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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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기타
4.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한국사에서의 삼국통일을 다르게 이르는 말. 3개의 한(韓)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삼한통일, 일통삼한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삼한은 한반도 남부 국가에 해당하는 마한, 진한, 변한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7세기삼국시대 부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마한·진한·변한이 고구려·백제·신라가 되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1].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百濟本紀) 제6 의자왕(義慈王) 11년. "...마침내 '삼한'의 백성의 목숨이 칼과 도마 위에 올라가게 하였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일컫는 삼한의 관념은 당나라로부터 수입된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 6세기 이후 당대 중국 지식인의 시각에서 요동삼한은 같은 종족으로 보는 인식이 확장된 것이다. 과거에 동이라고 묶어 부르던 것에서 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신라삼국통일전쟁 후 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한일통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고, 이후 다시 고려삼한을 평정, 삼한일통에 성공함을 표방함으로서 현재의 한민족의 정체성이 완성된 것이다.

2. 역사[편집]


통일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지배하기 위한 명분으로 단순히 신라가 고구려, 백제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신라가 삼한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웠다. 그리고 신라 왕실은 어떻게든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신라인으로 통합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오백 년도 더 넘게 이어진 신라 초기 육부의 직계 후신 진골들은 기득권을 좀처럼 양보하지 못했고, 때문에 다시 셋으로 쪼개지고 말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에 속했던 이들은 다시 쪼개졌을망정 삼한일통 이데올로기까지 잊은 건 아니었고, 때문에 고려가 이 삼한일통 의식을 이어받아 재통일을 실천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삼한일통 의식과는 정반대인, 원심력인 분립적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무신정권기에 삼국의 부흥운동은 또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후삼국시대처럼 파급력이 크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삼한일통 의식은 여몽전쟁 이후 여기서 더 나아가 '삼한(삼국)은 본디 한 나라였으므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고조선 계승 의식으로까지 발전하여 고대 삼국에 기반을 두는 분립적 의식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692년에 김유신이 삼한을 통일해 그 공업이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고 언급했으며, 김유신의 열전에서는 지금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갖지 않아 태평무사하다고 할 수 없지만 편안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외에 더 자세한 내용은 삼국통일전쟁 항목 참고.


3. 기타[편집]


  • 신라의 삼한일통과 비슷한 의식은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데 그 사례 중 하나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긴 내용이나 고구려가 보인 행보를 텅해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에서 백제신라는 복속시킬 대상으로 보았고 이후 점차 고구려인 스스로도 삼한인이라고 자칭하며 어느 정도 동질 의식을 보인 반면 주변의 다른 이민족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 처음으로 삼한일통을 이룩한 건 신라라고는 하나, 삼국시대 당시의 정체성까지 없애진 못하여 이후 다시 후삼국시대로 나뉘었고, 고구려 유민 출신들이 고구려를 이어받아 세운 고려[2]가 비로소 하나의 정체성까지 이루었다는 점에서 '신라의 통일은 물리적 통일만 이룩한 통일'[3]이고 '고려의 통일이 물리적, 정신적으로 이룩한 진정한 삼한일통[4]'이라고 보는 시각이 당대 고려에서부터 현대 대한민국까지도 다수 존재하는 만큼 고구려의 상징성 또한 크다고 볼 수 있겠다.


4. 같이보기[편집]



[1] 따라서 여기에서 지칭하는 삼한에 가야는 들어가지 않는다. 가야는 일찍이 신라로 포함되었으니....[2] 여기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읽을 수 있다.[3] '반쪽'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어쨌든 하나로 합치긴 합친 것을 부정할 순 없기 때문이다.[4] 이걸 위해 고려시대부터 민족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이념으로 민족 최고(最古) 국가인 단군조선단군이 대두된 것이다. 이후 고조선을 이어받는 조선시대로 들어 단군의 중요성은 더욱 확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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