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케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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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나치 독일의 정치인, 슈츠슈타펠 대장.
2. 초기 행적[편집]
독일 제국의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난 케플러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칼스루에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1903년부터 1904년간 1년 한정으로 육군지원병이 되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단치히 공업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1910년에 예비역 소위가 되었다. 1911년부터 1922년까지 바덴에 있는 화학공장에서 주임기사로 일한 케플러는 1921년부터 1933년까지 바이에른 주 오벨바하의 화학공장 공장장으로도 일했다.
3. 나치당 입당[편집]
1927년 2월에 나치당에 입당한 케플러는 1932년부터 히틀러 전속의 경제고문 상담역으로 일하며 <경제문제 연구위원회>를 설립했다. 1933년 3월 5일에 바덴 출신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케플러는 1933년 1월 4일에 아돌프 히틀러와 프란츠 폰 파펜과의 사이를 중재했다. 7월에 케플러는 경제정책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1934년까지 일했는데 동시에 나치당 전국지도부 경제정책 과장으로도 임명되었다.
4. 친위대 입대[편집]
1933년에 친위대 대령계급으로 친위대에 입대해 친위대 전국지도자 개인참모부에서 명예지도자가 되어 친위대 전국지도자 모임을 주재했다. 1934년에 석탄, 석유 주식회사 감독대표로 일하며 후에 군수산업의 감시역도 맡은 케플러는 1935년에 친위대 소장이 되어 원료 및 공업유지관련 산업위원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1936년에 4개년 계획을 주도한 멤버이기도 했는데 1937년에 오스트리아 문제의 전권위원이기도 하여 빈 주재 독일대사관의 서기관으로도 일했다. 1938년에 외무성 특무차관이 되어 인접지역의 군수경제 일체화를 위임받은 케플러는 1942년 1월 30일에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다.
5. 전후 재판과 행적[편집]
독일의 패전기인 1945년 5월 10일에 체포된 케플러는 1947년에 뉘른베르크 빌헬름 가 재판에 회부되어 1949년 4월 14일에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1951년 2월 1일에 석방된 케플러는 1960년 6월 13일에 클레스프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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