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 식민사관 주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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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실: 강단사학계는 삼국사기를 부정하지 않는다.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수정'하는 행위를 '부정'으로 보고, 이런 '부정'이 식민사관이라는 논리다.

이덕일김상태, 이희진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론자들을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론자"로 몰면서 식민사관이라고 주장한다. 정작 이들은 삼국사기 신봉도 식민사관이라고 주장한다.

서강대 총장을 역임한 신라사 전공 역사학자인 이종욱도 이런 주장을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종욱은 삼국사기 수정론 자체를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이종욱 등 삼국사기 초기기록 긍정론을 펼치는 한국고대사학자들의 주요 논지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론’을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하고 있지, ‘수정론’을 식민사관이라고 하지는 않는다(수정론과 부정론 혹은 불신론의 경계와 차이에 대한 논의 문제는 별개로 남아 있긴 하다). 다만 수정론의 논의는 식민사학의 영향력이 아직도 학계에 일부 잔존한,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1] 즉 수정론은 식민사학을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한 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수정론이 곧 식민사학 그 자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2. 사실: 강단사학계는 삼국사기를 부정하지 않는다.[편집]


그러나 실제로는 부정론이 아니라 수정론자들이다. 이덕일이나 김상태가 식민사학자라 주장하는 이기백의 말을 보자.

"시대에 따르는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서는 이미 이에 관심을 가지고 논급한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라도 시대적 변화를 시대에 따른 문헌자료의 신빙성 여부의 문제로 전환시켜버린 결과, 상고(지증왕 이전) 부분의 사료를 불신하고 이를 다루는 것을 포기함으로 해서, 갈문왕이 된 인물의 과반수를 연구대상에서 제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결국 갈문왕에 대한 시대적 인식은 중고(법흥왕~진덕여왕)에 한정된 것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시대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연구에 화를 미치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본고에서는 일단 모든 갈문왕 사료를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출발할 것이며, 또 그 후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자료까지도 검토하여 신라의 전역사에서의 시대적 변천과정을 파악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본고가 둘째로 주의를 기울인 점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말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내물마립간 이전의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니냐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부분에는 그 이후의 부분보다 사료상의 결함이 많기는 하다. 그러나 어떤 구체적인 사료의 신빙성 여부에 대한 결론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해본 뒤에 내려져야 할 성질의 것이다. 갈문왕 관계 사료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후대의 상식에 입각해서 약간의 문자상의 차이나 혹은 몇가지 이설의 존재에 당황하여 이를 일률적으로 불신하는 태도를 버리고, 관계되는 사료들을 대국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기백, 『신라정치사회연구』, 일조각, 1974, p.4

이기백은 분명히 삼국사기 부정론을 거부하고 있다.

이병도 당시만 해도 강단사학계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입장이었으나 이기백 이후로는 거부하고 수정론이 대세가 됐다.[2] 오히려 삼국사기에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는 이들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고고학자들이다.

게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초기 기록은 연대가 고고학 편년이나 중국 측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3] 초기군주들의 수명과 재위기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 때문에 그 연대를 그대로 신뢰하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자세한 것은 백제/왕사, 백제/역사, 신라/왕사, 사로국 , 마한, 고이왕, 포상팔국의 난, 탈해 이사금 등의 문서 참고. 고구려본기의 경우도 백제본기나 신라본기보단 조금 낫다지만 여기서도 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 등의 가족관계와 지나치게 긴 수명, 재위기간처럼 기년이 잘못된 정황이 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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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종욱, <한국고대의 부와 그 성격 - 소위 부체제설 비판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17, 2000 참조[2] 물론 대세라는 말은 모든 사학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이종욱 등 소수의, 주로 서강대 출신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수정론을 거부하고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대다수를 긍정하고 있다. 이들은 이덕일과는 달리 고대사학계 내에서도 그 학문적 성과의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들이다. 물론 당연히 모든 기사를 100% 완벽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사료검증 및 사료비판 과정을 거쳐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다.[3] 그런데 사실 고고학적 편년만 보면 고구려의 고도 국내성에서도 3세기 이전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서기 3년 유리왕 시기 국내성(집안)으로 천도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들어맞지 않고 졸본(환인)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단지 고구려의 경우 기원전 1세기~서기 1세기 기록인 한서에서 그 실체성이 명백히 드러나지만 신라와 백제의 경우 3세기에 가서야 삼한 78개국의 소국으로나마 교차검증되기에 신라와 백제의 경우 역사 출발이 늦는거 아닌가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해 역사학자 노태돈은 대무신왕 11년 기사의 '암석 위에 있으며 성 안에 물이 나오는 샘이 있다'는 위나암성의 묘사를 근거로, 유리왕 때 천도했다는 국내성(위나암성)은 환인의 오녀산성의 지세와 더 가까우며, 고구려의 집안 천도는 환도성으로 천도한 산상왕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마침 국내성 축조 기사가 고국원왕 12년조에 있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