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무라 상

덤프버전 :





1. 개요
1.1. 투표 기준
1.2. 수상에서의 예외
1.3. 기록들
2. 역대 수상자 명단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沢村栄治賞

사와무라 에이지 상(賞), 통칭 사와무라상(沢村賞). 전설이자 비운의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매년 그 해의 최고 투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며, 그 대상은 선발 투수로 한정된다.

1947년 熱球라는 야구잡지에서 이 상을 처음 제정되었으며, 1956년 제정된 메이저리그사이 영 상보다도 먼저 생긴 상이다. 그러나 1988년까지는 센트럴리그의 투수만 대상으로 했다. 1989년부터 수상의 범위를 퍼시픽리그까지 확대. 아직도 리그별 시상은 하지 않고 양대리그를 통틀어서 최고의 투수를 뽑는다.[1] 1988년까지는 반쪽짜리 최고투수상이었던 셈. 다만 양대리그 모두 시상범위에 들어간 첫 해인 1989년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사이토 마사키가 수상했고, 이듬해인 1990년 킨테츠 버팔로즈노모 히데오사와무라상을 수상하며 퍼시픽리그 최초의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나왔다.


1.1. 투표 기준[편집]


1982년 이전까지는 기자투표로 수상자가 선정되었다가, 1981년 에가와 스구루투수 5관왕 + 센트럴리그 MVP를 차지하고도 기자들의 안티 여론에 밀려 수상을 하지 못하면서 논란이 되었다.[2] 이에 1982년부터 아래의 7가지 자격 기준이 제정되며 전직 프로야구 투수들로 이루어진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에 의해 수상자가 뽑히게 되었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 등판 - 25경기 이상
  • 승리 - 15승 이상
  • 완투 - 10경기 이상
  • 승률 - 6할 이상
  • 투구 횟수 - 200이닝 이상
  • 평균자책점 - 2.50 이하
  • 탈삼진 - 150개 이상
  • QS+ - 등판 대비 비율 (2018년 신설)

하지만 꼭 저 항목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서, 위의 항목을 한 두개 만족하지 않더라도 수상자로 뽑히기도 한다. 물론 모든 항목을 충족한다면 수상 확률도 높아진다. 시대가 흐르면서 위의 모든 항목을 만족하기가 쉽지 않아지고 있지만[3], 전 항목을 만족하는 '괴물투수'는 여전히 가끔씩 나오고 있고 82년 사와무라상의 기준이 생긴 이후 7가지 항목을 모두 채운 투수는 총 11명이다. 1982년 키타벳푸 마나부에가와 스구루, 1987년 쿠와타 마스미, 1989년 사이토 마사키, 1991년 사사오카 신지, 1993년 이마나카 신지, 2007~2008, 2011년의 다르빗슈 유, 2009년 와쿠이 히데아키, 2011년 타나카 마사히로, 2013년 카네코 치히로, 2018년 스가노 토모유키. 보다시피 2번 이상 채운 선수도 없는데 다르빗슈 유는 혼자 3번이나 채우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수상 자체는 2007년 1번에 그쳤다.


1.2. 수상에서의 예외[편집]


그런데 사와무라상은 더 많은 항목을 만족한 선수가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선수가 뽑히기도 한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 1988년 - 4개 항목을 채운 오노 유타카(히로시마)가 5개 항목을 채운 마키하라 히로미(요미우리)를 누르고 수상했다. 1988년 오노의 평균자책점은 1.70으로 양대리그 1위.
  • 1990년 - 사이토 마사키(요미우리)는 노모 히데오(킨테츠)와 함께 6개 항목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탈삼진 수가 많을수록 사와무라상인 것 같다"는 이유로 노모 히데오가 수상했다. 사이토는 평균 자책점, 승률이 양대 리그 1위임에도 불구하고 노모의 287탈삼진에 밀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 해 노모가 신인으로서 일으킨 돌풍이 너무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사이토 마사키는 직전 해 사와무라상 수상자이기도 했지만 너무 모범생스럽고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라 2년 연속 20승을 올리면서[4] 리그를 평정한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임팩트가 큰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나 임팩트 면에서는 동료인 쿠와타 마스미, 마키하라 히로미보다 더 떨어질 정도.
  • 1992년 - 4개 항목을 채운 이시이 타케히로(세이부)가 6개 항목을 채운 노모 히데오(킨테츠)를 누르고 수상했다. 이시이는 일단 1점대 평균자책점(1.94)과 승률왕(.833) 타이틀이 있긴 했지만,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딴 것도 아닌데다가[5] 불펜알바 때문에 148.1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한 반면 노모는 이 해에도 어김없이 무지막지한 탈삼진을 뽑아내며 탈삼진 양대 리그 1위를 차지했으나, 이시이의 소속팀 세이부의 우승버프에 밀려서 수상에 실패했다.
  • 1994년 - 5개 항목을 채운 야마모토 마사(주니치)가 6개 항목을 채운 이라부 히데키(치바 롯데)를 누르고 수상했다. 이라부는 양대 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했지만, 야마모토는 탈삼진 6위, 평균자책점 14위에 그쳤다.[6] 이 수상은 일단 야마모토가 다승왕(19승)과 완투 1위(14완투)를 기록한 것에 더해, 이 해 시즌 내내 하위권이던 이라부의 소속팀 치바 롯데와 달리 야마모토의 소속팀 주니치가 이 시즌 최종전까지 우승 경쟁을 벌였고, 야마모토도 에이스 투수로써 팀을 상위권으로 이끈 것이 영향을 준 듯 하다. 당시 선정 위원 중 한 명이 야마모토와 선수, 감독으로 함께 주니치에서 뛰었던 호시노 센이치였다.
  • 1996년 - 5개 항목을 채운 사이토 마사키(요미우리)가 6개 항목을 채운 니시구치 후미야(세이부)를 누르고 수상했다. 사이토의 경우 센트럴리그 최다승, 평균자책점 타이틀과 승률 1위 기록이 있었지만 니시구치의 경우 퍼시픽리그 완투 1위 기록을 제외하고는 무관에 그친 것이 컸다.
  • 2003년 - 5개 항목을 채운 이가와 케이(한신), 4개 항목을 채운 사이토 카즈미(다이에)가 6개 항목을 채운 우에하라 코지(요미우리)를 누르고 공동으로 수상했다. 이가와한신사이토다이에는 양대리그 우승팀이었다. 그리고 사이토퍼시픽 리그에서 18년만에 나온 20승 투수였고 두 명 다 선발 20승 투수였다. 또한 이 수상은 사상 최초의 양대 리그 공동수상[7]이기도 하다.
  • 2008년 - 6개 항목을 채운 이와쿠마 히사시(라쿠텐)가 7개 전 항목을 채운 다르빗슈 유(닛폰햄)를 누르고 수상했다. 이와쿠마는 1985년의 사토 요시노리 이래 23년만에 나온 21승 투수였고, 리그 2위인 닛폰햄 소속이었던 다르빗슈와 달리 리그 5위에 그쳤던 라쿠텐에서 21승이나 따내며 팀 승수(65승)의 거의 1/3을 책임졌다.
  • 2013년 - 6개 항목을 채운 다나카 마사히로(라쿠텐)가 7개 전 항목을 채운 카네코 치히로(오릭스)를 누르고 수상했다. 다만 다나카NPB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24승 0패 투수로, 시즌 내내 연승 행진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만장일치로 여유롭게 수상했다. 이 해 라쿠텐의 창단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한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평균자책점 역시 1.27로 압도적인 리그 1위.
  • 2016년 - 히로시마 도요 카프크리스 존슨이 외국인으로서는 진 바키 이후 52년만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다만 존슨은 다승은 팀 동료인 노무라 유스케[8], 이닝과 탈삼진, 방어율은 스가노 도모유키(요미우리)[9]에게 밀려 리그 타이틀이 하나도 없음에도 수상한 케이스가 되었다. 스가노는 비율로서는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물타선과 불펜의 방화로 인해 9승밖에 챙기지 못한 반면 존슨은 리그 우승팀 카프의 에이스로 15승을 거두었다는 것이 주효했다.

몇몇 예를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성적을 기계적인 수치로 대입해서 뽑는 게 아니라 해당 시즌에 선수가 보여준 임팩트, 팀 성적 등도 같이 반영됨을 알 수 있다.

더 특이한 사실은, 수상 자격에 걸맞는 선수가 없을 경우 시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5번(1971년, 1980년, 1984년, 2000년, 2019년)이나 수상자가 없었는데, 리그 사무국이 주관하는 공식 연간 선수상에서 자격미달로 시상을 하지 않는 경우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10][11] 하지만 2011년 센트럴 리그 2루수 베스트나인과 퍼시픽 리그 포수 베스트나인을 생각해보면..

2019년에는 야마구치 슌(요미우리)과 아리하라 코헤이(닛폰햄)가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두 투수 모두 완투 숫자과 최소 투구이닝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심사위원장인 호리우치 츠네오는 "더 이상은 (수상자의) 레벨을 낮추고 싶지 않았다"고 '수상자 없음'의 이유를 밝혔다. 노무라 카츠야는 ''에이스는 개인주의자일 수 있지만 이기주의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선발투수의 이닝이 갈 수록 줄어드는 세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선발투수라면 등판한 경기를 다 책임진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주간 베이스볼에서 쓴 칼럼에서 "어깨는 소모품이라고 하는데, 보통 100개 남짓인 투구 수 제한은 과학적 근거가 모호하다. 그걸 지켜서 투수의 수명이 늘었나. 반대로, 매일 같이 던지던 옛 투수들이 덜 다친 건 무슨 이유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신문기사 혈액형 성격설을 믿으시는 분께서 과학적 근거 얘기하는건...

참고로, 그 다음년도 수상자인 오노 유다이는 비록 야마구치와 아리하라보다도 부족한 148⅔이닝[12]을 투구해 최소 투구이닝 요건을 충족하지는 못했으나 무려 10완투를 기록함으로써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 사와무라 상 수상에 성공하였다.


1.3. 기록들[편집]




2. 역대 수상자 명단[편집]


  • 굵은 글씨는 정규 시즌 리그 1위.
연도
투수

등판
완투
승리
승률
투구 이닝
탈삼진
평균자책점
1947년
벳쇼 아키라[14]
난카이 호크스[15]
55
47
30
.612
448 ⅓
191
1.86
1948년
나카오 히로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47
25
27
.692
343
187
1.84
1949년
후지모토 히데오
39
29
24
.774
288
137
1.94
1950년
사나다 쥬죠
쇼치쿠 로빈스
61
28
39
.765
395 ⅔
191
3.05
1951년
스기시타 시게루
나고야 드래곤즈
58
15
28
.683
290 ⅓
147
2.35
1952년
61
25
32
.696
355 ⅔
160
2.33
1953년
오토모 타쿠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43
22
27
.818
281 ⅓
173
1.85
1954년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드래곤즈
63
27
32
.727
395 ⅓
273
1.39
1955년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50
17
23
.742
312
152
1.33
1956년
카네다 마사이치
코쿠테츠 스왈로즈
68
24
25
.556
367 ⅓
316
1.74
1957년
61
25
28
.636
353
306
1.63
1958년
56
22
31
.689
332 ⅓
311
1.30
1959년
무라야마 미노루
오사카 타이거스
54
19
18
.643
295 ⅓
294
1.19
1960년
호리모토 리츠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69
26
29
.617
364 ⅔
210
2.00
1961년
곤도 히로시
주니치 드래곤즈
69
32
35
.648
429 ⅓
310
1.70
1962년
코야마 마사아키
한신 타이거스
47
26
27
.711
352 ⅔
270
1.66
1963년
이토 요시아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39
18
19
.704
236 ⅓
166
1.90
1964년
진 바키
한신 타이거스
46
24
29
.763
353 ⅓
200
1.89
1965년
무라야마 미노루
39
26
25
.658
307 ⅔
205
1.96
1966년
38
24
24
.727
290 ⅓
207
1.55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33
14
16
.889
181
117
1.39
1967년
오가와 겐타로[16]
주니치 드래곤즈
55
16
29
.707
279 ⅔
178
2.51
1968년
에나츠 유타카
한신 타이거스
49
26
25
.676
329
401
2.13
1969년
타카하시 카즈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45
19
22
.815
256
221
2.21
1970년
히라마츠 마사지
타이요 훼일즈
51
23
25
.568
332 ⅔
182
1.95
1971년
수상자 없음
1972년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48
26
26
.743
312
203
2.91
1973년
타카하시 카즈미
45
24
23
.639
306 ⅓
238
2.21
1974년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49
7
15
.625
188
137
2.87
1975년
소토코바 요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41
17
20
.606
287
193
2.95
1976년
이케가야 코지로
51
18
20
.571
290 ⅓
207
3.26
1977년
코바야시 시게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42
11
18
.692
216 ⅓
155
2.92
1978년
마츠오카 히로무
야쿠르트 스왈로즈
43
11
16
.593
199 ⅓
119
3.75
1979년
코바야시 시게루
한신 타이거스
37
17
22
.710
273 ⅔
200
2.89
1980년
수상자 없음
1981년
니시모토 타카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34
14
18
.600
257 ⅔
126
2.58
1982년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6
19
20
.714
267 ⅓
184
2.43
1983년
엔도 카즈히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36
16
18
.667
238 ⅓
186
2.87
1984년
수상자 없음
1985년
코마츠 타츠오
주니치 드래곤즈
33
14
17
.680
210 ⅓
172
2.65
1986년
키타벳푸 마나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0
17
18
.818
230
123
2.43
1987년
쿠와타 마스미
요미우리 자이언츠
28
14
15
.714
207 ⅔
151
2.17
1988년
오노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24
14
13
.650
185
183
1.70
1989년
사이토 마사키[17]
요미우리 자이언츠
30
21
20
.741
245
182
1.62
1990년
노모 히데오[18]
킨테츠 버팔로즈
29
21
18
.692
235
287
2.91
1991년
사사오카 신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3
13
17
.654
240
213
2.44
1992년
이시이 타케히로
세이부 라이온즈
27
8
15
.833
148 ⅓
123
1.94
1993년
이마나카 신지
주니치 드래곤즈
31
14
17
.708
249
247
2.20
1994년
야마모토 마사
29
14
19
.704
214
148
3.49
1995년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28
16
18
.643
213
187
2.70
1996년
25
8
16
.800
187
158
2.36
1997년
니시구치 후미야
세이부 라이온즈
32
10
15
.750
207 ⅔
192
3.12
1998년
카와사키 켄지로
야쿠르트 스왈로즈
29
9
17
.630
204 ⅓
94
3.04
1999년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25
12
20
.833
197 ⅔
179
2.09
2000년
수상자 없음
2001년
마츠자카 다이스케
세이부 라이온즈
33
12
15
.500
240 ⅓
214
3.60
2002년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26
8
17
.773
204
182
2.60
2003년
이가와 케이
한신 타이거스
29
8
20
.800
206
179
2.80
사이토 카즈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6
5
20
.870
194
160
2.83
2004년
카와카미 켄신
주니치 드래곤즈
27
5
17
.708
192 ⅓
176
3.32
2005년
스기우치 토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6
8
18
.818
196 ⅔
218
2.11
2006년
사이토 가즈미
26
8
18
.783
201
205
1.75
2007년
다르빗슈 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6
12
15
.750
207 ⅔
210
1.82
2008년
이와쿠마 히사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8
5
21
.840
201 ⅔
159
1.87
2009년
와쿠이 히데아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7
11
16
.727
211 ⅔
199
2.30
2010년
마에다 겐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8
6
15
.652
215 ⅔
174
2.21
2011년
다나카 마사히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7
14
19
.792
226 ⅓
241
1.27
2012년
셋츠 타다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7
3
17
.773
193 ⅓
153
1.91
2013년
다나카 마사히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8
8
24
1.000
212
183
1.27
2014년
카네코 치히로
오릭스 버팔로즈
26
4
16
0.762
191
199
1.98
2015년
마에다 겐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9
5
15
.625
206 ⅓
175
2.09
2016년
크리스 존슨[19]
26
3
15
.682
180
141
2.15
2017년
스가노 도모유키[20]
요미우리 자이언츠
25
6
17
.773
187 ⅓
171
1.59
2018년
28
10
15
.652
202
200
2.14
2019년
수상자 없음
2020년
오노 유다이
주니치 드래곤즈
20
10
11
.550
148 ⅔
148
1.82
2021년
야마모토 요시노부[21]
오릭스 버팔로즈
26
6
18
.783
193 ⅔
206
1.39
2022년
26
4
15
.750
193
205
1.68
2023년
23
2
16
.727
164
167
1.21

3. 관련 문서[편집]


[1] 메이저리그는 1966년까지 리그전체에서 한 명을 뽑았다가 1967년부터 사이 영 상을 리그별로 뽑는다.[2] 그 해에는 1981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했으나 선발등판, 소화 이닝을 제외하곤 무관에 그쳤던 에가와의 팀 동료 니시모토 타카시가 수상했다. 에가와는 1980년에도 다승왕-탈삼진왕을 차지했지만 사와무라상을 타지 못했고(심지어 이 해는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없는 해다! 작정하고 뽑지 않은 것.), 1982년에는 7개 기준을 모두 충족했지만 역시 7개 기준을 모두 충족한 히로시마키타벳푸 마나부에 밀리면서 결국 은퇴할 때까지 사와무라상과 인연이 없었다. 안티 여론이 컸던 이유는 드래프트 제도의 허점을 이용해 요미우리에 편법을 쓰다시피 입단하여 논란을 일으킨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이에 관해선 본인 문서 참조.[3] 특히 완투 10경기 이상. 선발-중계 분업화가 확대되어가는 현대야구의 추세로 완투형 투수를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 조건이 붙은 이유는 일본에서는 한 경기를 끝까지 책임지는 완투 능력을 이상적인 에이스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 다만 일본메이저리그보다는 로스터 운용이 자유로운 편이므로 선발이 좀 더 쉬는 대신 좀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6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하기도 한다.[4] 일본프로야구에서 사이토 마사키 이후로 현재까지 2년 연속 20승을 거둔 투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이토는 사와무라상을 3번이나 수상하며 역대 최고 수상 기록을 세웠고 최다탈삼진 1회, 다승왕 5회, 평균자책점 1위 3회 등의 화려한 실적을 기록하며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 센트럴리그를 지배했던 대투수다. 그러나 성적과는 별개로 사이토는 명문팀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이렇게 대단한 성적을 올렸음에도 이 정도로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투수이기도 하다. 단적인 예시로 올스타전 출전이 고작 6번에 불과하며 이마저도 팬 투표로 선발된 것은 단 1번에 불과했다. 요미우리의 불가사의 중 하나.[5] 이 해 평균자책점 1위는 노모의 팀동료 아카호리 모토유키(1.80)가 수상했다. 다만 이시이에겐 다소 억울할 수도 있는 게 원래 전문 구원투수였고 이 해부터 마무리 투수에 자리잡은 아카호리가 리그 최다인 50시합 등판을 달성하는 등 무지막지하게 등판하면서 시즌 막판에 평균자책점 타이틀까지 노릴 수 있는 상황이 되자 킨테츠 구단에서 아카호리를 선발로 2차례 등판시키는 등 대놓고 밀어주는 바람에 시즌 종료 시점에서 아카호리가 규정이닝에 도달하여 이시이를 제치고 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면서 수상에 실패했다.[6] 이 해 센트럴리그 최다 탈삼진 1위는 리그 MVP를 수상한 요미우리쿠와타 마스미가 185개로 수상했다. 쿠와타도 최다탈삼진을 비롯해 28등판 27선발 10완투 1완봉 207.1이닝 14승 11패 ERA 2.52의 출중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은근 많았던 패수와 야마모토 등의 임팩트에 밀려 사와무라상 수상에 실패했다.[7] 공동수상 자체는 1966년에도 있었으나 이 당시엔 센트럴 리그만 수상범위에 들어갔기에 퍼시픽리그 투수는 수상에서 제외되었다. 참고로 1966년의 공동수상자는 각각 무라야마 미노루(한신)와 호리우치 츠네오(요미우리).[8] 존슨 15승 v 노무라 16승.[9] 존슨 180.1이닝(3완투) 141탈삼진 2.12 v 스가노 183.1이닝(5완투) 189탈삼진 방어율 2.01.[10] 매년 선정하는 상의 경우 경쟁수준이 낮을 경우 종종 수준낮은 수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KBO 2003년 신인왕 이동학이다. 이동학은 2003년 투수로 27경기 8승 3패 평균자책점 5.35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당시 경쟁자가 없어서 신인왕에 올랐었다.[11] 즉, 사와무라상의 경우에는 그런 성적으로는 상 받을 자격 없다!라고 선정을 거부하는 셈. 더욱이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같은 이유로 신인왕을 뽑지 않은 전례도 수 차례 있다. 가장 최근의 일은 2000년 퍼시픽 리그에서 유례없는 신인 흉작으로 인해 투표 과반수를 넘긴 후보가 없어서 무려 32년 만에 신인왕을 뽑지 않기로 결정한 바 있다.(여담으로 과반에 미달하긴 했으나 그 해 신인왕 투표 수 1위는 사이토 카즈미.)[12] 다만, 코로나로 인해 120경기밖에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오노는 2020년 투구 소화 이닝이 리그 1위였다.[13] 2010년대에는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가 이시카와 아유무, 후타키 코타 정도인데 둘 다 2019년에 폭망. 유망주 중에서는 타네이치 아츠키사사키 로키에게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것이다. [14] 하술할 벳쇼 타케히코의 개명 전 이름.[15] 이 해는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리되기 전이다. 따라서 지금은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의 벳쇼가 수상이 가능했다. 즉, 리그가 분리되기 전인 1949년까지는 진정한 최고 투수를 뽑는 상이었던 셈.[16]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다.[17] 양대리그 통합 첫 수상자.[18] 퍼시픽 리그 첫 수상자.[19] 52년만의 외국인 선수 수상.[20] 역대 5번째이자 22년만의 연속 수상.[21] 카네다 마사이치 이후 역대 2번째이자 65년만의 3년 연속 수상.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2 06:27:55에 나무위키 사와무라 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