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프다르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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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afdarjung,_second_Nawab_of_Awadh,_Mughal_dynasty._India._early_18th_century.jpg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Safdar Jang (영문 통용표기, 또는 Safdar Jung); सफ़्दरजंग (힌디어 표기); صفدرجنگ (우르두어페르시아어 표기. 페르시아어 표기를 한글 통용표기로 옮기면 사프다르 장)

1708년 경 출생, 1754년 10월 5일 사망. 다른 이름은 아불 만수르 무함마드 무킴 알리 칸, 또는 줄여서 아불 만수르 칸. 무굴 제국정치가, 아와드 나와브(아와드 태수, 재위 1739년 - 1754년).


2. 상세[편집]


원래는 니샤푸르 태생의 페르시아인으로, 미르자 무킴 칸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촌인 사아다트 알리 칸은 아불 만수르 칸이 태어난 바로 다음 해인 1709년 불안정한 페르시아를 떠나 인도로 이주하여 무굴 제국에 임관하였고, 점차 승진하여 1722년에는 아와드 나와브가 되었다. 이에 아불 만수르 칸도 1723년 아와드로 이주하였다.

1724년 무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고 사아다트 알리 칸이 임지 아와드에서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을 때 아불 만수르 칸이 부 나와브로서 아와드 정계의 중심에서 삼촌을 보필하기 시작하였다. 1739년 3월 19일 사아다트 알리 칸이 델리에 쳐들어온 나디르 샤에 의해 감금당한 채로 아들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조카이자 사위(사아다트 알리 칸의 딸과 결혼함)인 아불 만수르 칸이 아와드 나와브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아불 만수르 칸은 나와브직 상속에 대해 2천만 루피를 나디르 샤에게 지불한다. 이 상속은 무굴 황제 무함마드 샤도 인정하였으며, 무함마드 샤는 아불 만수르 칸에게 '사프다르 장'(전쟁의 호랑이)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하사한다.

사프다르 장의 치세에 아와드는 내치, 외치 양면으로 번영을 누려 내실을 키우게 되었다. 전대 사아다트 알리 칸이 시작한 자민다르 통제 정책을 이어받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반항하는 자민다르는 무력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아와드 내 라지푸트족을 복종시키고, 아프간계 로힐라족과는 대립하였는데 이때 마라타 제국자트족으로부터 대금을 지불하고 지원군을 받았다. 아와드 사법 제도를 정비하였고, 관료 등용에 있어서도 종교에 대해 중립적으로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사아다트 알리 칸의 정책을 이어받아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를 고루 기용하였다. 실제로 사프다르 장의 아와드 정부에서 아와드 통치의 2인자는 힌두교도 마하라자 나와브 라이였다.

1748년 두라니 제국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인도를 침략하였는데(1차 침공, 이후 6차례 더 침공함), 사프다르 장은 무굴 황제 무함마드 샤의 요청으로 동년 3월 마누푸르 전투에서 아와드군을 이끌고 가서 두라니군을 물리쳤다. 이 공적으로 무함마드 샤의 뒤를 이은 황제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는 동년 4월 사프다르 장에게 힌두스탄의 대재상(와지르 울무말리키 힌두스탄)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알라하바드를 하사한다. 이에 따라 사프다르 장은 무굴 제국 궁정에서도 영향력을 확보하고 수도 델리에 본인의 저택을 지어 무굴 궁정에 출사하였으며, 동시에 아와드 나와브직 세습을 사실상 공인받게 된다.

사프다르 장은 인도를 노리는 두라니 제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과거 무굴의 적이었던 마라타 제국과 공동 대응을 위한 협정을 맺는다. 마라타와 아와드의 관계는 당시 그리 나쁘지 않았던 덕분에 가능했던 것으로, 이에 따르면 마라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 또는 기타 아프간족, 라지푸트족 등과 무굴 간의 전쟁에서 무굴을 지원하는 대신, 무굴은 마라타의 페슈와 발라지 바지라오에게 500만 루피를 지불하고, 펀자브신드 및 인도 북부의 일부 지역에서 차우트(Chauth) 징세권 및 아그라아지메르를 넘겨주게 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잠시 마라타와 무굴/아와드의 공동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무굴 궁정 내부에서 사프다르 장을 중심으로 하는 페르시아계 귀족과 군무장관 가지 웃딘 칸(피루즈 장 2세), 후궁 감독관 나와브 자우드 칸 등을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계 귀족 간의 파벌 다툼이 일어나, 사프다르 장은 나와브 자우드 칸을 암살했지만 결과적으로 1753년 5월 13일 힌두스탄 대재상직에서 해임된다. 1754년 10월 5일 술탄푸르에서 사망하고 델리에 매장된다. 무굴/아와드-마라타의 협력 관계는 사프다르 장의 외교적 수완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고, 후임 아와드 나와브이자 사프다르 장의 아들인 슈자 웃다울라는 이어지는 마라타와 두라니 간의 전쟁에서 오히려 두라니 측을 지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평생 단 한 명의 부인만을 사랑한 로맨티스트로 유명하며, 윤리적으로도 엄격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사프다르 장이 모략과 배신 등 술수를 사용한 곳은 오직 공적인 권력 투쟁의 현장뿐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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