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나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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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49년,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이끄는 옵티마테스군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한 일리리아의 살로나 시를 포위 공격한 전투.

2. 상세[편집]


기원전 49년,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가 이끄는 옵티마테스 함대는 쿠릭타 공방전에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의 15개 코호트를 생포하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의 40척 함대를 격파했다.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여세를 몰아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부임할 예정이었던 일리리아를 제패하려 했는데, 다른 곳은 순순히 귀순했지만 살로나 시만이 카이사르를 끝까지 지지했다.

살로나 시는 일리리아 남부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언덕 위에 건설되었으며 인근에 항구가 있었다. 이 도시는 사다리꼴 모양을 갖췄으며, 로마의 문화와 건축의 많은 부분을 본받아서 지어졌다. 살로나와 그 주변 지역은 민트와 은이 대량으로 묻혀 있었기에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중요했다. 옥타비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이곳을 압박했지만, 주민들은 귀순을 끝까지 거부하고 많은 목재 탑들을 지어서 수비를 강화했다.

옥타비우스는 일단 함대를 파견해 항구를 봉쇄하게 한 뒤, 해안가에 군대를 상륙시켜 살로나 시를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내전기에서 옥타비우스가 여성의 머리를 잘라서 도시에 투석기로 던졌다고 기술했다. 한때 도시가 함락되는 듯했지만, 주민들이 충분히 나이가 많고 기꺼이 싸울 수 있는 모든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로 하자, 노예들이 이를 악물고 적을 향해 달려들어 미친듯이 살육했다. 결국 옥타비우스는 막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후 옥타비우스는 마을 주변에 5개의 숙영지를 세우고 포위를 이어갔다. 살로나 수비대는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는 걸 눈치채고, 여자와 아이들을 성벽에 남겨둔 뒤 새벽에 성문을 열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숙영지를 하나씩 점령해 많은 적을 살육했고, 옥타비우스는 잔여병을 수습해 함선으로 도주했다. 그들은 곧 살로나를 떠나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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