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가와 히로시

덤프버전 :


1. 개요
2. 생애
3. 담당 작품
3.1. 감독작
3.2. 총감독작
3.3. 콘티 & 연출
3.4. 원안 및 감수


1. 개요[편집]


笹川ひろし 1936. 7. 9. ~ (87세)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 출신의 애니메이션 감독, 만화가, 작가로써, 타츠노코 프로덕션이 창립한 1962년부터 연출가로 활약하며 1970,80년대 타츠노코 황금기의 대표적 감독 중 1명으로 꼽힌다.

개그 장르의 애니메이션들을 많이 감독한 것 때문인지 개그 애니메이션의 제왕, 애니메이션계의 하기모토 킨이치로 불리기도 했지만, 본인은 정작 신조인간 캐산과 같은 진지한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는데 우주의 기사 테카맨의 실패 후로는 재채기 대마왕 [1] 타임보칸 시리즈 같은 개그 작품이나 만들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1975년엔 이사 겸 연출 부장으로 연수생들을 모집, 연출가 요원으로서 마시모 코이치, 우에다 히데히토, 니시쿠보 미즈호, 오시이 마모루를 채용해냈다.[2] 이 4명을 뽑은 이유는 한동안 연출가를 뽑아서 가르쳐보니 영 시원치 않아서 "토에이 애니메이션처럼 대학 졸업자만 연출을 시켜보면 똑똑한 연출을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대학 나온 애들만 모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스튜디오 피에로의 대표 누노카와 유지도 사사가와 히로시의 제자였다. 사사가와의 개인 사무소에는 오사다 노트, 카미키타 코타치, 이마가와 야스히로, 모키 지사토 등이 재적한 적도 있었고 한다.

타임보칸 시리즈에 등장하는 사사야키 리포터는 자신이 모델로써, 두뇌 담당 캐릭터(그롯키, 보얏키, 코스이넨 등)도 사사가와 자신이 모델이라고 한다. 얏타맨에 등장하는 도론죠의 본명도 사사가와 히로코로 자신의 성씨인 사사가와(笹川)에서 따와 이름을 붙였다.

연출 실력이 상당히 뛰어나고 어린이의 감성을 잘 읽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만화가 출신이라 화면 구도가 상당히 평면적이고 카메라 구도를 단단히 고정한다. 그래서 만화나 그림책을 TV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액션 연출을 못 하는 건 아닌데 카메라 구도를 단단히 고정하고 무술 액션에 집중하는 타입이라 초창기 성룡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이라 액션에서 저평가를 받기도 한다.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개그 애니 위주로 감독을 시킨 것도 이유가 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제자 4천왕은 전부 사사가와와 반대로 입체적인 연출과 자유로운 카메라 워크를 구사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사사가와 히로시에게 "어린이들은 애니메이션이 조금이라도 재미없으면 고개를 돌린다. 어린이가 고개를 돌리면 너는 진 것이다. 재미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라."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 그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는 있지만 사사가와가 가르친 연출법 중 자신과 안 맞는 것도 있어서 스승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사가와 히로시는 오시이에게 "애니메이션에선 대화를 1분 이상 치면 안 된다. 지루해진다." 라고 가르쳤는데 반대로 토리우미 히사유키는 "대사를 제대로 쓰기만 하면 그 어떤 대화도 재밌고 지루하지 않다." 라고 가르쳤고 그때 오시이는 토리우미와 뜻이 통하면서 이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2009년에 제작된 EBS의 국가경쟁력 리포트 다큐멘터리에 잠시 등장하기도 했다.1분 43초 부분

2. 생애[편집]


고향에서 만화가의 꿈을 가지면서 데즈카 오사무에게 만화를 계속 투고하였고, 1957년 데즈카의 권유로 도쿄로 이동해 풀 타임 전속 어시스턴트가 되었으며 이듬해 9월부터 1959년 3월까지 소년 화보에서 연재된 '탐정 학교'로 만화가에 데뷔했다. 이후 철완 베이비를 연재한 뒤, 1963년 소년 킹에서 연재한 마견고로는 9년 후인 1972년에 토에이 동화에서 '마견 라이너 0011 변신하라!'로 애니메이션화되었다.[3]

데즈카의 어시스턴트에서 독립한 후, 무시 프로덕션의 tv 애니 철완 아톰의 그림 콘티를 그린 것으로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 당시 친분이 있던 요시다 타츠오[4]에게 애니메이션 제작을 제안했다. 같은 시기 타츠노코 프로에서 토에이 동화와 TV 애니메이션을 공동 제작하는 기획이 반입되어 이야기가 흘러갔지만, 결국 타츠노코 프로 단독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다가 고향 친구의 권유로 1979년 9월, 도쿄동화로 이적해서 타츠노코 프로를 퇴사한 후에도 타임보칸 시리즈의 총감독을 맡는 것과 동시에, 우주전함 야마토 3의 콘티, 연출을 맡기도 했다.

이무렵 도쿄동화는 신에이 동화의 하청을 맡게 되어, 그것이 작용해 닌자 핫토리군의 총감독을 맡게 된다. 이윽고 시청자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1981년, 토에이 동화에서 백수왕 고라이온을 감독하기도 했다.[5]

시간이 흘러 1990년 애니메이션 기획 회사 스텝21의 사장으로 근무하던 중, 애니메이션21의 설립에 참가하였다. 이후 스기이 기사부로가 사장을 맡은 타츠노코 애니메이션 연구소의 애니메이터가 대거 이적했고, 애니메이션 제작 증가와 버블경제 붕괴의 영향이 겹쳐 애니메이션21은 해산되었다. OVA 타임보칸 왕도 복고에 감수로 참가한 것이 작용해, 1994년에 타츠노코 프로덕션에 복귀했다.[6]

시대가 21세기에 들어서며 잠시 연출 활동에서 손을 떼고 경영 활동에 몰두하다가 2021년 비트킹 THE Dancing HERO에서 이그제큐티브 디렉터로 제작 현장에 복귀했다.


3. 담당 작품[편집]



3.1. 감독작[편집]



3.2. 총감독작[편집]




3.3. 콘티 & 연출[편집]




3.4. 원안 및 감수[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2 05:12:59에 나무위키 사사가와 히로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한국에선 마이너하지만 일본에선 타츠노코 프로의 이름을 알린 히트작이었다.[2] 이들은 이후 타츠노코 4천왕으로 불린다.[3] 마견고로는 신조인간 캐산에 나오는 개 프렌더의 원형이기도 하다.[4] 1977년 그가 작고한 뒤로는 요시다 켄지, 요시다 토오하루가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5] 타츠노코 외 제작사에서 감독한 첫 작품. 그러나 타츠노코와 토에이의 작풍이 상반되는 탓인지 로봇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재미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나마 주역 메카인 고라이온의 완구가 워낙 대박이었던지라, 조기종영 되는 일 없이 무사히 52화 전편 다 방영할 수 있었다. 게다가 훗날 볼트론이라는 타이틀로 미국에 소개되어 대히트를 기록했다.[6] 2009년 3월 개봉된 실사판 얏타맨에서는 도론죠 일당의 사기 장사에 속는 손님으로서 카메오 출연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