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케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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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케 요시노부
사타케 가문의 대나무부채 가몬[1]

佐竹義宣
1570년 8월 17일 ~ 1633년 3월 5일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센고쿠 시대 말)에서 에도 시대 전기의 다이묘. 사타케씨 19대 당주. 구보타(久保田, 현재의 아키타현)의 초대 번주. 사타케 요시시게의 장남. 어머니는 다테 하루무네(伊達晴宗)의 딸.


2. 생애[편집]


1586년 가독을 이어받고, 1585년 히타치국을 평정했다. 아버지 요시시게는 그가 가독을 이어받기 전 호조가의 견제를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친분을 쌓았다.

외사촌인 다테 마사무네와 전쟁을 반복하고 1589년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동생인 아시나 요시히로가 마사무네에게 대패하고 만다. 이때 도요토미 쪽에서 사타케가와의 외교 공작을 담당한 인물이 이시다 미츠나리였는데 그런 요시노부를 미츠나리가 지원해주고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로 멸망은 피하게 된다.

정벌 뒤 마사무네, 모가미 요시아키, 요시노부를 비롯한 영지를 확인하는데, 아군이지만 진에서 저버린 요시노부한테는 다이묘로서의 부활이 실현되기 어려웠다. 그를 지원해준 미츠나리의 중제로 사타케가가 다이묘로 존속하는 것을 인정받고 히데요시로 부터 히타치 54만석을 영지로 승인 받는다.

1597년 임진왜란 때문에 조선에 있었는데 고종사촌 동생인 우츠노미야 쿠니츠나(宇都宮国綱)[2]가 갑작스럽게 히데요시한테 영지가 몰수되고 사촌관계였던 요시노부 영지도 몰수하려 했으나 미츠나리가 몰래 상경해라고 연락을 해줬서 화를 면하게 된다.

마에다 토시이에 사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등 무단파가 미츠나리를 암살하려 했지만 이를 눈치챈 요시노부가 미츠나리를 구출해 후시미성으로 도망,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를 받았다고도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요시시게를 포함한 사타케 가신들은 동군에 서는 것이 유리하고 생각했지만 요시노부만은 미츠나리를 배신할 수 없었기에 반대를 했다. 이 갈등이 세키가하라가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어느 측에도 가담하지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여서 도쿠가와에게 문책받아 기존 영지를 몰수당하고 데와국 구보타 번으로 옮겨졌다.[3]

전봉된 이후 구보타 번에서 내정에 힘쓰며 가문의 재건에 힘썼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로 참전했다. 자식은 없었으며 가독은 조카인 사타케 요시타카(佐竹義隆)에게 물려줬다.

1633년 64세로 사망했다.


3. 기타[편집]


초상화들이 전부 가면을 쓰고 있는데 평소에도 쓰고 다닌 것으로, 당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가신들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경계심이 매우 강해서 침소도 밤마다 바꾸었다.

군사적 재능말고도 전통 연극, 다도, 검도에도 능했고 문화적, 정치적 재능도 있었다.

여러모로 다테 가문에게는 능욕을 많이 당했다. 다테 가문에게 멸망당할 뻔 한 적도 있으며, 다테 마사무네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전공인 스리아게하라 전투의 패배자도 바로 사타케 요시노부. 한 일화로는 에도 막부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마쓰가 마사무네와 요시노부를 같이 불러 스리아게하라 전투에 대해 물어밨는데, 승자였던 다테 마사무네는 열렬히 자신의 무공을 자랑한 반면, 패자였던 요시노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4.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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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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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이와아키 히토시의 단편 '눈의 고개'에서 구(舊) 가신단의 말을 듣지 않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여하는 결정을 내렸다가 패한 이후 구 가신단과 갈등을 겪는 걸로 나온다.[4][5] 구보타 번으로 전봉 및 감봉당한 이후, 번의 성(城)을 어느 지역에 세울 것이냐로 의견 대립을 겪다 심복의 지략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었고, 그걸 바탕으로 구 가신단을 정리한다.[6]

[1] 사타케 가문은 일본에서 무용할때나 풍습에 사용되는 부채를 가문으로 삼았다.[2] 우츠노미야 히로츠나의 아들.[3] 히타치 54만석에서 데와 구보타 약 20만석으로 절반 이상의 석고가 깎여나갔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때 확실하게 도쿠가와 편을 들어 간토에서 12만석을 영유했던 사토미 가문이 몇 년 되지도 않아 비참하게 몰락한 것에 반해 사타케는 데와로 쫓겨난 덕에 메이지 유신 때까지 명목상 약 20만석, 실제 약 40만석 구보타 번의 번주로 존속할 수 있었고 폐번치현 이후 구보타 번은 아키타 현으로 이어지게 된다.[4] 제멋대로 갖다붙인 도쿠가와와 달리 사타케는 세이와겐지(清和源氏)의 적통인데다 주변의 아시나(蘆名), 소마(相馬) 등 여러 다이묘들의 큰집뻘 되는 가문이다. 그리고 영지인 히타치는 에도와 가깝다. 그런 가문이 세키가하라의 승리로 영지까지 가증된다면 같은 편이었다해도 도쿠가와는 불신을 가질테고 결국 사타케에게 안좋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때문에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구보타로 옮겨지게 된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평가가 작중에 나온다.[5] 다만 아시나, 소마씨 등은 다이라(平)씨이다.[6] 구 가신단들은 전국시대 무장들이라서 평화의 시대에 적응을 못한 것도있고 각종 새 성이라던가 영지 관리에 필요한 각종 사무직 업무에는 잼병이었고, 반면 주인공은 그런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인부들의 임금과 작업시간 각종 현실적인 제안을 바탕으로 성 건설과 영지의 개발안을 내놓지만, 구 가신단들은 그런것들을 탐탁지않아하고 오히려 백성들에게 열정페이를 요구하는 작업방식을 요구한다. 결국은 구 가신단들은 숙청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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