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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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談

( ? ~ 기원전 110년)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로 그는 천문과 역법을 주관하고 황실의 전적을 관장했다. 한무제한나라 황실의 봉선 의식에 참여하지 못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아들에게 자신이 쓰던 사적을 완성해 달라고 유언했다.

저 봉선의식이란 중국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처럼 위대한 황제면 봉선을 지낼 정도로 위대하도다'란 일종의 과시이다. 따라서 시대를 잘 만난 뛰어난 명군이나 할 수 있었던 의식이었으며,[1][2] 참가 자격 역시 그에 걸맞는 지위와 황제의 신임을 얻어야만 겨우 가능했다. 사마담으로선 평생 1번 얻기도 힘든 기회를 놓쳤으니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던 것.[3]

한서 사마천 열전에 의하면 제자백가 사상 중 음양가, 유가, 법가, 묵가, 명가, 도가를 비교하면서 다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도가는 이러한 사상들의 장점만을 모두 취할 수 있다며 도가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지 사마천은 사기에서 도가식 무위지치를 지향했던 한문제한경제 시기를 문경지치라 하여 매우 높게 평가했다.

《사기》에서는 피휘를 해서 담(談)자를 동(同)자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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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랬던 만큼 당태종도 "나 정도면 해도 되지 않나?" 라고 말했지만 위징은 "아직도 천하에 굶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라며 반대해서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2] 물론 후세 평가는 당태종이 한무제보다 더 나을듯...[3] 사실 사마담이 아니더라도 한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여한 이는 곽거병의 아들인 곽선 하나뿐이다. 그 곽거병이 이룬 업적을 감안해 보면 곽거병에 비해 이룬게 별로 없고 그렇다고 조상 중에 한나라 시대에 눈에 띄는 인물도 없는 사마담이 봉선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사마담에게는 일생의 한이 될 일이지만 한무제로서는 당연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