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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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아웃룩 잡지에서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인도인’ 명단이다. 단, 모한다스 간디는 그의 큰 영향력 때문에 선정인물에서 제외되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압둘 칼람
사르다르 발라브바이 파텔
자와할랄 네루
마더 테레사
6위
7위
8위
9위

10위
J. R. D. 타타
인디라 간디
사친 텐둘카르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라타 망게쉬카르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Bhimrao Ramji Ambedkar
भीमराव रामजी आंबेडक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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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1년 4월 14일
인도 제국 센트럴 주 마우
(現 인도 마디아프라데시 닥터암베드카르나가르)
사망
1956년 12월 6일 (향년 65세)
인도 뉴델리
국적
[[인도|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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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정치인
경력
총독 집행위원회의원
1942년 7월 22일 ~ 1946년 10월 20일
인도 초대 법무부장관
1947년 8월 15일 ~ 1951년 10월 6일
인도 제헌의회의장
1947년 8월 29일 ~ 1950년 1월 24일
서명
파일:Dr._Babasaheb_Ambedkar_Signatur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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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에필스톤 고등학교 (졸업, ~1907)
뭄바이 에필스톤 칼리지 (경제학 · 정치학 / B.A., 1907~12)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 철학 · 인류학 · 역사학 / M.A., 1912~15)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Ph.D., 1916~27)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법학 / D.Sc., 1916~23)
정당
인도 공화당}}}
배우자
라마바이 암베드카르 (1906년 ~ 1935년, 사별)
사비타 암베드카르 (1948년 결혼)
자녀
5명
종교
힌두교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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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1. 개요
2. 생애
3. 개종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i42.tinypic.com/w19xlk.jpg
[1]

만약 헌법이 오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태우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다.

암베드카르, <Writing and Speech>


인도의 정치가. 인도에서 존경받는 위인이다. 일명 인도 헌법의 아버지, 불가촉천민의 해방자, 인도 불교의 중흥자로 그 이전에는 티베트계 지역이나 스리랑카계 주민들이나 믿을 정도로 세가 축소되었던 인도 불교를 부흥시킨 인물이다.

간디와 네루가 인도를 영국이라는 외적인 위협으로부터 해방시켰다면, 암베드카르는 인도를 카스트 제도, 노동 문제, 교육 문제 등 내적인 고민들로부터 해방시킨 존재이다.[2] 인도의 학교에는 독립운동의 영웅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자와할랄 네루, 찬드라 보스와 함께 이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있을 정도.

그의 생일은 2015년부터 연방 공휴일이 되었다.


2. 생애[편집]


인도 제국 센트럴 주 마우[3]에서 불가촉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의 교육열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봄베이대학교 엘핀스톤칼리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 박사 학위를, 영국의 런던정경대학교에서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 그레이법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독일 본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연구 후, 인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관리가 되었으나 상위 카스트들의 천대를 받고 사직, 변호사와 하층민들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920년에 '벙어리의 소리'를 발간하고, 1930~1932년에 영국 인도 원탁회의에 달리트[4]의 대표로 참석하는 등 불가촉천민의 힌두사원 입장 금지 철폐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구를 주장하면서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파의 민족운동을 비판, 대립하다가[5] 결국은 양보하였다.[6] 1936년 독립노동당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등록카스트연합으로 발전하였다.

1947년 인도 독립 후에는 헌법기초위원장, 법무장관을 역임하여 인도공화국 헌법 제정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최대 공헌은 헌법을 통해 카스트 제도를 부정한 것이다. 또 인도의 삼색기 중앙의 법륜도 그가 제안한 것이다.

'신도 버린 사람들'을 쓴 나렌드라 자다브의 부모도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노동자 복지 대책을 수립하는 등 노동 문제 해결에 기여했고, 민중교육협회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결혼, 상속, 입양, 재산권 등에서 여성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3. 개종[편집]


"힌두교도로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힌두교도로 죽지는 않겠다."

- 개종 연설에서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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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카스트 폐지운동에는 석가모니가 설법한 자비와 평등 정신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죽기 두 달 전인 1956년, 불기 2500년을 기념하여 10월 14일 나그푸르에서 불가촉천민 50여만 명과 함께 힌두교를 버리고 수계하여 불교개종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암베드카르의 초상화에 석가모니를 같이 그리는 경우가 많다.

암베드카르가 귀의한 종파는 상좌부 불교이다. 대승 불교가 아닌 상좌부 불교를 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먼저 상좌부가 붓다의 원래 가르침과 가장 가깝다는 것[7], 그리고 상좌부에서는 그 어떠한 화신(化身)의 현현도 없다는 입장이기에 이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8] 무엇보다, 그의 사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상좌부 불교 국가인 미얀마의 승려인 우 차드라마니였다.

다만 그가 개인적으로 상좌부 불교 신도였더라도, 그의 불교 운동으로 발생한 신흥 종파인 나바야나(Navayana)는 상좌부와는 별개이다.

또 이 개종식은 카스트 제도를 지지하고 인정하는 힌두교에 반발하는 개종이었기에, 정말로 암베드카르가 불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개종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그가 쓴 불교 교리 관련 책을 봐도 불교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는 다소 자의적인 해석이 더 많다.[9] 당장 암베드카르를 따라 개종한 신도들의 교단을 보면, 불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교리이자 신앙의 대상인 삼보(三寶; 부처, 가르침, 승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실례를 들면 부처인 불보를 말 그대로 불상(!)으로 여긴다든가... 그 외 암베드카르 본인은 미얀마 승려 우 찬드라마니를 통해 수계하였으나, 자기를 따라 개종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를 통해 수계하도록 하기도 했다. 상좌부의 율장에서 이러한 일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문제점이었다. 물론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 원효 대사처럼 교리에만 너무 집착하지 않고도 본질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는 하다.

다만 이러한 교리 이해도 논란도 “신불교” 탄생 배경과 연관 지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암베드카르를 비롯한 불가촉천민 지식인들은 인도 내 기존 종교들(힌두교, 이슬람 및 기독교 등등)이 권리 향상에 소극적인 것에 회의감을 느꼈고,[10] 이 때문에 신불교 교리와 인도 내 기존 종교 간의 차이를 최대한 벌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인도 문화권 내 대표적인 불교 지역이던 스리랑카 내 상좌부 불교가 카스트 제도를 수용한 상황이라, 애초에 싱할라족 중심 국가로 독립한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 교리를 그대로 도입하기 껄끄러웠던 점도 있다. 그리고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이며 이를 받아들인 입장에서 해석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그의 개종은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성질을 건드렸는지, 지금도 인도 내 힌두 극단주의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는 이러한 대형 집단 개종식이 없어지고, 불가촉천민 중 개종하는 사람들도 적어졌다고 한다. 거기다, 암베드카르는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뒷목을 잡게 할 도발적 말과 행동을 여러번 했다, 달리트 정치를 반대하던 간디를 비난하며 "이런 식으로 불가촉천민에 대한 정치적 보호와 자립없이 방치할거면, 나는 인도 공화국의 독립보다는 영국의 식민지를 선택하겠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고, 독립후 네루의 지원으로 제헌의회 초안 총책임자가 되고 나서도, 남인도•벵골•무슬림 등을 무시하고 힌디어를 인도의 국어로 써야한다는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정치적 압력에 맞서다가, "가장 인도의 언어로 정통성이 높은 산스크리트어를 국어로 하자." 같은 말까지 써가면서 국어 선정을 거부해, 네루도 국어 선정을 포기하고 힌디어, 영어를 일단 공용어로 하고 주별로 각자 공용어[11]를 추가로 쓸 수 있게끔 임시조치한다는 식으로 넘기는 결정을 이끌어낸다. 실질적으로는 두 대표적 독립투사이자 인도 인민의 구심점인 이들이 힌두 극단주의자들과 힌디어를 극렬 거부하는 타밀족, 이슬람 등 남인도와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어느정도는 짜고친 결과였지만, 이로 인해 힌두 극단주의자들의 목표가 좌절되고 말았다.


4. 달리트 정치[편집]


그는 1957년 인도 공화당(Republican Party of India)을 창당하였다. 인도 공화당은 불가촉천민정체성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암베드카르는 뿌리 깊은 민주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졌지만 공산주의에 반대했는데,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다수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일하고 있지만 달리트 노동자나 일자리를 가지지 못한 달리트 계층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다수 노동자들을 대변하느라 다수 노동자들에게도 소외받고 있는 고전적 의미의 '룸펜' 계층을 멀리하거나 멸시한 경우가 많았는데 인도의 전근대적 신분차별 제도 때문에 불가촉천민 상당수가 노동계층보다도 못한 룸펜계층으로 밀려나 있는 현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현대적 정치 수사로 따지면, 그는 노동계급 환원주의에 부정적이였고 '노동운동'보다는 불가촉천민 '정체성 정치'를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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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힌디어 사용 지역 출신이지만 사진 속의 경구는 케랄라, 푸두체리의 공용어인 말라얄람어로 적혀 있다.[2] 다만 힌두 극단주의자들에겐 이런 점 때문에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된다.[3] 2003년 암베드카르의 업적을 기려 닥터암베드카르나가르(Dr. Ambedkar Nagar)로 명칭이 바뀌었다.[4] 억압받는 자라는 뜻으로 암베드카르가 제안한 불가촉천민의 명칭. 간디는 하리잔(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지만 암베드카르는 비참한 불가촉천민들의 실상을 은연 중에 은폐하려는 어휘에 불과하다며 이 단어의 사용을 반대하고 달리트라는 명칭을 고수했다. 실제로 그 본래 뜻이 무색하게 현대 인도 사회에서 하리잔은 불가촉천민을 비하하는 명칭으로도 악용된다.[5] 이 때 암베드카르는 "간디 선생님, 저에게 조국은 없습니다!"라는 폭탄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간디가 기겁했다고.[6] 간디는 이때만 해도 독실한 힌두교도였기에 불가촉천민에 대해 차별적인 말들도 꽤 쏟아냈다고 한다. 간디는 암베드카르의 카스트를 알기 전까지는 그를 불가촉천민에 관심이 많은 브라만 계급으로 생각했었다고 한다.[7] 대승불교에서는 힌두교의 영향으로 여러 가지 의례가 포함된다. 찾기 쉬운 예를 들자면 천수경을 들 수 있는데, 경전에 포함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범어 해석을 하면 힌두교 신 시바를 찬미하는 내용이다.[8] 암베드카르의 '불교입문맹세 22항' 중 제4항에서 "나는 그 어떠한 화신의 현현을 믿지 않는다."라고 기록했다. 힌두교에서 화신은 신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하며,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인간들 앞에 나타나 이끈다고 한다. 이는 힌두교에서 "신께서는 비천한 인간들 사이에서 현현하지 않으시며, 우리와 같은 브라만 사이에서 나타나시고 그것을 깨닫는 것도 브라만이다."와 같이 해석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화신은 중생들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부처의 여러 모습'으로 해석하였고 이에 따라 부처는 남자로도, 여자로도, 심지어는 짐승이나 벌레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힌두와의 접점인 화신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더더욱 상좌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9] 그의 저서 “인도로 간 붓다”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10] 그렇다고 이 시기에 시크교로 개종을 하는건 한참 파키스탄과 영토분쟁중인 카슈미르는 물론 이 지역 기반인 칼리스탄 독립운동을 자극해 인도를 분열시킨다라는 정치적 공격, 심할 경우 암살 위협까지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11] 이로 인해 타밀어, 텔루구어, 칸나다어, 말라얄람어는 물론 펀자브어, 우르두어, 프랑스어까지 인도 몇몇 주의 공용어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이 광동어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말을 공산당의 힘으로 강제적 표준중국어로 통일한 것과는 대조적.[12] Singh, Mahendra Prasad, ed. (2011). Indian Political Thought: Themes and Thinkers. Pearson Education India. p.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