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다 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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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가수, 배우, 작사가, 작곡가. 1967년 결성된 더 타이거스의 보컬로 데뷔, 1971년 더 타이거스 해체 후 싱글 「君をのせて(너를 태우고)」로 솔로로 데뷔해 큰 인기를 얻은 쇼와 시대 일본의 대표적인 남성 가수 중 한 명이다. 별명은 ジュリー(줄리).
2. 활동[편집]
2.1. 데뷔까지[편집]
1948년 6월 25일, 일본 돗토리현 돗토리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께서 마이즈루시 내의 화약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계셨고, 둘째 아이였기 때문에 이름을 "켄지"라고 지었다고 한다.사와다 켄지 이름의 유래는?
어린 시절에는 활발한 성격이었고 중학교 시절에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교내에 팬클럽이 있었다고 한다. 야구부에 들어가 캡틴까지 맡으며 진심으로 프로 선수를 지향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교토시 대회에서 4위를 한 이후 야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가라테부에 들어갔지만 야구라는 큰 목표가 사라진 후 고등학교 생활이 힘들었다고 밝혔다. 재즈 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산타즈"라는 밴드에서 보컬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 무대를 보고 있던 키시베 잇토쿠에게 스카우트되어, 그의 밴드의 보컬로 들어가게 되며 고등학교를 자퇴한다.
1966년, 사와다 켄지는 히토미 미노루, 키시베 잇토쿠, 모리모토 타로, 카하시 카츠미와 함께 정식으로 "샐리와 플레이보이즈"의 멤버가 되고, 밴드명은 "퍼니즈"로 바뀌었다. 더 타이거즈의 전신 밴드였던 "퍼니즈"는 난바의 재즈 다방 "난바 이치방(ナンバ一番)"의 전속 오디션을 보고 2월부터 주 2일 공연 계약을 맺었다. 이 재즈 다방에서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의 곡을 커버해 공연했고, 이때부터 다섯 명은 오사카시의 아파트에서 합숙생활을 했다.
이후 "퍼니즈"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우치다 유야의 권유로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오디션을 보고, 계약을 맺는다. 1966년 11월 9일 상경하여 폴리돌 레코드(당시 일본 그라모폰, 현재는 유니버설 뮤직 재팬에 합병됨)의 오디션에 합격해 레이블이 정해지고 세타가야구의 집에서 매니저를 포함한 6명이서 지냈다.
2.2. 커리어[편집]
2.2.1. 데뷔[편집]
동년 11월 15일, 처음으로 더 히트 퍼레이드에 출연해 TV데뷔를 하게 된다. 녹화 당일, 방송 디렉터였던 스기야마 코이치가 "더 타이거스"라는 새 밴드명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첫 TV출연은 당시 미국의 인기 펑크록 밴드였던 폴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의 곡을 커버했으나, 연주 시간은 고작 30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더 타이거스는 1967년 2월 5일에 싱글 「僕のマリー(나의 마리)」로 데뷔하고, 두 번째 싱글 「シーサイド・バウンド(시 사이드 바운드)」이 대히트를 친 이후 「モナリザの微笑(모나리자의 미소)」, 「君だけに愛を(너에게만 사랑을)」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그룹 사운드의 정점에 올라선다. 이 때 사와다 켄지는 특히 준수한 용모로 10대, 2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열광적 인기를 얻는다. 이후 1969년 3월 1일 미국의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의 표지를 일본인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식하게 되지만 1971년 1월 24일 일본무도관에서 밴드는 해체하게 된다.
더 타이거스의 해체 후, 사와다 켄지는 PYG라는 밴드에 참가하나, 아직 일본 내에서 반체제의 장르였던 록을 연주했기 때문에 청중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2.2.2. 솔로 데뷔[편집]
2.2.2.1. 70년대[편집]
1971년 11월 1일 싱글 「君をのせて(너를 태우고)」로 데뷔했으나 오리콘 차트 23위에 머무르며 누계 매상은 10만장에 그쳤다. 그러나 1972년 3월 11일 발매된 세컨드 싱글 「許されない愛(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이 오리콘 차트 4위를 기록하며 솔로로서 첫 오리콘 톱10에 진입하며 1973년 4월 21일 발매된 「危険なふたり(위험한 두 사람)」이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대히트를 쳐 사와다 켄지는 처음으로 제4회 일본가요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 제4회 일본가요대상은 역대 최고 시청률인 47.4%를 달성하며 사와다 켄지의 가수로서 인지도와 인기가 굳혀지고, 익년 발표한 「追憶(추억)」역시 2연속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한다. 이 해 처음으로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매년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하고 있다. 1975년 1월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진출해 프랑스에서는 연간 라디오 차트에서 톱4에 진입, 프랑스의 골든디스크상을 일본인 최초로 수상한다. 6월 4일 7년간의 교제 끝에 더 피너츠의 이토 에미와 결혼, 7월 2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8월 21일에 발매된 싱글 「時の過ぎゆくままに(시간이 흘러가는 대로)」가 3억 엔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TBS드라마「悪魔のようなあいつ(악마같은 그 녀석)」의 삽입곡으로 사용되어 90만장이 넘게 팔리며 5주 연속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는 등 사와다 켄지의 최대 히트곡이 된다.1976년 9월 10일에 발매된 「コバルトの季節の中で(코발트의 계절 속에서)」는 사와다 켄지 본인이 직접 작곡하는 등 아티스트로서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나 작년 12월과 동년 5월에 일어난 두 차례의 폭행 사건으로 인해[4] 으로 홍백가합전과 각종 시상식에서 사퇴했다.
1977년 5월 21일에 발매된 「勝手にしやがれ(네 멋대로 해라)」는 5주 동안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했고 이 곡으로 제19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한다. 이 19회 일본 레코드 대상 시상식 방송 또한 역대 최고 시청률인 50.8%를 갱신했다. 이 해에는 싱글 한 장으로 제8회 일본가요대상도 수상하는 등 큰 음악 시상식을 독점하였다. 레코드대상 수상 장면 가요대상 수상 장면 1978년 1월 21일에 발매한 「サムライ(사무라이)」는 A면은 물론, B면 수록곡까지 광고에 기용되어 인기를 얻었다. 당시 사무라이의 라이브 공연시에 자켓에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간 완장을 차고있던 것으로 논란이 되었다. 사와다 켄지의 인기가 엄청나서 쉬쉬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당연히 쇄도하는 항의로 하켄크로이츠가 X모양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라이브 영상
5월 21일의 「ダーリング(달링)」으로 마지막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 8월 1일의 「ヤマトより愛をこめて(야마토로부터 사랑을 담아)」는 안녕히 우주전함 야마토 사랑의 전사들과 우주전함 야마토 2202: 사랑의 전사들[5] 의 주제곡으로 사용되고 9월 10일의 「LOVE(抱きしめたい(끌어안고 싶어))」제29회 홍백가합전에 출장, 팝 가수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오오토리[6] 를 맡았다. 1979년 2월 1일에 발매된 「カサブランカ・ダンディ(카사블랑카 댄디)」는 「ダーリング(달링)」 이래의 더 베스트텐 1위를 기록했다. 5월 31일의 「OH! ギャル(oh! 갤)」까지 더 베스트텐 2위를 기록하는 등 사와다 켄지는 70년대의 대표 인기 아티스트였다.
2.2.3. 80년대[편집]
1980년 1월 1일에 발매된 싱글 「TOKIO」는 무대가 전부 가려질 정도로 거대한 패러슈트를 달고 온 몸에 전구를 감고 나오는 등 사와다 켄지 특유의 화려한 무대와 의상이 눈에 띄게 되었다. 4월 21일의 「恋のバッド・チューニング(사랑의 배드 튜닝)」의 무대에서는 빛이 나는 전구를 내장한 투명한 기타와 노래를 부르며 비닐 코트를 찢는 연출과 같은 미래지향적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1981년에는 더 타이거스의 재결성과 함께 5월 1일의 「渚のラブレター(물가의 러브레터)」, 9월 21일의 「ス・ト・リ・ッ・パ・ー(스트리퍼)」, 1982년 1월 10일의 「麗人(여인)」 등의 싱글을 다시 직접 작곡을 하는 등 아티스트적인 활동도 더욱 넓혀갔다. 1982년 9월 10일의 「6番目のユ・ウ・ウ・ツ(6번째 우울)」은 솔로로서 오리콘의 싱글 총 매출이 야마구치 모모에를 제치고 1991년까지 9년간 역대 1위의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싱글 판매량은 부진한 성적을 보였으나 1983년 <晴れのちBLUE BOY(맑게 갠 BLUE BOY)>로 홍백가합전에 출장, 1984년 9월 25일 발매된 「AMAPOLA」는 스페인 작곡가 호세 라칼레가 1924년 발표한 스탠더드 팝으로, 사와다의 싱글 A면곡으로서는 첫 커버곡이다. 이 곡으로 제35회 홍백가합전에 출전하며 노래 중 폭발음과 함께 분홍색 의상의 가슴에서 피가 스미는 연출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1985년 1월부터 반년간 휴식기를 가지고 데뷔 이후부터 쭉 소속되어 있었던 와타나베 프로덕션에서 독립 후 개인 소속사인 주식회사 코코로[7] 를 설립하고, 레코드사도 폴리돌에서 도시바 EMI로 이적했다. 동년 6월에 자서전 <내 이름은 줄리>를 발행[8] 하고 동년 결성한 자신의 백밴드 CO-CóLO와 함께 8월 8일 직접 작사작곡한 싱글 <재와 다아이몬드>를 발매, 영화 <Mishima: A Life In Four Chapters>에도 출연한다.
1987년 1월, 이토 에미와 18억 1,800만엔의 위자료[9] 를 지불하고 이혼, 3월에는 교토 공연 중 무대에서 떨어져 골절로 1개월간 입원했다. 1988년에는 CO-CóLO가 해산하고 1989년에는 이토와 별거 중이었던 1986년부터 불륜관계였던 배우 다나카 유코[10] 와 재혼한다. 이 때 앨범 <그는 잠들 수 없어>를 발매하고 연말에는 싱글컷 된 수록곡 <DOWN>으로 NHK홍백가합전에 출장하였다.
2.2.4. 90년대[편집]
1992년부터 추억의 가수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어했던 이유로 음악방송에서 자신의 과거 영상을 넣는 것을 금지했다.(2001년 이후부터 다시 허가했다.) 1997년에는 타이거스 시절 동료였던 모리모토 타로, 키시베 잇토쿠와 함께 유닛을 결성하였다.
2.2.5. 2000년대[편집]
2001년에는 후지 테레비계열 음악 방송의 사회도 맡는 등 미디어 출연이 있었지만, TV는 더 이상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며 현재까지 더 이상의 방송 출연은 없다.
2002년에는 자신의 레이블 JULIE LABEL을 설립, 2005년에는 첫 베스트 앨범도 발매되었다.
2008년 환갑을 맞아 도쿄 돔과 쿄세라돔 오사카에서 천 명의 코러스 인원과 함께 6시간 동안 80곡을 부르는 압도적인 규모의 라이브 <인간 60년 줄리 축제>를 개최하였다. 2010년에는 옛 프로듀서였던 카세 쿠니히코와 함께 JULIE WITH THE WILD ONES를 결성, 싱글 <물가에서 샤라라> 등을 발표하며 전국 투어를 개최했다.
2.2.6. 2010년대[편집]
2011년부터 2013년까지는 더 타이거스의 드러머 히토미 미노루가 연예계에 복귀하여 더 타이거스 활동도 있었다. 2017년에는 데뷔 50주년을 맞아 NHK 홀을 시작으로 옛 히트곡과 최신 발매곡까지 50곡을 부르는 <사와다 켄지 50주년 기념 LIVE 2017-2018>을 개최했다.
2018년 7월부터 익년 2월까지 자신의 70세를 기념한 전 67회의 대규모 라이브 투어 <사와다 켄지 70YEARS LIVE OLD GUYS ROCK>이 있었다. 그러나 이 투어 도중 10월 17일에 예정되어있던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의 관객 부족을 이유로 공연 직전에 콘서트를 중지하고 귀가해버리는(...)일이 있었고 기사 보도 등으로 점점 일이 커지자 바로 다음날인 18일 자택 주변의 공원에서 해명 및 사과 회견을 열었다. 관련 기사
2.2.7. 2020년대[편집]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예정되어있던 전국 투어를 중지했으며 동년 5월에 영화 키네마의 신의 주연이었던 시무라 켄이 사망함에 따라 시무라 켄의 대역으로 약 15년 만에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또한 12월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팬클럽을 해체하게 된 것을 공식 사이트에 알렸다.
2021년은 대망의 솔로 활동 50주년의 해로써 전국 투어 <사와다 켄지 2021 솔로 활동 50주년LIVE BALLADE>를 열어 대부분 발라드로 구성된 세트리스트로 공연했다. 11월에는 출신지인 교토시의 문화 상향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서 교토시 문화공로자의 표창을 받았다.
2022년에는 제 40회 교토부 문화상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 흙을 먹는 12개월을 통해 제77회 마이니치 영화 콩쿨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 제96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텐에서 주연남우상을 수상, 2022년도 전국영연상에서 남우상을 수상하였다.
2023년 5월에는 개인 사무소였던 주식회사 코코로(CO-CóLO Corporation)가 아내인 다나카 유코의 개인 사무소 아니마 출판주식회사에 합병되어 주식회사 코코로는 해산되었다.
또한 2018년 사이타마에서의 일로 2022년부터의 전국투어 마지막 공연은 6월 25일 사와다 켄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함과 동시에 리벤지적인 의미를 가진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또 한번 도전, 드디어 1만 9천명분의 티켓이 완매되었다! 해당 라이브에는 원래 세션들과 함께 타이거스 시절의 멤버들도 출연하였고, 더 타이거스 메들리가 끝난 후 멤버들과 타이거스 시절 이야기를 꽤 길게 하는 등의
3. 음반 목록[편집]
자세한 내용은 사와다 켄지/음반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배우로서의 사와다 켄지[편집]
영화는 더 타이거스 시절부터 꾸준히 출연했다. 특히 1979년 태양을 훔친 사나이에서의 주인공 키도 마코토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고, 최근 2021년에는 스다 마사키와의 공동주연의 키네마의 신에 시무라 켄의 대역으로 출연했다.
드라마는 1975년 방영된 3억 엔 사건 테마의 악마같은 그 녀석이 유명하다.
5. 출연 작품[편집]
5.1. 드라마[편집]
5.2. 영화[편집]
6. 여담[편집]
-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배우를 지망하셨다고 한다. 배우 하세가와 카즈오의 제자이셨다고.
역시 잘생김은 유전인듯 하다. - 중학교 시절 "싸움의 사와켄"이라고 불릴 정도로 교토시에서 알아주는 악동이었다고 한다.
- 데뷔 전 우치다 유야는 사와다에게 "사와노이 켄(沢ノ井謙)"이라는 예명을 쓸 것은 권했지만 사와다는 거절했다.
- 재일교포라는 설이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본명의 澤는 귀화 성씨에 쓸 수 없는 한자다. 일본인 중에서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꽤 되는 듯 하다.
- 더 타이거스 시절 운전면허 취득에 실패했지만 이후 79년 태양을 훔친 사나이의 운전씬을 위해 운전학원에 다녀 취득에 성공했다.
- 굉장히 파격적인 의상과 연출 등으로 엄청나게 주목받았던 가수인 만큼 그 시대를 보낸 만화가, 작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준 케이스가 꽤 있다. 순정만화에서 사와다와 닮은 캐릭터나 관련 소재가 은근 많이 나오고,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를 다룬 만화에서는 반드시 한 번 쯤은 언급된다.
-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고 한다.
- 추운 것을 엄청나게 싫어해서 겨울을 제외한 모든 계절이 좋다고 한다.
- 거의 이름과도 같은 별명인 줄리는 줄리 앤드류스의 팬이고, 여성적인 얼굴에 잘 어울려서 타이거스 시절 매니저와 상담 끝에 정한 것이라고 한다.
- 시무라 켄과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 사와다의 콩트 영상의 대부분은 시무라와 함께 출연했을 정도. 또한 다양한 예능에 굉장히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교토도 칸사이다.이후 2001년 부터 2003년까지 <사와다 켄지, 시무라 켄의 쥬리켄>이라는 라디오 방송도 함께했다. - 첫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한다.
- 마이크는 보통 왼손에 쥔다.
- 평소에는 칸사이벤을 사용한다.
- 2000년 11월 잡지 닛케이 엔터테인먼트 특집
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 2003년 HMV의 일본 사상 최고의 탑 팝 아티스트 100에서 17위에 랭크되었다.
- 2017년에 조사한 좋아하는 70년대 남성 아이돌 랭킹에서 전 세대 1위를 차지했다.
- 가수 이시노 마코가 79년 발매한 히트곡 <줄리가 라이벌(ジュリーがライバル)>의 등장하는 줄리는 사와다를 말하는 것으로, 후렴 직전의 멜로디는 <위험한 두 사람(危険なふたり)>을 오마쥬했고 안무에서도 사와다를 흉내 낸다. 여담의 여담으로 이시노 마코는 이 곡으로 NHK 홍백가합전에 처음 출장했는데, 곡 중간에 손으로 총을 쏘는 안무 장면에서 총알을 튕겨 내는 시늉을 하는 사와다가 카메라에 잡히기도 하였다. 직접 확인해보자.
- 2023년 사와다 켄지에 대한 시마자키 쿄코의 책이 나왔다. 제목은 줄리가 있었다-사와다 켄지,56년의 광망(ジュリーがいた 沢田研二、56年の光芒). 팬이라면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연예계에도 사와다의 팬임을 밝힌 사람이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70년대 대표 걸그룹 캔디즈의 이토 란, 가수 겸 배우 킷카와 코지, 배우 우에노 주리, 가수 텐도 요시미, 가수 와타나베 미사토 등이 있다.
[1] 성장은 교토부 교토시[2] 데뷔 극초반에는 47~49kg(!), 1973년 잡지 인터뷰에 따른 체중은 55kg, 1976년에는 58kg이었다고... 현재는 저 시절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 중후반에는 살이 꽤 쪘었으나 최근에는 살이 좀 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3] 더 타이거스로 데뷔.[4] 12월에는 도쿄역 신칸센 홈에서 역무원이 사와다를 마중 나온 여성 팬들을 힐난했다는 이유로 머리로 들이받았고, 5월에는 신칸센 차내에서 23세의 남성이 사와다에게 "고구마(いも, 촌스럽다, 가치가 낮다는 뜻으로도 사용됨)쥬리"라고 말한 후 다툼이 있었으나, 열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상대 남성이 넘어지며 사고가 있었는데 남성이 폭행당했다고 주장해 15만엔을 청구하는 것으로 끝난 사건.[5] 39년만에 다시 쓰이게 됐다.[6] 홍팀과 백팀 통틀어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 가수로서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인기뿐만 아닌 경력과 품격등을 갖추어야 설 수 있다.[7] 현 CO-CóLO Corporation[8] 이후 사와다 켄지는 이 책을 사와다가의 수치라고 말할 정도로 흑역사 취급한다.[9] 현재까지 일본 연예계 역사상 3위에 해당하는 금액의 위자료이다.[10] 유명 드라마 오싱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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