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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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관련 작품



1. 개요[편집]


사진신부()는 하와이 이민 1세대 한국인 남성들이 한국에 있는 여성의 사진을 통해 신부들을 데리고 온 것을 말한다. 당시 하와이 정부는 이 같은 결혼이 합법이었기 때문에 각국에서 이주 노동자들과 결혼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2. 상세[편집]


초창기 형태의 국제결혼에 해당한다. 당시 하와이 이주노동자는 대부분이 남성이었는데, 지금이야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당시는 결혼이 성인으로서 필수적인 것에 가까웠다. 결혼을 못 해서 대를 못 잇는 것은 사회적으로 거의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 인종차별이 심하던 당시 동양인과 현지인의 결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고국에서 신부를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국제결혼할 때 해당국에 직접 날아가서 보고 오고, 또 스카이프나 하다못해 국제전화라도 해서 상대를 확인하지만 이 당시는 사진이 정말 전부였기에 남성 여성이 서로 사진과 편지만으로 상대를 확인하고 결혼을 했던 것. 이 당시에는 해외 사는 사람끼리 서로 확인하려면 정말 사진이랑 편지가 최선이었을 뿐더러 사진신부가 아니더라도 아직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이란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신랑신부는 중매 선자리에서 딱 한 번 보고 다음에는 결혼식날 보는 경우도 있었고, 아예 결혼식까지 배우자의 얼굴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이상한 개념은 아니었다.[1]

대다수는 경상도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업화 이후 경제규모가 한참 역전되었지만, 공업화가 되기 전 당시는 호남평야가 있어 쌀 생산량이 많은 전라도가 부유했고, 미곡 생산량이 적은 경상도는 가난한 동네였기 때문. 사진신부로 가는 여성들은 가난한 집에서 먹을 입을 덜기 위해 보냈고, 여성들도 가난한 집이 싫어 신천지를 찾아 떠났던 것. 하와이가 지상낙원이라는 중매쟁이의 말은, 뭐 100퍼센트 사실은 아니더라도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당시에도 세계 최선진국이던 미국은 훨씬 풍요로웠던데다가, 하와이의 남편 될 사람도 입 하나 먹여살릴 번듯한 직업은 있는 사람이라 하와이에 가면 최소한 먹고사는 걱정은 안 해도 되었기 때문.

그래서 서로서로 웃픈일들도 벌였는데, 신랑신부가 서로서로 나이를 속이거나, 사진을 젊게 조작하였다.[2] 남자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처를 얻으려고 나이를 속이거나 사진을 조작했고, 여자도 어차피 하와이가 지상낙원이건 아니건 여자 쪽도 빨리 혼처를 구해야하니, 남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이 정도는 당연히 했던 것이다[3]. 하와이에 온 사진신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약 6백 명에서 1천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사진신부.png
미국의 한인 사회는 남초였다. 게다가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이 있었기에 미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러나 사진신부를 통해 한인 사회는 성비 균형을 맞추었다.

사진신부들은 1919년 하와이에서 '대한부인구제회'라는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해 자금 모금에 힘썼다. 독립선언서를 통해 독립기금을 모으기도 했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 군정사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3.1 운동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일어난 한국 독립운동 집회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24년 미국 의회가 동양인배척법(Oriental Exclusion Act)을 통과시키면서 더 이상 사진신부가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죽을 때까지 고국에 못 돌아갔다는 건 낭설이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으며, 실제로 독립자금을 모아서 독립군 군정사에 보냈다는 기록도 있으니. 1세대 독립운동가였던 권도희-이희경 부부의 이희경 여사 또한 사진신부로 알려져있으며, 이들 부부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어 2년 옥고를 치르고 하와이로 돌아와서 다시 한국에 입국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공로를 인정 받아 이들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있다.

고 천연희 여사는 2022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는 2022년 8월 19일 방송된 다큐ON에서 조명되었다.

다아아몬드 헤드 추모공원에 사진신부 묘소가 있다.


3. 관련 작품[편집]


관련 창작물로는 이금이의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 웹툰 '포와의 사진신부' 등이 있다. 또한 외국인 작가가 쓴 소설로 <사진신부 진이>라는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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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기준 이런 결혼을 한 세대는 거의 죽었지만, 간혹 100세 가량의 증조모가 살아계신 경우 여쭤보면 그렇다는 증언이 나올 것이다.[2] 당시에도 사진을 조작하는 기술이 있었다.[3]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미국인편에 의하면, 이중에서 가장 황당무계한 사례는 남의 사진을 도용한 경우였다고 한다. 미국에 살던 한국인 남성들이 사진으로만 본 아리따운 여성에 반해서, 그 사람을 초청했더니 생판 다른 얼굴의 못난이가 온 것이다(...). 당연히 애써서 미국까지 온 여자를 차마 되돌려보낼 수 없으니, 낙장불입으로 그냥 결혼한 것이다. 남자쪽도 마찬가지 남의 사진을 도용하거나 남의 차 앞에서 찍은 사진을 여자에게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