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럼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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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초대 국왕
빌럼 1세
Willem I


파일:1273px-William_I_of_the_Netherlands.jpg

출생
1772년 8월 24일
네덜란드 공화국 헤이그 하우스텐보스 궁전
사망
1843년 12월 12일 (향년 71세)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재위기간
나사우오라녀풀다 공
1803년 2월 25일 ~ 1806년 10월 27일
오라녀나사우 공
1806년 4월 9일 ~ 1806년 10월 27일
오라녀나사우 공 (복위)
1813년 11월 20일 ~ 1815년 3월 16일
네덜란드 국왕&룩셈부르크 대공
1815년 3월 16일 ~ 1840년 10월 7일
림부르크 공작
1839년 9월 5일 ~ 1840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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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오라녀나사우 가문
이름
빌럼 프레데릭
(Willem Frederik)
아버지
오라녀 공 빌럼 5세
어머니
프로이센의 빌헬미나 공주
형제자매
루이세, 프레데리크
배우자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1791년 결혼 / 1837년 사망)
헨리에트 둘트레몬트(귀천상혼) (1841년 결혼)
자녀
빌럼 2세, 프레데리크, 폴린, 마리아너
종교
개신교 (네덜란드 개혁교회)


1. 개요
2. 생애
2.1. 연합 네덜란드 주권공국의 공작
2.2. 네덜란드의 국왕
3. 자녀



1. 개요[편집]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2. 생애[편집]


네덜란드 국부 빌럼 1세 판 오라녀의 방계후손으로 침묵공의 동생인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요한 6세의 후손[1]이며 네덜란드 연합왕국 초대 국왕이다.

오라녀나사우 왕조 초대 국왕(1815~1840)으로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했다. 헤이그에서 오라녀 공 빌럼 5세와 프로이센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손녀 빌헬미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1795년 프랑스네덜란드 공화국을 침공하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다.


2.1. 연합 네덜란드 주권공국의 공작[편집]


1809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 1세에 대항하는 데 오스트리아군에 복무한 것 이외에 1812년 프로이센 궁정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1813년 프랑스의 패색이 짙자 네덜란드인들이 프랑스 제1제국의 통치에 봉기하자, 빌럼은 연합 네덜란드 주권공국의 주권공작으로 즉위했다.


2.2. 네덜란드의 국왕[편집]


빈 회의1815년 빌럼은 벨기에와 저지대 라인, 즉 헌재의 벨기에를 흡수하고 네덜란드 연합왕국 초대 국왕이 됐다. 국왕에 오르자 마자, 국가의 경제 부흥 프로그램을 세웠다. 1822년 은행을 설립해 벨기에의 산업 확대에 힘쓰고, 1824년 네덜란드 무역 회사를 이루어 나라의 북부에서 장거리 상업을 촉진하였다. 벨기에네덜란드 사이에 국회에서 동등한 대표권이 주어지고 동등한 세금을 받아들이자, 벨기에인들은 네덜란드 북부와의 연합에 반대했다. 벨기에의 자유주의와 가톨릭 당파들은 1828년 가입된 빌럼 1세 통치에 반대했고, 그에게 정치와 종교적 개혁을 청원하였다.

1830년 7월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영향을 받아 다음 달에 브뤼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반군의 군사적 성공 후 유럽 열강들은 회의를 통해 1831년 1월 벨기에를 독립국으로 인정할 것을 선언하였다. 물론 그는 벨기에가 네덜란드에게서 독립하는 것에 대해 극구 반대하여 이른바 인내정책(Volhardingspolitiek)을 펼쳤다. 사실 벨기에의 독립은 당시 네덜란드 영토의 거의 절반[2]과 인구의 60%[3], 가장 발달된 공업지대가 전부 사라지는 대참사였으므로 빌럼 1세의 입장이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4] 그러나 벨기에가 이미 떨어져나간 마당에 실지를 되찾겠다고 추진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벨기에의 적대감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남은 네덜란드 지역의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켰다. 이에 지친 네덜란드 국민들의 반발을 산 빌럼 1세는 1840년 10월에 퇴위하고 베를린으로 망명하여 1843년 12월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종교 정책의 측면에서 빌럼 1세는 친개신교를 표방했지만 어설픈 개혁안으로 인해 오히려 네덜란드 국내의 개신교를 분열시키기도 했다. 즉위 이듬해인 1816년에 '교회 치리 정관'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영국이나 독일의 성공회, 루터교회 등을 모델로 해서 수장제와 감독제를 도입하고, 공화국 시절의 개혁교회를 완전히 국교화하는 것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교단 총회 내 인사들이 모조리 낙하산으로 물갈이되는 등의 비리가 일어났으며 개편안을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갈라져 옥신각신하게 되었다. 결국 1834년 헨드리크 코크라는 목사를 주축으로 기존 국교회에서 등을 돌린 사람들이 '분리파'(Afscheiding) 혹은 '십자가 밑의 교회'라고 불리는 교단을 새로 차리는 데까지 가게 되었다.[5]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서는 그냥 어쩌다 목사들끼리 다퉈서 분열된 것처럼 그려졌으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화하기엔 복잡한 뒷사정이 있었다.

이 시기의 네덜란드 국가는 '네덜란드인의 피'(Wien Neêrlands Bloed)였으며 현 국가인 Het Wilhelmus로 바뀐 것은 빌헬미나 여왕 시기인 1932년부터이다.

3.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빌럼 2세
(Willem II)
1792년 12월 6일
1849년 3월 17일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슬하 4남 1녀[6]
2남
프레데리크 왕자
(Prins Frederik)
1797년 2월 28일
1881년 9월 8일
프로이센의 루이제
슬하 2남 2녀[7]
1녀
파울리나 공주
(Prinses Paulina)
1800년 3월 1일
1806년 12월 22일

2녀
마리아너 공주
(Prinses Marianne)
1810년 5월 9일
1883년 5월 29일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8]
슬하 1남 3녀
요하네스 반 로섬
슬하 1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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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6세는 형이 네덜란드에서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창시해 활약한 것과 달리 부친의 작위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을 이었는데 침묵공 직계가 잉글랜드 국왕 겸했던 윌리엄 3세 사후 단절되자 침묵공과 가장 가까운 항렬인 요한 6세 '나사우딜렌부르크' 계열이 네덜란드 국가원수직을 맡았다[2] 오늘날 네덜란드 면적은 벨기에보다 크지만 1830년 당시는 간척이 덜 되었으므로 양 지방의 면적이 거의 비슷했다.[3] 당시는 벨기에 인구가 네덜란드보다 많았다. 네덜란드 인구가 벨기에를 추월한 것은 무려 1세기가 지난 1930년대의 일이다.[4] 물론 과거 세계의 바다를 호령한 네덜란드 공화국의 짬밥이 어디 간 건 아니라서 나머지 네덜란드 지역도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5] 이 분리파 교단은 현대에도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란 이름으로 계속 명맥을 잇고 있다.[6] 빌럼 3세[7]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로비사 왕비[8] 1849년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