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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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2.1. 배경
2.1.1. 국제 상황
2.1.2. 국내 상황
2.2. 삼선건설의 시작
3. 대삼선
4. 소삼선



1. 개요[편집]


三線建設/三线建设
The Third-Front Movement[1]

삼선건설은 1964년에 논의되기 시작하여 1964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이다. 미국과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후방 기지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개발되지 않던 지역들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와 개발이 진행되었다. 미국과의 관계가 완화되는 70년대 초반까지 활발히 진행되었고, 이후에도 삼선건설은 지역균형개발 정책으로 존속하여 진행되었다.

2. 설명[편집]



2.1. 배경[편집]



2.1.1. 국제 상황[편집]


1960년대 중국의 외교관계는 좋지 못했다. 중국은 냉전시기를 이끈 두 거두, 소련과 미국 모두와 양호한 관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소련에서 후르시초프가 집권하자 중소간의 갈등관계가 표면화 되기 시작했고, 1959년에는 소련이 중국에 파견한 기술자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한편,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은 베트남을 지원하며 미국을 견제하였다.

중국은 두 초강대국에 대항해 중국과 연대할 국가들을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다. 중국과 함께 제3세계를 이끌던 인도와는 1962년 국경 분쟁을 통해 사이가 악화되었다.[2] 친중정권이 통치하던 인도네시아에서도 1965년에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지면서 수하르토 치하의 친미 독재정권이 시작되었다.

2.1.2. 국내 상황[편집]


1950년대 후반에 야심차게 진행했던 대약진 운동은 정책 자체의 한계와 시행시의 여러 문제점,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중국에 극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60년대 초반에는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의 주도로 조정 정책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실용성을 강조하는 소위 '전적 노선' 위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였고, 이를 통해 중국 경제는 일정 수준 회복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정 정책을 주도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대약진의 주창자였던 마오쩌둥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2.2. 삼선건설의 시작[편집]


이런 국내외적 상황 속에서 1964년 5월에 중앙공작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 중 하나는 대약진운동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5개년 개발 계획의 재개였다. 1966년에 진행될 예정이었던 제3차 5개년 계획은 조정 정책의 기조를 계승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중국 공업지대의 구조적 불균형을 지적하며 전쟁을 대비하여 새로운 공업지대를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삼선건설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을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1선 지역은 동북지역과 동해안 지역으로 중국 산업의 중심지였다. 문제는 1선 지역이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적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소련과의 전쟁에서 동북 지역은 최전선이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동해안 지역은 최전선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중국의 인구, 공장, 교통 설비가 집중되어 있어, 만약 이 지역이 타격을 입는다면 중국의 전쟁 지속 능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때문에 마오쩌둥은 3선이라고 칭하는 중국의 내륙지역에 산업 단지를 구축하여 만약의 사태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오쩌둥의 이 주장에 따라 제3차 5개년 계획은 기존에 상정하지 않았던 미개발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반영하여 재조정되었고, 삼선건설은 제3차 5개년 계획의 시작인 1966년을 기다리지 않고 1964년부터 시작되었다.

3. 대삼선[편집]


대삼선(大三線) 지역은 중국 내륙 지역으로 크게 북서부(칭하이, 닝샤, 간수)와 남서부(쓰촨, 윈난, 구이저우)로 구성되었다.

4. 소삼선[편집]


삼선건설은 중국 전체를 세 지역으로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각 성 역시 세 지역으로 구분하였다. 이에 따라서 1선에 있는 성 역시 세 지역으로 나뉘어 그 후방지대는 소삼선(小三線)으로 칭해지며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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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설을 직역하여 construction이 쓰이기도 한다.[2] 이 문제는 현재도 해결되지 않아 2017년 국경 분쟁 사태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