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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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개요
2. 배경
2.1.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2.2. 늘어나는 산업재해
2.3. 회사의 외면과 어용노조
3. 전개
3.1. 어용노조에 대한 저항
3.2. 4월 21일의 집회와 충돌
3.3. 광부들, 사북을 점령하다
3.3.1. 치안공백 사북
3.3.2. 노조지부장 아내 성추행 사적제재 사건
3.3.3. 안경다리 전투
3.3.4. 공수부대 투입계획
4. 노사정 협상
5. 사건 이후
5.1. 체포 및 고문과 가혹행위
5.2. 5.17 내란에 준 영향
5.3. 계엄군에 준 영향
5.4. 언론의 행태
5.5.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
6. 결론
7. 여담
8. 참고자료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위치한 동원탄좌 소속 탄광노동자들이 저임금과 어용노조 등에 분노하여 일으킨 봉기.


2. 배경[편집]



2.1.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편집]


산지사방이 일터인데 / 그리도 할 일 없어 탄광에 왔나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막장으로 들어간다 - 당시 광부들이 일하면서 부른 <광부아리랑>[2]


사택은 베니다 합판 양쪽에 스티로폼을 중간에 댄 것이 벽이어서 추웠다. 겨울이면 고산지대이다 보니 특히 추웠는데 어쩔 수 없이 방에다가 연탄난로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로인해 연탄가스 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1970년도에는 월급을 쌀로 받았다가 하반기에 들어서 현금으로 받기 시작했다. 쌀 장수도 회사 사장 친인척이었다. 하질미 팔고서는 값은 같은 가격을 받았다. 소비조합은 사북에는 현재 카지노가 있는 지장산 사택과 새마을 사택 두 군데에 20~30평 규모였다. 요즘말로 마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진 돈이 없으니 이곳에서 인감증을 제시하고 가져온 후 월급날이면 공제했다. 가격이 30%이상 비쌌다. 안전장구 시설 장비 등을 지급하도록 규정되어 있지만 회사 측은 안전시설은 도외시하고 탄을 캐는 데만 집착했다. 그 당시 70년대 에너지 파동이 나면서 정부는 '석탄 증산 보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기업주가 어떤 사고를 내도 모든 책임을 광부들에게 떠 넘겼다. - 이원갑 당시 노조 지도위원


해발 800m의 지장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사북광업소 광부사택은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방지대다. 160동의 연립주택에 760가구 3,000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중략) 산비탈에 옹기종기 서있는 연립식 주택은 10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무척 낡아 있어 2.5km 떨어진 시가지로 나가는 길은 경사 40도의 비탈길로 차량통행마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슬래브 단층인 연립식 주택 1동에 5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한 가구가 방 2개 부엌 1개(8평)로 구조가 똑같으나 수리를 하지 않아 벽과 천장이 허물어져 물이 새고 수도도 설치되어 있으나 겨울철이면 물이 나오지 않아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목욕탕은 1개로 그나마 여자용은 없어 주부들이 시가지까지 나가야 하는 불편을 겪고 있다. - <신아일보>, 1980년 5월 3일자 기사

사북읍[3]의 사북탄광은 동원탄좌[4]의 관리 아래 있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민영광산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던 곳이었다.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였던 이 곳은 대한민국 석탄생산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했다. 하지만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의 노동환경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30~40도가 넘는 고온 속에서 고난도의 노동을 해야 했다. 탄광이라 산업재해도 자주 발생하여 광부들의 목숨은 늘 위태로웠고, 탄광 속의 짙은 석탄가루는 광부들의 폐를 진폐증으로 망가뜨렸다. 그런 환경인지라 광부들의 노동은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북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월급은 월평균 15만 5천원에 불과했다.[5] 1980년의 물가가 라면 100원, 버스비 100원, 소주 200원, 자장면 500원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적은 월급이었다. 물론 이들이 목숨을 걸고 탄광에 들어가기 때문에 위험수당을 더 받기는 했으나 탄광촌의 물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 게다가 급여의 산정 역시 회사 제멋대로였다. 광부들의 급여에서 기본급은 매우 낮고, 생산량에 따라 급여가 결정되는데 광부들이 탄을 10톤을 캐서 실어나오면 '부비끼'라고 하여 회사 소속의 검탄원[6]이 눈짐작으로 탄을 평가해서 일부러 탄의 등급을 낮추어 잡거나, 탄에 이물질이 많이 섞였다면서 생산량을 6톤이나 7톤으로 매기는 짓을 했다.

임금이 그랬으니 가족들의 삶도 고달팠다. 당시 사북탄광은 사북읍 지장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산간지역이라 물자수송도 어려워 물가가 다른 지역보다 더 높았다. 상수도 시설은 거의 보급 되지 않았고, 고지대라서 지하수도 얼마 없었다. 거기에 광산의 특성상 얼마 있지도 않은 지하수조차 이리저리 탄맥을 뚫다 보면 끊겨버려 사북에서 제일 귀한 게 돈이 아니라 물이라고 할 정도로 물이 없어 힘들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광부들은 탄광에서 탄가루에 범벅이 되어 새까맣게 되어도 씻을 물조차 제대로 없어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닦아내며 살았다고 할 정도이다. 한 광부가족은 그 당시를 회고하며 "70년대 입주한 지장산 사택은 세탁은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짐승처럼 살았다."고 말했다.[7] 당시 사북탄광지역 사택모습

또 사택이라고 있는 집 역시 벽이 너무 얇아 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할 정도였고, 거기다 날림으로 지어 너무 추웠다. 집에는 화장실조차 없어서 30가구 당 푸세식 공동화장실 1개꼴로 사용했는데, 대변을 볼 수 있는 칸은 4칸도 채 안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할만 하다.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정부 각료의 입에서 언급될 정도였다는 걸로 알 수 있다. 사건 1달 전인 1980년 3월 14일 오전 10시에 열린 계엄위원회 19차 회의에서 내무부 차관 서정화는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광산의 경우 광부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하다. 주택 및 급수시설을 포함한 생활여건도 나쁘거니와, 광부의 임금으로는 자녀교육이나 생활이 불가능한 실정인데다 요즈음은 체불노임 때문에 이들의 생활고는 가중되고 있다. 광산에서는 이러한 광부들의 입을 막기 위해 "덕배"라는 폭력조직까지 동원하고 있다. 원성이 집단화되지는 않고 있지만, 체념적인 이들의 원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2. 늘어나는 산업재해[편집]


1977 ~ 1982년 각국별 광산 재해 실태(사망자수/1백만 t생산)

서독 0.4명 / 영국 0.6명 / 스페인 1.1명 / 일본 1.36명 / 한국 8.3명

『석탄 산업의 현황』, 1983.5.


1972년 이후 광산 재해 현황

1972년 : 사망 187명 / 중상 1,647명 / 경상 4,511명

1973년 : 사망 264명 / 중상 1,579명 / 경상 3,328명

1974년 : 사망 252명 / 중상 1,742명 / 경상 3,370명

1975년 : 사망 270명 / 중상 1,945명 / 경상 4,362명

1976년 : 사망 240명 / 중상 1,937명 / 경상 3,690명

1977년 : 사망 219명 / 중상 1,896명 / 경상 3,825명

1978년 : 사망 195명 / 중상 2,074명 / 경상 3,350명

1979년 : 사망 221명 / 중상 2,270명 / 경상 2,873명

1980년 : 사망 170명 / 중상 2,436명 / 경상 3,387명

1981년 : 사망 226명 / 중상 2,809명 / 경상 3,671명

1982년 : 사망 199명 / 중상 2,545명 / 경상 3,240명

자료 : 전국광산노조 사업보고서 `72~`83[8]

석탄 채굴은 전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해외에 고정적으로 수출할만한 효자 품목이었다. 때문에 정권을 가리지 않고, 채탄과 광업은 국가적 주도하에 나날이 생산량이 늘어났으며, 이 석탄 대금은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탄을 다 캐내어 폐광이 되는 광산이 늘어났고, 탄맥이 살아있는 광산들도 탄층의 심부화(深部化)로 점점 더 깊이 파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깊이 파들어가면 갈수록 당연히 위험성과 노동강도는 몇곱절로 늘어나게 된다. 때문에 1980년에는 전체 탄광노동자 56,173명 중 총 재해자는 5,885명으로 광부 10명 중 1명이 죽거나 다쳤을 정도로 높은 재해율을 보였다. 이로 인해 당시 탄광노동자들의 이직률은 해마다 급증하여 1977년 이전에는 15% 정도였던 것이, 1978년에는 28%, 1979년에는 32%로 급격히 증가한다.

이렇게 작업환경은 나날이 나빠지는데, 회사는 작업환경 개선은커녕 생산량이 줄어들었으니 임금을 깎거나 체불까지 하는 등 갑질을 일삼는다. 붕괴사고나 진폐증으로 큰 부상을 입은 종업원들이 산재 신청이라도 하려들면 깡패들을 풀어 가족을 협박해서 막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위에 서술된 광산 재해 피해자의 숫자도 매우 축소된 것이다. 대부분의 탄광 회사들은 사망사고가 나면 위로금이란 명목의 푼돈 몇푼을 유족에게 쥐어주고 덮어버리기 일쑤였으며, 가족도 없이 혼자 일하러 온 사람은 그냥 암매장해버리는 것도 다반사였다. 저기에 집계된 인원은 그나마 노조가 명목상으로나 존재하는 제법 큰 회사들에서나 확인된 것이니 그것보다 못한 수많은 소규모 탄광이나 덕대 집단에서 죽은 인원까지 하면 얼마나 될지도 짐작조차 어렵다.

2.3. 회사의 외면과 어용노조[편집]


(광부들은) 불평불만을 하면 그날로 해고당했다. 고정된 직장이 아니고 매일 작업배치를 받는데 그날 안 해주면 그걸로 해고 된 것이었다. 노동청에서 구제신청을 받아줘도 회사에서 절대 안 받아줬다. 벌금 물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 이원갑 당시 노조 지도위원


특히 동원탄좌의 경우 임금인상 시기가 도래하면 임금인상의 기준이 되는 3개월 전부터 임금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임금인상분을 상쇄하여 결국 임금인상 효과를 실질적으로 낮추는 편법을 사용하였다. (주)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후산부로 근무했던 윤0철의 노임지불명세서를 보면 기본금은 임금인상 시기인 3~4월을 기준으로 이전 3개월 동안 점차적으로 감소되어 결국 3월의 실질 임금인상 효과는 전년 11월 대비 5~11% 내외에 그쳤다. -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보고서 中


상황이 이런데도 회사와 노조는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했다. 회사는 광부들의 임금을 올리거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데 일체 신경을 쓰지 않았고 노조는 이름만 노조였을뿐 사실상 어용노조로서 회사의 꼭두각시같은 존재였다.

우선 회사는 '암행독찰'이라는 이름으로 광부들을 감시했다. 사장 친인척들로 구성된 간부들이 하루종일 탄광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관찰하며 회사에 보고했다. 얼마나 감시를 철저하게 했던지 "간밤에 부부싸움을 한 것"까지도 다 알았다고 한다. 또 산업재해가 터지면 보상도 별로 해주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해고통지를 하는 등 강압적으로 노동자들을 통제하려 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광부들이 저임금으로 고생하고 있는데도 임금을 올리지 않기 위해 갖은 편법을 동원했다.[9] 또 어용노조를 전두지휘하여 노동자들의 단결도 저지했다.

어용노조도 심각했다. 어용노조는 광부들의 요구조건이 아닌 회사의 요구조건을 우선시했다.[10] 왜 이렇게 노조가 변질되어버렸냐면 회사가 노조지부장같은 노조 지도부에게 혜택을 마구 주었기 때문이다. 노조원은 안중에도 없는 대신 노조 지도부를 세뇌시켜서 자기 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회사의 기만적 행태는 노조지부장 선거에도 나타났다. 노조지부장 선거 전에 대의원 선거를 거치는 간선제 형식이었데, 선출된 대의원들에게는 버스를 보내 관광여행을 시켜주었다. 일종의 회유인 셈인데 그렇게 여행을 즐기게 하다가 선거날에 투표장 앞에 내려놓는 식이었다.[11] 이렇게되니 노조 지도부로서는 회사에 충성만 하면 되었다.

당시 사북탄광의 노조였던 광산노조 동원탄좌지부의 지부장은 이재기라는 사람이었는데, 1964년 처음 노조가 설립되었을 때에도 노조지부장을 했었었다. 그런데 이재기는 노조에 있으면서도 광부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회사의 간부들만 따라다니며 비위를 맞췄다. 어찌나 광부들에 관심이 없던지 광부들 중 이재기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절반을 넘을 정도였다. 이렇게 노조가 무력화된 채로 회사로부터 조종당하게 되자 노조에 대한 광부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3. 전개[편집]



3.1. 어용노조에 대한 저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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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갑[12]
1970년대 말이 되면서 사북탄광은 저임금과 열악한 생활, 그리고 어용노조에 대한 항의로 빗발쳤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이원갑이었다. 1960~70년대 내내 고통받았던 광부들은 이원갑을 열렬히 지지했고, 이재기를 끌어내리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이원갑은 1978년 노조지부장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노조지부장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다. 선거를 앞두고 1978년 12월 13일 이재기는 제주도의 신제주호텔에서 사북광업소 대의원 29명한테 1천만의 거금을 들이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들의 표를 자신에게 돌리려는 심산이었다. 이렇게 하여 1979년 4월 3일의 선거에서 이재기는 또 다시 노조지부장으로 선출된다. 이같은 결과에 광부들은 분노했다. 그리하여 1979년 7월 16일에 광부 2568명의 서명을 받아 노조지부장 직선제와 노조의 개혁을 요구했다. 광산노조는 이를 받아 이재기에게 징계를 내리긴 했으나 회사는 그 해 11월 15일 이재기를 노조지부장 직무대리로 임명하면서 요구조건은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임금교섭에서 이재기가 보여준 기만적 행태는 광부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재기는 1980년 3월에 있었던 임금교섭에서 광부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40% 임금 인상'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20% 임금 인상'으로 처리해버렸다. 이는 광부들의 의견을 무시한 것이었기에 광부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더 이상 회사의 처사에 견디다 못한 광부들은 '지부장선거 직선제', '임금인상', '처우개선' 등을 외치며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1980년 4월 15일 26명의 조합원들은 광산노련 사무실로 몰려가 그곳의 지도부에게 "왜 직선제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는 답변이 돌아오자 이들은 4월 18일 더 많은 수와 함께 조합사무실로 몰려들었다. 거기에는 노조지부장 이재기가 있었는데 노조원들이 물러가라고 하자 자신은 정당하게 노조지부장이 되었다면서 노조원들의 주장을 거절했다. 이에 광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알릴 집회를 열기로 하고 경찰서에 가서 집회신청을 했다. 서장은 집회를 허가한다고 했지만 노동자 간의 충돌을 우려한다며 불허할 것을 계엄당국에 건의했고 그 건의대로 집회는 불허됐다. 하지만 이 사실은 광부들에게는 알려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불허사실이 통보된 것은 집회가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기 때문이다.[13]


3.2. 4월 21일의 집회와 충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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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아침부터 노조사무실 앞에 광부들이 집회를 열기 위해 모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광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오후 2시경 30여명 정도에 불과했던 군중의 숫자는 오후 3시 경 300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집회는 공식적으로 금지된터라 정,사복 경찰 68명(간부 2명, 경찰 66명)이 노조사무실 2층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대기 중에 있었다. 그러던 중 노조사무실 앞에서 노조원과 노조부지부장이 실랑이를 벌였다. 경찰 몇 명이 이를 채증하겠다면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에 광부들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광부들과 경찰 간의 언쟁이 벌어지더니 곧 광부들이 채증하던 경찰들을 쫓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황급히 도망가다 건물 앞의 지프차에 올라탔다. 광부들이 막아섰지만 지프차는 그대로 돌진하더니 광부 한 명을 치고 달아나버렸다.

내가 직접 차에 치이는 것을 봤어요. 검은 지프차가 출발하려고 할 때 서너 명이 가로막았고, 차가 출발하자 몇 사람은 피했고, 원00은 차에 치였지요. 차가 원00을 지나가고 난 다음 보니까 원00는 죽어 있더라구요. 진짜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원00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 당시 광부 최00(동원탄좌 760항 후산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의 인터뷰(2006)


그날 오후에 노조원끼릴 다투다가 차에 치였다면서 3명이 동원보건원에 실려 왔어요. 경찰차에 치였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어요. 그 중 한 사람은 내가 직접 보았는데, 차가 배 위로 지나갔다라고 들었습니다. 장파열이라고 들었어요. 나머지 두 사람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겠어요. - 당시 동원보건원 간호사, 고한성당 수녀 장00,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와의 인터뷰(2006)


원00는 좌측 치골 골절, 방광 탈구, 골반타박상(의사 김우길 진단) 3개월간 치료를 요하는 부상을 입음 - <동원탄좌 노사분규 개황>, 1980.4


사고가 터지자 인근의 광부들은 '경찰차가 사람 잡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는 마침 노조사무실을 나서는 경찰서장을 잡아끌고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는 그렇게 밤 10시 경부터 광부들에게 점거되었고, 경찰서장과 경찰은 경찰서를 뺏긴 채로 그 날 저녁 철수했다. 그리고 사고 소식이 사북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상황은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3.3. 광부들, 사북을 점령하다[편집]



3.3.1. 치안공백 사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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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들이 사라지자 사북은 치안공백 상태가 되었다. 21일 밤 사북광업소 곳곳에서는 광부들과 주민들이 밤을 새웠고 부녀자들은 솥을 내걸고 음식을 해 광부들에게 제공했다.

칼국수 집은 국수를 내놓고, 다방에서는 커피를 양동이로 타서 문밖에 두어 마음대로 마시게 했고, 쌀집에서는 쌀을 내놓고, 동료들은 노조사무실과 본관 앞에 큰 솥을 걸어놓고 서로 밥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오히려 전에 없던 정이 넘쳐났었습니다. - 이원갑 당시 노조 지도위원,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인터뷰(2006)


한편 앞의 교통사고 때문에 분노한 광부들과 주민들[14]은 평소에 원성의 대상이었던 건물이나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다. 노조사무실 건물은 주민들의 공격으로 유리창이 깨지고 기물이 파손되었으며, 경찰지서도 마찬가지로 부서졌다. 광업소 사무실, 회사간부의 사택, 노조간부의 사택들도 이 공격을 피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그런가하면 동원탄좌 검수과장, 양곡과 사택배급 담당직원 등도 폭행을 당했다. 또 일부 경찰도 폭행을 당했다.


3.3.2. 노조지부장 아내 성추행 사적제재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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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들은 노조지부장[15] 이었던 이재기의 행방을 쫓았다. 하지만 그는 도망간 상태였다. 군중들은 이재기의 처 김순이를 찾아 그의 행방을 물으려고 했으나 그녀조차 집 안에 없었다. 하지만 부엌에 쌀이 씻겨져 있는 것을 보고 부근을 뒤져 옆집에 숨어 있던 그녀를 끌어냈다. 그녀는 군중들에게 이끌려 광업소 정문 게시판 근처 전봇대 기둥에 묶였다. 거기서 그녀는 군중들로부터 린치를 당했다.[16] 심지어 성추행까지 당했다고 한다.[17]

그날 광부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온다는 얘기를 듣고 겁이 나 옆에 사는 정00 씨의 집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 집 안방 침대 밑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나를 발견하고는 마구 때리며 끌고 나갔습니다. 주로 부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름과 얼굴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습니다. 광부들과 부녀자들은 나를 광업소 정문 근처로 끌고 가면서도 계속 머리와 온몸을 구타했습니다. (중략) 기둥에 묶이고 난 후 더욱 구타가 심해졌습니다. 상의, 하의를 벗기고 온갖 난행을 저지른 후 광부들이 끌고 가 차마 말로 할 수 없는짓을 하였습니다. - 김순이의 증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1차 진술조서(2007) 中

김순이는 4월 24일까지 사북 주민들에게 억류되어 있다가 4월 24일에야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18]

지부장 부인이 동원보건원에 도착한 것은 4월 24일 오후였어요. 광부 옷을 입고 있었어요. 다른 여자 한 명이 부축하며 동행했어요. 지부장 부인이 보건원에 오자 기자들이 인터뷰하기 위해 몰려 왔는데 내가 병실을 가로막고 출입을 막았어요. 그때 지부장 부인은 손가락이 골절된 상태였고, 몸 여기저기가 멍이 들어 있었고,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안정을 시켜야 했어요. 그날 밤 지부장 부인은 잠도 못 자더라구요. 결국 다음날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어요. 내가 쭉 같이 있었는데 지부장 부인과 동행한 여자가 하는 말이 '이 여자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광부들에게 당했다. 노조지부장 이00는 작은 여자를 두고 집에 제대로 돈도 갖다주지 않아 이 여자가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 당시 동원보건원 간호사, 고한성당 수녀 장00,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 인터뷰(2006)



3.3.3. 안경다리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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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다리 철로변의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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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다리 주변 약도
그러는 사이 강원도경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경찰들이 사북에서 전부 철수한데다가 경찰지서 등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진압을 위해 원주에서 사북으로 가는 경로에 위치한 경찰병력 347명이 출동했다. 강원도경찰국장 또한 도경찰국 과장들을 대동하고 사북으로 향했다.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광부들과 주민들은 사북읍에서 광업소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철둑길 앞 안경다리로 집결했다. 이 곳은 읍내와 탄좌 사이를 단절시키는 태백선 철도가 지나가는 곳으로, 철도 자체가 높은 지대로 되어있어 토성성곽과 같고, 안경다리는 이 철도 밑으로 뚫린 굴다리이기에 성문과 같은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방어측인 농성 광부들에게는 매우 유리한 지형이며, 더불어서 농성중인 탄좌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했다. 이곳에 1500여명이 경사 45도의 10m 높이 언덕에서 모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접근해왔다. 경찰들은 최루탄을 마구 쐈다. 그러자 주민들은 주변의 돌을 경찰들에게 던지며 경찰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했다. 여자들은 돌을 나르고 남자들을 돌은 던지는 방식으로 계속 싸우니 경찰들의 병력이 허물어졌다. 이 와중에 경찰 1명이 날아온 돌에 맞아 사망했고, 70여명이 부상을 입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경찰들은 결국 사북을 접수하지 못한 채 철수했다.

사북은 철길쪽과 길 양쪽만 막으면 들어올 곳이 없다. 안경다리 철길 쪽에는 사람들이 쭉 서있었다. 철길이다 보니 전부 자갈밭이었다. 도로는 갱목으로 막아놓았는데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진입해 들어왔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람이 역으로 위에서 밑으로 불면서 경찰 쪽의 피해가 컸다. 철로 변에 있던 자갈을 위에서 아래로 던지니까 철길에 자갈이 없어질 정도로 던졌다. 부인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돌을 나르고 광부들은 돌을 던져댔다. 순식간에 경찰이 허물어지면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민가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 산으로 도망쳤다. - 이원갑 당시 노조 지도위원


4월 22일 안경다리에서 경찰과 광부들이 충돌한 뒤 우리 동원보건원에 경찰과 광부가 많이 왔어요. 얼마나 환자가 많았던지 환자실은 물론 복도에까지 누워 있었어요. 부상 입은 경찰들은 대부분 광부 옷을 입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누가 경찰인지, 광부인지 몰랐어요. 경찰들이 도망치면서 민가에 들어가 옷을 바꿔 입었기 때문이지요. - 당시 동원보건원 간호사 장00,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인터뷰(2006)


경찰들이 안경다리의 충돌에서 패배한 이유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진압작전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가 경찰 간부들을 인터뷰했을 때 이들 모두가 경찰 작전의 실패를 시인했다. 경찰들은 '거의 맨 몸'으로 보호장구도 하나 없이 진압에 나서야 했고, 현장지휘부가 경찰의 안경다리 진입을 놓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했으며, 그 곳의 지형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난공불락의 성곽과 같은 곳이었기에 공격측이 제대로 된 계획을 잡고 진입해도 쉽지 않은 곳이지만 강원도경은 그렇지 못했다. 강원도경 국장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지휘통제가 힘들었으며 경찰진압병력이 시위진압 경험도 없었고, 안전장비가 부족했으며, 당시 도경 경비과장이 자신의 명령 없이 진입을 시도"한 것이 경찰의 패배 및 인명피해의 원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3.3.4. 공수부대 투입계획[편집]


경찰들의 공격마저 사북 주민들의 저항으로 무산되자 경찰은 계엄당국에게 공수부대를 투입(!)할 것을 요청했다.[19] 요청을 받은 1군 계엄사령부에서 사태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 탓에 출동승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1군 군수지원사령관에게 군 병력 300명을 출동준비시키고 영월, 정선 지역의 대대에 출동준비 대기를 지시하는 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계엄당국이 공수부대 투입계획을 구상하고 검토한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육군본부에서 발행했다는 <계엄사>에서는 계엄군 부대가 사북사건을 진압하고자 원주로 배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실제로 4월 23일에는 계엄사의 요청으로 공군 비행기가 정선 일대를 비행한 적도 있었다. 또 국군기무사령부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제출한 자료 <동원탄좌 사태 진전상황2>에는 더 구체적인 군병력 투입계획이 나와 있었으며 그 투입시점까지 결정나 있었다![20] 다행스럽게도 4월 24일의 협상타결로 군부대 투입은 무산되었다.


4. 노사정 협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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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이 광부들의 손에 넘어가자 회사와 정부는 광부들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980년 4월 22일부터 4월 24일까지 노사정 협상이 열렸다.

1차 협상은 4월 22일 오후 3시 삼척탄좌 객실에서 열렸다. 이 협상에는 강원도경 국장과 수사과장, 이재기 노조지부장, 광부대표 이원갑과 신경 등이 참석했다. 여기서 회사는 이재기의 사표를 받고 이원갑과 신경이 직접 광부들에게 가서 협상결과를 말하고 설득하기로 결론 났다. 하지만 광부들은 '이재기가 직접 나타나서 사의를 표명하라'며 반발했다.

2차 협상은 1차 협상이 있은지 몇 시간 후인 오후 7시 사북읍사무소에서 열렸다. 이 협상에는 소위 대책본부 소속의 광산노조 위원장과 광부대표 이원갑, 그리고 주민대표가 참석했다. 광부들은 노임과 상여금을 인상하고 형사처벌을 면제해달라며 요구했지만, 대책본부 측은 자신들이 임의로 정한 6개항을 일방적으로 제시했다.[21] 4월 23일에는 대책본부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조항들을 인쇄한 종이 1천여 장이 '합의문'으로 둔갑하여 광업소 주변에 뿌려졌다. 이에 광부와 주민들은 '합의문이 회사 측에만 유리하다'며 계속 항의했다. 이에 강원도경 국장은 광부대표 이원갑을 만나서 "협상대표로 참여한 광부들은 주동자로 몰지 않겠다"는 확인서를 주었고, 회담은 23일 밤 다시 열렸다.

3차 협상에서 광부들은 "주동자들을 형사처벌하지 말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이 말을 들은 춘천지검 검사는 "그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어쨌든 불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사태수습 후라도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로 답변했다. 밤새도록 광부 60~70여명과 대책본부 간의 협상이 이어지다가 4월 24일 최종적으로 11개 조항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최종 합의문[22]

1. 이재기는 이미 사퇴했음.

2. 부상자 치료비 및 보상금 일체는 회사에서 책임진다.

3. 피해 주택복구비도 회사에서 전액 부담한다.

4. 하청업자 종업원의 임금인상도 최대한 보장토록 노력.

5. 신용조합 운영에 있어서 부실한 원금에 대하여는 회사에서 지급한다.

6. 79년도 징계로 인한 상여금 삭감분은 즉시 회사에서 지급한다.

7. 이번 사태로 쉰 4일간에 대하여는 휴업수당을 지급한다.

8. 현재 250% 상여금을 400%까지 인상하여 분기별로 지급한다.

9. 1~2월 임금인상 소급분 20%는 5월 말까지 지급하고 탄가인상시 재조정한다.

10. 경찰당국은 이번 사태수습에 절대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기로 한다.

11. 금번 사태에 대한 문제는 회사와 당국이 최대의 노력으로 원만히 해결하도록 한다.

이상의 협의사항을 깊이 인식하고 상호 간의 이해와 협조로써 질서회복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1980.4.24

광산노조 위원장 최00

광업소장 류00


후속조치[23]

동원탄좌개발(주) 사북광업소는 아래와 같이 확인한다.

1. 상여금은 250%에서 400%로 인상한다.

2. 1~2월분 임금인상 소급분 20%는 5월 말에 지급하고 탄가인상 때 재조정한다.

3. 임금인상 후 도급료 인상률을 보장한다.

4. 79년도 징계자 상여금 삭제분에 대하여 이를 지급한다.

5. 21일부터 24일까지의 4일간 노임을 휴업수당으로 지급한다.

6. 부상자의 치료 및 가옥 파손 수리비용은 회사가 지급한다.

7. 신용조합에서 미지급된 해당 금액에 대하여도 회사가 부담한다.

8. 하청업자에 대한 것(노임 및 상여금)은 현재까지 독립된 업자 책임 아래 지급되었으므로 회사에서 가능한 한 업자 측에 건의하여 현재보다 향상 지급토록 한다.

1980년 4월 24일

동원탄좌개발 사북광업소장 유00


그렇게하여 나흘간 사북읍을 휘들었던 사북사건은 평화적으로 종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5. 사건 이후[편집]



5.1. 체포 및 고문과 가혹행위[편집]


사태가 수습되고 난 며칠 후부터 경찰들이 밤낮으로 광부들과 부녀자들을 잡아간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중에 사택을 돌아봤는데 지장산사택 같은 경우는 일부 사택구역이 텅 빌 정도였어요. 잡혀갔다가 나온 사람들로부터 특히 부녀자들이 지부장 부인이 당한 것과 똑같이 험한 일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 당시 동원보건원 간호사, 고한성당 수녀 장00,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인터뷰(2006)


광부들과 주민들은 협상이 평화적으로 종료되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진 체포와 검거는 사북을 다시금 얼어붙게 했다.

사북사건이 끝난 직후인 1980년 4월 25일 강원도경은 주모자 색출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24] 광부들을 처벌하지 않겠다고 말한 도경국장의 하루 전 발언을 뒤집는 것이었다. 곧 경찰들이 사북사건 중 일어난 폭력행위의 주동자의 명단을 파악하고 소재를 찾아나섰다. 4월 27일 정선경찰서에는 현지수사반이 설치되었다. 현지수사반의 작성한 주동자 명단에 따르면 119명[25]의 인물의 이름이 수록되었다.[26] 이 명단의 작성에는 경찰 자체의 수사도 있었지만 회사 측의 협조도 있었다.

계엄사도 수사에 나섰다. 계엄사는 비상계엄령을 활용하여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을 조직했다.[27] 수사단의 인력은 보안부대, 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곧바로 주모자 명단에 수록된 광부와 주민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6일 합동수사단은 '수습대책위원회'를 한다며 광부대표였던 이원갑과 광부 10여 명을 불러모은 후 모두 연행하였다. 체포는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마저 폭행[28] 할 정도로 강압적이었고 또한 폭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사람들을 검거하고 체포했다. 이렇게 연행된 사람은 110여 명에 달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수사 동안 모진 고문을 겪으며 사북사건 때 있었던 폭력행위를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29] 이들은 엄청난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으며 심지어 성고문까지 당했다.[30]

정선경찰서에 맨 처음 가자마자 볼펜으로 손가락 끼워 비틀고, 무릎 뒤에 각목을 끼우고 앉혀 허벅지를 짓밟았습니다. 각목으로 발바닥을 하도 맞아서 걸음도 못 걸을 정도였습니다. 또 양 손목과 발목을 묶고 가운데 각목을 가로질러 책상 사이에 걸어놓고 고춧가루 탄물을 코와 입에 번갈아 들이부었습니다. 꿇어앉힌 상태에서 1m 정도 되는 각목으로 어깨를 패고, 쓰러지면 군홧발로 얼굴을 밟았습니다. 내가 맞아서 바닥에 쓰러지면 조사실 바닥 벽틈으로 옆 조사실에서 맞는 여자들을 잠깐 볼 수 있었습니다. 옆 조사실에서 남자 형사가 "00아 묻는 말에 대답해"라고 욕을 하면서 발로 차고 여자는 양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발발 떨면서 나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머리는 산발하여 헝클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사실 밖으로 끌려간 여자들은 보안대원들로부터 몹쓸 짓을 당했습니다. - 강00의 경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인터뷰(2006)'


'서울 광산노조에까지 가서 농성한 놈'이라며 조사실로 끌려가 군인으로 보이는 수사관이 머리에 권총을 겨눈 채 '죽여도 상관없다'며 협박을 하고, 무릎 뒤에 각목을 넣고 꿇어앉힌 자세에서 허벅지와 각목을 밟는 등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 안원순의 경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2006)


곡괭이 자루는 길이 1미터 20센티미터 정도고, 굵기는 지름이 5센티미터 정도였습니다. 묻는 질문을 부인하면 통닭구이[31]

, 물고문, 몽둥이질을 반복했고, 다시 2,3일 쉬다가 새로운 사실을 가지고 와 인정할 것을 강요하며 고문을 반복했습니다. 이 같은 행위가 5월 20일 경 영장 발부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 신경[32]의 경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인터뷰(2006)


고문수사는 피해자들만 증언하는 것이 아니다. 수사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고문을 증언한다.[33]

'(고문 폭행 장면을) 봤습니다. 당시 끌려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슷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주모자였던 000씨 등은 더 가혹하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심하게 당했지요. 부녀자들은 좀 덜 맞기는 했지만 몇몇이 끌려가 욕을 보였습니다. (가혹행위를 한 사람은) 20명 가량의 보안대원들이었습니다. 보안사 소속 군인들이었습니다. (고문도구는) 각목, 고무 호스 등을 사용했습니다. - 당시 합동수사단 소속 조사반장 이00,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 인터뷰(2006)


폭행은 주로 보안대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1군사에서 파견된 보안대요원이 길이가 약 1m인 호스를 들고 남녀를 불문하고 광원들의 전신을 때리고 각목을 두 다리에 오금 사이에 넣고 짓밟았으며, 이러한 폭행으로 인하여 실신자가 부지기수로 속출하였습니다. 실신하면 큰 바케스로 물을 붓고 또한 정선군 보건소에 긴급 배치된 의사, 간호사들이 응급치료를 하게 한 후 계속하여 가혹행위를 포함한 수사를 하였습니다. 이 중 혐의가 없다고 인정되는 광부들은 밖에 나가 절대 수사내용과 과정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은 뒤 귀가시켰습니다. - 당시 합동수사단 1조 소속 피의자 조사 담당원 김00,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 인터뷰(2006)


이런 수사를 받은 피고인들은 서로를 밀고하는 지경에 이르렀고[34] 강요받은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접견조차 금지되고 있어 어디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그러던 중 이원갑 등 사북사건 피의자들은 정선경찰서에서 이감되어 원주에 있는 한 헌병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군 검찰관에 의해 수사는 계속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폭행과 고문은 계속되었다. 헌병대에서의 가혹행위는 검찰관은 물론이고 헌병대원들까지 가세했다.

그렇게 모진 고문 끝에 1군 검찰은 31명을 기소하고 50명을 불기소처분했다. 이들의 죄목은 게엄령포고령 위반, 소요죄, 특수공무방해치사 등이었다. 1980년 8월 6일 1군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이원갑 등 2명에게 징역 5년, 신경 등 3명에게 징역 3년 등을 선고했다. 그리하여 28명이 징역형을 받았는데, 그들의 형량을 합치면 84년 6개월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의 고난은 투옥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사북사건 관련자들은 일부는 복직되기도 했지만 일부는 블랙리스트에 적혀 취업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후유증으로 퇴사해야만 했다.[35] 또 그 가족들도 지속적으로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했다.


5.2. 5.17 내란에 준 영향[편집]


사북사건이 일어났던 1980년대 초반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어지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군부는 이 저항을 억눌러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북사건은 이들에게 일종의 '소요사태'처럼 받아들여졌고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참고로 사북사건으로 수감된 관련자는 이런 말을 했다.

"이득 본 사람은 전두환과 ○○○(사북사건 후 노조지부장이 된 사람)밖에 없다."



5.3. 계엄군에 준 영향[편집]


많은 사람들이 특전사 병력에게 부과된 국내 치안의 역할에 점점 더 염증을 느끼고 있음. 1979년 부산,마산 소요사태 당시 파견된 특전사 소속 장교와 사병들은 '머리를 깰'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럴 의지도 있었음. 가장 최근 원주에서 대기상태에 있었을 때 태도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음. 광부들의 의견이 옳다는 의견들을 피력한 바 있음. 광부들의 임금인상 요구는 옳다는 것이었음. 학생데모 진압활동에 대해서는 이와 다소 다른 견해이긴 하나 적극적인 자세는 아님. 특전사가 학생들에 대한 발포명령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음. 그러나 그런 요구들은 특전사 내의 기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임. - 미 국방부 메시지센터가 1980년 5월 8일에 작성한 기밀문서[36]

이 문서를 보면, 아마도 사북사건 진압을 위해 대기 중이었던 계엄군 장교와 사병들은 명령에 따르기는 했지만 상부의 그런 명령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에 계엄군이 보여준 행태를 보면 그런 조짐이 있었다 하더라도 신군부가 가만히 놔두었을리는 만무하다.


5.4. 언론의 행태[편집]


언론은 사북사건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4월 24일자 전국 일간지에는 사북사건의 폭력성을 매우 부각하는 기사들이 실렸다. 신문들의 기사제목도 '공포의 탄광촌', '사북광부폭동 치안마비' 등이었다. 사진도 지부장 아내의 린치 사진과 부서진 건물이나 차량을 찍은 사진을 썼다. 그리하여 광부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처럼 단정했다. 이는 아마도 신군부의 검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37] 하지만 사북사건의 원인을 점검한다던가, 경찰에 의해 광부가 차에 치인 사건이던가, 무차별적인 폭동은 아니었다던가, 사건 이후의 고문수사와 가혹행위를 폭로한다던가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사실로부터, 강준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사북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이미 그 때에 언론기능이 죽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앙일보> 기자 탁경명에게 가해진 모진 폭력은 벌써 서울의 민주언론인들에게도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38]고 말했다.


사북사건이 있고 난 뒤의 후일담을 보도하는 대한뉴스 영상이다. 58초부터 "4월 소요사태" 라고 언급하며 나타난다.


5.5. 명예회복을 위한 투쟁[편집]


사북사건이 결국 핏빛으로 종료된 이후 20년 동안 관련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사북사건 또한 '사북사태'라고 불리어지며 광부들의 집단난동인 것마냥 여겨져 왔었다. 그러다가 관련자들이 힘을 합쳐 '사북노동항쟁명예회복추진위원회(가칭)'을 결성하고 이 사건의 명예회복을 정부에 강력 촉구하기로 했다. 사북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는 황한섭(62, 당시 광산노조 조직차장)은 "사북사태는 불순분자들의 난동이 아닌 민주화를 위한 노동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사북사건에 대한 명예회복을 주장하며 노동자 21명이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과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을 신청했다. 2005년 이들 중 2명[39]만이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에 사북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적이 있던 김순이가 이원갑 등의 민주화유공자 지정에 반발하여 민주화유공자 지정을 취소해 달라며 헌법소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이는 7:1로 기각되었다.# 왜냐하면 헌법재판소는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그녀의 인격권 침해와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40] 하지만 김순이가 사북사건 관련자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는 최종적으로 일부 승소했다.#[41]

2015년 12월, 서울고법 형사6부는 사북사건과 관련된 재심에서 이원갑과 신경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들에게 적용된 계엄포고령 위반과 소요죄 등이 인정되지 않으며, 그들의 자백 또한 불법으로 구금하고 고문을 자행한 끝에 얻어낸 허위라며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사북사건은 또 다른 명예회복을 한 셈이다.#

2005년 제25주년을 맞아 '사북항쟁기념식'을 개최한 이후로 사북항쟁동지회 주최로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 2017년에는 사북민주항쟁동지회[42]가 고한사북남면신동지역살리기공추위와의 협력을 통해 기념식과 함께 사진전시회도 열었다.# 사북항쟁동지회를 중심으로 사북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기념사업회 등 다양한 재조명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2020년 40주년부터 강원도 기념행사로 격상되었다.


6. 결론[편집]


이 사건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건보고서에서 이렇게 권고했다.

- 국가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밝혀진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하여 피해자들에게 총체적으로 사과하고, 가혹행위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회복하고, 피해자들과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사북사건 이후 연행, 구금되었던 사건 관련자와 그 가족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국가는 김순이와 그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고 관련자들 사이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 국가는 사회적 합의에 대한 신뢰를 보호하고 증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사북사건 당시 계엄당국은 과도한 공권력으로 노사정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였다.

사북사건의 교훈을 통해 국가는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고 사회집단들의 이해충돌과정이 민주적이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여야 한다.



사북사건에 가려진 이면인데, 사북사건이 일어난 동원탄좌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의 탄광과 광부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충격적이게도 위에 서술된 열악한 작업환경과 부당함으로 얼룩진 대우임에도 불구하고 동원탄좌 정도면 강원도 일대의 탄광회사 중 큰 규모의 회사라서 나름 괜찮은 곳이었다고 한다. 동원탄좌보다 못한 작은 회사는 큰 회사들이 채산성이 나지 않아 버리고 간 폐광을 다시 파내려가면서 사업을 했는데, 이런 곳은 다른 탄광보다 훨씬 더 깊이 파 내려가야하니 작업환경은 극도로 위험하면서 힘들고, 작은 회사다 보니 임금체불도 잦았으며, 체불을 몇 달 끌다가 아예 망해버리면 목숨 걸고 일한 광부들은 한푼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회사에는 주로 큰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일했는데, 큰 탄광 회사들은 진폐증 1~2기가 발병한 광부들은 나중에 더 크게 아프게 되면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므로 수시로 진폐증 검사를 해서 걸리는 사람들을 퇴직시켰다. 이런 사람들은 따로 배운 기술도 없고, 병력 때문에 큰 탄광 회사에는 취직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자신들을 받아주는 작은 회사로 내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7.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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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하나 있다. <먼지, 사북을 묻다>(80분)인데 이미영 감독이 2002년에 찍은 작품이다. 본 문서 처음에 나오는 동영상이 바로 이거다. 영화의 내용은 사북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사북사건에 대해 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2002년 '올해의 인권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영화정보

이 사건이 신군부에도 꽤나 큰 충격을 주었던지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강원도 시찰길에 사북탄광을 들리면서 광부들의 처우 개선을 약속하고 선물을 뿌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방문에서 막장까지 직접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고 이후에도 광부들의 처우 개선 문제와, 석탄산업이 사양화된 이후의 대체산업을 논의했다는걸 보면[43] 이 사건이 준 충격이 엄청났다는걸 알 수 있다.

사북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78년 사북을 방문했던 최규하 대통령(당시 총리)은 광부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평생 석탄을 쓰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도 최규하가 죽을 때까지 자택에서는 연탄 보일러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사실이 약간 와전된 이야기이다. 최규하가 평생 석탄을 쓰겠다고 다짐하고, 실제로 이를 실천한 건 사실이다. 다만 총리 시절인 1978년에 방문한 탄광은 이 사북사건의 배경이 된 정선 탄광이 아니라 이웃한 삼척군 장성읍(현재의 태백시)[44] 장성광업소 탄광이다. 대한뉴스 1168호 최규하 국무총리 탄광촌 시찰 영상

대중매체에서는 1995년에 방영한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대학에서 만난 친구 하석주의 부모를 만난 인범이 자신의 출신을 사북이라고 소개할 때 석주의 부모가 사북사건을 잠깐 거론하는 장면으로 언급된 바 있다.

최근에는 제39주년 사북항쟁기념일에 맞추어 사북항쟁동지회에서 <배신 당한 사북의 봄>이라는 영상을 발표하였는데 이 영상은 사북사건에 대한 국가 공권력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

레진 코믹스에서 연재한 웹툰 조국과 민족에서 언급된다.


8. 참고자료[편집]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 80년 사북사건 편>
  • 사북사태 광부 '박노연' 1편 2편
  • <탄광촌 공화국>, 홍춘봉[45], 노동일보, 2002
  •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제1권,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80~87쪽
  • <노동일보>
  • <막장의 절규, 1980년 사북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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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북사건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2] <노동일보>, 2002년 10월 14일자[3] 1980년 초 기준으로 약 5만 명의 시민이 거주하고 있었다.[4] 1962년 '원동탄좌개발(주)'로 시작하여 1963년 '동원탄좌개발(주)'로 상호를 변경하고 민영광산회사로서 사북탄광 등을 경영했다. 이 회사는 지금 '(주)동원'이라는 이름의 자갈채취업체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참고로 대기업 동원그룹과는 아무 관련 없다.[5] 현재가치로는 약 150~200만원 상당이다.[6] 이들은 대개 회사 사장이나 간부들의 자식, 친인척들이었다.[7] <노동일보>, 2003년 1월 23일자[8] 이건 진폐증과 같은 산업재해는 집계하지 않은 것이다. 순수하게 광산내의 사고만 집계한 것.[9] 위의 증언처럼 '시간차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을 징계할 때 '30% 감봉'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광부들의 월급 체계는 도급제(광부가 캔 석탄의 양만큼 임금을 받는 제도)였기에 이는 지출하는 돈을 줄이기 위한 꼼수였다.[10]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발생하기 전만 하더라도 '노동조합'이라고 불리는 단체들은 거의 다 어용노조나 다름없었다.[11]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노조지부장 선거에서는 회사의 공작뿐만 아니라 경찰, 형사, 군수까지 동원되어 개입했다고 한다.[12] 여담으로 이 사진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소설가 조세희가 1985년 사북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조세희의 책 <침묵의 뿌리>에 수록되어 있다.[13] 추가로 말하자면 당시 탄광과 광부들의 사택 그리고 노조사무실 등은 모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즉, 단 몇 시간 만에 모든 광부들에게 집회불가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무리였다.[14] 사건에 참여한 주민들 가운데 장애인이 많았다는 증언이 좀 있는데, 아마도 산업재해로 인하여 부상을 당하고 해고된 사람들로 보인다.[15]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노조지부장 직무대리'였지만 전후상황을 봤을 때에는 노조지부장이나 다름없었다.[16] 김순이의 증언에 따르면 다수의 부녀자들이 폭행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그 부녀자들은 아마 광부의 아내들로 판단된다.[17] 이 사건은 사북사건의 도덕성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실제로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사북사건을 다룰 때 작가 이동형은 "이 사건 때문에 사북사건이 항쟁까지는 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18] 이 사건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과 판단은 관련항목을 참고바란다.[19] 참고로 사북사건이 일어나고 있던 1980년 4월은 비상계엄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이 선포되어 있을 때였다.[20] 군대가 투입될 시점은 1980년 4월 25일이었다.[21] 이 조항들은 광부들이 제시한 조항과 비교하면 상당히 후퇴한 것이었다.[22] <사북사태에 대한 진상>, 광산노조, 1980, 49-50쪽[23] <사북사태에 대한 진상>, 광산노조, 1980, 49-50쪽[24] 이같은 사실을 눈치채고 광부와 주민 30여명이 도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수사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체포 및 수사를 포기한 듯하다.[25] 주동자 11명, 선동자 21명, 행동대원 87명[26] 경찰이 작성한 <사북 광부난동 사건 관련자 명단>에서는 130명(주모자 21명, 선동자 37명, 극렬 행동대원 48명, 비조합원 14명 등)으로 되어있다. 이 명단에는 이름뿐만 아니라 주민번호, 호주, 본적과 주소까지도 다 적혀졌다. 또 <사북난동사건 학력분석상황보고>에는 149명의 관련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27] 이 합동수사단의 단장이 바로 전두환이었다.[28]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제1권,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83~84쪽, 중앙일보 기자 탁경명은 합동수사반 설치로 인해 다른 기자들이 정선경찰서의 수사결과를 기다리며 사북을 떠났지만 자기 혼자만 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5월 6일 광부들이 체포당할 때 그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그러자 체포를 진행하던 무장군인이 M16 개머리판으로 그를 후려쳤다. 탁경명 기자는 그 후 군부대로 끌려가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29] 고문수사에 대한 증언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보고서에 적나라하게 적혀져 있다. 본 문서에는 그 중에서도 가벼운 것을 인용해 놓았다.[30] 체포된 여성들은 윤간, 경찰봉 삽입 등 일반적인(?) 방법은 물론 일부 여성들은 벌레를 성기에 넣는 성고문을 당했으며 고환을 폭행당해 성불구가 된 남성도 있었다.[31] 마치 예전의 전기통닭처럼 사람을 막대에 묶어놓고 빙빙 돌려가며 구타하는 고문 수법. 한국 외에도 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애용되는 고문이다.[32] 그도 이원갑처럼 광부들을 위해 일하던 사람이었다.[33] 물론 고문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고서에 따르면 고문은 분명 있었다.[34]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에서는 고문수사 피해자였지만 고문으로 따른 밀고로 인해 관계가 단절된 남녀가 나온다.[35] 광부대표였던 이원갑의 경우에는 재판 도중에 해고되기까지 했다.[36] <미국비밀문서로 본 한국현대사 35장면>, 이홍환 편저, 삼인, 2002, 64쪽[37] 계엄이 선포되면 그 기간 동안 언론은 검열을 당했다. 한 달 후 5.18을 보도한 언론들의 논조를 잘 생각해보자.[38]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제1권,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 87쪽[39] 사북사건을 이끌었던 이원갑(66)과 신경(64)[40] 소수의견을 낸 1명은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들과 김순이의 피해와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41] 사북사건 관련자가 자기 블로그에 사북사건에 대해 글을 올리며 자신들을 명예훼손했다고 2007년부터 법정싸움에 들어간 논쟁이었는데 2010년 원고에게 19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42] 사북사건 관련자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로 이원갑이 회장을 맡아 오다 2019년 황인오가 회장에 취임하였다. 옛날에는 '사북항쟁동지회'였는데 도중에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측된다.[43]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카지노강원랜드다.[44] 이 사건 이듬해인 1981년에 시로 승격되었다.[45] 이 당시에는 진보적이었던 홍춘봉은 후일 변신하여 도박전문기자가 된다. 적지 않은 도박 썰들이 그의 기사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