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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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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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
웅진성
공산성


[a] 어떤 성곽이 위례성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b] 하북위례성 또한 존재만 전할 뿐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사비성(泗沘城) / 소부리(所夫里)

1. 개요
2. 연혁
3. 구조와 특징
3.1. 대지
3.2. 성곽
3.3. 도시계획
3.3.1. 도로
3.3.2. 왕궁
3.3.3. 사찰
3.3.4. 능묘
4. 관광지
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KBS 〈역사스페셜〉에 나온 사비성 영상
웅진성에서 천도한 백제 왕조 마지막 수도. 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성 과 나성 그 일대를 말한다. 도심부는 부여 나성으로 둘러 쌓여있고, 안쪽에는 부소산성이 자리잡은 2중 성곽 구조이다. 부산성과 청산성 등 부속 산성이 있다.

제 26대 성왕이 천도하여 마지막 제 31대 의자왕까지 수도로 기능하였다.[1]


2. 연혁[편집]


5세기 말-6세기 초에 건설되어 성왕의 천도로 538년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최후의 수도로 기능했다. 소부리(所夫里)라고도 불렸다.[2]

660년 당나라의 대군을 맞아 백제주력군은 백강에서의 요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군은 배를 타고 사비성으로 진격한다. 8월 20일, 처절하게 싸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결사대가 전멸하였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앞에 결집하자, 백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표현대로 "온 나라를 기울여서" 몇 차례 결전을 벌이나 잘 훈련된 당나라군과 기세가 오른 신라군을 당해낼 수 없어, 전사자만 만여명에 이를 정도의 대패를 당한다. 당 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 나성이 돌파당하고, 의자왕과 백제군은 부소산성에 농성했던 것 같다. 의자왕은 홀로 배를 타고 웅진성으로 달아났고, 23일엔 문무왕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하였다.[3]

이후 당나라가 웅진성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사비성은 거기에 속했다가 나당전쟁으로 신라가 수복해 671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도독을 부임시켰다. 통일신라는 이곳 대신 웅진성을 충청 일대 웅천주의 행정 중심지로 삼았다.[4]

신라 경덕왕 10년(750년) 지명을 백제 시절의 소부리에서 '부여군'으로 개칭, 이후 오늘날까지 이 명칭이 쓰이고 있다. 부여군 역사 항목 참조. 이외에 '사비로'라는 도로명이 부여군내 한복판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이다.

삼국유사엔 사비를 '전백제 왕도(前百濟 王都)'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는 사실 역시 서술했다. 당시 사비엔 부산(浮山), 일산(日山), 오산(吳山)이란 세 산이 있었는데 모두 신인(神人)이 살고 있어 하늘과 땅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사비성을 둘러싼 강을 사비하라고 불렀고 두 산 사이에 대왕포(大王浦)가 있어 백제 군주들이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3. 구조와 특징[편집]



파일:사비도성의 계획성.jpg

사비도성의 계획성


3.1. 대지[편집]


위 위성사진에 보이다시피, 사비성은 금강이 곡류하는 부분의 충적지에 조성되었다. 이 때문에 도성을 조성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물빼기 공사와 터 다지기 공사를 하여 기본 대지를 조성하였다[5]. 당연히 이 공사에는 엄청난 양의 자재와 노동력, 그리고 고도의 토목기술을 요한다. 이 때문에 성왕대의 백제에는 고도로 발달된 전국단위의 역역(力役) 체계가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3.2. 성곽[편집]


가장 특징적인 구조물은 시가지 전체를 둘러싸는 나성이다. 한반도 국가에서 수도 시가지 전체를 둘러싸는 나성은 사비성이 처음이다. 나성은 북나성과, 동나성의 경우 토석혼축으로 쌓아올렸으며, 청산성과 같은 부속 방어성도 나성과 직접 연결되어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방사상으로 산성들이 배치되어 수도로 접근하는 적들을 차단한다.

서나성은 예전부터 그 존재가 추정되어 왔으며 실제 명확한 인공구조물도 확인되었으나, 발굴 결과 모두 후대의 제방으로 밝혀졌다. 남나성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 조사 결과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도 육지로 접근이 가능한 부분에는 북나성과 동나성을 쌓아 방어하고, 금강으로 차단된 쪽에는 따로 성벽을 쌓지 않고 망루, 목책, 마름쇠 같은 전술차단물로 방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부여 나성 문서 참조.

나성 주변에는 부산성, 청산성, 청마산성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전술한대로 금강에 면한 도성의 서쪽과 남쪽에는 성벽이 없기 때문에 강 건너편에 부산성을 쌓아 도하를 시도하는 적을 차단하고자 한 의도가 보인다. 이외데도 북나성 구간에도 산 봉우리에 작은 청산성을 쌓았다. 청산성은 최근 발굴 조사에서 정상부의 여러 대형 건물지들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곳의의 전망이 탁월하기 때문에 도성의 동북방면 지휘소 같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성의 동편 바깥의 청마산에 있는 청마산성은 거대한 포곡식 산성으로 백제시대 성으로 알려졌지만, 학자에 따라 통일신라, 고려, 심지어 조선(...)시대 성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시기의 성이라기엔 나성의 규모를 뛰어넘는 거대한 성이 뜬금없이 왜 이 곳에 있는지 의문이긴하다. 실제로 사비성의 구조는 구당서나 신당서, 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본기에서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청마산성이 있었으면 벌어져야 할 상황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6] 통일신라시대라기에는... 신라는 부여 나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심지어 부소산성을 내외성으로 보강하였기 때문에 이만한 대규모의 성곽을 나성에 인접하여 쌓은 것이 의문이긴하다. 산성 내에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유물이 다양하게 채집되고 있으므로 청마산에 백제시기부터 모종의 시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이나 이것이 성벽의 축조시기를 담보해주진 않는다. 앞으로의 발굴조사를 기대할 뿐이다.

부소산성은 사비성의 내성 및 대피성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의 백제 도성이 본성+대피성 체제였다면, 사비성의 경우는 본성과 대피성이 융합된 체계. 자세한 것은 부소산성 문서 참조.


3.3. 도시계획[편집]



3.3.1. 도로[편집]



파일:external/edhlab.com/baek4.jpg

관북리 유적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

일제강점기때부터 부여군에서 격자 도시구획이 관찰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따라서 일제 고고학자, 사학자들은 이것이 일본 아스카쿄, 헤이조쿄에서 보이는 계획 도시의 원류가 아닐까 하는 추정도 하였다. 실제로 발굴 결과 관북리 유적 앞의 주작대로로 추정되는 대로부터, 여러 도로들이 격자 구조로 나있음이 밝혀졌다. 수당의 장안성의 완전 바둑판식 구획, 즉 조방제가 사비성에 적용되었을 가능성도 지적되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성내의 군수리사지, 정림사지도 이 격자 배치에 맞게 배치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알려진 도로나 사지를 이용해 가상의 방의 크기를 설정하고, 사비도성 전체의 도로망의 배치를 추정하는 연구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발굴 결과에 따르면 성 전체적으로 격자 구조의 도로망이 발견되지만, 수당 장안성처럼 엄격하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즉 도로 간격이나 일정치 않거나 너비도 일정치 않은 부분도 있었고 지형에 따라서 비스듬하게 교차하거나 심지어 없기도 하는(...) 식으로 도로가 나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위 지도에서도 보이다시피, 주요 건물지들의 축선이 꼭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나타난다. 실제 사비성의 축조시기(537년)은 수당의 장안성보다 빠르기 때문에 수당 장안성이나 그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 아스카쿄, 헤이조쿄와 같이 엄격한 조방제가 시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비도성은 아마도 남조의 남경성이나 북조의 업성, 혹은 한나라대 축조된 장안성을 규범으로 하여 지형에 맞게 도로 구획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 시기의 도성인 풍납토성, 몽촌토성에도 최근 도로 자료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부여 관북리 유적 앞에 남북으로 뻗은 주작대로와 같은 성질의 도로유구도 있어서[7] 이러한 도시 계획이 한성기때부터 이어진 것일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자면 사비성의 도시구획을 무작정 외부에서 직도입된 것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3.3.2. 왕궁[편집]


관북리, 쌍북리 유적, 몽촌토성 및 왕궁리 유적과의 관련성

사비궁의 위치는 현재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관북리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형건물지와 기와기단건물, 창고, 연못, 배수로, 우물, 공방 등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왕궁리 유적에서만 나오는 수부(首府)명 기와가 발견되고, 대형건물지가 왕궁리 유적 건물지와 일치하는 등 관북리 유적이 백제왕궁의 일부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아직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많은 부분이 추측의 영역에 남아있다. 풍납토성만큼은 아니지만 관북리 유적 역시 발굴에 여러 애로사항이 꽃피는 곳이다.

태자가 머무는 태자궁(太子宮)이 존재했다. 사비궁 내부에 있던건지 외부에 있던 건지 확인 할 길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후계자가 머무는 동궁은 정궁 내부에 존재한다. 의자왕 대에 이르러 극히 사치스럽게 개축되었다고 한다.

화지산 유적은 백제의 이궁이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문헌기록과 주변환경을 봤을 때 백제의 이궁이였던 망해정(望海亭)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이므로 조사가 끝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쌍북리 유적을 발굴하던 중 잠동궁(岑凍宮)이라고 적힌 목간이 발견되었다. 어떤 문헌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이름으로 사비궁의 별칭이거나 혹은 별궁 또는 화지산 유적의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시대 당시에 지은 건물은 아니지만 백제문화단지에 현재까지 얻은 정보를 토대로 사비궁을 복원해놓았다. 고증면에서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지만 실물이 있다는 점에서 옛 백제의 궁궐을 가늠해 보기엔 나쁘지 않다.


3.3.3. 사찰[편집]


정림사지, 군수리사지, 부소산성 사지, 왕흥사지, 능사지


3.3.4. 능묘[편집]


능산리 고분군, 능안골 고분군, 염창리, 규암면 등


4. 관광지[편집]


전주 한옥마을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이며 대부분 복원이긴 하지만 잘 꾸며놓았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판타지 소설 "창천의 백제와 대해의 백제"에서는 동아시아 전체를 제패하고 이후 알려진 문명 세계를 정복하기 시작하는 대백제국의 2개의 도읍지(나머지 하나는 "한성" 지금의 서울특별시)중 하나로 나오는데 원래 도읍이다 보니 정쟁의 중심이며 이후 왕비와 왕자들을 외척도 숙청하고 그러면서 신라를 멸하고 일본을 몇 개의 귀족령을 제외하면 직할령으로 삼고 당나라를 멸하고 강남 지역을 직할령화 하면서 돌궐의 대칸이 되고 고구려를 아래로 두면서 금화 은화도 생산하고 세계적으로 가장 큰 도서관(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 로마제국 후기의 혼란기와 이슬람 제국의 점령 등으로 파괴되고 복구하다 서서히 입지가 좁아지고 결국 작중 시기에서는 사라졌다)을 두고 주변국으로 인재를 받아들이는 원래 역사보다 거대한 대제국의 수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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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30대 무왕 시기에 금마저로 천도했다가 의자왕 때 사비로 다시 돌아왔다는 설도 있다. 왕궁리 유적 문서 참조.[2] 백제 지명 중에는 -부리로 끝나는 것이 많다. 아마도 "벌판"을 음차한 것으로 본다. 신라,가야가 있던 영남지역에는 '벌' 또는 '불'을 훈을 음차해서 '火'로 표기되기도 한다. 북부 큐슈에는 벌판 "原"을 "바루"로 읽는다.[3] 의자왕은 급히 웅진성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붙잡혔다.[4] 웅진, 즉 공주시는 평지가 좁아서 한 나라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아서 천도했지만, 이제 더 이상 수도가 아니기에 드넓은 부여 대신 공주로도 지역 행정 중심지 역할은 충분하다고 보았던 듯 하다.[5] 이 때문에 부여읍의 충적대지를 발굴하면 백제 이전으로 올라가는 문화층은 거의 조사되지 않는다. 사비성 조성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저습지인데다가, 어렵사리 모래톱같은데 마을을 건설한다 해도 강이 범람하고 유로가 바뀌어 터전이 박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성 내의 산지나 산기슭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산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6] 나당연합군은 사비성 동쪽과 동북쪽에서 공격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가운데를 누르고 있는 위치에 있는 청마산성은 사비성의 가장 큰 약점인 동편을 방어할만한 핵심 거점이었음에도 전투진행 과정에서 관련된 기록이 전혀없다.[7] 폭 20m 정도로 주작대로라기엔 좁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