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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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가문의 여섯 닢 엽전 가몬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真田信之(真田信幸)
1566년 ~ 1658년 11월 12일

일본 센고쿠 시대 말기에서 에도 시대 초기에 활동한 무장으로 통칭 겐자부로(源三郎).[1] 원래 이름은 信幸인데 세키가하라 이후 돌림자인 幸을 之로 바꿨다.


2. 생애[편집]


사나다 마사유키(무토우 키헤에)의 아들로 아버지가 다케다의 가신이라 당시의 관습에 따라 주군에게 인질로 보내지고, 1579년에 다케다 카츠요리의 아들인 다케다 노부카츠의 성인식과 같은 날에 성인식을 하며 역시 당시의 관습대로 주군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물려받아 노부카츠에게 한 글자를 받아 노부유키라고 칭하게 되었다. 1582년에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사나다 집안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마사유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자, 슨푸(시즈오카)로 이에야스의 인질로 보내졌는데, 1585년 마사유키가 누마타 령을 둘러싸고 이에야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가신이 되자 마사유키와 함께 도쿠가와 군과 싸우게 되자 제1차 우에다 합전에 참가하였다.

이후 마사유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히데요시의 권유로 1589년에 이에야스와 다시 화목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가세한 다이묘가 되었으며, 이에야스의 가신인 혼다 타다카츠의 딸이자 이에야스의 양녀[2]인 코마츠(이나히메)를 부인으로 맞았다.

1590년에 후호죠씨를 정벌하는 오다와라 정벌이후, 누마타 지역을 다스리는 성의 성주가 되었으며, 히데요시가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을 준비할 때 히젠 국 나고야로 향했다.

1594년에 종오위하 이즈노카미에 임명되었으며,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날 때 아버지인 마사유키와 동생인 사나다 노부시게와 달리 이에야스가 있는 동군에 참가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 휘하에서 제2차 우에다 합전에 참가했다.[3]

전후 아버지 마사유키가 다스리던 우에다 지역(3만 8천석)은 몰수당했으나, 그 영지는 노부유키가 받아서 다스리게 되었고, 기존에 다스리고 있던 누마다 지역(2만 7천석)외에 세키가하라의 공로로 따로 3만 석의 영지를 받고, 9만 5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마사유키에 대한 조명을 탄원하거나 아버지와 결별을 했다는 뜻으로 이름을 信幸(노부유키)에서 信之(노부유키)로 바꿨다.[4] 하지만 이후에도 간간히 信幸 라고 쓰기도 한 걸 보면 본인 나름대로 막부와 집안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걸로 보인다.

1614년에 오사카 전투에는 병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자 아들로 장남인 사나다 노부요시, 차남인 사나다 노부마사를 대리로 보냈으며, 이후 참전 공적을 인정받아 1622년에 시나노 마츠시로 번을 추가로 받아 13만 석의 영지를 얻게 되었다. 1656년에 장남인 노부요시, 노부요시의 아들인 사나다 쿠마노스케가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에 차남인 노부마사에게 가독을 양보하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1658년 2월에 노부마사가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가독상속을 두고 노부요시의 차남인 사나다 노부토시가 노부마사의 6남인 사나다 유키미치의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자 막부에 호소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소동으로 노부토시의 누마타 령은 번으로 독립하여 마츠시로 번은 10만 석으로 줄어들었으며, 유키미치가 계승했지만 2살이었기 때문에 복귀하여 번의 정치를 맡다가 10월 17일에 사망했다.

사나다 가문을 대표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협력하여 끝까지 이에야스와 대결하다 전사한 동생 사나다 노부시게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와 내통하던 문서를 담은 상자를 도쿠가와 쇼군가에게 받은 단도라고 속이고 가문 대대로 지키도록 한 일화가 전해지는 걸로 봐서는[5]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원한 같은 감정도 어느 정도 있었는 듯.

다이묘이기는 하지만 관직은 이즈노카미. 사에몬노스케인 동생(일설에는 히데요시에게 귀여움을 받아서 받았다고도 한다)보다 아래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동생에 대한 글은 칭찬 일색. 하지만 오사카의 전투에서 동생인 노부시게[6]가 참가했다는 얘기를 듣자 병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때 탄원해서 살려줬거늘 아직도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너의 자식들을 내가 책임질테니 당장 할복하라!"는 편지를 자식들을 통해 전달했던 만큼 크게 분노하기도 했다.

참고로 93살까지 살았다.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장수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장수해서 아들들까지 일찍 보내서 후계자 쟁탈전까지 일어나는 등 말년이 좋지 못했다. 막말에는 끝내 가문이 끊어져서 마츠다이라, 다테 등 이곳저곳에서 양자를 들이기도. 동생 노부시게가 비교적 일찍 죽었어도 아들 다이하치를 통해 피를 남긴 것과는 대조적. 그러나 당시 일본인들은 직계혈통에 대한 집착[7]이 별로 없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말년에는 장수하며 도쿠가와를 섬긴 충신으로 인정받았고 후손 중에서는 로쥬(老中)[8]까지 배출했다. 원래 사나다가 지방호족에 불과한 격이 낮은 가문[9]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출세. 또 이런저런 사정때문에 석고가 줄었다고는해도 애초에 에도 막부는 다이묘들의 힘을 깎는 데 주력[10]했고 이에 따라 에도 시대 동안 10만석 이상[11]을 유지한 가문은 소수이다. 애초에 동생인 노부시게의 핏줄이 붙잡혀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노부시게의 차남을 보호한 카타쿠라 가와 그 배후인 다테 가, 그리고 노부유키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건 조카 문제 때문인지 다테 마사무네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며 마사무네가 보낸 편지가 현재까지도 전해진다. 대충 내용은 "공(노부유키)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근시일 병문안 가 보겠다"하는 내용.

노부유키가 사망하자 가신뿐만 아니라 농민들까지 크게 탄식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가하는 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농민과 마을사람들도 저마다 명복을 비는 불사를 지냈다고 하며, 가신과 백성들에게도 흠모되는 명군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족 중의 가장 수수한 이미지라 인기가 떨어지지만, 메이지 시대까지 계속 되는[12] 마츠시로 번 사나다 가문의 기초를 만들어 사나다 가문을 지켜낸 최대 공로자다.


3. 여담[편집]


  • 동생에게 밀려 인기가 떨어지는 그룰 위해 5ch에 노부유키와 함께 고난을 넘는 스레(真田信之と共に苦難を乗り越えていくスレ)가 개설되기도 하였다. 또한 동생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는 90살 넘게 장수했다는 점 때문에 유키무라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해 단명(93살) 같은 소리도 듣곤 한다.

  • 일본 전국시대의 재녀 오노노 오츠우[13]와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등 친밀한 관계였다고 한다. 이 연으로 오노노 오츠우의 딸이 노부유키의 차남 노부마사의 측실이 되어 아들까지 낳았다고 한다.

  • 입었던 기모노나 갑옷 등으로 추측한 키는 6척 1촌(약 185cm)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로서는 매우 장신이었다.


4. 창작물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사나다 노부유키/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동생 사나다 노부시게의 통칭이 겐지로인데 형이 겐자부로인 것에 대해, 노부시게의 생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노부시게가 형이지만 모친이 첩이라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노부유키가 형이 맞다는 반론은, 사나다 가가 대대로 삼남이 대를 이어서 대를 이을 노부유키가 겐자부로이고 둘째인 노부시게가 겐지로라고 주장한다.[2] 하지만 이것은 아버지 마사유키가 "나도 이에야스도 다이묘인데 급수가 낮은 타다카츠에게 사위로 보내라니 말도 안된다!"라고 주장해서 형식적으로 한 것이다.[3] 별책이나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논문에서는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노부시게가 사나다 가문 보전을 위해 형 노부유키가 동군으로 가는 걸 허락했거나 설득했다고 한다. 마치 순욱순심처럼.[4] 발음이 같아서 바꾼게 사실상 없다는 인식을 받는데 이에 관해서 일본 전국시대 관련 역사가들은 노부유키의 이런 개명에 대해서 대세로 인해 일단 도쿠가와의 뜻은 따라 이름은 바꾸지만 발음을 똑같은 한자를 씀으로써 아버지가 준 이름음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로 사나다 가문이 할 수 있던 마지막 저항의지라는 평가를 했다.[5] 저걸 걸고 넘어지면 단번에 개역당해도 할 말이 없는 증거다. 다행히도 상자의 개봉 자체는 대정봉환 이후에 이루어졌다는 듯.[6] 유키무라의 본명[7] 당시에는 병이나 사고나 전쟁으로 직계혈통이 끊기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럴 경우 비교적 혈통이 가까운 친척에서 양자를 들여오거나 사위에게 가문을 잇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8] 막부내에서 두번째 서열이다.[9] 에도 시대에 출세하기 위해서는 가문의 격이 높을 필요가 있었다. 근대처럼 고시를 봐서 합격하면 출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10]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에도 막부의 만성적인 적자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만만한 수법이 적당한 가문하나 잡아다가 전재산을 몰수하는 거고, 두 번째로 전국시대가 지방세력이 힘을 길러 중앙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다이묘들을 압박했다. 참근교대(参勤交代)제는 그 대표적인 수법.[11] 대부분의 사무라이는 석고가 5천석도 안되었고 에도 막부의 직참 신하나 다이묘들의 심복 중의 심복이나 5천석이었다. 에도시대에는 1만석 이상이면 다이묘였고 10만석이면 상당한 권세를 누린 것이다.[12] 메이지 유신 후에 그의 가문은 자작(이후에 백작이 됨.) 가문이 되었다.[13] 조루리의 기원자인 13단 아사코의 저자와 혼동돼서 그녀가 조루리의 기원자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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