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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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회당 1998년 로고.svg
사회당
한자 명칭
社會黨
창당일
1998년 11월 29일 (청년진보당, 1차)
2000년 10월 2일 (청년진보당, 2차)
2006년 4월 25일 (희망사회당)
2008년 8월 11일 (사회당)
당명 변경
2001년 8월 26일 (사회당)
2006년 10월 30일 (한국사회당)
해산일
2000년 4월 14일[1]
2004년 4월 20일[2]
2008년 4월 15일[3]
2012년 3월 14일 (진보신당으로 흡수합당)
이념
사회주의
자율주의
생태주의
기본소득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익
해산 전 대표
안효상
당가
인터내셔널가
당 색

빨간색 (#EF4122)


1. 개요
2. 역사
3. 성향
3.2. 탈당위원회
4. 역대 주요 선거 결과
5. 평가
6. 관련항목



1. 개요[편집]



파일:한국사회당_김영규.jpg

파일:한국사회당_금민.jpg

1998년 청년진보당으로 시작하여 2012년 초까지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던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기본소득당의 실질적 전신이기도 하다. 로고의 의미는 희망(초록-생태주의), 의지(검정-자율주의), 열정(적색-사회주의).

백기완 선거대책본부[4] 출신 PD계열 학생운동권이 창당의 주축을 이뤘지만, 이전의 독립노농당 출신 인사 등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하여 창당되었다.

현재 제21대 국회의 원내정당인 기본소득당이 이 당의 실질적 후신이다.


2. 역사[편집]





파일:청년진보당 로고.svg
파일:희망사회당 로고.svg
파일:한국사회당 로고.svg
청년진보당
희망사회당
한국사회당

1998년 11월 29일 청년진보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당대표는 최혁. 당시 기사 백기완 등이 창당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기사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최혁 당대표가 구로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청년좌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 전 지역구에 후보를 내어 평균 3% 정도의 득표율을 올리면서 나름 선전했으나, 이 당시에는 1인 1표제라서 의석을 한석도 얻지 못했다.

2001년 8월 26일 당명을 사회당으로 바꾸고 '반反 신자유주의'와 '반反 조선노동당'을 공식 천명했다. 기사

1인 2표제가 시행된 이후로는 17대 총선18대 총선에서 매번 0.2% 득표하는데 그쳤다.[5] 민주노총과의 연대로 경상남도 창원시울산광역시 일대에서 한나라당과 맞설 정도의 기반은 있던 민주노동당과는 다르게, 사회당은 지역기반이 미약한데다가 민주노동당이 거물급 인물들을 입당시키거나[6] 노회찬, 심상정, 강기갑 등 나름대로 이름있는 정치인을 배출하는 동안 사회당은 이름있는 정치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결국 16대 총선에서 사회당에 투표했던 유권자들은 2002년 3회 지방선거16대 대선, 2004년 17대 총선에 걸쳐 대부분이 민주노동당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고 200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참패하고 PD파가 탈당하여 민주노동당의 세가 축소되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반사이익 같은 것도 얻지 못했다.

이렇게 매 총선마다 득표 미달로 매번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가[7] 재창당하는 방식으로 청년진보당 - 사회당(2001년) - 희망사회당(2006년) - 한국사회당(같은 해 10월)[8] - 사회당(2008년)까지 존속해왔다. 최종적으로는 2012년 3월 4일 19대 총선을 앞두고 안효상 대표 등이 뒤에 보듯 "탈당위원회"라는 해프닝까지 벌이며 진보신당과 통합했다. 노동당 내로 흡수된 사회당계나, 이탈한 사회당계가 모여있는 청년좌파, 알바노조, 기본소득당에도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기본소득당이 더불어시민당에 얹어가는 식으로 원내에 진출하게 되었다. 비록 얹어가기 식 원내 진출이지만 국회의원 한명도 내지 못하고 있는 잔류 진보신당-노동당과는 다르게 당당히 원내에 진출하게 된 것.

당명을 여러 차례 바꿨다. 득표율 부족으로 정당등록이 취소될 경우 같은 당명으로 다시 정당등록을 할 수가 없었던 규정이 있었기 때문. 2002년 16대 대선김영규 후보와 2007년 17대 대선금민 (당시 역대급 최연소 후보인 45세)# 당시 인터뷰 후보는 0.1%, 0.07%(각각 2만2천, 1만8천)의 득표율에 머물렀다. 유럽, 미국 등의 사회당과 비교하면 한국 사회당은 당세가 미약하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원용수 후보가 서울시장에 출마하면서, 이명박 당시 후보와 토론하며 민주노동당을 '종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종북이란 단어는 이 때부터 만들어진 것이다.[9]


3. 성향[편집]


사회당 강령

기본적으로 '반자본주의, 반 조선로동당'노선을 표방하고 있었는데, 반자본주의의 경우는 명시적인 사회주의보다는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연대를 표방하던 반세계화 운동의 영향이다. 반 조선로동당의 경우 사회당의 모체인 학생운동 조직인 '공동체 학생연대(이후 전학협-전국학생회협의회-로 전환)' 시절부터 일관되게 표방하던 것으로 반 김일성주의 학생운동 즉, 한총련 운동에 대당하는 좌파 학생운동 노선의 연장선상이다. 또 사회당의 삼색 깃발은 적, 녹, 흑으로 사회주의, 생태주의, 자율주의를 아우른다고 주장하였다.

개별 학생운동 정파에서 독자적으로 창당되었기에 규모도 작았으며 특히 학생운동 시기부터 노동운동에 대한 의존을 '노동자주의'라고 비판하며 학생운동의 독자적인 활동을 강조하고 타 학생운동 정파의 조직원을 빼내오는 등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양자에서 적을 만드는 행보를 걸었기에 시작부터 고립적이었다. 학생운동 시기의 노동자주의 비판과는 달리 이후 좌파노동자회라는 독자적인 노동운동 내 정파를 만들었지만 의미있는 세력은 되지 못했으며, 노동운동 내 배타적 지지를 받던 민주노동당이 미처 다 신경 쓰지 못하는 장애인 이동권이나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 등에 활동을 집중하며 생존을 모색했다.

사회당의 성격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의 우경화와 정치적 타락을 견제하고 가장 진보적인 가치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정당 활동의 성격이 제도 정치에 맞지 않고 너무 투쟁 등에만 집중한다는 비판도 있다. 남한 사회의 일반적인 좌파들에 비해서 장애인운동이나 빈민운동에 주력하는 측면이 있다.

17대 대선 전후 진보적이면서도 현 대한민국 현실에 실현가능한 정책들을 내세우면서 거의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형태의 노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일각에서는 우경화 되는 것 아니냐는 내부의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합당 직전의 사회당은 공식적으로 사회주의, 사민주의 등의 이론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기존 정치 이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한국 사회 현실에 맞는 민주 사회주의 및 사회적 공화국의 추구를 표방하고 있으며 일반의 인식처럼 그다지 극좌의 성격은 없다고 봐야 할듯 하다. 오히려 심심찮게 논란을 일으키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정당으로써 딱히 새로운 모습을 제안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신당에 비교하면 오히려 대안 세력으로써의 방향성은 잘 보여주고 있는 듯 했지만 진보신당과 합당을 하게 된다.

물론 현실의 벽은 매우 높아서 지난 2010년 7월 은평구재보선에서 민주노동당 이상규 후보의 사퇴로 자연스럽게 자칭 '진보대연합' 후보의 자리를 차지한 금민 후보가 단 458표, 단 0.55%로 1%가 안되는 득표율을 보여주었다. 이것도 그나마 다른 정당인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인사들이 도와주어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세가 계속 줄어 고작 1,000명 가량의 당원으로 정당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한지라, 마침 통합진보당으로의 이탈이 나와 새롭게 당을 정비할 필요성이 있던 진보신당과 합당(사실상 흡수)했다. 두 당은 일단 총선은 진보신당으로 치루고, 총선 후에는 새로운 좌파 정당 건설을 시도하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2012년 3월 7일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흡수통합 공고가 나면서 청년진보당으로부터 시작되어 꾸역꾸역 생명을 이어간 사회당의 13년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새진보통합연대의 탈당 이후 탄생한 노동당을 점령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평등사회네트워크도 순수 PD보다는 사회계 색채를 많이 띈다는 걸 생각해보면, 사회당은 노동당에 들어가서 많은 영향을 준 셈. 2017년 기준 노동당과 녹색당은 사실상 합당을 해도 될 정도로 노선이 비슷하다. 그나마 다른 점은 노동당은 사회주의를 취했다는 것 정도였으나 2016년 이갑용 대표의 선출 뒤 행보로 인하여 노동당이 노동자 투쟁 정당으로 바뀌었다.

사회당 당원이었던 박정근우리민족끼리 트위터 계정 멘션을 리트윗하고 북한정권에 대한 조롱성 게시물을 올렸다가 국보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으로 잠깐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3.1. 덕후위원회[편집]


파일:Rd1kqbP.jpg
당 내에 덕후위원회가 실존했다. 덕후도 덕후 나름 생각은 하고 살자는 말이고, 통일 관련은 그쪽도 사람 끌어들이기 정말 까다롭다는 뜻.

http://it.sp.or.kr/static/page/ev01/ 1주년 기념 페이지의 좌표.

덕후위원회의 경우 이글루스 상에서 여러가지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뜬금없이 이오공감에 덕후위원회 관련 포스팅이 늘어나면서 위원장의 개인경력 관리 차원이라는 의혹이 많았다. 위원장을 맡은 김성일이 이후 사회당의 대외적 얼굴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오공감을 조작하는 그룹이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링크

덕후위원회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여 당을 탈당한 경우도 있는 등 사회당의 이미지에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닌듯. 덕후위원회의 문제점과 비판

그리고 지금은 덕후 위원회는 없는거나 마찬가지 덕후위원회의 몰락경위 또 이에 영향을 받아서 진보신당 오덕위원회를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었으니 친목 동호회로 변질돼서 망했다.


3.2. 탈당위원회[편집]


출범선언문

2008년 부문 위원회 개설 요건이 간단화 되고 생긴 두 부분위원회 중 하나 다른 하나는 위의 덕후 위원회가 되겠다.

진보신당과의 합당 과정에서 생긴 부당한 일들에 대한 반발로 생겼다. 절차적 문제, 기본소득 강령의 문제, 진보신당에 대한 문제 등등.

중요한건 이 위원회 덕분에 지도부가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는것 합당과정에서 당원들의 강력한 반발이 구체적으로 보이고 있는 점 때문에 진보신당과 통합 과정에서 발언권이 더 강해질 수 있게 되었다.

2012년 2월 25일 토요일 오후 7시에 대회를 했다. (실질적인 시작은 8시)


4. 역대 주요 선거 결과[편집]


대통령 선거
연도
선거명
대통령 후보
득표수(득표율)
결과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김영규
22,063 (0.1%)
낙선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금민
18,223 (0.07%)
낙선

파일:김영규.jpg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광역시장 김영규 후보 선거벽보
파일:돈세상.jpg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김영규 후보 선거벽보
파일:17대 비례 사회당.jpg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사회당 비례대표 선거벽보
파일:17대 대선 금민.jpg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금민 후보 선거벽보
파일:10년7월 재보선 금민.jpg
2010년 재보궐선거 서울 은평구 을 금민 후보 선거벽보

5. 평가[편집]


사회당은 당대에 주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저 진보통합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나 덕후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개인적 반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비판을 받는게 관심을 받는 측면까지 있었을 정도. 사회당계가 비판을 받는 부분은 오히려 사라진 뒤, 진보 세력 내 실제 세력로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10] 더욱 주목되었다.

노동당 청년위원회를 중심으로 20대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의 당권을 일시적으로 장악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좀 있었다. 특히 노동당과 알바연대 대표를 지낸 구교현 위원장의 이른바 '비선실세 사건' 이후로는 그 논란의 상당부분이 사실로 드러났다.


6. 관련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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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득표율 미달로 해산.[2]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득표율 미달로 해산.[3]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득표율 미달로 해산.[4] 약칭 백선본[5] 17대 총선에서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양쪽 모두 후보를 냈고, 18대 총선에서는 비례대표에서만 후보를 냈다.[6] 봉준호, 박찬욱, 하리수, 홍석천, 문소리 등 연예인 당원도 많았다.[7] 2%는 넘겨야 정당 등록이 유지되었다. 지금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져 이 규정이 폐지되었다.[8] 희망사회당-한국사회당 시절에는 사회당이 아닌 우회 명칭으로 등록했는데, 이는 당시 총선에서 득표율 미달로 해산된 경우 그 당명을 4년간 쓰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 이후 득표율 미달 정당 해산 규정과 함께 폐지.[9] 다만 당세가 워낙 미약해서 금방 묻혀버렸고 이를 다시 발굴해서 마타도어급으로 퍼뜨리고 다닌 건 원용수가 아닌 조승수다.[10] 세월호 참사 이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운동을 벌였고 후일 기본소득당을 창당하여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용혜인이 대표적이었다. 참고로 용혜인진보신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