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야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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狭山事件 (さやまじけ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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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사

1. 개요
2. 사건의 전개
2.1. 나카타 요시에의 사망
2.2. 범인 체포
2.3. 범인의 혐의 인정과 번복
3. 50년간의 법적 공방
3.1. 이시카와가 범인이다.
3.2. 이시카와는 범인이 아니다.
3.3. 답답한 일본 사법계
3.4. 계속되는 법적 투쟁


1. 개요[편집]


1963년 5월 1일일본 사이타마현 사야마시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이 시의 부농(富農)이자 구청장의 넷째 딸이었던 고등학교 1학년생 나카타 요시에(中田善枝, 당시 16세)가 납치되어 강간을 당한 뒤 살해된 사건이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이시카와 가즈오(石川一雄, 당시 24세)를 체포했으나 그가 일본에서 거의 천민 취급을 받는 부라쿠민 출신이라 이 사건을 구실로 부라쿠민을 탄압하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고 이시카와는 사건 이후 초지일관으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였으나 무죄라고는 인정되지 않았다. 즉 살인사건인 동시에 미제사건이 아닌지 의심받는 사건이다.


2. 사건의 전개[편집]



2.1. 나카타 요시에의 사망[편집]


1963년 5월 1일 나카타 요시에는 반 친구에게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평소와 달리 조기 하교하였지만 사실 요시에의 집에서는 딸의 생일을 딱히 축하해 주려는 준비나 의도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하교한 요시에는 학교 근처 우체국에서 1964 도쿄 올림픽 기념 우표를 예약했다. 오후 3시 20분경 요시에와는 잘 아는 사이인 주민 N씨는 학교로 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세이부 철도 가드레일 쪽에서 요시에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봤다. 이때 N씨 이외에도 목격자 2명이 있었다. 이것이 요시에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 그들은 미처 몰랐다.

가족들은 오후 6시가 되도록 딸이 나타날 생각을 않자 걱정하였고 마침내 요시에의 오빠(당시 25세)가 요시에를 찾으러 나섰다. 먼저 요시에의 오빠는 학교로 가서 동생이 어디로 갔는지 물었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수소문 이후 7시 반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요시에의 오빠는 문 틈 사이로 낀 편지 봉투를 발견했다. 봉투 안에는 아이를 살리고 싶거든 내일 자정에 돈 20만 엔을[1] 내놓아라. 경찰과 이웃에게 알릴 경우 딸의 목숨은 없다.'는 협박편지가 들어 있었다. 협박편지를 읽고 오빠는 요시에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여 7시 50분에 호리가네 파출소에 신고했다. 파출소 측에서는 다시 사야마 경찰서에 연락해 협조를 요청했다. 사야마 경찰서 측에서는 유괴사건이라 판단하고 긴급수사체제를 편성했다.

이상하게도 범인(들)은 집안의 여자가 돈을 들고 올 것을 지시했는데 결국 요시에의 언니(당시 23세)가 5월 2일, 밤 11시 40분에 경찰과 함께 위조지폐 20만 엔을 들고 협상 장소로 갔다. 협상 장소는 편지에 적힌 대로 '사노야'라는 술집의 문 앞이었는데 근처에 경찰관 40여 명이 잠복해 범인을 체포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만 사소한 실수 하나로 일이 꼬이고 말았다! 요시에의 언니가 범인을 기다리면서 경찰관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그 광경을 그만 범인이 보고 만 것이다. 그자는 경찰이 잠복했음을 알아차리고 도주해 버렸다. 결국 경찰은 범인을 체포할 결정적인 기회를, 어쩌면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최고의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협상이 결렬된 이후 더 이상 협박편지나 전화 따위는 없었다. 수사를 계속하던 경찰관들은 3일 새벽에 사노야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밭에서 범인의 족적을 발견했다. 수사관은 경찰견을 앞세워 발자국의 뒤를 쫓게 했지만 오가와라는 곳 근처에서 더 이상 추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경찰견이 멈춘 자리 바로 앞에는 양돈장이 보였다. 그 양돈장의 주인과 가족, 종업원들은 모두 사야마시 내의 부라쿠민들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 양돈장이 요시에가 학교를 갈 때 자주 이용했던 통학로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아침 사이타마 현경은 이 사건을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아침부터 경찰관 45명과 현지의 소방단원 45명을 동원해 산속을 조사하는 한편 수사원 165명을 동원해 용의자들을 심문하였다. 사건 수사의 총지휘를 맡은 사이타마 현경의 본부장은 "사야마시에 거주하는 현지인"이 범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범인을 조기에 검거하겠노라 굳게 약속했다. 나카 이사오 수사 본부장도 이 사건의 범인은 주변 지리에 밝은 인물이라며 사건을 조기에 해결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5월 4일 오전 10시경에 허무하게도 나카타 요시에는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실종된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시신은 사야마시 이루마가와의 잡목림에서 보리밭으로 이어지는 농로(農路)에 암매장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이타마 현경의 의뢰로 나카타의 집에서 사법해부가 실시되었다. 법의학자들은 나카타 요시에의 시신을 정밀하게 부검한 결과를 발표했다. 우선 요시에의 사인은 경부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판정되었다. 즉 목이 졸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요시에가 죽기 직전에 누군가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밝혀진 것이었다.

이쯤 되면 강간이 아닐까 의심되었지만 요시에가 저항한 흔적은 없었다. 요시에가 강간을 당했다고 보기에는 살짝 부족한 증거였지만 경찰 측은 소녀가 강간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질 내에 사정을 했는지 정액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정액에서 검출된 혈액형은 B형이었다. 요시에의 위 안에는 반쯤 소화된 음식물이 약 250 mL 정도 남아 있었다. 법의학자들은 요시에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고 약 2~3시간 이내에 살해되었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위 속에는 감자, 양파, 콩, 채소의 잎, 밥, 당근의 반소화물 외에도 토마토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후에 동급생이 법정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피해자가 실종 당일 정오에 점심으로 먹었던 조리실습의 카레라이스에는 토마토가 없었다고 한다. 시신의 정황과 동급생의 증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문이다.

그리고 요시에의 후두부에는 둔기로 가격당한 듯한 상처가 있었는데 살아 있을 때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배와 다리에는 무언가로 할퀸 상처가 있었다. 이로 볼 때 범인은 요시에를 유인해 성교를 한 뒤 둔기로 뒷머리를 때려 기절시키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2.2. 범인 체포[편집]


당시 일본 경찰은 본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1963년 3월)에 발생한 이른바 요시노부 유괴 살인 사건(吉展ちゃん誘拐事件) 직후 결정적인 실책을 범해 범인 체포에 실패했다. 그로부터 불과 2개월 만에 여학생이 납치된 후 살해당한 본 사건이 일어나자 엄청난 사회적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나카타 요시에의 시신이 발견된 5월 4일에는 당시 일본 경찰청장 가시와무라 노부오(柏村信雄)가 사임했고 사이타마 현경은 165명으로 구성된 특별수사본부를 발족했지만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그런데 시신이 발견된 그날 특별수사본부에서는 앞서 경찰견의 추적이 끊겼던 그 문제의 양돈장에서 삽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경찰견이 냄새를 추적하다가 그 양돈장 앞에서 멈추었기 때문에 경찰들은 양돈장 관계자들을 강력하게 의심하여 양돈장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다 심문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양돈장 주인으로부터 며칠 전에 삽이 분실되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양돈장에 삽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양돈장 관계자들밖에 없었고 투견으로 유명한 사나운 도사견이 양돈장을 지키고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날에는 도사견이 짖었다는 말이 없었으므로 삽을 훔쳐간 자는 그 양돈장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양돈장 관계자로 표적을 좁히곤 특명수사반을 조직해 양돈장 관계자를 대상으로 수사를 개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1일 그 양돈장의 삽은 이루마가와의 어느 밀밭에서 발견되었다. 삽에는 나무 부분에 식용 기름이 발라져 있었기에 양돈장에서 쓰인 삽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삽에는 흙이 묻어 있었는데 요시에의 시신이 묻현던 곳의 흙과 같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누군가가 요시에를 살해하고 양돈장의 삽을 훔쳐내 시신을 암매장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2일이 지난 5월 23일 마침내 경찰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양돈장 근처에 거주하는 부라쿠민 이시카와 가즈오를 긴급 체포했다. 사실 이시카와는 본 사건이 아니라 상해, 절도 건으로 체포되었다. 이시카와는 소학교 5년을 마친 후 농가의 아이 돌보는 일을 했고 신발 제조기술을 배워 제화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으며 토공(土工)을 거쳐 양돈장에서 머물며 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그가 범인이라고 의심한 결정적인 근거는 양돈장 관계자 21명 중에서 혈액형이 B형인 사람은 오직 이시카와 가즈오뿐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이시카와가 살던 부락에는 양돈장 관계자가 많았고 그 또한 사건의 3개월 정도 전까지 양돈장에서 일했다고 밝혀졌다.

조기에 범인을 검거하겠다고 선언한 경찰은 마침내 이렇게 약속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범인 이시카와 가즈오를 체포함으로써 본 사건도 이렇게 사건 발생 22일 만에 해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3. 범인의 혐의 인정과 번복[편집]


이시카와를 체포한 경찰은 20일에 걸쳐 강도 높은 심문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시카와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며 버텼다. 결국 이시카와 측의 변호사가 보석을 신청하였고 허가가 내려져 6월 17일에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석방 직전에 경찰은 강도, 강간, 살인, 사체유기 혐의를 적용해 다시 이시카와를 체포했다. 다시 체포된 이시카와는 마침내 6월 20일에 자신과 함께 총 3명이서 나카타 요시에를 간음한 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21일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요시에의 책가방이 매설된 곳을 약도로 그려서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 자백에 근거해 경찰은 마침내 피해자의 유품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6월 24일 이시카와 가즈오는 3인이 공모해 저지른 게 아니라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진술을 번복했다. 그 뒤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유품인 피해자의 만년필과 손목시계에 대해서도 자백하여, 경찰은 그 자백에 근거해 6월 26일에 이시카와의 집에서 만년필을 발견했고 7월 2일에 손목시계를 발견했다. 이런 일들을 근거로 볼 때 범인이 이시카와 가즈오라는 건 명백한 사실임에 틀림없었고 사건도 다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 해 7월 9일에 첫 재판이 열렸다. 우라와 지방재판소(현재의 사이타마 지방재판소) 1심 재판에서 이시카와 가즈오는 다시 한 번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였고 마침내 6개월 뒤인 1964년 3월 11일에 범인 이시카와 가즈오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범인 이시카와는 다음 날인 3월 12일항소했다. 사형이란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해 감형을 받을 목적으로 항소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1964년 9월 10일, 항소심의 제1 공판이 열렸다. 경찰, 검찰 측에서는 자신들의 예상대로 그저 형을 감면받을 목적으로 항소했겠거니 하고 여유롭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경찰 조사와 1심 재판 때는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던 이시카와 가즈오는 갑자기 법정에서 자기 진술을 번복했다.

피고인 이시카와 가즈오는 경찰 조사 때와 1심 때는 경찰과 검찰의 집요하고도 잔혹한 강압수사와 허위의 사법거래 따위로 자백을 강요당했고 자신은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렸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검찰과 경찰 측에서는 모두 멘붕에 빠져 버렸고, 이를 기점으로 이시카와 가즈오와 일본 검경 사이에서 50년간 벌어질 피 말리는 두뇌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


3. 50년간의 법적 공방[편집]


경찰 측의 말만 들어 보면 정말로 이시카와가 범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범인이 아니라고도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시카와 진범임을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할 만한 결정적인 물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시카와가 범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거기다 이시카와가 부라쿠민이라 누명을 쓴 것이 아니냐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3.1. 이시카와가 범인이다.[편집]


일본의 경찰과 검찰은 이시카와 가즈오가 범인이라고 강력하게 밀었다.

이시카와가 범인이라는 첫 번째 근거는 협박장이었다. 처음 나카타 요시에의 집 문 틈에 꽂힌 협박장은 글쓰기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 예를 들면 時란 한자에서 우방 寺의 머리 부분은 土인데 협박장에는 主로 잘못 쓰였다. 이는 범인이 문맹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당시 일본에서 문맹 비중이 가장 높았던 부라쿠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시카와가 체포 전 다니던 직장에서 조퇴신청서를 썼을 때 히라가나つ(츠)라고 써야 할 부분을 가타가나로 썼고 날짜를 적으며 한자와 아라비아 숫자를 같이 썼다. 일본어 조사 [2]를 음만 같은 로 썼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이시카와는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서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운 탓에 글을 쓰며 기초적인 실수를 범한 듯싶었다. 이는 범인이 제대로 글을 배우지 못한 부라쿠민일 것이라는 추리와 맞아떨어지므로 이시카와가 범인이라는 첫 번째 근거였다.

두 번째 근거는 이시카와가 협박장을 피해자 가족에게 전달하러 가던 도중 가마쿠라 가도(街道)에서 자동삼륜차에 추월당했다고 진술했다는 점이었다. 이 자백 후에 경찰이 증인을 찾았을 때 확실히 같은 시각에 가마쿠라 가도를 자동삼륜차로 지났다고 하는 증인이 발견되었다. 또 이시카와는 협박장을 전하러 가던 도중에 피해자의 집 근처에 있는 농가에 피해자의 집 위치를 물어봤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그 농가를 찾아가 확인한 결과 그때 그 농가에 피해자의 집 위치를 물었던 사람의 모습은 이시카와의 두상과 머리 모양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또 이시카와는 협박장을 피해자의 가족에 전하러 가던 중에 피해자 집의 2~3개 동 인근의 도로에 자동차가 정차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조사 결과 그때 피해자 집의 2동 근처에 비료상이 라이트 밴[3]을 세워 뒀음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세 번째 근거는 증인이었다. 몸값을 전달하기 위해 피해자의 언니와 함께 협상장소로 갔던 호리카네 중학교 교육진흥회의 회장은 '범인의 목소리와 이시카와의 목소리가 완전히 동일했고, 목소리로부터 받는 느낌이 전체적으로 같았다.'고 증언했다. 처음 이시카와는 '5월 1일은 17시 경까지 형과 함께 일을 했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했는데 이후 이 알리바이는 반증(反證)되어 이시카와의 허위가 증명되었다.

검찰 측에서는 이상의 근거를 토대로 이시카와 가즈오가 본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3.2. 이시카와는 범인이 아니다.[편집]


변호인 측에서는 당연히 이시카와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검찰 측이 이시카와가 범인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았던 증거들, 즉 손목시계와 만년필, 가방 등이 모두 날조되었다고 반박했다. 먼저 손목시계를 예로 들면 당초 수색으로 발견되어 발표된 품명은 시티즌 코니였다. 특히 사이타마 현경은 특별 중요증거품으로, 5월 8일에 나카타 요시에의 손목시계를 수배했는데 그 물건은 코니 6형으로 개체식별정보(個体識別情報: C6803 2050678)까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발견된 것은 시티즌 배트였으니 다른 물건이라고 봐야 했다.

또 만년필은 안에 블루블랙 잉크가 있었다. 피해자가 당일 수업 중 필기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잉크는 라이트블루였기에 발견된 만년필이 이시카와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특히 이시카와의 집은 자백 이전에 몇 번이나 수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필을 발견하지 못했다가 갑자기 이시카와가 자백한 뒤에 만년필을 발견했다니 매우 의심스러웠다. 이시카와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그 만년필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쉬운 부엌 문틀에 있었다. 이 역시 이시카와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경찰이 조작한 증거가 아니냐고 변호인은 주장하였다.

또 변호인은 이시카와가 문맹이라는 점, 협박장의 필적과 이시카와의 필적이 다르다는 점을 들어 이시카와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특히 저명한 일본어학자 오노 스스무(大野 晋)는 검찰 측에서 증거로 제출한 협박장의 필적 및 문장이 이시카와의 낮은 일본어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분석하고 "협박장은 피고인이 쓴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3.3. 답답한 일본 사법계[편집]


일본 사법계가 매우 경직된 구조이고 답답한 체계임은 유명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 답답함이 더욱 심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재판에서 변호인 측이 주장한 근거들은 모조리 무시되었고 결국 이시카와 가즈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일본 법원이 변호인 측의 주장을 기각한 근거는 아래와 같다.

손목시계에 대하여: 발견된 손목시계와 실제 나카타 요시에가 찼던 손목시계는 각기 일련번호뿐만 아니라 아예 제품명까지 다름이 드러났다. 하지만 법원은 "일련번호는 수사관이 물건 목록을 작성하기 위한 견본으로 사용한 동종동형의 손목시계의 일련번호를, 경솔하게도 그대로 기재한 것이 증거상 명백하다."고 밝혔다. 즉 일련번호가 다름은 수사관이 부주의하여 범한 실수일 뿐이라는 참으로 황당한 판결이었다. 정말로 수사관이 실수로 잘못 기재했음을 입증할 근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또 그 손목시계는 요시에와 요시에의 언니가 번갈아 사용했던 적이 있는제 그 경우 각각 다른 밴드를 사용했는데 본건 손목시계의 밴드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밝혔다.

만년필에 대하여: 제3자가 블루블랙 잉크를 보충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증거로 제출된 만년필이 피해자의 것이 아님을 입중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시카와의 집을 몇 차례나 뒤졌어도 나오지 않다가 이시카와가 자백한 만년필이 발견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문틀의 높이로 보아 수사관의 눈이 닿을 만한 장소라고 하기 힘들고 수사관이 그 장소를 놓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인다며 또 수사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이는 수사관이 자세히 조사를 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이 사실에 대해 법원은 어떠한 해명도 하지 못했다.

필적에 대하여: 협박장의 필적과 이시카와의 필적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시카와의 식자(識字) 능력을 두고는 이시카와가 14세 때 석 달간 히라가나와 한자를 배웠던 점, 고객의 성명을 한자로 썼던 점과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점, 친구로부터 교통법규와 자동차 구조에 관한 책을 빌려 읽은 적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다른 보조수단을 사용해 연습한다면 이시카와가 협박장을 작성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결을 내렸다. 일본어학자 오노 스스무가 내린 감정 결과에 대해서는 그저 "전문적인 소견으로 보기 어렵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를 들어 묵살했다. 결국 이시카와 가즈오는 1974년 10월 31일에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3.4. 계속되는 법적 투쟁[편집]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1977년 9월 8일에 이시카와는 치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새로운 증거를 가지고 온 변호인의 도움을 얻어 여러 번 재심 청구를 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특히 1999년 2차 재심 청구를 기각한 사람은 아시카가 사건 때 스가야의 항소심을 기각한 것으로 악명 높은 재판관 다카기 도시오(高木俊夫)였다. 1994년 12월 21일 사건 발생 후 31년 7개월 만에 가석방되어 풀려났으며 현재까지도 생존 중이다.

이시카와 가즈오는 유죄를 인정한 적이 없고 가석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원 단체들의 도움을 얻어 법적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법적 투쟁을 벌이긴 하지만 아직도 무죄 판결을 받아내지 못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시카와가 범인이라고 볼 근거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죄 판결을 받지 못하였음은 일본 사법계의 현실이 얼마나 시궁창인지, 고질적인 엔자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준다. 부라쿠민 관련 단체에서는 이시카와 가즈오의 법적 투쟁을 부라쿠민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적극 지원한다고 한다.

만일 이시카와 가즈오가 범인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본 사건은 결국 영구 미제사건이 되고 일본 검경의 끼워 맞추기 수사로 말미암아 정말로 잡아야 할 범인은 놓치고 엉뚱한 사람을 징역살이 시켰다는 결론이 나온다. 특히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요시에의 언니는 슬픔을 못 이기고 사건이 일어난 몇 달 후에 음독자살까지 했다고 한다. 검경의 삽질로 진짜 범인은 누구인지 미궁에 빠졌고 공소시효도 지나 버려 진범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로 이시카와 가즈오가 이 사건의 범인이었는가, 아니면 엉뚱한 사람을 조져서 진짜 범인이 그 틈에 유유히 빠져나갔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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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의 환율로는 한화 211만 원 정도인데 1963년의 물가를 감안하면 대략 2-3천만 만 원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2] 읽을 때는 わ(와)이지만 조사로 쓸 때는 は(하)로 쓴다. 옛날에는 は를 '하' 또는 '와'로 읽었고 조사로 쓰이는 'は'는 '와'로 읽었다. 현재는 '와' 발음을 わ로만 쓰고 'は'는 '하'로만 읽도록 바꾸었는데 조사의 경우 예외로 하여 발음에 맞는 わ가 아닌 옛날 표기 그대로 は로 쓰도록 하면서 발음과 글자가 달라졌다.[3] 좌석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소형 화객(貨客: 화물과 승객) 승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