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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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테리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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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33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Terry%20Bill%20Plaque%20280_NBL.png
빌 테리
헌액 연도
1954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7.38% (14회)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3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타격왕
레프티 오돌
(필라델피아 필리스)

빌 테리
(뉴욕 자이언츠)


칙 헤이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뉴욕 자이언츠 등번호 4번
결번

빌 테리
(1932)


멜 오트
(1933~1948, 영구결번)
뉴욕 자이언츠 등번호 3번
프레디 린드스트롬
(1932)

빌 테리
(1933~1936)


멜 오트
(1937)
대니 오자크
(1983)

영구결번


뉴욕 자이언츠 등번호 30번
팁 토빈
(1932)

빌 테리
(1937~1941)


빌 보이젤
(1947)



파일:빌테리.jpg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No. 3
윌리엄 해롤드 "빌" 테리
William Harold "Bill" Terry

출생
1898년 10월 30일
조지아 주 애틀랜타
사망
1989년 1월 9일 (향년 90세)
플로리다 주 잭슨빌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85cm / 90kg
포지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23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NYG)
소속팀
뉴욕 자이언츠 (1923~1936)
지도자
뉴욕 자이언츠 감독 (1932~1941)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은퇴 후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6. 여담



1. 개요[편집]



파일:Terry Bill 694.68_Bat_ PD.jpg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 뉴욕 자이언츠에서 뛰었으며, 초창기의 자이언츠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었던 테드 윌리엄스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상 마지막 4할타자다.

별명은 멤피스의 빌.

2. 선수 시절[편집]


1923년, 25살의 나이로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당시에는 조지 시슬러와 마찬가지로 좌완투수로서 주목 받았지만, 자이언츠의 감독이었던 존 맥그로는 투수 보다는 타자로서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자이언츠의 1루에는 조지 켈리라는 준수한 1루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빌 테리는 1924년까지는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다. 1924년의 기록은 .239에 불과했을 정도.

조지 켈리가 2루로 이동한 1925년에는 주전 1루수로 기용되어 133경기에 나오면서 타율 .319 156안타 11홈런 70타점을 기록했지만, 조지 켈리가 1926년에 도저히 답 없는 2루 수비를 보여주자, 다시 1루로 이동하면서[1] 테리는 다시 벤치 멤버행. 156안타 11홈런 70타점을 쳤는데도 벤치라니[2] 빌 테리가 벤치에서 재능을 썩히고 있던 것을 아쉬워하던 존 맥그로 감독은 테리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1926년 시즌이 끝나고 조지 켈리를 신시내티 레즈로 보내버리는 초강수를 두고, 빌 테리를 주전 1루수로 기용한다.[3] 이렇게 되자, 1927년에 타율 .326 189안타 20홈런 121타점을 기록하며 대활약했고, 유니폼을 벗게 되는 1936년까지 무려 10년 연속 3할을 기록하는 명실상부 자이언츠의 주포로서 활약한다.

1928년에는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며, 1929년에는 다저스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9안타 6타점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고, 그 해 타율 .372 226안타 14홈런 117타점을 기록했다. 1930년에는 단 한번도 2경기 연속 무안타를 기록한적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타격감을 보이면서 그해 타율 .401 254안타 23홈런 129타점이라는 MVP급의 성적을 내며, 타격왕을 차지한다.

빌 테리가 그 해 기록한 타율 .401는 내셔널리그 최후의 4할이며 254안타는 역대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 3위이다. 이 게 빌 테리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타이틀이다.

다만, 1930년 빌 테리가 기록한 성적은 다소 저평가가 되었는데, 그 당시의 내셔널 리그는 역대 최악의 타고투저 시즌이였기 때문이다. 내셔널 리그 타율이 무려 .303이였을 정도인데, 이는 KBO 리그 사상 최악의 타고투저 시즌이라 일컬어지던 2015년 보다도 1푼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여하튼 1929년 레프티 오돌이 기록한 역대 한 시즌 최다 안타와 타이를 이루는 기록이다.

1931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칙 헤이피와 시즌 막판까지 타격왕 경쟁을 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태에서 헤이피의 타율은 .353였고 빌 테리는 .349였다. 헤이피는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8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빌 테리와 동률인 .349로 떨어졌다. 빌 테리는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1안타를 기록했으나 비로 인하여 노게임이 선언되었고, 빌 테리가 친 안타도 무효가 되었다. 결국 빌 테리는 0.0028이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헤이피에게 타격왕 자리를 내주었다.

1932년, 빌 테리는 자신의 스승인 존 맥그로에 이어 자이언츠의 감독직을 맡아 감독 겸 선수가 되었다. 1933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4년 연속 200안타 100타점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자이언츠를 리그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해 월드시리즈에서 조 크로닌이 이끄는 워싱턴 세네터스를 4승 1패로 격파하며 자이언츠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감독으로서의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1934년에는 처음으로 열린 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 최다 득표자를 뽑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934년에도 200안타를 넘기고, 1935년에는 타율 .341 203안타 6홈런 64타점을 기록했고, 1936년에는 시즌 절반도 출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310 71안타 2홈런 39타점이라는 성적을 남기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마지막 시즌이 3할이라니

여러가지 면에서 조지 시슬러와 비교가 된 초창기 자이언츠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원클럽맨 선수이다. 14년을 보내면서, 11번의 3할 타율과 6번의 2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선수.

통산 성적은 .341 2139안타 1078타점. 자이언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통산 3할 타자는 그렇게 유니폼을 벗었다.


3. 지도자 시절[편집]


존 맥그로에 이어, 자이언츠의 감독직을 맡아 감독 겸 선수로 뛰는 플레잉코치가 되었고, 감독으로서 두번째 해를 맞이한 1933년1933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해, 워싱턴 세네터스[4]를 상대로 승승패승승을 기록해 4승 1패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1934년에는 월드 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1936년, 1937년에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36년, 1937년에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193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2승 4패, 1937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1승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선수들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자유방임주의형 감독으로 유명했다. 옆동네 어슬레틱스는 지미 팍스는 애주가라는 이유로 쫓겨났는데


4. 은퇴 후[편집]


은퇴 후에는 1941년까지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리그 우승 2번과 월드 시리즈 우승 1번과 준우승 3번을 이끌었고, 그가 감독시절 달았던 등번호인 3번은 자이언츠의 영구결번이 되었다.[5]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감독을 그만둔 1941년 이후, 1953년에 입성했으며, 무려 14수 만에 득표율 77.38%을 기록하며, 턱걸이로 들어갔다. 일단 테리 본인이 언론과의 관계가 극도로 안 좋았고, 누적스탯도 좀 부족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14년 동안 통산 3할이 훌쩍 넘고, 2000안타를 기록한 타자가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봐도 이런 기록을 기록한 선수가 많지 않았기에 "우리를 싫어했던 빌이 알고 보니까 천재라서 그랬던 거야" 등으로 여론이 좋아졌기에 14수 만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 당장 자기 때문에 신시내티로 쫓겨난 조지 켈리의 누적 성적이 더 좋았지만, 그는 1973년이 되어서야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입성했으니, 빌 입장에서는 그래도 성공이랄까.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빌 테리
12
154
169
42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First Base (23rd)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빌 테리
54.2
41.2
47.7
1루수 HOF 입성자 평균
66.4
42.7
54.6


6. 여담[편집]


빌 테리는 언론과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는데, 테리는 자신의 사생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자신의 사생활이 언론에 거론되면 매우 화를 냈고, 야구가 아닌 개인사에 관심을 갖는것을 싫어했다. 또한 1934년 시즌 시작전, "아직도 다저스가 메이저리그에 있나?"라며 반농담으로 말했던 것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크게 다루어졌고, 그 해 자이언츠가 리그 2연패에 실패하자 언론이 "자이언츠가 리그 2연패에 실패한 이유는 빌 테리의 운영 때문이다!"라며 비난하며 빌 테리와 언론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빌 테리는 "내가 야구를 하고 있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야구가 좋아서 한다기 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었던 것.

[1] 조지 켈리의 1925년 당시 2루수 수비는 그야말로 최악이였다고 한다. 켈리는 이 해 100타점도 기록하지 못 하고, 20홈런을 치긴 했지만 OPS가 무려 8푼이나 떨어지며 점차 커리어가 하락하게 된다.[2] 이는 후술하겠지만, 내셔널 리그가 최악의 타고투저였기 때문이고, 이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야구를 하는 국가 공통의 고민인 셈.[3] 이는 맥그로가 무려 31년 동안 감독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트레이드였다.[4] 현재의 미네소타 트윈스.[5] 메이저리그에서 등번호를 쓰기 시작한것은 빌 테리가 은퇴한 이후인 1937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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