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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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錯 [1][2]
생몰연대 미상

1. 개요
2. 생애
3. 후손
4. 대중 매체에서
4.1.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서의 묘사



1. 개요[편집]


전국시대 중후반기의 진나라명장. 기록상에는 혜문왕(惠文王) 때부터 언급된다. 그는 춘추시대부터 수백년 동안 진나라를 괴롭혀왔던 파, 촉(巴, 蜀)[3]을 기어코 멸망시킨 장수였다.


2. 생애[편집]


기원전 316년에 사마착은 연횡책으로 유명한 장의(張儀)와 설전을 벌인 끝에 결국 10만명의 대군을 얻어, 장의와 함께 진나라 군대를 이끌고, 파나라와 촉나라를 공격하여 파, 촉을 멸망시켰다. 촉을 멸망시킨 이후 사천 지방에 봉지를 얻었다.

사마착이 파, 촉을 멸망시키자 높은 생산량을 가지게 된 진나라는 더욱 부강하게 되었고, 제나라(齊)의 민왕연나라(燕)의 소왕에게 털려 몰락한 상황에서 초나라(楚)와 비견되는 2강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중(漢中)과 파, 촉을 동시에 먹은 진나라는 양방향으로 초나라를 후려칠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촉나라 병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쳐들어가 수도 영을 함락시키고 천도하게 만들었다. 이후 초나라는 영토가 계속 쪼그라들게 되었다.

기원전 301년, 구 촉나라였던 사천 지방에서 촉후인 영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했고, 기원전 292년에는 백기와 함께 위나라(魏)의 원을 빼앗았다가 돌려주었으며, 다음해에는 위나라의 지, 등 땅을 빼앗았고, 기원전 289년에는 위나라의 원, 하옹을 빼앗았으며, 기원전 286년에 위나라의 하내 지방을 공격하면서 위나라로부터 안읍을 할양받았다.

기원전 280년에는 농서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사천 지방을 지나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초나라의 검중을 점령했다.

활동 영역으로 보면 남쪽 방면의 군사 행동을 맡은 것으로 보아 정남장군 비슷한 직책이었던 듯 하다.


3. 후손[편집]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무안군(武安君) 백기를 상관으로 섬겼으며, 장평대전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조나라의 수송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조나라 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는 비극에 제대로 일조했다. 백기의 최측근급으로 가깝거나 혹은 그 일파의 인물로 분류되었는지 이후 백기가 숙청당할 때 함께 휘말려 죽었다. 사마근이 죽은 후 그의 후손들은 군사 방면의 직책을 맡지 않았는데 그 중 한 명이 그 유명한 사마천이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위나라사마의(司馬懿)와 같은 집안 사람이다. 다만 사마의초한쟁패 시대 항우에게 책봉된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의 후손으로 사마착의 직계 후손은 아니다.


4. 대중 매체에서[편집]



4.1.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서의 묘사[편집]




파일:킹덤-사마착.jpg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 따르면 진 소양왕 시절 육대장군 중 하나였다고 설정되어있다.

나름 실제 역사에서도 활약한 인물임에도 회상 등을 통해 용모가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작중 언급이 아예 없다. 다른 육장들이 동료와 제자, 싸웠던 적들의 입을 통해 어떤 스타일의 장군인지 알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 향후 스토리의 전개과정에서 언급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설정상으로 육대장군에 묶기에는 너무 앞선 시대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사마착의 제일 먼저 확인되는 전과가 무려 기원전 316년이고 마지막이 280년으로, 킹덤 본편보다 30년은 훨씬 앞선 기록이다. 육대장군의 필두로 꼽히는 백기의 첫 등장이 기원전 293년 이후인데 사마착은 마지막 기록이 280년이고, 손자인 사마근이 백기와 260년 장평대전에 참가한 것을 생각하면 여기 묶이기엔 나이대가 맞지 않다. 심지어 육대장군이 진 소양왕을 따랐다고 나오는데 사마착은 애초에 소양왕이 즉위한 기원전 306년보다도 최소 10년은 더 앞선 인물이다. 소양왕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힘을 쓴 것이 기원전 265년 정도로 추정되는 것을 감안하면 애초에 소양왕과 별로 깊은 관계도 없는 인물인 셈.

물론 백기와 함께 출전한 기록이 있는 등 아예 육대장군과 관계 없는 인물은 아니지만, 백기조차도 소양왕때 위염의 천거로 인해 등용된 인물인 것을 생각하면 소양왕이 즉위하기도 전부터 활동한 사마착은 육대장군보다도 앞선 세대의 인물이라 보는게 더 맞다. 육대장군의 마지막이었던 왕기가 244년에 사망했는데 316년에 활동을 시작한 사마착과는 70년이 넘게 차이가 난다. 이런 연유로 사실 사마근과 헷갈린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는 편. 혹은 왕기와 왕흘을 혼동했듯이 사마착의 활동과 사마근이라는 인물을 합쳐서 혼동했을 수도 있다.

[1] 錯이라는 한자의 뜻과 음이 '어긋날 착' 말고도 '둘 조'라고도 읽히기에 《사기》 <본기> 번역본을 보면 좌경 조니 사마착이니 뭐니 혼동되게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모두 동일인물이다.[2] 사기의 주석인 사기색은에 의하면 錯의 음은 '七各反,又七故反,二音。'으로 착, 초 두가지 음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착이나 조 어느 식으로 읽어도 틀린 것은 아니다.[3]삼국지》의 촉한할 때 그 촉 지역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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