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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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비판론
3. 반론
3.1. 사문난적 매도와 사실관계 오류
3.2. 학파간 갈등의 실체
3.3. 보편성에 따른 옹호론
4. 여담



1. 개요[편집]


사문난적()은 주자의 가르침인 성리학의 해석을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을 비방할 때 사용되던 멸칭이다.

한자어 '사문(斯文)'은 풀이하면 '(바로) 이 학문'이라는 뜻인데, 이는 유교를 의미한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여러 나라에서 학문이라는 단어는 별도의 수식 없이 그 자체로 유학을 지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 용례는 성리학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에 나타난다. 흔히 조선 후기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노론 치하에서 반대 세력의 인물들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문난적 논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고, 실제로는 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지만 부작용으로 조선의 학풍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2. 비판론[편집]


숙종조에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윤휴는 병자호란 전후로 북벌론으로 의기투합하여 송시열의 오랜 친구가 되었으나, <중용주해(中庸註解)>에서 주자의 해석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송시열과 평소 여러 번 논쟁을 벌였다. 결국 그로 인해 단단히 삐친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었다.

또한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을 통해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다 역시 사문난적에 몰렸고,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은 어찌 유학만이 진리라 할 수 있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사후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고, 소론의 대부였던 윤증 등이 주자학을 비판하다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에 몰렸다.

용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용어의 용도는 조선시대○○○ 개새끼 해봐랑 진배없고, 당대에도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말이라고 평가한다.


3. 반론[편집]


일본의 주자학 연구자인 미우라 구니오(三浦國雄, 1941년~)에서 시작된 이 논지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3.1. 사문난적 매도와 사실관계 오류[편집]


대표적으로 사문난적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윤휴는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몰았기 때문에 사약을 받아 죽은 것으로 많이 알려져있지만,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지목된 것은 효종 때인 1653(효종 4년)년이고 정작 사약을 받아 죽은 때는 경신환국, 즉 1680년이다. 이 때의 죽음은 사문난적과 관계도 없다.

오히려 앞서 사문난적으로 몰린 후 관직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송시열이 반대했는데, 남인은 물론 같은 서인까지도 능력있는 윤휴를 혼자 싫어한다고 해서 반대하느냐고 항의하여 송시열이 한발짝 물러섰다. 끊어진 관계는 복원되진 않았지만, 최소한 송시열은 이 시점에서 윤휴의 비판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효종이 죽기 1년 전인 1659년(효종 10년)과 현종이 즉위한 1660년에는 아예 송시열이 그를 다시 천거했다. 이때 이유태는 윤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추천하는 일은 중단할 것을 권고했고, 이후원은 그를 등용했다가 후에 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하는 등 일부 서인의 반대 여론이 일었다. 심지어 이후원은 "공이 옛날에 윤휴가 주자를 공척한 것을 두고 배척하며 이단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세자로 하여금 이단의 학문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오?"[1]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송시열은 "주자도 육상산을 극력 공박하여 이단이라고 하였지만 상산이 남강(南康)에 이르자 주자는 여러 문하생들로 하여금 상산에게서 강학을 듣게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진실로 (옛날로부터) 이어받은 것입니다."[2]라는 말로 대답했다. 즉, 같은 당파의 여러 사람들이 말렸는데도 주자를 끌어오면서까지 강행했다는 것.[3]

이런 것을 보면 이 시기까지만 해도 송시열은 (그 속마음이야 어떻든) 윤휴를 인간적으로 비난하거나 적으로 돌린 것 같진 않다. 주자의 행적까지 끌고온 것을 보면 학문적인 이견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이 직후의 일인 예송논쟁 초기까지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에 이것이 정치적 이슈로 불어나고 나서야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고 멸시하기 시작했다.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고 송시열의 미움을 샀던 윤선거의 묘비명으로 불거진 송시열과 윤증과의 갈등도 현종 년간(1669년 이후)이다. 이것이 송시열과 윤휴, 그리고 윤증의 관계의 실체(선후 관계)다.

3.2. 학파간 갈등의 실체[편집]


우선, 조선 후기의 학자들 중에는 성리학 그 자체를 부정하고 본격적으로 비판한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다. 소위 실학자라 불리는 사람들도 성리학적 기반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 예송 논쟁 이전에는 그렇게 학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았다. 예컨데 남인의 거두 허목의 학설은 보다 온건했기에 김수홍이나 원두표, 유계 같은 서인들 일부도 지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남인들이 서인의 소현세자 일가 복권 주장을 효종을 부정하고 소현세자 정통을 부정했다고 정치공세를 한 뒤, 연이어 윤선도송시열의 예론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내부단속을 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허목의 주장을 대놓고 지지하기까지 했다.

덧붙여, 윤휴와 허목의 학설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퇴보적으로 볼 수 있는 학설이기도 하다. 윤휴의 중용 주해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유학적 성인이 될 인물은 오직 군주에 국한되며 존비귀천의 사회구조를 실현하는 것이 예법이므로, 예법의 실천이 학문의 핵심이 된다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유학적 성인의 소양이 모두에게 있다고 판단한 송시열에게 이 설은 말도 안되는 학설이었고 급기야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비판하게 된 것이다.

흔히 사문난적은 보수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인물들이 신진적인 세력을 견제할 때 사용하던 스킬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성리학의 주축인 퇴계율곡의 학설만 봐도 주자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퇴계의 주리론은 주자의 기본 전제와 어긋나는 학설이고, 율곡은 "주자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틀린 거다"라고 말한다. 조선 성리학에 대한 막연한 편견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 문집을 읽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만연한 편견들과 달리 송시열이 주자의 의심가는 해석을 정리한 <주자대전차의>를 지었고 <주자어류소분>을 지어 주자를 독자적으로 재해석한 적도 있다.[4]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그가 갑인환국 이후로 귀양을 가서 윤휴가 전면에 나섰다가 숙종에게 찍혀 사사당하는 바로 그 시기였다. 결론적으로 송시열은 귀양 중이라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죽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 송시열도 주자의 학문적 한계를 인정한 적이 있었다.[5]

한 마디로,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했다'라는 타이틀 때문에 실제 그들의 해석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윤휴, 허목, 박세당 등은 졸지에 개혁자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송시열, 송준길 등은 졸지에 '수꼴'의 수괴로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덧붙여 흔히 이 시대에 대해 설명할 때 사문난적 문제를 들면서 성리학은 말 그대로 "학"(學)이 아닌 "종교(敎)"로서 변질된다고 설명하는 예도 있는데 역시 오류. 敎라는 글자에 종교성이 두드러지는 건 20세기 이후 용례다. 제국주의시대에 서양의 종교개념이 동양에 소개되며 섞여들여가게 된것. 무슨 반대자를 이단으로 몰아 심문한 끝에 처형한다든지 이랬던 것이 아니다.

3.3. 보편성에 따른 옹호론[편집]


위에서 열거된 정도의 사례는 현대의 학계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문제다. 역시 보편적 사례를 특수 사례로 왜곡하는 논리인 것.

후기의 조선은 새로운 사조에 대하여 폐쇄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너무 과장하는 것도 올바른 인식이 아니다. 중국서 들어온 양명학, 고증학을 금지했다거나, 금지한 것조차 아니고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 16세기에 전습록과 같은 책이 들어왔다가 조선성리학이 체계를 갖추면서 읽게되지 않은 것이지 심경이나 심학 문제는 여전히 다루어졌다. 다만 왕양명이 쓴 글은 내용이 주자학와 일치하지 않는 게 옥의 티라고 여기긴 했지만 문장이 뛰어나다고 평하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되기까지 했던 것. 그러니까 크게 융성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도입과 연구정도는 이루어졌고, 그래서 강화학파도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조선보다 상대적으로 양명학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하는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도 양명학은 가혹한 탄압을 받은 것 까지는 아니라도 막부 차원에서 몇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고, 요시다 쇼인이나 오시오 헤이하치로와 같이 양명학 연구로 유명한 유학자들이 반정권운동을 계획하다 사형당하거나 민중봉기(잇키)를 주도했다 실패하여 자살한 사례가 있다. 즉 양명학은 진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때문에 국가의 공식 이념의 역할까지 해야 하는 관학으로써는 환영받기 어려웠고, 그래서 본고장인 중국에서도 청나라 이후에는 결국 쇠퇴하고 만 것이다. 딱히 조선만 붙잡고 "폐쇄적인 조선은 양명학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고 시비털 문제는 아니다. 당시 조선의 사회와 학계, 정치권력이 좀 까칠하게 군 편이었다고 하는 정도면 모를까.

그리고 고증학세도정치 시기에 잘만 들어왔다. 이는 고증학 자체가 따지고 보면 성리학이나 양명학과는 다루는 분야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다. 성리학이나 양명학에서는 현대의 학문 영역으로 치면 형이상학이나 정치철학에 해당하는 영역이 핵심 중에서도 핵심으로 다루어지지만, 고증학은 저러한 영역은 철저히 피하고 서지학이나 고고학, 문헌학 등의 분야를 중시한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문자의 옥 항목에 설명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해 반청복명 사상을 억누르기 위한 강력한 검열과 탄압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걸려들 건더기'가 있는 분야는 피하기 위해 옛 사람들의 문헌을 글귀 하나하나까지 뜯어보며 파고드는데 집중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썼다가는 특히 그 '생각'이 정치나 사회, 역사와 같은 민감한 주제에 대한 것이면 말할 것도 없고, 형이상학과 같은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그게 어디에서 꼬투리가 잡혀 자신과 가족, 친척, 주변인들의 모가지가 모조리 날아갈 지 모르지만 옛 사람들, 특히 선현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글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것이니까. 조선에 고증학이 들어온 시기가 세도 정치 시기였다는 것 역시, 이와 같이 고증학이 현실 도피적인 성격을 가진 학문이었다는 점과 별개로 생각하기 힘든 문제이다[6].

"한 글자라도 의심을 품으면 요망하다 하고, 글귀를 서로 비교하면서 고찰하기라도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니, 정주(程子·朱子)의 글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옛 경전은 어떠하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학문은 노둔함을 면하기 어렵다"


위와 같은 성호 이익의 비판은 현대에도 보수적 학자의 행태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폐단을 조선 왕조 특유의 폐단으로 왜곡하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전형적인 논리다. 항목 참조. 게다가 조선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보다 과장된 말임을 알 수 있다.[7] 당장 송시열주자가 틀릴 수 있다고 했고, 옛 것에만 집착했다면 성리학 내부의 다양한 견해 차이가 어떻게 발생했겠는가?

이런 수준의 보수적 생태는 일반적인 학문이 아니라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종교들에서 강하게 드러나는데[8] 이는 일반 사회의 보수성과는 차원이 다르기에 단순히 '어디서나 보이는 것'으로 넘어갈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철학의 보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비판은 전근대 시기와 현대를 동등 비교한다는 한계가 있다. 당장 유럽그리스, 로마학문에만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4. 여담[편집]


  • 여담으로 김구는 자신의 저서인 백범일지에서 공산주의카를 마르크스만을 인정하며 그것에 대한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조선의 사문난적보다 더한 탄압이라 비판했다. 공산주의가 세계에 퍼진다면 전 인류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만 남을 것이고 그것만큼 큰 인류의 불행은 없을 것이라고 공산주의를 사문난적과 엮어서 평가했다.# 이는 사실 김구가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에 스탈린이 소련의 최고지도자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스탈린은 자신의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교조화된 스탈린주의를 고수했는데 이를 공산주의 전체가 그렇다고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1] 公嘗斥尹之攻斥朱子而曰, 是異端矣. 今乃欲使世子學異端之學耶? - <송자대전습유> 권8, 오재이공유사[2] 朱子力攻陸象山爲異端, 而象山至南康, 朱子乃使諸生聽講於象山. 余今日事, 實有所受也. - <송자대전습유> 권8, 오재이공유사[3] 물론 여기에 대고 이후원은 "당신도 원래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면서 참 포장 쩌시내요."라고 깠다.[4] 이러한 일련의 학술적 활동들은 송시열 개인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니고 그 학맥 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원진의 <주자언론동이고> 또한 이러한 계통의 산물.[5] 특히 심성론에 있어서 미발(未發)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러한 태도를 보인바 있다.(안은수, 「尤菴 心性論의 특징과 의의 : 未發論을 중심으로」,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 혜안, 2009, 190~191쪽.) 관련 기록은 <송자대전> 권113에 있으며, 원문은 "前稟諸說, 多蒙印可, 自幸謏聞之不甚悖理矣, 惟未發之旨, 迄未相契, 豈前所稟者辭不達意, 以致如此耶? 朱先生於此, 亦不免前後異同."로 되어있다.[6] 루쉰의 일화중에도 신해혁명 붕괴 이후의 혼란기에 고서 수집이나 고증, 불경 및 비석 탁본따위의 연구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이건 루쉰이 정말 해당 분야에 큰 흥미와 취미를 가져서 한 일이 아니라, 신해혁명이 미완성된 상태로 붕괴하고 위안스카이가 황제 즉위를 시도하고, 장쉰이 청 황실의 복벽을 시도할 정도로 복고주의가 격렬하게 반격해오는 상황에서 루쉰과 같은 급진적 성향의 신지식인이 정말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를 연구하고 그 내용을 발표했다가는 신변이 위험해질 것이 너무 뻔하니 누가 뭐래도 꼬투리잡힐 것 없는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혼란기에 예술 따위로 현실을 도피하는 것'과 비슷하다.[7] 원래 무언가를 비판하는 사람은 실제보다 문제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8] 대표적으로 근본주의적 성향이 다수파인 한국 개신교, 그리고 가톨릭조계종의 근본주의적 부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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