라크뿐만 아니라 중동 국가 어디에서든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 언론 뉴욕 타임즈에서 언급된 폭탄 전문가 7명은 해당 차량폭탄이 이라크 외의 국가에서 만들어졌다고 감정하였고# 결국 CIA의 대테러 전담부서까지도 해당 암살 음모가 쿠웨이트 정부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였다##[43] 출처 : 전후 일본의 방위 구상:일본 우익 세력의 자위대 구상과 그 실천 과정, 서민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14[44] 출처 :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 변화, 이현송(한국외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국제·지역연구 24권 2호 2015 여름[45] 현재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의 경우 전업주부로 지내다 만 47세의 나이로 하원에 처음 입성해 지금까지 30년 넘게 의정활동 중이다. 펠로시 의장은 1940년생으로 빌 클린턴보다 6살 연상이며 2021년 현재 만 80세이다. 전전임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의 경우는 클린턴이 퇴임한 나이인 55세에 정계 입문했다.[46] 56세의 나이로 퇴임한 버락 오바마도 마찬가지. 그 외에 두 사람보다 더 빨리 대통령직을 마친 사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로, 50세 혹은 51세에 마쳤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에는 이보다 더 빠른 있다.[47] 힐러리는 당시 공직자라서 수입이 많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자연인 빌 클린턴이 다 갚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48] 운송업계의 재벌이다.[49] Andrew Jack,'Clinton initiative wins $7.3bn pledges,financial times, 2006년 9월 22일.[50] David Rothkopf,'슈퍼클래스', 이현주 역, 더난, 2008, p443[51] 미국에서 First Lady/First Gentleman은 대통령의 아내/남편에게만 쓰이는 말은 아니며, 주지사의 아내/남편에게도 쓰인다. 주지사가 여성인 경우는 이미 있었으므로 First Gentleman 이라는 칭호 자체는 이미 사용되어 왔다.[52] 전국 표에선 근소하게 이겼지만 선거인단에서 패했다.[53] 시기를 잘 탔다는 분석도 있다. 닷컴버블을 목전에 두고 민간 투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 그럼에도 적절한 재정정책통화정책을 통해 민간투자의 확대가 고용의 확대로 이어지게 만든 점은 큰 업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관련 기사[54] 공화당에선 아이젠하워와 레이건을 이미 배출한 바가 있다. 재선 성공 자체야 닉슨 등이 있는데 사임 크리... 민주당의 경우는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후 승계 재선, 존슨 역시 케네디 사후 승계 재선이며 카터는 단임에 그쳤다.[55] 다만 이후에 이 정책은 동성애자들로 하여금 입 다물라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폐지된다. 물론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당시로서는 이것도 진일보한 거였지만...(그리고 동성애자들의 성향을 밝히지 말라는 것도 공화당과의 타협의 결과이기는 하다)[56] 1999년 11월 12일 그램-리치-브릴리법으로 개정. 이후 2010년 오바마에 의해 상업은행의 자기 매매는 금지되었는데 이것을 '새로운 글래스-스티걸 법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57] 이에 대해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이권다툼에서 한국이 희생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대결[58] 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59] 김대통령 핵,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60] 여담이지만 코소보는 이슬람 신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자국을 보호해 준 미국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하며, 특히 코소보 공습을 단행한 클린턴에 대해서는 동상을 세우고 그의 이름을 딴 도로를 만들 정도로 영웅시하고 있다. 후임 아들 부시 역시 코소보 독립을 적극 지지했기에 클린턴만은 못하지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코소보 공습을 결단한 시점이 자신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코너에 몰려있고, 의회가 탄핵을 착착 준비 중이던 때라는 것. 이런 상황이 영화 'Wag the Dog'에서 비꼬이기도 했다.[61] 이때 파키스탄은 핵실험 이후 카슈미르의 인도 지역인 타이거 힐스를 공격하여 빼앗으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나중에 인도군의 반격으로 파키스탄은 패하여 타이거 힐스를 빼앗기고 후퇴하였다.[62]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개발 참조. 물론 바지파이 총리는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주었고 회담은 별탈없이 끝났다.[63] 클린턴은 자신이 아일랜드계 조상이 있어서 아일랜드 대선에, 또 "미국이 지난 1803년 프랑스로부터 사들인 땅의 일부인 아칸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프랑스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라고 농담했다("과거 프랑스 식민제국 영토였던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든 프랑스로 이사를 가서 6개월간의 거주 요건을 충족하고,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으면 프랑스 대통령 선거 입후보가 가능하"기 때문#).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지만, 클린턴이 아일랜드에 쏟은 관심의 근거를 엿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64] 한국에서도 이에 맞물려 클린턴 집권기 시절인 1997년부터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시작되었다.[65] 1:12초에 나온다.[66] 르윈스키의 배신감에도 불구하고 트립은 "애국자로서 해야 할 의무"라고 주장했다. 린다 트립은 클린턴 정부 교체와 동시에 펜타곤에서 해임을 당했고, 2004년 독일 출신의 건축가와 결혼했다. 그녀는 워싱턴 D.C. 교외에서 크리스마스 용품 판매점을 경영하며 여생을 보냈다. 2020년 4월 8일 트립은 췌장암으로 사망했고 트립이 위독하단 것을 안 르윈스키는 자신의 트위터에 "과거와 상관없이 트립이 회복하길 바란다. 그의 가족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할 수 없다"란 글을 남겼다.[67] 이 사건의 여파로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고어는 미주리, 아칸소, 루이지애나, 플로리다(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오하이오, 뉴햄프셔, 애리조나, 네바다, 테네시,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등 무려 11개 주를 공화당에게 내주며 패배했다.[68] 미국의 사법체계에서 법정에서 작정하고 한 위증죄는 엄청난 죄다. 미국에서 다른 대통령이 관여한 큰 사건인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차드 닉슨을 사임까지 몰고 간 것도 '워터게이트 자체'보다는, 이에 관련해 닉슨이 거짓말을 한 것이 더 크게 작용했다.[69] 클린턴이 위증혐의를 변호하려고 본인이 법정에서 한 성교(Sexual Relationship)라는 말에 구강성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변론에서 나온 말이다.[70] 원문은 'Indeed, I did have a relationship with Ms. Lewinsky that was not appropriate.'[71] 존 올리버는 자신 또한 그런 흐름에 편승해 여성혐오적 농담을 한 것을 인정하며 사과하는 뜻으로 모니카 르윈스키를 쇼로 초청하여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72] 자신이 개정한 주법에 의해 1986년부터는 아칸소 주지사 임기가 4년이 되었다.[73] 참고로 이 연설은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에게 아슬아슬하게 위협받고 있던 오바마의 재선을 굳혀준 결정적인 요인으로 간주된다. 오바마 2기는 사실상 빌 클린턴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민주당원 사이에선 여겨진다.[74] 여담으로 대본을 보면 알겠지만 말 그대로 오바마가 당선돼야 하는 이유를 경제 수치로 단박에 설명해버렸다.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전직 대통령[75] 연설 내용은 학교에서 부인을 처음 만나서 현재에까지 이르는 삶의 내용이 담겨 있다. 위의 문장은 영상에서 39분 지점일 때 나온다.[76] still in office와 feeling on his가 라임이다. killing off it도 마찬가지로 라임.[77] 캉 & 코도스가 지구의 대빵이 누구냐고 묻고 호머는 미국 대통령을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 빌 클린턴을 언급했다. 그런데 곧 선거가 있어서 조금 있으면 그가 그 자리에 없을 수도 있다며,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밥 돌 의원도 언급한 덕분에 둘 다 납치되었다.[78] 비슷한 예시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정치적으로는 완전 정반대 성향이지만 사적으로 절친이다.[출처] - 영어 위키피디아[79] 참고로 이때 모자 쓰고 얼굴 가려서 경호원까지 따돌렸다고 한다![80] 재임 당시만 해도 100kg가 약간 넘었으나, 지금은 두 자리 체형으로 줄었을 가능성이 높다.[81] 그의 새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82] 미국은 월반제가 있다.[83] 한 여론조사에서는 미국 내 흑인의 90%가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2008년 민주당 경선 초기 당시 흑인 사회에서 힐러리가 정작 흑인인 오바마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었었다고 한다...[84] 다름아닌 모건 프리먼 옹이 한 말이다. 흠좀무.[85] 하지만 현실은 힐러리가 남편 덕을 본 것에 가깝다.[86] 1기 임기를 전임 대통령의 유고 등의 상황으로 인해 승계해서 치른 경우 등은 제외한다는 뜻이다.[87] 트루먼부터 전임인 조지 H. W. 부시까지 모두 군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었으며, 특히 존 F. 케네디 대통령부터 지미 카터 대통령까지는 모두 해군 장교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