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진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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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진 킹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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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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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파이살

미국의 여성[1]

1976 - 지미 카터



빌리 진 킹
Billie Jean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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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빌리 진 모핏
Billie Jean Moffitt
출생
1943년 11월 22일 (80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테니스 선수
신장
164cm
학력
롱비치 폴리테크닉 고등학교 (졸업)
배우자
래리 킹 (1965년 ~ 1987년)
일라나 클로스 (2018년 결혼)
링크
공식 사이트
서명
파일:Billie_Jean_King_signature.png
테니스 경력
사용 손
오른손 (한 손 백핸드)
프로데뷔
1959년
은퇴
1990년
헌액
1987년 국제테니스 명예의 전당 #

1. 개요
2. 커리어
3. 선수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4.1. 성 대결
5. 커밍아웃, 그리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
6.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테니스 선수. 총 12개의 그랜드 슬램 여자 단식(오픈 시대 이후 8개)을 포함해 총 39개의 그랜드 슬램 우승[1]을 거둘 정도의 대단한 기록을 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윔블던에 강해 20개의 우승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당시 남녀 선수 간의 상금 격차에 대해 항의하며 주도적으로 여성 테니스 협회(WTA)를 설립하였으며, 상금이 평등하지 않으면 출전하지 않는다는 압박을 통해 US 오픈을 시초로 테니스 대회의 남녀 상금 규모가 동등해지는 데에 큰 역할을 했으며, 현재의 WTA 투어의 전신이 되는 '버지니아 슬림 서킷' 창설하고, WTA 발기인 중 한 명이며, 초기 WTA의 운영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오늘날 테니스라는 종목이 여성 선수에 대한 대우와 페이가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가장 좋다고 평가받는 건 빌리 진 킹의 주도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녀는 레즈비언으로, 여성 인권 운동 외에도 성소수자의 권익 신장을 위해 힘쓰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이기도 하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기의 여성들’ 중 운동선수 부분에 뽑혔으며, LIFE 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에도 이름을 올렸다.


2. 커리어[편집]


그랜드 슬램 단식 우승 12회 / 준우승 6회
  • 호주 오픈 우승 1회 (1968) / 준우승 1회
  • 프랑스 오픈 우승 1회 (1972)
  • 윔블던 우승 6회 (1966, 1967, 1968, 1972, 1973, 1975) / 준우승 3회
  • US 오픈 우승 4회 (1967, 1971, 1972, 1974) / 준우승 4회
  • 커리어 그랜드 슬램[2]

그랜드 슬램 복식 우승 16회 / 준우승 13회
  • 호주 오픈 준우승 2회
  • 프랑스 오픈 우승 1회 (1972) / 준우승 2회
  • 윔블던 우승 10회 (1961, 1962, 1965, 1967, 1968, 1970, 1971, 1972, 1973, 1979) / 준우승 2회
  • US 오픈 우승 5회 (1964, 1967, 1974, 1978, 1980) / 준우승 7회

그랜드 슬램 혼합복식 우승 11회 / 준우승 7회
  • 호주 오픈 우승 1회 (1968)
  • 프랑스 오픈 우승 2회(1967, 1970) / 준우승 1회
  • 윔블던 우승 4회(1967, 1971, 1973, 1974) / 준우승 3회
  • US 오픈 우승 4회(1967, 1971, 1973, 1976) / 준우승 3회


3. 선수 경력[편집]


1983년 40세의 나이로 은퇴하기까지 단식 통산 695승 155패, 복식 통산 87승 37패를 비롯해 12개의 단식과 16개의 복식, 11개의 혼합 복식 그랜드 슬램 달성, 6년간 세계랭킹 1위를 기록했다.

프로시절 초기에는 단식보다는 복식(특히 윔블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중반에 들어서부터 단식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72년에는 불참한 호주 오픈을 빼고 나머지 대회 모든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대단한 위세를 자랑하기도 했다.

마거릿 코트와 라이벌 관계였다고 평가되기는 하지만 그랜드 슬램 상대 전적이나 타이틀 개수, 그리고 그녀가 거둔 성적 중 일부는 코트가 결혼과 출산으로 뛰지 못하던 시절(1968년, 1972년)도 있어서 기록 자체만으로는 다소 못미친다고 할 수 있다. 1972년 코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킹이 3개의 그랜드 슬램을 따냈으나, 이듬해 코트가 복귀하자 코트는 다시 3개의 그랜드 슬램을 가져왔다. 그래도 1972년 윔블던만큼은 킹이 우승[3]하면서 그녀의 두 번째 캘린더 이어 슬램을 저지하기는 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고전적인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 빠른 발을 바탕으로 서브 이후 재빠르게 앞으로 돌진해 상대의 리턴을 발리로 툭 끊어내는 플레이는 그녀의 주된 무기였다.

4.1. 성 대결[편집]


1973년에 은퇴한 지 한참 된 55세바비 릭스[4]성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빌리 진 킹은 그때 30살)

릭스는 여자 테니스 경기가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남자인 자신이 5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자 선수들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며 킹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킹이 거절하자 대타로 마거릿 코트[5]와 맞붙어서 세트스코어 2-0(6-2, 6-1)으로 가볍게 완파하며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의 관심에 흥분한 릭스는 더욱 강렬한 말로 여자 테니스 선수들을 조롱하며 킹을 자극했고 결국 대결이 성사되었다.

킹은 여자들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9천만 명이 시청하는 해당 경기를 꼭 승리해야 하는 강한 의무감을 가졌으며, 코트의 패배를 거울삼아 릭스와의 경기를 대비하여 결국 세트 스코어 3-0(6-4, 6-3, 6-3)으로 이기면서 릭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다.[6]

이 경기의 결과로 1973년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고, 1975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미국 여성들 중의 한 명으로 꼽혔으며, '라이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미국인 100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경기는 2017년에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또한 2017년 12월 2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뤄졌다.

우습게도 이 일화를 가지고 자신을 얻어서인지 세레나 윌리엄스비너스 윌리엄스 자매가 우린 남자선수 랭킹 200위 이하는 얼마든지 이긴다고 언론 인터뷰로 큰 소리쳤던 적이 있다. 이에 독일 프로 테니스 선수였던 카스텐 브라쉬(당시 세계랭킹 203위)가 도전장을 내밀어서 경기를 치렀고 둘은 각자 1-6,2-6으로 참패했다. 이게 2000년대, 그야말로 여자 테니스 전성기 시절의 일이었다. 이런 패배에 언론들이 좋아라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면서 비웃음을 당하자 남자 랭킹 350위 이하 수준을 이길 거 같다고 부랴부랴 인터뷰했는데 정작 이래놓고 랭킹 350위 이하 남자선수들이 그럼 우리랑 겨뤄보자는 말에 일절 경기를 하지 않아 더더욱 비웃음을 받았다.[7]

결국 이러다보니, 테니스에서 전설인 존 매켄로가 저 둘은 기껏해야 남자 랭킹으로 700위 수준 테니스선수이라고 2017년 자서전 홍보 투어 경기 당시 깠다. 다만 매켄로는 남자대회 나간 것을 젊은 시절 실수라고 깠을뿐, 여선수로서 세레나는 여제라는 존칭이 아깝지 않은 전설이라고 호평했기에 세레나로서도 옛날 일을 왜 거론하냐는 기분나쁜 반응 빼곤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

한편,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선수로서 서로를 존경했으며, 1995년에 릭스가 죽기 전날 빌리 진 킹과 마지막으로 통화를 하는 등 상당한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5. 커밍아웃, 그리고 성소수자 인권 운동[편집]


빌리 진 킹은 학교에서 래리 킹이라는 남학생과 사랑에 빠져 약혼한 뒤 1965년에 결혼하였다, 남편 래리 킹은 빌리 진과 함께 '버지니아 슬림 서킷'의 창설과 WTT(World Team Tennis) 를 세우며 빌리 진 킹을 열정적으로 외조하던 남편이었다, 하지만 1968년, 2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빌리 진 킹은 여성들에 대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달았다. 이후 그녀의 비서였던 마릴린 바넷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1981년 바넷이 동거 수당을 달라며 소송을 걸어왔고, 결국 이 과정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로서 그녀는 전 종목 통틀어 여성 운동 선수로서는 최초로 동성애자임을 인정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로 커밍아웃을 한 게 아니라 본인의 전 연인인 마릴린이 걸어온 법정 소송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성 지향성을 밝히게 된 거였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무수한 의혹을 해명해가며,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뎌가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또한 킹은 1981년에 선수 생활을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불어나는 소송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선수 생활을 지속해야만 했다.

이렇게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래리 킹과는 결혼 사이를 유지하였으나, 그녀가 복식 파트너인 일라나 클로스와 새롭게 사랑에 빠지면서 1987년에 결국 이혼하였다, 하지만 이후 빌리 진 킹은 래리가 재혼으로 얻은 아들의 대모가 되어주는 등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후 사귀던 복식 파트너 일라나 클로스와 사귀다가 2018년에 결혼하였다.

빌리 진 킹은 후에 인터뷰에서 보통 사람들은 청소년기에 성 정체성을 깨닫지만 자신은 매우 늦은 나이에 깨달았다며, 일찍 깨달았다면 래리 킹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전 남편에게 사과하였다, 또한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이 호모포비아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1981년 법정공방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딸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대화를 회피하였다고 한다, 결국 킹은 부모님에게 당당히 밝히는 것을 너무 일찍 포기해버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 50이 넘어서 부모님에게 다시금 당당하게 성 정체성을 밝혔고, 그때서야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이 킹의 정체성을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좀 더 일찍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도 밝혔다.

그녀는 성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중이다, 성소수자와 관련된 날에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언제나 성소수자에 대한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게시물을 올리고 있고, 라이벌이자 친구인 마거릿 코트가 성소수자에 대해 비난을 퍼붓자[8] 같은 레즈비언 선수인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와 함께 격렬하게 비난하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미국 테니스의 상징 격인 선수 중 하나인데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 앞장서는 그녀는 오늘날 미국에서 성소수자들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6. 여담[편집]




  • 엘튼 존과 1973년부터 오랜 친구로 지내고 있으며 엘튼 존의 에이즈 재단에도 소속되어 있다. 엘튼 존이 그녀를 위한 곡 Philadelphia Freedom을 작곡했고, 1975년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르는 등 크게 히트쳤다.

  • 1983년 마이클 잭슨이 발표한 신곡이었던 Billie Jean이 빌리 진 킹에 대한 노래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곡명이 빌리 진 킹의 이름과 동일했기 때문.[9] 심지어 노래가 명곡이라 전세계에서 이 노래가 수도 없이 재생되었기 때문에 해명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빌리 진 킹이 진땀을 빼야 했다. 기자회견까지 열어서 '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 1987년 국제 테니스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6년에는 그녀의 선수로서의 업적과 성 평등에 기여한 공을 기려 US오픈이 열리는 경기장의 명칭이 'USTA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로 명명됐다.

  • 2016년에 노박 조코비치가 남성 테니스와 여성 테니스의 상금이 똑같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터뷰를 하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논란이 커지자 빌리 진 킹에게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남자선수들에게서 남자는 5라운드를 하고 여자는 3라운드만 하는 게 성평등에 어긋난다는 반발이 터졌는데 킹도 이 부분에 대해서까지 뭐라고 하진 않았다.

  • 2018년은 그녀가 호주 오픈[10] 우승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차지한 해의 5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호주 오픈을 참관했는데, 선수 생활 시절 라이벌이었던 또 다른 전설 마거릿 코트가 동성애에 대해서 강한 비난을 퍼부은 사실 때문에[11] 또 다른 성소수자 테니스 선수였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와 같이 호주 오픈이 치러지는 경기장 중의 하나인 '마거릿 코트 아레나'의 이름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사 하지만 호주오픈 위원회는 "코트가 가진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그녀가 가진 업적이 그만큼 훌륭하기에 마거릿 코트 아레나 이름을 변경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 국제 테니스 연맹에서 2021년부터 여자 테니스 국가 대항전 이름을 빌리 진 킹 컵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

[1] 여자 복식 16개, 혼합 복식 11개[2] 단 호주 오픈의 유일한 우승인 1968년은 오픈 시대 이전이기 때문에, 오픈 시대 이후로만 친다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은 아니다.[3] 코트는 크리스 에버트에게 4강에서 패배[4] 1918년생으로 1940년대 그랜드 슬램 우승 3개와 프로 슬램 우승 3개를 차지한 적 있으며 1959년에 은퇴했다. 1995년 77세로 사망.[5] 1972년에 출산으로 쉬었지만, 1973년에는 윔블던 4강과 나머지 3개 대회를 우승하면서 막강한 포스를 자랑하던 시절이다.[6] 1992년에는 지미 코너스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의 성 대결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지미 코너스는 두 가지의 핸드캡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뒀다.[7] 위에 나오듯이 바비 릭스는 당시 50대 중순이었다. 반대로 브라쉬는 30대 남짓이었다.[8] 코트는 오순절교회의 독실한 신자로, 은퇴 후에 목사로 전업까지 하였다.[9]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프로듀서였던 퀸시 존스가 곡명을 바꾸자는 의견을 표명했으나 잭슨이 이 노래는 이 제목이어야만 한다고 강행했다.[10] 당시는 호주 선수권 대회.[11] 마거릿 코트는 은퇴 후에 목사로 전업할 정도로 독실한 개신교 오순절교회 신자로,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하는 호모포비아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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