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케베츠 불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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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사건
3.1. 사건의 예고
3.2. 첫 번째 사건: 1915년 12월 9일
3.3. 두 번째 사건: 1915년 12월 10일
3.4. 수색과 사살: 1915년 12월 11일~14일
4. 피해
5. 사건 이후
6. 사건 이후 비슷한 사건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8. 여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20180117180810.jpg
당시 사건을 재현한 모습.

三毛別(さんけべつ(ひぐま事件(じけ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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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2월 9일부터 12월 14일까지 일본 제국 홋카이도의 토마마에군 산케베츠(현재의 토마마에쵸 산케이(三渓)) 로쿠센사와 지역에서 벌어진, 일본 역사상 단일 개체 맹수에 의한 최악의 동물 재해 사건 중 하나. 우수리불곰에게 6명(임산부 희생자의 태아 포함시 7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가 발생했다.[1] 지명을 딴 '로쿠센사와 사건', 혹은 당시 불곰에게 붙여준 이름을 따서 '쿠마아라시(羆嵐) 사건'으로도 불린다.

2. 배경[편집]


19세기에도 막부 말기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당시 일본제국은 미개발지가 많은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이주-개척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전까지는 토착민인 아이누를 제외하면 미개척지로 남아 있던 지역에 이주민들이 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동물들의 서식지와 인간들의 거주지가 겹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동물들이 농작물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해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이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그 피해 규모와 잔혹성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최악의 동물 재해로 꼽힌다.


3. 사건[편집]


요약하자면, 1915년 12월 9~10일 이틀 동안 불곰은 다시 마을로 내려와 두 차례에 걸쳐 오타 가와 메이케이 가를 습격해 여자와 어린이 등 6명을 죽이고 일부는 먹어치웠다.


3.1. 사건의 예고[편집]


불곰의 습격은 곰에 의한 대학살 한달 전인 1915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케다 가의 말 한 필이 놀라 옥수수 몇개를 떨어트리고 도망치는 데에 그쳤고 이후 다시 마을에 내려온 곰은 마을 장정들의 공격을 받고 도망친다. 사실 당시 마을이 그렇게 개척이 되지 않았던 곳인지라 이런 야생동물의 출현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였고 이때까지는 아직 인명피해도 없었으나...


3.2. 첫 번째 사건: 1915년 12월 9일[편집]



첫번째 습격은 1915년 12월 9일 오타 가의 가장인 오타 사부로(당시 42세, 1873년생)와 오타 가에 신세지고 있던 나가마츠 요우키치(당시 59세, 1856년생)가 다리를 만들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발생했다. 집에는 사부로의 아내 마유(당시 34세, 1881~1915)와 오타 가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하스미 미키오(당시 6세, 1909~1915)가 남아있었는데, 새참을 가지러 집에 돌아온 요우키치는 뒷모습만 보면 졸고 있는 것 같았던 미키오를 보고 미키오를 놀래켜주려다가 그 아이가 끔찍한 시신이 된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이 사건에 크게 놀란 마을 사람들은 흔적을 보고 불곰의 짓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불곰은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 미키오를 한방에 때려죽이고 마유는 산 채로 끌고 간 것으로 보였다.

이 사태로 로쿠센사와 사람들은 사이토 이시고로를 인근 경찰서로 급파하고, 이웃마을 산케베츠 사람들까지 합쳐서 수색대를 꾸린다. 7정의 엽총 및 낫이나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수색대는 문제의 불곰과 마주치지만 6정은 격발불량에 그나마 발사된 총알은 한참 빗나가고,[2] 곰한테 반격을 당하여 혼비백산해서 쫓겨났으나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다.

그렇게 위기를 면한 수색대는 다음날 아침 마유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이미 절반 이상이 사라진 뒤인 참혹한 시신을 보고 공포에 떨었다.

문제는 이때 마유의 시신을 수습해서 내려왔다는 것이다.[3]


3.3. 두 번째 사건: 1915년 12월 10일[편집]


이 때문에 불곰은 자신의 먹이를 되찾으려고 또다시 마을을 덮치는데, 처음에는 마유와 미키오의 시신을 모셔둔 오타 가를 다시 덮쳤지만 겨우 쫓아냈으나[4], 그 직후 하필이면 사이토의 가족 등 여자와 아이들이 피신해있던 메이케이 가를 덮친다. 사망자는 임산부 타케(당시 34세, 1881~1915)[5]와 그녀와 함께있던 3세 남자아이 2명. 그리고 6세 남자아이 1명은 곰에게 몸이 뜯어먹힌 채로 구조되었지만 약 20분 후 사망했다. 태아는 모체가 공격을 받을 때 배가 찢기면서 밖으로 꺼내졌는데, 불곰이 주변 다른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전혀 공격하지는 않았기에 한동안은 숨이 붙어 있었지만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타케가 사망하고서 1시간 뒤 역시 사망했다. 생존자는 숨어 있어서 불곰의 공격을 피한 아이 2명이였다. 그 즈음 검시를 위해서 산케베츠로 오던 의사 역시 곰의 변에서 옷 조각과 인골 조각을 발견한다.

3.4. 수색과 사살: 1915년 12월 11일~14일[편집]


사이토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홋카이도의 경찰관인 스가 미츠구 경위는 헌병 경찰과 인근 마을 청년단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구성하였고 60정의 총기와 사냥개 10마리를 동원하여 12월 12일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한 토벌대는 시신들과 현장을 보고는 경악하며 시신들을 수습하고 수색에 나선다. 하지만 토벌대가 하루종일 지역을 수색했으나 곰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곰이 이미 인육을 먹어본 경험이 있으므로 인육 맛을 들여 먹잇감으로 인식하였다 판단한 뒤에 (실제로 한번 인육을 먹은 동물은 이후 사람을 먹잇감으로 보고 계속 잡아먹게 되기 때문.) 인육을 먹으러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스가 경위는 조심스럽게 메이케이 가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미끼로 쓰자고 제안했다. 맨 처음에는 토벌대와 유가족들이 반대했으나 상황이 상황이였던지라 나중에는 토벌대와 유가족들도 이에 동의하여 명사수 7명을 매복시켰다. 하지만 곰은 시신이 있는 집 근처에 나타났다가 경계심을 가졌는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사람이 없는 다른 집들을 습격하여 겨울 양식을 먹어치우고 옷과 침구를 찢어놓고 갔다. 다음날인 13일 밤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 입구에 매복하던 토벌대는 낮에 세어놨던 나무들이 한 그루 더 늘어나있자 그것이 곰임을 알아채고 사격을 가했으나 도망쳐서 놓친다. 곰이 흘린 핏자국을 확인한 스가 경위는 만족스러워했지만 토벌대에 합류한 사냥꾼 야마모토 헤이키치[6]는 되려 곰의 화만 더 돋궜다며 걱정했다. 한편으로 아사히카와에 위치한 일본 육군 7사단 28연대에서도 병력을 차출해 파견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건이 끝날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12월 14일 토벌대는 부상을 입은 곰을 추적했는데, 그동안의 경험으로 곰의 성질을 잘 알고 있던 헤이키치는 곰의 도망을 방지하려고 일부러 조용히 다른 대원들과 다른 길로 올라간 뒤 느릅나무 위에 올라가 숨었고 토벌대를 기다리고 있던 곰의 선수를 치는데 성공하여, 곰한테 첫 발에 심장을 맞추었고, 두 발째로 머리를 맞춰서 사살한다. 곰한테 치가 떨렸던 토벌대는 사살한 곰의 사체를 때리고 발길질하며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 사살당한 곰은 단단한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컸으며 군데군데 누런 갈색 털이 섞여있는 검은 털로 뒤덮인 몸에는 흉간 부위에서 등에 걸쳐서 하얀 얼룩 반점이 있었다. 그리고 7~8살로 추정되고 문단에서 뒷발 뒤꿈치까지 길이가 9척(약 2.7m)에 몸무게는 90관(약 340kg)에 달하는 거대한 수컷이었다. 당시 토벌대에 참가한 아이누족 사람들은 얼마 전 근처에서 사람을 잡아먹고 사냥꾼들한테 쫓기던 놈 같다고 했으며, 해부한 결과 내장에서 사람의 머리카락과 옷 조각 등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도 이미 적어도 3명의 사람을 잡아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가 나와서 이를 본 사람들 모두가 경악한다.[7] 곰의 사체는 가죽을 벗긴 뒤 고기는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가족들이 나눠 먹었으며[8] 가죽과 간은 매각한 뒤 수익금 50엔을 토벌대가 유가족에게 위로금으로 건넸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공포심에 모두 마을을 떠나 이 마을에는 한 명도 살지 않게 되었다.

4. 피해[편집]


최종 피해는 사망자 6명(태아도 피해자로 꼽을 경우 7명), 중상자 3명. 중상자 중 1명은 태어난지 1년 남짓한 영아였으며, 이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몇 년 못 가 요절했다. 그래서 사망자를 이 아이까지 포함하여 8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사망자
    • 오타 마유: 당시 34세(1881~1915): 12월 9일 사망
    • 하스미 미키오: 당시 6세(1909~1915): 12월 9일 사망
    • 메이케이 긴조: 당시 3세(1912~1915): 12월 10일 사망, 메이케이 家 3남.
    • 사이토 하루요시: 당시 3세(1912~1915): 12월 10일 사망, 사이토 家 4남.
    • 사이토 다케: 당시 34세(1881~1915): 12월 10일 사망, 사이토 家 모친.
    • 사이토 다케의 태아: 12월 10일 사망
    • 사이토 이와오: 당시 6세(1909~1915): 12월 10일 습격, 동일 사망, 사이토 家 3남.

  • 사건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 메이케이 우메키치: 당시 1세(1914~1918): 12월 10일 습격 이후 2년 8개월만에 후유증으로 사망, 메이케이 家 4남.

  • 생존자
    • 메이케이 유지로: 당시 8세(1907~1942):메이케이 家 2남. 27년 후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했다.
    • 메이케이 야요: 당시 34세(1881년생): 메이케이 家 모친.
    • 메이케이 리키조: 당시 10세(1905년생): 메이케이 家 장남.
    • 메이케이 히사노: 당시 6세(1909년생): 메이케이 家 장녀.
    • 사이토 이시고로: 당시 42세(1873년생): 사이토 家 부친.
    • 메이케이 야스타로: 당시 40세(1875년생): 메이케이 家 부친.
    • 나가마츠 요우키치: 당시 59세(1856년생) 사건 다음 해에 강에 빠져 사망했는데, 곰에게 받은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영향을 미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5. 사건 이후[편집]


곰을 사살한 직후 토벌대가 사체를 운반하려 하자 이전까지 맑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눈보라가 몰아쳤다고 한다. 이를 두고 주민들은 '쿠마아라시(羆嵐. 곰 폭풍)'이라 부르며 두려워했으며, 이 사건의 충격으로 마을 주민들은 거의 대부분 타지로 이주했다고 한다. 한편, 홋카이도에서는 이 사건 이후 곰 사냥 명령을 내려서 100여 마리의 곰들이 사살당했다고 한다.

이후 로쿠센사와 마을에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과 불곰과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냥꾼이 된 구장의 아들 오카와 하루요시(1909~1985)[9]가 은퇴 이후인 1977년에 세운 것이다. 불곰까지 추모하는 이유는, 그 불곰 역시 무분별한 인간의 미개척지 개발로 인해서 삶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이다.

현재 홋카이도 산케베츠는 곰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쿠센사와 근처를 지나는 도로는 잔인했던 실제 사건과는 다르게 '베어 로드'라 하여 귀여운 모습의 엄마곰과 아기곰 그림이 있는 등, 곰을 주제로 한 관광 도로로 지정되어 있어 왠지 더 섬뜩하고 기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6. 사건 이후 비슷한 사건[편집]


8년 후인 1923년 역시 홋카이도 지역에서 이시카리누마타 호로신 불곰 사건이 발생해서 5명이 죽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후 1970년 역시 같은 홋카이도의 히다카 산맥에서 대학생 3명이 불곰의 습격에 참혹하게 살해당한 후쿠오카 대학 반더포겔부 불곰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100년도 넘게 지난 2016년 아키타현에서도 식인 반달가슴곰이 4명을 살해하고 잡아먹은 토와리산 반달가슴곰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7.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은아 시리즈의 붉은 곰이 이 산케베츠 불곰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명견 실버에서도 이 사건처럼 곰들이 홋카이도의 개척민 마을을 습격한다.

요시무라 아키라(吉村昭)가 쓴 1977년작 공포 스릴러 소설 <쿠마아라시(羆嵐)>가 이 사건을 다룬 첫 번째 창작물이다. 본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한 논픽션은 아니고 어느 정도 작가의 상상과 각색이 들어가 있는데, 그 때문에 안 그래도 무서운 사건이 더욱 무섭게 묘사된다. 어릴 때 이 소설을 읽고는 밤에 화장실을 못간 사람(특히 산골마을 거주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정도로 묘사가 무섭다. 지금도 아마존 재팬에서 605엔에 판매중이다. 국내에 정발된 적은 없다.

'소년 낚시왕(원제 낚시왕 산페이)'으로 유명한 야구치 타카오가 그리고, 나오키상을 수상한 도가와 유키오가 글을 쓴 '야성전설 히구마카제'가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 유리쿠마 아라시가 해당 사건과 1982년 소설 원작에서 제목과 모티브를 따왔다는 얘기가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곰'인 데다 '식인'이라는 요소까지 들어갔으니 무엇보다 제목을 직역하면 "백합곰 폭풍"이란 뜻으로, 문제의 곰에 붙여진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로 유명한 만화가 아라카와 히로무의 만화 백성귀족에서는 작가와 가족들이 TV를 보다가 곰이 을 2마리나 물고 갔다는 말에 이 사건의 곰과 같은 괴물이 나타났다며 공포에 떤다. 그나마 다행히(?) 물고 갔다는 말은 일반적인 크기의 말이 아니라 사람도 손으로 들 수 있는 작은 포니종.[10]

귀멸의 칼날이 이 불곰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괴담이 존재한다.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의 회상 속에서 이 사건의 곰과 동일한 특징을 가진 곰이 등장한다. 9척(2.7m)에 사람을 여섯 명 잡아먹은 곰이라는 말이 나온다.

또한, 토미오카 기유의 외전 만화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나오는데 북부 지방에서 식인곰이 사람을 여럿 사냥한다는 소문을 듣고 혈귀의 소행이라 판단한 귀살대에서 기유를 파견하는데 이 때의 묘사가 이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게 전개 된다.[11]


8. 여담[편집]


한때 해당 불곰을 사살한 직후을 찍었던 당시 사진이라고 알려졌었던 것이 인터넷에 계속 떠돌아다니지만 사진 조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도 눈치챌 수 있듯이 사진 속 곰이 무슨 마블 코믹스데몬 베어 마냥(...) 판타지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크기 때문에 판별해 본 결과 결국 조작한 사진임이 밝혀지게 되었다.사진의 진위 여부를 고찰한 영상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878년에 같은 홋카이도의 오카다마[12]에서 불곰이 엽사와 개척민 부부를 습격,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은 '삿포로 오카다마 사건'이 있었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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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다가 토벌후의 해부 결과와 증언에 따르면 그 이전에 이미 해당 곰에 의한 희생자가 3명 더 있었으므로 최대 10명의 사람이 죽었다.[2] 무라타 엽총이 사용하는 엽탄은 흑색화약을 사용해 무연화약을 총탄을 사용하는 타 엽총들과 비교했을 때 불발률이 높은 편이었다.[3] 곰은 집착이 매우 강한 동물이기 때문에 한 번 자신의 소유물이 된 것은 절대 놓지지 않는다.[4] 이때 한 남자가 아내를 밟고 천장으로 도망쳤다고 하며, 그 때문에 이후 부부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고 한다(...).[5]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곰에게 먹히기 직전 배는 건드리지 말고 차라리 머리를 먹으라고 애원했지만 불곰이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었기에 그대로 뜯어먹혔다고 한다.[6] 이 인물은 1858년생으로서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당시 썼던 군모와 전장에서 획득한 베르단을 가지고 곰사냥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왔다. 이 사건 전까지 고등어 손질에 쓰는 식칼로 불곰을 잡는 등 야생동물을 100마리 넘게 잡았을 정도로 솜씨가 좋은 베테랑 사냥꾼이지만, 툭하면 술 먹고 싸움을 벌이는 등 행실이 거칠어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상황이 급박해서 촌장이 직접 불러왔던 것. 그래도 다정한 면도 존재하였으며 1950년 7월에 9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300마리가 넘는 곰을 잡았다고 한다.[7] 이 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위에도 서술했지만 한번 인간의 피와 살맛을 본 동물은 그 이후로는 인간을 사냥감으로 인식하여 끝없이 희생자를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내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죽여버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도망쳐도 무조건 추적해 발견하면 반드시 사살해야 하며, 멸종위기 동물이나 보호종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람의 생명이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식인 경험이 있는 개체를 빠르게 솎아 내지 않으면 자위를 위한 인간 집단의 공격을 받아 아예 멸종할 수 있다.[8] 다만 이 곰의 고기는 질기고 단단하고 딱딱하면서 근육이 많아서 맛이 없었다고 한다.[9] 사건 당시 6세였고 공교롭게도 사건 70주년이 되던 1985년 12월 9일에 향년 76세로 사망했다. 그것도 70주기 위령제 때 인삿말을 하던 도중 쓰러져 사망했다. [10] 미니어처 호스라고 흔히 불리는데, 대형견 정도 사이즈라서 '개만한 말'로 인터넷에 알려졌다. 일반적인 미취학 아동이라면 잠깐 탈 수 있는 크기라서 동물 체험장소에서도 인기가 있다.[11] 당연하지만 식인곰의 소행이 아닌 모종의 이유로 혈귀로 급변한 사냥꾼 소녀의 아버지가 벌인 짓이었고 토미오카 기유와 기유보다 나중에 도착한 코쵸우 시노부의 도움으로 혈귀가 된 아버지를 토벌하는데 성공한다.[12] 현재의 삿포로시 히가시구 오카다마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