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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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행정 약칭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의 성
산둥성
山东(Shāndōng(Shěng | Shandong Provinc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25px-China_Shandong.svg.png





지역
화둥
면적
157,100km²
성도
지난시
청사소재지
산둥성 지난시 리샤구 성푸첸제1호
山东省济南市历下区省府前街1号
하위 행정구역
16지급시(2부성급시)
시간대
UTC+8[1]
인문 환경

[ 펼치기 · 접기 ]
인구
1억 152만 7,453 명[1]
인구밀도
646.26명/km²
민족 구성
한족 99.29% | 회족 0.55%
만주족 0.03% | 조선족 0.03%
HDI
0.758 (2017)
서기
린우(林武)
성장
저우나이샹(周乃翔)
GRDP
전체
$1조 3063억 (2021)
1인당
$12,859 (2021)[2]
행정구역 약칭

행정구역코드
370000
지역전화번호
0530 ~ 0539
0543, 0546
0631 ~ 0635
우편번호
250000 ~ 277500
ISO 3166-2
CN-SD

홈페이지
1. 개요
2. 명칭
3. 지리
4. 산업과 교통
4.1. 최저임금
5. 문화
6. 역사
6.1. 고대
6.2. 중세
6.3. 근현대
7. 기타
8. 행정구역
9. 역대 영도인
10. 출신인물
10.1. 고대
10.2. 중세
10.3. 현대
10.4. 유명인



1. 개요[편집]


산둥성(山东省, 산동성)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급 행정구역으로, 성도는 지난시(济南市, 제남시)이다. 북쪽에는 허베이성, 서쪽에는 허난성, 남쪽에는 장쑤성이 있고 안후이성과도 약간의 경계를 접한다. 성의 인구는 약 1억153만 명(2020년 기준)으로 중국 전체에서 광둥성의 뒤를 이어 2위의 인구 수를 자랑한다.


2. 명칭[편집]


이름은 남북으로 뻗은 타이항 산맥의 동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했다.

약칭은 (루, ()로, 이 지역 서쪽에 있었던 춘추전국시대 국가인 노나라에서 유래했다. 덧붙여, 이 일대를 지나는 강으로 지금은 황하와 합쳐진 지수이에서 따온 지(济)란 명칭이 산둥성의 지명에 자주 쓰이며[2]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 있었던 제나라와 노나라를 합해 따로 지루(齐鲁)라는 표현으로 산둥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당시에는 춘추오패와 이후 전국칠웅에까지 드는 제나라가 더 강했지만 공자의 고향 노나라 명칭이 지금은 더 우세한 것이 아이러니.


3. 지리[편집]


역사 이전에는 빙하기가 끝난 후 해수면이 높아졌을때 반도 전체가 거대한 이었으며, 황하의 토사가 쌓이면서 이들 지대가 습지대로 변하면서 중국 대륙과 연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습지가 많은 편이었다. 진나라 말기에는 거야택이라고 불렸으며, 이런 습지를 기반으로 팽월이 도적 생활을 하였으며, 송나라대에도 습지가 줄었다지만 여전히 늪이 많았다. 양산박이 바로 이 지역이며, 도적들의 기반으로 악명높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개간 및 황하의 퇴적작용으로 오늘날에는 습지대는 둥핑호 일대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서쪽에는 황하삼각주를 이루면서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상당히 넓은 평야 지대가 위치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인구가 많고 인프라가 발달한 지역은 서쪽의 평야 지역이다.

그에 반해 중부와 동부는 주로 해발고도 800m 내외의 구릉지와 산지 투성이이다.

그 중에서도 중부의 산지가 약간 더 험준한데, 이 지역 최고봉이 그 유명한 타이산(泰山)이다. 각종 시조에서 허구한 날 나오는 높은 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최고봉인 옥황봉은 해발 1,535m에 지나지 않는다.[3] 하지만 전체적으로 평야가 넓은 이 지대에서 이 정도 해발고도면 충분히 높은 산으로 인식될 만 하다.

그리고 동부의 산으로는 칭다오에 위치한 라오산(崂山)이 유명하며, 여기 해발고도는 1,132m로 중국에서 보기 드문 화강암지대라 산줄기를 타고 물이 정수되어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했고, 이 물로 담근 맥주가 바로 칭따오다.

산둥반도에 위치해 있다. 물론 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이 크게 작용하긴 하지만, 생각 외로 반도가 아닌 부분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4] 성도인 지난시도 반도에 위치하고 있지는 않다.

지리적 특성상 한국과 가장 가까운 중국 땅으로, 한국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 예로 다른 국가(특히 동남아)의 화교들은 광둥성, 푸젠성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한국의 1세대 화교들의 대부분은 이곳 산둥성 출신이고,[5] 거기에다가 중국본토이면서도 한국과도 비교적 가깝다는 점 때문에 많은 한국 기업들이 산둥성에 많이 진출해서 공장을 지었던지라[6] 교민들과 조선족들도 산둥성 지역에 많이 살고 있으며, 한국인조선족을 합해서 약 25만명~30만명이 살고 있다. 또한 칭다오청운한국학교연대한국학교 등 많은 재중 한국인 학교가 산둥성에 위치해 있다.

칭다오[7]에 한국 영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웨이하이옌타이에도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있어 각각 인천광역시 위해구(웨이하이), 연대구(옌타이)라는 별칭도 있을 정도다.

재미있게도 태안반도, 서산시 쪽이나 경기도 평택시, 충남 아산시 해안지대, 전라북도 군산시 일대에서는 이곳에서 쏘는 AM라디오가 잡힌다. 날씨가 좋으면 아주 좋은 퀄리티로 나온다. 장쑤 지역의 라디오 방송이 전라남도 목포시, 신안군제주도에서 나오는 것이나 일본규슈 지방방송이 부산광역시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하게 가까워서 전파월경이 잘 되기 때문.[8]

사실 칭다오나 웨이하이, 옌타이 등에서 날씨가 좋을 때는 한국방송 전파가 닿기 때문에 산동에 사는 교민들이나 조선족들이 안테나를 설치해서 한국 지상파 방송을 시청하는 경우가 많다. 즉, 서해안 일대에서 산동 지역 방송전파가 닿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 것.

주요 도시로는 성도인 지난을 비롯해 타이안, 칭다오, 허저, 르자오, 린이, 지닝, 웨이하이, 웨이팡, 옌타이 등이 있다. 한국인들과 조선족들은 주로 산둥성 동반부에 위치한 칭다오, 옌타이, 웨이하이에서 많이 살고있다.


4. 산업과 교통[편집]


서부에 평야가 넓게 자리해있기 때문에 서부지역에서 농업이 발달해있으며 농업은 농사가 대부분이지만,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를 재배하기도 한다. 공업은 황하 하류에서 석유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9] 석유산업이 발달되어있지만 석유매장량이 많다고 해도 주요 산유국급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수준은 아닌지라 당연히 중국의 많은 인구를 지탱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10] 일부 산지에서 석탄도 채굴되며 금도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금 채굴량도 중국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바다에 넓게 접해 있기 때문에 산둥성은 주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해 있다. 한편 해안 도시 칭다오를 중심으로 첨단 산업도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중.

수도 베이징에서 상하이를 비롯한 경제특구로 통하는 도로철도가 이 곳을 지나가 교통의 중요성에서도 상당히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쪽의 이야기이고, 반도 내로 들어가면 사정이 상당히 달라진다.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서부처럼 인프라가 발달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반도 지역은 대한민국과 교류하기 가장 유리한 지역이기 때문에 인천항 및 평택항과 다수 항로가 개설되어 있어 해운 교통 면에선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선 산둥 성의 옌타이, 웨이하이, 칭다오로 배를 타고 갈 수 있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웨이하이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한다.

2015년 가을이 되면서 우리나라에서 TV 광고도 하고 있다. 공자의 땅, 휴양지 등.

다만 위에서 언급한 중화학공업 등으로 인한 산업화로 인해 생겨난 폐수에, 무분별한 저인망을 이용한 남획으로 인해 이 일대의 수산업은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로 넘어와 불법조업하는 중국 어선의 대부분이 이 산둥성의 어선들이다. 게다가 한국이랑 가장 가까운 땅이다 보니 중국에서 오는 미세먼지 중 여기에서 나오는 미세먼지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4.1. 최저임금[편집]


산둥성의 최저임금은 지난 2023년 10월 1일부로 조정되었으며 이는 2021년 10월 1일부로 조정된 이래 2년만에 인상된 것이다.#
상용직 최저임금(월)
시간직 최저임금(시간)
1급지(元)
2급지(元)
3급지(元)
1급지(元)
2급지(元)
3급지(元)
2200
2010
1820
22
20
18

※ 같은 지급시여도 개발수준에 따라 급지가 달라지므로 자세한 지역은 각 성 자치구 지급시 인력자원보장국 홈페이지를 참조하자.


5. 문화[편집]


언어로는 산동 방언을 쓴다. 산동 방언은 표준중국어와는 어느정도 다르기는 하지만[11] 그래도 남방 방언처럼 아예 의사소통이 힘들 정도로 멀리 떨어져있지는 않고,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서 많은 산둥성 주민들이 동북 3성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중국 동북 방언과 비교적 의사소통이 잘 되는 편이다. 이 가운데서 해안부 방언은 어느정도 알아먹을만한데 내륙부 방언의 경우에는 영 알아먹기가 힘들다는 평이다. 하지만 외국어 소리를 듣는 남방방언보다는 훨씬 차이가 덜한 편. 산둥성 주민들은 공자와 맹자도 산동어를 썼다며 자부심을 가지기도 한다.[12] 다만 타 주민들이 보기에는 세련된 구개음화를 쓰지 않는 산둥 방언이 촌스럽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산둥성 사람들은 예로부터 중국 내에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동대한(山東大漢)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실제 노나라 출신인 공자도 키가 큰 것으로 유명했으니, 산둥성 사람들의 큰 체격은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 셈.

5.1. 요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산동 요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요리도 꽤나 유명한데 이 가운데서 공자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는 공부채가 특히 유명하다. 덧붙여 산둥성이 한국과 가까운 만큼 한국식 중화 요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짜장면도 산둥성의 향토음식인 작장면이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달달한 맛을 첨가하고, 춘장을 여러가지 재료와 같이 볶아서 양념장을 만드는 방식으로 변화해서 정착된 음식이다. 당연하겠지만 산둥성에서 먹는 작장면은 기름지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짠맛이 느껴지는 등 한국 짜장면과는 맛이 다르며, 그래서 중국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에 본토 짜장면을 찾은 한국인들이 종종 낭패를 보았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산둥성내에서도 한국인과 조선족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돈과 시간만 있다면 한국식 짜장면을 맛볼 수 있기는 하다.

한 광고를 통해 "양꼬치에는 칭따오!" 라고 유명할 만큼, 이곳에서는 칭따오 맥주 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6. 역사[편집]



6.1. 고대[편집]


지금이야 중국의 심장부에 있어서 상상하기 어렵지만, 춘추전국시대를 기점으로 중원에 동화되기 이전에는 중원이라고 불리는 허난성 일대의 주민들과는 별개의 문화(웨스문화 岳石文化)와 정체성을 지닌 '래이'(來夷)라는 동이족계 이민족이 살고 있었고, 상나라-주나라 시기에는 산둥성 일대에 수많은 성읍국가들을 형성해나갔다.

이들을 통칭해서 동이라고 불렀고 한민족도 후에 동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물론 이때는 다르게 동이족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한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상나라와 주나라 동쪽에 살던 여러 종족들을 통칭한 개념인데다가 한반도에서도 수많은 부족-군장국가가 난립해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관계가 있다하더라도 공통의 정체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13] 이 래이라는 이민족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뚜렷하게 우세를 점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제나라와 노나라,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에게 완전히 잠식당하여 서쪽 허난성 일대를 중심으로 발원한 초기 중국에 완전히 흡수된다. 중원과 위도가 같고 기후지형적 환경이 비슷해서 중원 동서남북 중에서는 가장 먼저 동화, 편입되었다.

하지만 가운데 황해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지리적 인접함 때문에 한반도와 교류가 잦았던 것은 사실로, 고대로부터 산둥지역 주민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로 이주하거나 반대로 한반도에서 산둥지역으로 이주한 경우는 빈번했다. 산둥성에서 한반도 스타일 고인돌이 발견된다던가, 반대로 초한쟁패기 때 제나라 주민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며[14] 그 이후로도 백제고이왕 시기 요서를 비롯하여 산동 지역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멸망한 고구려계와 발해계 유민들이 산둥성 일대에 대거 정착해 이정기제나라를 세웠고 신라인들도 산둥성 해안도시에 정착해 신라방을 차려 한중일 삼각무역을 했다.

어쨌든 춘추전국시대에 산둥성 지역에는 수많은 소국들이 이합집산을 거치며 점차 통합되어나가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 시절에 산둥 성 지역에 위치한 나라로 노나라제나라가 있다. 노(魯)나라는 그 유명한 공자의 출신지이고[15] 제(齊)나라는 한때 전국시대 최강의 자리를 거머쥐었던 강국이었으나 나중에는 서쪽의 진(통일왕조)(秦)이 폭풍처럼 성장해 세력다툼에 밀려 멸망하고 만다.[16]

삼국지에서 공융이 자사로 있었던 청주가 바로 산동 반도다.

백제 위덕왕이 당시 중국에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이 '동청주'가 바로 중국 '산동지방'이었다. 당시에는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나라 시기에는 요서 지방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할 때 사용했던 항구들이 있었던 곳 중 하나였다.


6.2. 중세[편집]


당(통일왕조)의 중당시기에 약 60여년간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의 치청번진[17]의 세력권이기도 했다. 당나라 시기에는 수많은 신라 주민들이 산동반도로 이주하여 신라방이라는 고대의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들의 수가 많았는지, 이들을 다스리기 위한 소수민족 특수 기관으로 신라소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기도 했고, 이들의 종교활동을 돕는 신라원이라는 곳도 생겨났다고 한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와 쉽게 오갈 수 있다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한반도와의 접경 지역인 동북 3성 지역과 함께 한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미 고조선 이전시대부터 무역이 활발히 이루졌으며, 고려 시대에는 무역항인 벽란도와의 무역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거기에 명나라 때는 오늘날의 랴오닝 성인 요동 일대 역시 행정구역 상 산둥 성이 관할했다.

명나라 만력제임진왜란 당시 조선백성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자 한반도에서 지리상으로 가장 가까운[18] 산둥성을 대거 매입해서 황해를 건너 조선에 원조했다고 한다.


6.3. 근현대[편집]


청나라 멸망 이후에는 톈중위가 4년간 산둥성을 지배했으나 임성 사건으로 인해 정사기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제노전쟁을 거쳐 봉천군벌인 개고기 장군 장쭝창의 영지가 되었다가 국민당의 2차 북벌 이후 펑위샹이 차지했다. 허나 반장전쟁에서 펑위샹이 패배하면서 펑위샹의 부하였던 한푸쥐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바로 밑에 난징 국민정부가 번성하면서 독립성은 다른 성에 비해서 현저히 낮은 편이었다. 1927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저지하기 위해 1차 산동파병을 강행했으며 1928년에 2차 산동파병을 거행해 일본군이 북상하던 국민혁명군을 공격하면서 제남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독일에게 패배하여 상하이를 내준것처럼 산둥성 역시 칭다오를 독일, 웨이하이를 영국에게 내주면서 서양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일전쟁 때는 일본제국이 이곳을 지배했다. 류보청덩샤오핑이 거느린 8로군 129사단이 이곳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뒤이어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이들은 게릴라전으로 장제스군을 괴롭혔고, 화북지역과 화남지역의 보급선을 차단, 중공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다.


7. 기타[편집]


  • 예로부터 협객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지금도 중국에서 왠지 산둥성 사람이라고 하면 호걸을 연상할 정도. 일반적으로 산둥성 사람들은 자타공인 호방한 성격으로 을 잘 마시고, 손님 접대를 중시한다는 이미지가 중국 내에서 강하다. 수호전의 배경인 양산박(梁山泊)이 바로 산둥성 지닝시 량산현의 지명이다. 민국시대에도 수십만에 달하는 토비가 들끓어 1923년 임성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8. 행정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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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급시

색인:
{{{-2
둥베이
화중
화난
기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50px-Shandong-map.png
산둥 성에는 부성급시 2개, 지급시 14개로 총 16개의 지급 행정구역이 존재한다.(라이우시가 지난에 통합되었다)


9. 역대 영도인[편집]


파일:중국 국장.svg
산둥성 영도인

[ 성장 ]
#FFF
||<-3><table width=100%><tablebgcolor=#ee1c25> '''{{{#ffff00 산둥성 인민정부 주석}}}''' ||
||<-3> {{{-2 {{{#ffff00 초대}}}}}} ||
||<-3><rowbgcolor=#fff,#191919> [[캉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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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공산당 지방위원회 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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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출신인물[편집]



10.1. 고대[편집]



10.2. 중세[편집]




10.3. 현대[편집]




10.4. 유명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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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은 전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포함)이 중국 표준시를 사용한다.[2] 지난, 지닝 등.[3] 덕유산보다 낮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구절이 정말 무색해진다.[4] 대표적으로 성도인 지난(济南), 취푸(曲阜), 랴오청(聊城) 등 서남부 내륙일대는 중원 하남 일대이던 '연주'에 속해있었고 반도 아래 남부해안지역은 월나라/서나라 등 남방 국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한대에 서주에 속했다.[5] 한국 화교들의 국적은 대부분이 대만이며,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과는 다르게 재중동포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다. 사실 어린 세대의 인식과 달리 원래 중화민국이 중국 원본이 맞으며, 한국 화교가 건너오던 시기에는 엄연히 중국은 중화민국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1949년에야 세워진 역사가 짧은 나라에 불과한 반면, 중화민국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세워진 구중국이다.[6] 현재는 중국도 생활수준이 어느정도 향상되면서 봉급수준이 많이 올라서, 중소기업들이나 제조업체들의 경우에는 더 멀리 떨어진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태국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옮겼다. 하지만 산둥성의 인구만 해도 억에 가깝다는 이점이 있기에, 서비스업 중심으로 남아있는 한국 기업들도 많다.[7] 青岛;한국식 독음으로 청도[8] 몰론 부산과는 다르게 이들 지역에는 산둥성 지방의 라디오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라디오가 한창 전성기를 누릴때는 70년대까지였고 그때만 해도 중국은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전파를 잡아 어찌저찌 라디오로 연결시킨다고 해도 이윤이 없었다. 반면 일본은 문화적으로 풍부한 선진국이었기에 라디오로 일본의 생생통을 접하는 부산의 입장에서는 반사이익을 얻을 수가 있었다.[9] 확인매장량은 8억 배럴에 추정매장량은 30-40억 배럴 정도로 추산된다.[10] 전체적인 생산량이 적은 건 아니지만, 중국의 석유소비량이 미국 다음인 것을 생각해보면 자급자족하기엔 당연히 턱없이 부족한 양인 게 맞다. 괜히 2000년대 중반기에 중국이 세계의 석유값을 끌어올린 것이 아니다.[11] 일부 구개음화되지 않은 음이 보존되어 있어, 한국으로 치면 서북방언 정도의 포지션이다. '깐풍기'로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면, 표준중국어로는 '지'로 읽는 글자를 산동 방언에서는 '기'로 읽는다. 이 영상 36초부터 나오는 산동 방언을 직접 들어보자. 여기서도 '气(qì)'를 '키' 비슷하게 발음한다.[12] 다만 현대 중국어춘추전국시대 당시의 중국어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게 함정. 시기상 상고 라틴어 혹은 고전 라틴어와 현재 이탈리아어의 차이와 비슷하다.[13] 한반도 이북에 살던 흉노, 동호와 같은 튀르크, 몽골계 민족들과 숙신과 같은 퉁구스계 민족들은 동이가 아닌 북적(北狄)으로 분류되었다.[14] 사기 조선열전.[15] 그런데 이 미칠 듯한 네임밸류와는 달리 노나라는 군사적으로는 별로 보잘 게 없는 작은 나라였다.[16] 그래서 산둥성의 자동차 번호판은 鲁를 쓰는데, 이게 여기서 따온 것으로 지역별 분류는 다음에 오는 알파벳으로 구분한다. 지난시는 鲁A, 칭다오는 鲁B 이렇게. 하단부의 鲁Q는 린이 지역의 번호판이다. 파일:external/img5.imgtn.bdimg.com/u=772827718,1276754095&fm=21&gp=0.jpg[17] 후에 잠시 제나라(齊) 왕조를 칭하기도 했다[18] 만주지역이 붙어있긴 하지만 명나라의 행정력이 잘 미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