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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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큐
坂本(さかもと (きゅう | Kyu Saka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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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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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모습

파일:external/www.tv-tokyo.co.jp/main_cast_photo.jpg

▲ 1980년대 모습

본명
오시마 히사시 (大島(おおしま (ひさし)[1]
출생
1941년 12월 10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가와사키구
사망
1985년 8월 12일 (향년 43세)
군마현 다카마가하라 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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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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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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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틀:깃발|

기 명칭

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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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점령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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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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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가수, 배우, 탤런트
활동 기간
1958년 ~ 1985년
배우자
카시와기 유키코 (1971년 결혼)
자녀
장녀 오시마 하나코 (1973년생)
차녀 마이사카 유키코 (1976년생)
소속사
빅터 엔터테인먼트 (1959)
도시바 EMI (1960 - 1984)
펀 하우스 (1985)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무명 시절
2.2.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
2.2.1. 가사
2.3. 그 외 연예계 활동
3. 여담



1. 개요[편집]


일본가수, 배우, 탤런트.

본명은 오시마 히사시(大島九). 아내인 배우 카시와기 유키코 사이에 두 딸이 있으며, 큰딸 오시마 하나코는 가수로 활동 중이고 작은딸 마이사카 유키코는 배우, 가수 생활 이후 현재는 애니멀 테라피[2] 사업을 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무명 시절[편집]


더 드리프터즈의 전기 밴드 시대 멤버로 약 반년 동안 활동했지만[3] 메인 보컬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탈퇴한 후[4], 로큰롤 스타일의 밴드 타니 이케다와 파라다이스 킹으로 이적해 활동을 하였으나, 별로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 7월, 토시바 레코드로 이적하면서 솔로 가수로 변신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8월에 발표한 첫 싱글 슬픈 60세 (悲しき六十才)[5]가 10만 장을 판매하며 첫 히트를 거두게 된다.[6]


2.2.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편집]


빌보드 차트 역대 1위곡
It's My Party

Sukiyaki(3주)

Easier Said Than Done

上を向いて歩こう
해외 제목: Sukiyaki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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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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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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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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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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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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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녹음
1961년
장르
가요코쿠
길이
3:05
작사/작곡
에이 로쿠스케, 나카무라 하치다이
프로듀서
구사노 고지
레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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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바-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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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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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피톨 ·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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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MV · EMI
B-사이드
あの娘の名前はなんてんかな

[ 싱글 커버 펼치기 · 접기 ]

파일:external/userdisk.webry.biglobe.ne.jp/125008428752416208481_SukiyakiCover5B15D.jpg



1961년 10월에 발표한 싱글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 / 그 여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대히트를 치며 1,300만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해외에는 SUKIYAKI 라는 뜬금없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곡을 수입하기로 한 미국의 레코드사 사장이 원 제목인 '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우'를 발음하기 힘들어 해서 제목을 발음하기 쉬운 스키야키로 바꿨다고 한다.

그리고 1963년 6월 15일부터 3주 연속으로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시아 가수 중 최초.[7][8] 곡의 분위기가 50-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스윙풍 노래들과 유사해서 서구에서도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

그리고 이 여파로 일본 문화와 담을 쌓고 지내던 당시 한국에서도 재미교포들을 통해 합법적으로 수입되어 앨범이 판매되었고, 1964년에는 한국의 여성 그룹 '이 시스터즈'가 '위를 보고 걸어요'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곡을 내놓아 한동안 인기를 끌었다.

제목의 의미는 눈물이 떨어지지 않게 위를 보고 걷자는 의미로, 힘든 현실을 희망(하늘)을 보며 이겨내자는 이야기. 이 노래가 나왔던 1960년대 일본의 당시를 생각해 보면 전쟁의 여파에서 벗어나고 있던 일본의 모습을 그리는 노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국민가요이며, 지금도 여러 가수들이 커버하는 등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이다. 일본의 고속성장기인 6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가요의 명곡이라서 그 시대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로 21세기에도 쓰이고 있다. 그래서 그 시대를 경험한 노인 세대들 뿐 아니라 비교적 젊은 세대들에게도 친숙한 곡이다.

한편, 이 곡은 1963년고시엔(선발고등학교야구대회)의 입장 행진곡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당 대회 입장 행진곡으로 쓰인 첫 대중가요로 이후부턴 쭉 전년도에 유행했던 대중가요를 입장곡으로 선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서 자주 나온다. 노랫말이 애니메이션의 주제와 밀접한 편. 라이트노벨 풀 메탈 패닉!에서는 투아하 데 다난에 초청받은 치도리 카나메가 승무원들과의 파티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부르기도 했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후에 일본 가요계의 유명한 그룹 CHAGE and ASKA의 멤버 아스카가 지진 성금 마련을 돕기 위해 이 노래를 커버하여 싱글로 수록하여 발매한 바 있다.

2015년, 미국 아마존 스튜디오의 드라마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라디오에서 나온다. 다만 작중 설정상 일본은 2차 대전에서 승리한 상황인지라 전후 힘든 현실을 노래한 이 곡과는 괴리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9]

위를 보고 걷자의 해외 대박으로 사카모토 큐는 일본의 국민 가수로 떠올랐다.

워낙에 듣기 좋은 명곡이라 비싼 저작권료에도 불구하고 여러 작품에서 인용된다. JASRAC의 코드는 010-0006-3. 위에서 언급했듯 코쿠리코 언덕에서빙과 제12화 등에서도 나왔기 때문에 오타쿠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귀에 익은 곡이다. 빙과에서 축제에서 합창부가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극장판 타마코 러브 스토리에서는 바톤부가 공연을 펼치는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이 곡의 취주악 편곡판이 쓰였다.

2012년 방송된 NHK 연속TV소설 우메짱선생 마지막화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노래자랑에 나갔을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

미국 힙합계에서도 이 노래를 샘플링한 사례가 꽤 있다. 대표적으로 비트박스의 대가 '더그 E. 프레시'와 래퍼 '슬릭 릭'(이 당시엔 '리키 D' 명의 사용)이 1985년에 발표한 La Di Da Di.[10][11]

Avicii의 사후 앨범인 TIM의 곡 중 8번 트랙 Freak의 리드 멜로디가 이 곡의 휘파람 소리를 샘플링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 곡이 다시 조명되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 마에다 겐타가 등판하는 경기에서 투구 혹은 타격 때 응원 구호로 다저 스타디움에서 연주해주기도 했다.

또한 일본 철도의 발차 멜로디로 만들어졌으며 그가 태어난 곳인 카와사키구도카이도 본선 카와사키역 1, 2번선, 케이큐 본선케이큐카와사키역에 사용 중에 있으며 카와사키시와 멀리 떨어진 조반선 이바라키현토모베역의 1번선에서도 사용 중에 있다.[12]

한편 이 노래가 일본을 대표하는 가요로 세계에 알려지다 보니 올림픽에서도 연주된 적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선수단 입장 시 입장하는 국가의 대표적인 음악을 행진곡으로 연주하자는 취지에 의거하여 일본 선수단이 입장할 때 이 곡의 초반부가 편곡되어 연주되었다.[13]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폐회식 때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2.2.1. 가사[편집]


上を向いて歩こう
위를 보고 걷자
[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우]
涙がこぼれないように
눈물이 넘쳐흐르지 않게
[나미다가 코보레나이 요우니]
思い出す春の日
그 봄날이 생각나는구나
[오모이다스 하루노 히]
一人ぼっちの夜
혼자뿐인 밤
[히토리봇치노 요루]
上を向いて歩こう
위를 보고 걷자
[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우]
にじんだ星をかぞえて
하늘에 번진 별을 세면서
[니진다 호시오 카조에테]
思い出す夏の日
그 여름날이 생각나는구나
[오모이다스 나츠노 히]
一人ぼっちの夜
혼자뿐인 밤
[히토리봇치노 요루]
幸せは雲の上に
행복은 구름 위에
[시아와세와 쿠모노 우에니]
幸せは空の上に
행복은 하늘 위에
[시아와세와 소라노 우에니]
上を向いて歩こう
위를 보고 걷자
[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우]
涙がこぼれないように
눈물이 넘쳐흐르지 않게
[나미다가 코보레나이 요우니]
泣きながら歩く
울면서 걷는
[나키나가라 아루쿠]
一人ぼっちの夜
혼자뿐인 밤
[히토리봇치노 요루]
(口笛)
(휘파람)
思い出す秋の日
그 가을날이 생각나는구나
[오모이다스 아키노 히]
一人ぼっちの夜
혼자뿐인 밤
[히토리봇치노 요루]
悲しみは星のかげに
슬픔은 별 그늘에
[카나시미와 호시노 카게니]
悲しみは月のかげに
슬픔은 달 그늘에
[카나시미와 츠키노 카게니]
上を向いて歩こう
위를 보고 걷자
[우에오 무이테 아루코우]
涙がこぼれないように
눈물이 넘쳐흐르지 않게
[나미다가 코보레나이 요우니]
泣きながら歩く
울면서 걷는
[나키나가라 아루쿠]
一人ぼっちの夜
혼자뿐인 밤
[히토리봇치노 요루]
一人ぼっちの夜
혼자뿐인 밤
[히토리봇치노 요루]


2.3. 그 외 연예계 활동[편집]


위를 보고 걷자 이후로도 사카모토는 "올려다 보렴 밤하늘의 별을(見上げてごらん夜の星を)", "내일이 있으니까(明日があるさ)"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내며 활동하였는데 이 당시 큐의 히트곡 대부분은 689 트리오[14]에게서 나왔다. 전 세계적으로 무려 1,5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

가수 이외에도 영화배우, 탤런트, TV 쇼 프로의 MC 등으로 연예계에서 다재다능한 모습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의 사회자를 맡기도 했다.


2.4. 안타까운 죽음[편집]


1985년, 소속사를 옮긴 후, 싱글 그리운 Love-song (懐しきlove-song)[15]/마음의 눈동자/心の瞳)를 발표하고[16] 다시 가수 활동을 본격화 하려던 차에, 그 해 8월 12일 오사카로 가기 위해 탄 항공기가 추락하면서 43세의 일기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중에서 마음의 눈동자(心の瞳)는 큐 본인의 애착이 강했다고 한다. 복귀작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바치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녹음을 마치고,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고. 안타깝게도 이 작품들은 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큐는 사고 당일 NHK-FM의 특집 프로그램 녹음 방송을 마치고[17] 선거에 출마한 지인[18]의 선거 사무소 개소식 응원을 위해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던 중 예기치 못한 추락 사고로 변을 당한 것이다.

그는 평소 국내 이동 시에는 무조건 전일본공수만 이용했고, 소속사 관계자들과 부인 카시와기 유키코에게 항상 "항공편은 반드시 전일본공수로 해줄 것"이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럴 만한도 한 게 일본어 위키백과를 보면 1970년대~1980년대까지는 일본항공 역시 대한항공 못지않게 추락사고가 많았다. 또한, 이 사고 3년 전(1982년)에는 일본항공 350편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하필 그 날은 오본(お盆, 일본의 추석) 연휴 기간이라 지인의 측근이 전일본공수의 표는 전부 매진이라 구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구입하여 우편으로 발송해온 표가 하필 일본항공 123편이었다.

이 때문에 같은 시간, 같은 노선에 전일본공수 항공편도 있어서 가족들과 소속사는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소식에 처음엔 안도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발표된 탑승객 명단에 큐의 본명인 오시마 히사시와 매니저인 고미야 카츠히로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망연자실했으며, 큐와 함께 비극스러운 운명을 맞은 고미야 카츠히로 매니저는 공항에 일찍 가서 전일본공수표로 바꾸려 했으나, 귀성객들이 많아 바꾸지 못하고 탑승했다고 한다. 이 사고를 다룬 천국에 있는 내 아이에게라는 드라마에서 당시 123편의 모형에 탑승했던 승객들의 사진과 이름이 당사자들의 좌석에 붙어 있는데, 큐, 고미야 두 사람은 당시 1등실이었던 어퍼덱에 탑승하고 있었다.

추락 후 99시간이 지난 8월 16일, 가족들에 의해 시신이 확인되었는데[19], 상태가 굉장히 처참한 모습이었다고 한다.[20]

한편, 큐의 죽음은 일본 가요계의 큰 손실이기도 했지만, 일본 인권 운동계에도 큰 손실이었다. 큐가 평소에 인권을 강조하며 인권을 침해하는 구습을 타파하는 데 힘써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3. 여담[편집]




  • 사카모토 큐는 일본 내에서 오늘날까지도 시대를 풍미한 전설로 언급되고 있고 2005년에는 TV 도쿄에서 사카모토 큐의 일생을 다룬 특집 드라마를 제작해서 방영한 적도 있었다.

  • 친족 외에도 사촌으로는 전설적인 프리 재즈 색소포니스트 아베 카오루가 있었다. 큐 본인은 대중들에게서, 아베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전설로 추앙받은 셈.

[1] 본래 성은 사카모토였으나 부모님이 이혼해서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오시마를 따랐다.[2] 동물을 통한 심리 치료의 한 수단.[3] 그 인연으로 훗날 더 드리프터즈 멤버들이 레귤러로 출연한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8시라구! 전원집합)>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4] 보컬 겸 기타였지만 주로 기타를 맡았다.[5]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레바논계 이집트인 가수인 밥 아잠(Bob Azzam, 1925~2004)의 노래인 '야 무스타파(Ya Mustafa)의 번안곡. 터키에 살던 무스타파라는 상냥한 남자 주인공이 어느 날 여자 노예 한 명에게 사랑에 빠졌으나, 그녀를 구하고 싶어 '돈만 있으면 안되는 일은 없다.' 라는 결론 하에 터키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으나, 그녀를 구했을 땐 어느덧 그의 나이가 60세여서 결국 펑펑 울었다는 내용의 노래이다.[6] 이 곡은 나중에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위령제진혼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7] 2012년, 싸이강남스타일이 본 곡의 기록을 깰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핫 100 차트에서 7주 연속 2위만 하다 내려가는 바람에 역대 아시아 최고 기록 타이틀을 잃지 않았다. 2020년 9월 1일방탄소년단Dynamite가 아시아권에서 두 번째로 빌보드 1위를 하면서 다시 관심이 모아졌는데, 2주 1위하고 내려왔다가 다시 1위로 복귀함으로써 3주 1위라는 동률을 이루었다. 몇 달 후, 한국어 곡인 방탄소년단의 Life Goes On이 빌보드 1위를 기록했다. 2021년 6월부터 방탄소년단Butter가 핫 100 차트 7주 연속 1위, 비연속 8주 1위를 이어가면서 아시아 최장 연속 1위 기록이 깨졌다.[8] 때문인지 한일 양국에서의 K-POP vs J-POP 대결과 같은 병림픽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함께 강제 언급당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일본 커뮤니티 내에서 자국 연예인들의 초창기 해외 성공사례를 거론하면서 주로 언급하는 사례가 우메키 미요시(梅木 美代志, 1957년 영화 '사요나라'로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와, 사카모토 큐의 이 곡 '위를 보고 걷자(스키야키)'의 1963년 빌보드 넘버원 기록이다. 한편 흥미롭게도 빌보드 쪽은 상술했듯이 BTS가 기록을 갱신했으며, 여우조연상의 경우 아시아 국적자 최초로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를 통해 수상하면서 어째 한류의 약진을 증명하고 있다.[9]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식민지인 뿐만 아니라 일본 서민에게도 팍팍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만큼 어울리는 노래도 없다는 평가 역시 공존한다.[10] 허락을 맡지 않고 실은 거라서 CD화하면서 이 부분이 편집되었다.[11] 이 곡은 스눕 독이 1집에서 리메이크한 바 있다.(제목은 발음 상 문제로(슬릭 릭은 영국 출신) 미국식 영어 발음에 맞춘 Lodi Dodi로 변경) 샘플링도 아니고, 아예 리메이크를 한 건 힙합에선 드물다. 이 버전은 원곡과는 달리 '위를 보고 걷자'의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아서 샘플링 부분이 (피처링한 여성 가수의 보컬로) 온전히 실려 있다.[12] 토모베역 2, 3번선의 멜로디도 사카모토 큐의 곡이다.[13] 이 곡은 일본 선수단 다음 순서인 이스라엘 선수단이 입장할 때까지 계속 연주되었다.[14] 작사가 에이 로쿠(6)스케 (永六輔), 작곡가 나카무라 하치(8)다이 (中村八大), 사카모토 큐(9) (坂本九)의 숫자를 따 만든 별명. Kyusakamoto라는 이름의 소행성도 있는데, 이름이 그렇게 지어지게 된 이유는 등록 번호가 6980이라서 그렇다고 한다.[15] 이 노래로 코가 마사오 기념 음악 대상에서 입상했다.[16] 5월 22일에 발매.[17] 이날 그가 녹음을 마친 프로그램은 그해 9월 1일 방송되었고, 방송 직전 큐의 사망 소식과 추모를 마치고 시작한다. 해당 방송[18] 큐의 전 매니저.[19] 시신 발견은 14일.[20] 몇 년 전의 치아를 치료한 기록을 통해 치아 구조와 큐 본인이 어릴 때부터 연을 맺어왔고, 결혼식을 치른 신사에서 받은 펜던트로 본인임을 판명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절엔 아직 DNA 검사 기술이 없었기 때문. DNA 검사 기술은 1980년대 말부터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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