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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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고고학


1. 개요[편집]


산융(山戎), 또는 무종씨(無終氏), 북융(北戎)은 중국 춘추 시대에 존재한 유목민족으로, 현재의 요녕성 서북부와 하북성 동북부에서 활동했으며, 제나라의 공격을 받고 소멸했다.


2. 역사[편집]


산융은 한때 강대해져 그 세력의 범위가 전국시대연나라, 조나라, 제나라의 사이에 있었다. 연나라를 자주 침범했으며, 기원전 705년에는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기원전 679년, 제환공이 제후들 사이에서 패권을 잡고, 산융이 중원에 끼치는 소란을 해결하고자 했다.

기원전 664년, 산융이 다시 연나라를 공격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제 환공은 연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산융을 토벌했다. 다만 이듬해인 기원전 663년에 산융은 이미 북방으로 되돌아갔다.

제나라, 연나라의 연합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산융의 근거지인 무종산(無終山, 현재의 허베이성 첸안시 옌산 일대)을 공격해 크게 이겼다. 산융의 왕은 고죽국으로 도망갔고, 연합군은 최종적으로 '산융을 북벌하고, 영지(令支)를 치며, 고죽을 참한 뒤 남쪽으로 돌아오는' 빛나는 결과를 얻었다. 제환공의 산융 정벌 때 고죽국도 동시에 멸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연나라는 강역을 넓히게 되었고, 제나라의 북쪽 방벽이 되었다.

기원전 660년, 제환공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고죽과 이지(離支, 영지)의 땅을 쳐서 철저히 산융을 정복했다.

3. 고고학[편집]


고고학적으로는 한국학계에서 적봉부터 요서 일대에 걸쳐 있던 비파형 동검이 특징적인 유목 문화인 하가점 상층 문화를 산융으로 비정한다. 연과 접해있다는 지리적 특징, 연계 문화가 하가점 상층 문화가 팽창할 때에 축소된다는 점, 기원전 7~6세기 동안 급격히 몰락한다는 점 등 사서와 일치하는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1] 하가점 상층 문화의 후기에 요서에서 나타나는 십이대영자 문화, 즉 고조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의 중국 학설은 하가점 상층 문화를 동호에 비정하고 옥황묘 문화를 산융으로 비정하는 학설도 있으나[2] 동호라는 표현은 기원전 4세기부터 중국 사서에 나타난다는 점과 이상의 증거에서 하가점 상층 문화는 산융에 더 적절한 점에서 반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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