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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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삼국시대의 삼년상
3. 구체적인 방식
4. 현실
5. 사례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安."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故, 不爲也. 今女安則爲之."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 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재아가 물었다.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너무 깁니다. 위정자가 3년 동안 예식을 시행하지 않으면 예식이 반드시 폐기되고, 3년 동안 음악을 하지 않으면 음악이 전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다 할 무렵은 바로 새 곡식이 여무는 때입니다. 불씨를 뚫어 불을 피우는 것처럼 1년이면(期)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니 1년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공자께서 물으셨다.

"부모 돌아가시고 1년 만에 기름진 음식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면 너는[1]

편안하겠느냐?"

"편안합니다."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무릇 군자는 상중에는 음악을 들어도 기쁘지 않고 어디를 거처해도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네가 편안하다고 하니 그렇게 해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께서 이르셨다.

"여(재아)는 인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 3년은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무릇 부모를 위해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천하에 통하는 상례인 것이다. 여도 태어나서 3년 동안 그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았을 텐데."[2]

논어 양화편(陽貨篇) 21[3]



1. 개요[편집]


삼년상()은 유교 문화권에서 치른 장례 방식의 일종이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에도 이미 삼년상을 했음을 중국 측 기록으로 알수 있다.

말 그대로 3년(36개월)이 아니라, 대부분 27-28개월이다. 만 3년이 아닌 3년차의 개념이다. 주희가 예법을 정리한 주자가례에도 3년차로 나온다. 아주 옛날에는 27개월이었을지 36개월이었을지 알 수 없다.


2. 삼국시대의 삼년상[편집]


<廣開土太王碑文>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대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서기 412년/영락永樂 2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甲寅年, 서기414년, 장수왕 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北史 列傳 - 高麗 >

死者,殡在屋内,经三年,择吉日而葬。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埋讫,取死者生时服玩车马置墓侧,会葬者争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隋書 列傳 - 高麗>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삼국시대에 삼년상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중국의 사서에 나온다. 백제 무령왕릉 지석과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에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실제로 무령왕릉 지석의 내용에 해당하는 빈전 유물이 공주 정지산에서 발굴되었고 27개월간 빈전(殯殿)을 세워 시신을 입관한 뒤 매장하기 전까지 안치하는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공주정지산유적(公州艇止山遺蹟))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412년에 사망하였고 2년 후인 414년에 능비를 옮겼다고 기록했다. 이것이 삼년상을 암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염을 해놓고 3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하여 장사 지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413년 10월에 죽었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와 능비의 1년 격절 문제를 감안해 계산하면 412년 10월 임을 알 수 있다. 능비에는 414년 10월에 이장했다고 씌었으니 딱 24개월 동안 상을 지낸 것이다. 백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왕이 사망한 날과 매장된 시기는 27개월 차이가 난다.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출처1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4]

주보돈 교수 또한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대왕이 죽고 삼년상을 치렀다고 말했다.#

적어도 광개토대왕의 치세기인 4-5세기에는 삼년상이 고구려 내에서는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삼년상이 관습화되었을까? 노태돈 교수에 의하면 2세기 말 고국천왕[5]이 죽고나서 중국 서적 위략이 고구려인들의 관습을 설명하며 '백일 동안 상을 치렀다(停喪百日)'고 쓴 구절을 인용하여, 고국천왕의 장례는 백일장이었다고 추정하였다. 고국천왕의 상을 백일장으로 치렀다면 삼년상이 고구려에 도입된 시기는 그 후대, 추정컨데 3-4세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신라에는 지증왕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교에서는 순장을 죄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적어도 (순장을 하던) 지증왕 치세기 이전 마립간 시기까지는 유교적 장례법인 삼년상이 없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여담으로 고대 일본에서도 5세기 중엽쯤이면 삼년상을 치른 정황이 있다. 유랴쿠 천황으로 비정되는 왜왕 무가 자신의 부형이 죽고 장례를 치르느라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왜5왕 문서를 참조.

조메이 덴노는 백제궁(百濟宮)에서 사망하였는데 사망 후에 '백제의 대빈'이라고 부르는 백제 왕실식 장례를 치렀을 정도였다.

겨울 10월 기축삭 정유(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죽었다(崩). 병오(18일)에 궁의 북쪽에 빈궁을 설치하였다. 이를 백제의 대빈(大殯)이라 한다.

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일본서기 권23 조메이 덴노 재위 13년(641)조[6]

여기서 말하는 '백제의 대빈'이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

사실 이 시기에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서 삼년상을 받아들였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변방 오랑캐나 유목민족으로 천시하는 실위나 오환족 등 여러 북방의 이민족들도 중국 역사서에서 삼년상을 치렀다고 기록하였고, 그들의 습속(특히 장례) 부여와 비슷했다고 증언한다.

3. 구체적인 방식[편집]


조선은 성리학[7]를 국시로 채택했다. 유교는 부모에 대한 효를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에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의 상례를 정성껏 모신다는 의미로 정착했다.

조선 초기에는 유교식 삼년상보다는 불교식 장례를 치를 때가 더 많았다. 만 2년이나 묘를 지켜야 하는 삼년상과 달리 간단하게 화장하고 사십구재를 지내는 정도면 장례절차가 쉽게 끝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삼년상이 공식 장례법으로 채택되었음에도 삼년상이 완전히 자리잡는 데에는 2백여 년이 걸렸다. 조선왕조실록에 유교식 매장 상례(喪禮)에 어긋나는 불교식 화장을 비난하고 요승[8]에 속아 생기는 백성들의 잘못된 풍속으로 지적하는 내용이 등장할 정도였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상주는 금주하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 아버지의 상을 맞으면 참최복(斬衰[9]服)을, 어머니의 상을 맞으면 자최복(齊[10]衰服)을 입는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어머니가 먼저 사망한 경우에는 만 1년만 장례를 치른다.

일단 상을 맞으면 상주는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고 관을 집 안에 모신 뒤 정해진 절차에 따라 곡을 하고 손님들을 맞으며 여러 번 제사를 지냈다. 그 과정이 실로 복잡하여 이 항목에서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다. 아무튼 복잡한 절차에 따라 관을 땅에 묻으면 상주는 무덤 옆에 여막(廬幕)이라는 작은 초막을 지어 기거했다. 여막에서 지내며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 식사를 올리기를 만 2년, 햇수로는 3년을 보낸다고 '삼년상'이라고 부른다. 상주는 외출할 때엔 방립을 착용했다. 모자 비슷한 갓인데 이를 쓴 이유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

부모가 돌아가시고 첫 번째 맞는 기일을 소상(小祥), 두 번째 맞는 기일을 대상(大祥)이라고 부른다. 대상을 치르면 유교예법으로도 대략적인 상례를 모두 마친 것이라 탈상(脫喪: 상에서 벗어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대상을 치렀다고 바로 평상시로 돌아감 또한 예가 아니라 하며 2개월 뒤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완전히 상례를 끝낸다. '담제'란 명칭은 상례를 끝내니 더 이상 슬프지 않고 마음이 고요(禫)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삼년상을 지내는 기간은 부모가 돌아가신 달을 1개월째로 셈하여 27개월(만 26개월)이 된다, 윤달은 달수로 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삼년상 기간 중에 윤달이 끼었다면 한 달을 더하여 28개월(만 27개월)이 된다.

이렇게 만 2년 동안 삼년상을 무사히 마치면 효자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몸이 쇠약해져 병을 얻거나 심지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 태종이 신하들에게 "주상(세종)[11]더러 내 상중에는 고기 드셔도 된다고 해라." 했다는 일화가 있다.


4. 현실[편집]


현실적으로 한 집안의 가장이 3년이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서 오로지 비생산적인 부모의 묘를 돌본다는 것은 현대에서는 물론이고, 과거에서도 정말 대단한 집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전근대의 상류층들이라고는 해도 있는 그대로 행하지는 못하였으며, 편법을 쓰거나 또는 그 기간 동안 공직에 나서지 않는 것으로 갈음했다. 쉽게 말하면 그 당시에도 삼년상은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사대부들이라고 해서 모두 삼년상을 정식으로 치른 것이 아니라 장남이 처음 몇 개월은 시묘살이를 하고, 그 이후에는 다른 형제들이 돌아가며 맡거나 외거노비에게 맡기는 대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대부라고 하더라도 큰 벼슬이 아닌 대부분 사람들은 3년상은 하지 않았고, 또 3년상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큰 불이익은 없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실제로 3년상이 그리도 중요한 일이었다면, 3년상을 제대로 하지 않음은 원칙적으로 강상(綱常)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아야 했으나, 조선왕조실록을 통틀어서 3년상을 하지 않았다고 처벌을 받은 사례는 없다.[12]

따라서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손님이 방문한 경우에도 집으로 돌아와 일을 보기도 했다. 또한 3년상 중 몸이 불편할 경우에도 집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며 휴식을 취하는 등 비교적 현실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3년상을 제대로 하면 대단하다고 칭송받을 일이었으나, 현실에선 적당히 눈치껏 간략하게 하여도 별 말이 없었다. 만약 FM 3년상이 정말 필수였다면 조선의 조정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5. 사례[편집]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 3천 명가량이 삼년상을 지냈다. 삼년상이 끝나자 제자 중 자공은 한 번 더 삼년상을 지내 총 육년상을 지냈다. 자공은 사기에서 부자들을 모아놓은 화식열전에 기록되었을 정도로 큰 부자이다. 자기 희생으로 공자사후 흔들리는 제자들을 결속시킬 목적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삼국지원소는 얼자[13]라는 약점과 탁류라는 평판을 씻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으로 아버지[14], 와 적모[15]의 상을 합쳐 6년간 상을 치르어 명성을 쌓았다.[16][17] 이때 쌓은 명성[18]을 바탕 삼아 원소는 동탁 사후에 세력이 가장 강한 군주로 성장한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삼년상 중 약을 먹었다가 평생 불효자 꼬리표로 고생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광개토대왕이 삼년상도 안 치르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다녔다고 대차게 깠다. 반대로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선조가 죽으면 후손은 응당 복수해야 마땅하며 고국원왕이 죽은 지 고작 22년밖에 안 지났는데 권근은 뭔 생각으로 깠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광개토대왕의 행위를 옹호하고 권근을 깠다. 단 안정복은 '장례를 치르자 마자'라고 썼는데 두 사람이 바라본 장례기간의 관점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안동에서는 어느 상주가 상복 차림으로 개고기를 먹는데 마침 지나가던 퇴계 이황의 제자가 보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호되게 그 상주를 불효막심하다고 욕하고 꾸짖었다. 그리고 스승에게 돌아와 이 이야기를 했는데, 퇴계는 오히려 "이 멍청한 놈아, 그건 삼년상 치르느라 버티는 동안 몸이 안 쇠약해지게 관리하는 거다. 삼년상 치른다고 버티다 몸 버리고 병 나면 그게 더 큰 불효 아니냐!"라며 제자를 나무랐고, 심지어 제자를 데리고 그 상주에게 찾아가서 사과하고 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지만 꽤 파격적이어서, 원칙을 중시하다 본질을 잃어버림을 굉장히 경계하던 사람이라 가능한 언행이다.

문종인종도 삼년상을 치르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9] 문종은 모후인 소헌왕후의 삼년상을 치르고, 곧이어 아버지 세종의 삼년상까지 연이어 치르다, 몸이 쇠약해져 종기를 앓다가 삼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고, 평소부터 인종은 효심이 지극하여 장례를 치르면서 극단적으로 음식 먹기를 거부하다가 거식증에 걸려버렸다. 오죽하면 신하들이 "제발 밥 좀 드세요." 하며 통사정을 하였을 정도. 그러다가 즉위한 지 아홉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문종은 재위기간이 너무 짧아서 단명 이미지가 있을 뿐 왕세자 시절부터 격무에 시달리던 아버지 세종의 일을 분담하던 역시나 일중독 왕세자였고 그 과로때문에 세종 말년에 위독하여 여러 번 병을 앓은 기록이 있고[20],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암살을 두려워하여 거식증에 걸렸다. 제왕의 예는 사대부와 달라서 전술하다시피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 하여 1일을 한 달로 간주하여 12일 또는 27일 만에 국상을 탈상하는 예법으로 대체했다.[21] 이마저도 국상기간 중 왕의 소식하면 신하들이 나서서 육식을 권하는 게 당시 일반적인 예법이었다. 그리고 실록에서 왕자나 공주 탄생 기록이 생략되었다가 몇 년 후 몇 살이 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탄생기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국상 중 태어나면 원칙적으론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이다.[22]

조선 고종 이후 서구화 개혁의 영향으로 인해 삼년상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장례 간소화 명이 떨어져 삼년상은 거의 사라젔다. 오히려 불교 집안에서 사십구재를 지낸 뒤 탈상하거나 천주교 집안에서 위령미사와 사십구재 미사를 봉헌한 뒤 탈상하는 사례가 더 많다. 생전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들의 경우 임종 파티를 열 때부터 상을 시작하여 장지에 안장된 후에 탈상한다.[23] 희귀한 사례로 1980년대까지 남아있었으나 거의 볼 수 없다가 2016년 대구에서 현대판 삼년상을 치른 70대 상주가 있어#화제가 되었다. 광주와 대전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시민들이 3년상을 치른 사례도 있다.

북한에서는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동안 국상을 치렀다.

만약 삼년상을 치르는 중 아내가 임신을 하면 최악의 불효이고, 아예 안하는것만도 못한 맹비난을 받게 된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조선시대 실제 3년상의 모습이 등장한다. 등장인물인 안현(킹덤)이 시묘살이 중에 봉화가 피워진 것을 발견하고 바로 집으로 귀가하는 모습으로 당대에도 3년 내내 묘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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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문에 여(女)는 여(汝) 즉 '너'란 뜻이다.[2] "재아는 3년 동안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했나 보다"라는 해석도 있다. 어느 쪽이든 재아를 비꼬는 말이다. 그밖에도 재아는 낮잠자는 것을 본 공자가 한숨을 쉬는 등 유일하다시피 까이는 제자이다. 자공이나 자로도 까이긴 하지만 재아만큼 공자가 돌직구 날린 제자는 없다. 이외에도 재아를 까는 공자의 말은 많은데 재아가 공문십철에 드는 제자기는 하지만 그 이유가 언어라고 하며 공자 자신은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 뽑았다가 재아로 인해 실수했다고 하는걸 보면 언변은 좋았지만 유교적 소양이 부족했던 것 같다. 훗날 제나라에서 반란 일으켰다 멸족 당한 최후도 영 공자의 제자답지 않은 면모.[3] '삼년상을 치르느라 예악의 발전이 지체될 수 있다'는 재아의 말은 공자 당대에도 삼년상이 꼭 필요한가 의문이 제기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비판이다. 국왕이 삼년상을 치르느라 국정이 마비될 수 있음은 국가운영의 관점에서 문제가 컸다. 이렇다 보니 후대의 왕들은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고 해서 하루를 한 달로 쳐서 27일만 상복 입어도 삼년상(27개월)을 끝낸 것으로 여기는 융통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벌어질 수 있는 국정공백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왕이 막 즉위한 상태에서 정권교체기에 벌어질 수 있는 혼란을 덜기 위한 정치적 융통성에서 나온 것. 한국에서는 10세기 중반 고려 광종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게 통하는 것도 일반 사대부까지지 일반 백성이나 천민으로 내려오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가 된다.[4]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5] 고국천왕과 동시대 인물인 중국 후한의 원소는 삼년상을 치렀다. 이에 달리 당대 고구려에서는 삼년상이 관례가 아니었나 보다.[6] 번역문은 동북아역사재단 <역주 일본서기> 3권 123쪽에서 인용함.[7] 성리학은 중국 현대 중국의 양쯔강 유역, 남송 이후에 정립된 형이상학적인 유학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지만 공자 때의 소위 '선진(先秦) 유교'와는 차이가 있다.[8] 妖僧: 요사스러운 승려.[9] 쇠할 '쇠'라는 음으로 널리 쓰이나 상옷이라는 훈도 있으며 이땐 '최'로 음이 바뀐다.[10] 흔히 가지런할 '제'라는 음으로 널리 쓰이나 옷자락이라는 훈도 있으며 이땐 '자'로 음이 바뀐다.[11] 이미 태종 본인은 물러나 상왕이 되었고 아들인 세종이 왕이 된 시기이므로 주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12] 다만 중종 2년(1507) 양수영과 같이 3년상을 하지 않았는데 했다고 거짓 보고하여 들통나 처벌을 받은 사례는 다수 존재.[13] 천민(노비) 출신 첩의 자녀[14] 아버지가 자신이 어릴때 돌아가셨었는데 그때 자신이 상복을 입지 않고 제를 지냈었다 라는 이유를 댔다.[15] 이복동생 겸 집안의 적자였던 원술의 어머니. 원소에게 있어서는 마님이다. 원소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친어머니가 노비였기에 호적상 인정되는 모친(그 집안의 정실)이 따로 있었다.[16] 이게 얼마나 힘드냐면 후한 말에는 유교사상 중 다른 것도 그랬지만 라는 부분에서 근본주의적인 것이 가장 심하게 판을 쳤다. 심지어 어머니가 부친상 치르는 아들에게 추울까 봐 이불을 덮어준 것마저 결격 사유가 되었을 정도. 달리 말하자면 상을 치르다가 죽는게 더 낫지, 최소한의 생존행위나 상 치르는 사람을 가족이 걱정하여 도와주는 것조차도 안 된다고 본 것. 상 하다가 죽으면 그게 남은 부모에게 불효잖아 이런 상황인데도 원소는 문책이나 시비 잡히는 일은 물론 도움도 안 받고 + 설사 옆에서 도움 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쳐내는데 성공하고 무사히 상을 치러낸 것이다.[17] 게다가 원소네 집안은 당대 유명한 명문가여서 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 중에는 당연히 원소의 6년상 행위에 대해 진의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 앞에서도 트집 하나 잡히지 않고 두 사람의 상을 총 6년 정도 치른 것.[18] 지금 생각해보면 효심보다도 기행에 가깝거나 출세를 위한 노력이라 의심 살 만하지만, 후한 말 당시 유교사상 중에서도 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원래 유교의 기본 사상에서 벗어나 허례허식이 극에 달하는 시점인 탓도 있었다. 이걸 당시에 정면에서 비판한 사람이 바로 공자의 후손이었던 공융.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선 이런 효심 어필도 충분히 명성 쌓을 만한 건수가 되었다.[19] 문정왕후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야사에 불과하다.[20] 게다가 사망한 나이를 보면 오히려 성종이 문종보다 일찍 죽었다. 성종은 재위기간이 길어서 장수한 것처럼 보였을 뿐.[21] 그래도 더 입겠다고 하는 경우에도 보통 능에 모시거나 졸곡 때까지만 입었다.[22] 사도세자의 두 아들, 의소세자와 정조가 태어났을 때 영조가 영 내켜하지 않은 이유도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에서였다.[23] 상을 치르는 기간 자체는 이쪽이 더 길 수도 있지만, 남은 사람에게 부담을 안 주기 위해 고인 본인이 이렇게 결정한 경우가 많으므로 그리 엄숙하게 치르지는 않는다. 게다가 생전 장례식을 치르는 사람들의 경우 100%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예측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므로, 호상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치르며, 악상이라 해도 불치병이 원인이 되어 자신이 죽는 시기를 예측 가능한 경우에 본인 의사에 따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