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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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 김무성과 친박의 악연
3. 상황
3.1. 김무성과 친박의 공천 다툼
3.2. 김무성의 직인 날인 거부
3.3. 최종 공천 결과
4. 결과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일부 선거구 공천에 대한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의 추천장에 대표 직인 날인을 거부한 사태. 물론 도장 자체는 제자리에 계속 있었지만 어차피 당시 당대표인 김무성의 허락 없이는 직인을 날인할 수도 없었으므로 도장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통칭 '옥새 파동', '옥새', ''옥새들고 나르샤[1]'라고도 불렸다. 옥새 파동은 주로 언론에서 쓰였고 옥새런, 옥새들고 나르샤는 온라인에서 네티즌들이 빤스런에 빗대 가볍게 쓴 말이다.


2. 배경 - 김무성과 친박의 악연[편집]


2000년대까지만 해도 김무성친박 1호 정치인이었으며 한때는 친박 진영의 좌장으로도 꼽히던 인물이었다.[2] 실제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조직과 자금을 관리하면서 선거운동을 이끌었던 것도 김무성이었으며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친이, 친박 세력이 철천지원수가 된 후에도 김무성은 친박계로 분류되어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후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은 친이계가 18대 총선에서 친박계 정치인들을 공천 학살할 때 피해를 봤다.[3] 그리고 이에 반발한 친박계는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와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만들었고[4] 이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친박계 의원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꾸려 총선에 출마했다.[5]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영남 친박의 좌장으로 꼽히던 김무성은 일명 '친박 무소속 연대'로 출마해 살아남았고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중반 들어 김무성은 세종시 수정안 파동으로 박근혜와 의견을 달리하면서 눈 밖에 나고 말았으며 애초에 김무성은 부산 사람으로, 영남이라곤 해도 박근혜와 친박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었던 TK 정서와는 결이 좀 달랐기 때문에 친박 충성파들에게 밀려 계파 내 입지 면에서도 점점 밀리고 있었다. 그러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가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되면서 그간 비주류였던 친박계는 당권을 장악했는데 당권을 거머쥔 박근혜는 지난 총선에 대한 복수로 친이계를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고 이때 자신에게 세종시 수정안 및 원내대표 취임 등으로 반기를 들었던 김무성도 배신자로 간주해서 공천에서 제외했다. 이에 김무성은 공천에서 탈락한 친이계 인사들과 자유선진당을 묶어서 보수신당으로 총선에 나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보수의 판세가 좋지 않아 선거 승리를 위해서 뜻을 접고 당에 남아 다음 기회를 엿보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김무성은 18대 대선에서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고 2013년 재보궐선거로 부산 영도구에서 당선되어 원내 복귀에 성공했지만 박근혜가 대선에서 승리한 뒤에도 김무성은 한동안 박근혜를 보좌하는 무지성열성 친박계 충성파의 견제 때문에 당에서 겉돌기만 했다.[6] 그러나 실정에 힘입어 박근혜 정부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당심도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2014년 당 내 선거[7]에서는 본인이, 이듬해인 2015년에는 또다른 비박계 인사로 입지를 다지던 유승민[8]이 각각 당 대표, 원내대표에 선출되며 박근혜 정부에서 일정기간 비박계가 당권을 잡게 되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와중에 2015년 유승민 원내대표가 감히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로[9] 선거로 선출된 정당한 원내대표였음에도 박근혜의 이른바 배신자 프레임과 친박계 충성파의 등쌀에 밀려 말 그대로 반강제적으로 직에서 쫓겨났다. 이때 김무성은 양측을 중재하는 척 했지만 속으론 같은 비박계인 유승민 측과 동병상련을 나누면서도 친박계의 눈치도 보는 애매한 스탠스를 보였다. 허나 속부터 곯아 버린 갈등이 이대로 정리될 리는 만무해서 후술되어 있듯 2016년 총선 과정에서 친박계 충성파의 제1목표는 유승민의 영구적인 정계 퇴출이 되었다. 그리고 친이계 좌장이던 이재오 등을 함께 쳐내려고 했던 걸 볼 때 제2목표는 친이계 포함 비박계 쓸어내기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3. 상황[편집]



3.1. 김무성과 친박의 공천 다툼[편집]


2016년 3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무성을 위시한 비박계는 당의 공천을 상향식 공천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이어 왔다. 김무성의 처음 목적은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 경선제)였지만 친박계의 견제를 이겨내지 못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국회의원 후보를 아래에서 위로 공천하는 상향식 공천을 통해 민주적인 공천을 뿌리내려야 한다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를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

사실 김무성의 이러한 입장은 총선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박근혜 정부의 연이은 실정 탓에 박근혜와 친박계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자 그에 대한 반사 이익으로 비박계의 인기가 올라가던 추세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의 반영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향식 공천으로 방침을 정할 경우 친박계가 경선에서 우수수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친박계는 위에서 내리꽂는 전략공천과 다를 바 없는 '우선 추천식 공천'을 주장하면서 김무성과 강하게 부딪쳤다.

김무성이 위에서 아래로 가는 전략공천(하향식 공천)을 극도로 꺼린 이유는 또 있었다. 위에 서술된 속셈도 있지만 김무성 본인 스스로도 이른바 '공천 학살'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김무성은 18대, 19대 총선에서 두 번이나 공천 배제 대상이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전부터 상향식 공천에 긍정적이었던 것을 보면# 평소의 소신+두 번씩이나 피해를 본 경험+정치적인 계산이 더해진 결과라고 보인다. 그러나 공천권을 쥐게 되는 당 대표가 된 다음에도 김무성은 청와대와 친박계의 등쌀에 밀려 공천을 관장하는 공천관리위원장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 하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고 당시 청와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새누리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이 된 이한구 의원은 공공연히 김무성과 각을 세우면서 오히려 "당 대표도 공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등 독설적인 화법으로 비박계를 연신 압박했다.[10]

때문에 이 시기에 김무성은 엄청난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원과 여론의 지지를 받아서 당대표가 됐는데 공천관리위원회 심사장에 들어와서 공관위장 이한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심사를 받거나[11] 당대표의 권한 중 하나인 비례대표 선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거나[12] 심지어 '박근혜의 황태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당시만 해도 핵심 친박 인사였던 윤상현 의원에게는 취중이라고(주장하기)는 하지만 "김무성 그 새X 죽여버려." 같은 망언까지 들을 정도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런 굴욕 속에서 어떻게든 자기 세력 지키기에는 성공해서 이재오, 유승민 등 대표적인 비박계 인사들이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김무성계 의원들은 제3차 공천 학살에서 다수는 살아남았다.[13] 때문에 당시 김무성이 친박계와 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고 김무성도 훗날 이를 일부 인정하는 듯한 말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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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최종 공천이 완료된 3월 24일 새벽 새누리당 당사 인근에 있던 감자탕집에서 당 지도부 인사들끼리 회식하는 장면을 박종희 공관위 위원이 본인의 SNS에 올린 것이다.

한편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과정에서 공관위장 이한구는 배신자 프레임의 유승민과 친이계 좌장 이재오를 공천에서 탈락시키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여 역풍이 우려되었고 그렇다고 경선을 시키자니 친박계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공천 마감일이 가까울 때까지 이들 지역구컷오프도 경선도 아닌 공백 상태로 놔두며 규정상 본인 스스로 탈당하지 않으면 출마도 못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게 유승민과 이재오가 울며 겨자 먹기로 탈당하면 이한구는 본인이 직접 탈락은 안 시켰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 전략으로 명분을 얻고 이 두 사람의 지역구를 포함해 총 5개 지역구에 친박계 후보를 공천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한구의 시나리오대로 23일 밤 유승민이 탈당 선언을 하며 이대로만 가면 친박계가 원하는 계획대로 실현되어 가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새누리당의 공천 전쟁은 친박계의 압승으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3.2. 김무성의 직인 날인 거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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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4일 오후 김무성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유승민, 이재오의 지역구를 포함한 "몇몇 선거구에 대한 공관위 추천장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며 후보자 등록이 마무리되는 3월 25일 저녁까지는 최고위를 열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뒤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광역시 영도구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이런 김무성의 예상치 못한 역공에 친박은 말 그대로 헬게이트가 열렸다. 공직선거법상 후보자 추천장에는 당인과 당대표의 직인 두 개의 날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장이 없어져서 그랬다면 다시 파면 되겠지만[14] 도장 주인이 날인을 거부하던 상황[15]에서 최고위와 원내대표 멋대로 직인을 함부로 쓰면 법적 고발은 불가피할 것이고[16] 그렇게 되면 당선된 후보자들도 당선 무효 처리가 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무성이 최고위 개최를 안 하겠다고 선언하고 보란 듯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헌 30조[17]에 해당하는 상황이라고 우길 수조차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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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이후 부산으로 내려간 김무성은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영도대교에서 인생샷을 찍는 등 여유롭게 영도구를 활보했다. 이에 원유철 원내대표는 당과 협의 없는 무책임한 기자회견이고 부산으로 내려가 최고위 개최를 요구할 것이라는 긴급 브리핑을 내놓았고 서청원/이인제 등 친박계 최고위원들 역시 김무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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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부산에 부리나케 도착한 원유철은 김무성을 만나 당 복귀를 요구하며 자갈치시장의 한 횟집에서 키야 소주맛 좋네 술을 기울였지만 회동 후에도 각자의 입장 차이만 유지한 듯하다. 원유철은 김무성이 최고위 개최를 수락했다는 발표를 내놓았다. 그리고 김무성은 점심을 먹고 당사로 돌아가서 최고위는 열지 않고 당무만 보겠다고 선언했다. 기사 이는 유고라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당사에 남아있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3.3. 최종 공천 결과[편집]


다음 날 서울에 도착한 김무성은 전날 말과 달리 11시 30분에 열린 최고위에 참석해 친박계 최고위원들과 5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유승민의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동구 을과 이재오의 지역구였던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그리고 유일호의 지역구인 송파구 을에는 공천하지 않고 대신 대구광역시 동구 갑수성구 을, 그리고 달성군에는 공천하기로 합의를 봤다.


  • 공천
    • 대구광역시 동구 갑(정종섭) - 류성걸의 지역구.
    •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이인선[18]) - 주호영의 지역구.
    • 대구광역시 달성군(추경호)

그리고 이런 결과에 따라 최종적으로 김무성은 유승민·이재오의 지역구를 지켜내면서 실질적인 판정승을 거두었다. 2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청와대를 상대로 한 권력 투쟁에서 오랜만에 우세승을 보인 것이었다. 친유계, 친이계 좌장을 살려내면서 비박계에서 입지를 다졌고 한편으론 친박계 핵심 정종섭·추경호는 살려주어 체면치레는 하게 해 주는 방법으로 계파 갈등 봉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음과 동시에 너무 때리기만 하다 보면 잠재적 대권 경쟁자로 클 수 있는 유승민 역시 의원으로 안전하게 연착륙시키면서 대선 후보로의 급부상을 견제하는 등 평소의 곰이 아닌 여우 같은 행보를 보여줬다.[19]

파일:R658x044.jpg

이렇게 공천, 무공천 대상자가 정해지자 본인 입장에서는 날벼락을 맞은 격인 이재만동구청장은 당 최고위원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진입을 거부당하자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분하다!"며 분노를 토해냈으며 유재길 후보는 법적 대응도 감수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유영하 후보는 당의 결정에 승복하겠다며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과 대조적이다.[20]

이후 중앙일보에서 기사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공천 협상 결과는 원유철이 주도했다고 한다. 당인도 김무성이 밝힌 대로 당사에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은 김무성이 '30시간의 법칙'[21]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유승민의 지역구 같은 경우는 청와대에서 동의를 해 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당시 유승민 지역구의 여론은 무소속인 유승민의 당선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 경우 청와대에서 사실상 직접 공천한 이재만 후보가 패배하게 되면 청와대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합의를 해 줬다는 설도 있다.


그 직후 새누리당에서는 위처럼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 사태를 선거 홍보에 써먹는 비범함(?)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당시 다수의 네티즌들에겐 오히려 조롱거리가 되었고 선거 이후에는 그야말로 웃음벨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22]


4. 결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정당별 결과/새누리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런 새누리당의 추태에도 불구하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상으로는 새누리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기 때문에 새누리당도 선거 기간에는 일단 이기고 보자는 식으로 어떻게든 갈등을 묻어두고 선거에 임했으나 선거 결과 국내 총선 역사상 손에 꼽힐 만한 대반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러한 행위들은 죄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새누리당은 선거에서 참패했고 비박과 친박은 선거 패배의 이유가 니들 때문이라며 서로 공격하기 시작해 당내 계파 갈등은 더 심해졌다.

새누리당이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옥새 투쟁으로 김무성이 지원하려고 한 무소속 후보들 역시 다수는 낙선하고 말았다. 새누리당 후보 공천을 추인했지만 속마음으로는 무소속 후보를 밀었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서는 컷오프(공천 탈락)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주호영 의원만[23], 새누리당 무공천 지역에서는 유승민만 생존하고 이재오 의원과 김영순 전 송파구청장은 낙선했다.[24]

5. 여담[편집]


사실 총선을 앞두고 이 정도로 여권이 스스로 분열을 작정하고 혼란을 조장한 배경엔 당시 야권도 내부 갈등 끝에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분열되어 20대 총선에서 겉으로 보기엔 새누리당이 과반 혹은 원내 제1당 자리를 지킬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기 때문에 친박계가 월권 논란 등으로 욕 좀 먹더라도 공천권을 강하게 밀어붙여 비박계를 몰아내고 당을 장악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평이 나왔다.

실제 몇몇 관계자들이 이후 썰을 푼 것을 보면 이런 갈등은 총선에서 안정적인 과반을 먹을거라는 확신이 어느정도 있었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박근혜가 자기 말 안 듣는 160석보다 자기 말 잘 듣는 140석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물론 현실은 대중에 밉보여 140석은 커녕 비박계를 포함한 120석을 간신히 사수하면서 스스로 레임덕을 가속화하는 결과가 나와 버렸지만.

한편으론 김무성 역시 박근혜가 레임덕이 오던 시기였으니 자신이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선거를 승리한 뒤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일부러 옥새런을 일으키는 승부수를 던진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김무성의 대권 야욕도 물 건너갔다.

사실 김무성 대표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한창 이한구 파동이 일 때 전원책 변호사는 옥새 들고 암자 같은 데 가면 되지 않느냔 의견을 밝히기도 했고 조국 교수도 해당 사태 이전에 자기가 김무성이라면 도장을 가지고 튈 것이다란 글을 페북에 게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둘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도장을 실제로 들고 튄 건 아니더라도 대표 외에는 아무도 도장을 찍을 수 없으니 날인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은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공천 파동과 이에 따른 옥새런이 단행될 수 있었던 이유도 새누리당의 텃밭인 영남권 다수 유권자 표를 과신하고 공천 과정에서 어떤 추태를 부려도 "야이~ 그래서 새누리당 안 찍을 거야?ㅎㅎ"라는 안일한 생각을 한 것이 한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정치인의 모든 행위는 곧 정치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정치인 김무성이 왜 영도대교에서 '지역 발전 예산 김무성이 책임지겠습니다.'라는 대문짝만한 현수막이 보이는 사진을 찍었는지 생각해 보자.

허나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이는 이전부터 위태로웠던 새누리당 내 계파 갈등의 결정타가 되어 20대 총선 패인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중도보수층을 비롯한 민심 자체는 당시 이한구의 공천폭거와 진박 감별사 타령 등 친박의 막장 행각에 분노하는 민심이 더 강했지만 강경우익층은 반대로 김무성 패거리의 난동이 언론 등으로 확대되어 이런 패배를 맞게 되었다고 오히려 비박계를 탓하면서 갈등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정국 주도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새누리당은 삽질을 거듭하다가 그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몰락했다. 특히 친박은 이후 반등의 기미가 잘 안 보일 정도로 세가 크게 꺾이고 말았다.

파일:이준석인생샷.jpg

세월이 흘러 국민의힘 당 대표가 된 이준석이 2021년 대선 기간에 윤석열 대선후보와의 갈등 끝에 잠적해 버리는 당 역사상 유례없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이 사건이 다시 거론되기도 했다. 다만 이 사건은 4일만에 정리되면서 옥새런만큼 길게 세간의 화제가 되진 않았다. 물론 대선 이후까지 갈등이 이어지긴 했지만.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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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장안의 히트작이었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빗댄 유행어다.[2]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김무성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친박과 연이 먼 김영삼상도동계로 분류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이후에는 친박 맏형 소리를 듣기도 하는 서청원과 함께 2000년대 중반 상도동계에서 친박으로 넘어온 몇 안되는 케이스였다. 탈박한 후에는 비박계 혹은 범친이계가 되었다.[3] 이때 탈락한 주요 인사들이 김무성을 비롯해 김기춘, 홍사덕, 서청원, 이규택, 박종근, 이해봉, 한선교 등이었다.[4] 새로 만든 것은 아니고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근모를 후보로 내세웠던 참주인연합에 입당하여 이름을 바꾼 것이다.[5] 이들이 왜 친박연대에 가지 않고 무소속으로 남았냐면 다른 당에 갔다가 선거 이후 한나라당에서 복당 안 시켜줄까봐였다고 한다.(...)[6] 게다가 대선 당시의 NLL 발언 때문에 수사를 받기도 했다.[7] 당시 친박계는 서청원을 당 대표로 밀었다.[8] 당시 이완구 원내대표가 국무총리로 입각하자 공석이 되었는데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세월호 사건을 수습하고 당으로 복귀한 범친박 이주영 의원을 상대로 승리한다.[9] 유승민 역시 과거엔 친박 출신이었으나 충성 경쟁을 거부하면서 박근혜와 친박의 눈밖에 난 상황이었다. 이런 걸 보면 박근혜와 친박은 애초에 결이 좀 달랐던 친이계도 친이계지만 친박계였다 자기들 기준 배신을 한 사람들에게 더 눈이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10] 이때 정두언 의원이 자신을 포함한 비박 살생부가 있다는 말을 김무성에게 들었다고 발언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때만 해도 김무성은 그런 일 없다고 했으나 3년 후인 2019년 11월에 의견을 번복하면서 살생부를 인정했다. 다만 당시 살생부는 비박 뿐만 아니라 친박 인사도 있었다며 정두언 의원이 친박의 비박 학살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한 것이라는 듯한 의견을 같이 피력했다.# 이때 친박 인사로 거론된 사람들이 서청원과 이인제였는데 둘은 알다시피 김무성과 비슷하게 저쪽에서 넘어온 케이스라 순혈 친박(?)은 아니기는 했으며 혹은 진짜 지금 당장 정계 은퇴를 해도 무리없는 노년층들이라 정리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이한구가 공관위원장이 되면서 이런 계획들은 다 어그러졌고 서청원, 이인제도 다 공천을 받았다.[11] 이에 대해 전원책 변호사는 도대체 투표로 뽑히지도 않은 공관위장이 무슨 자격으로 당원들의 투표로 뽑힌 당 대표를 심사하냐며 당 내부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기만하는 행위라고 노발대발하기도 했다.[12] 이는 썰전 특별편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의 발언을 통해 밝혀졌는데 이준석의 말에 의하면 당시 김무성은 후보 지원 유세 중 동석했던 비례대표 후보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몰라볼 정도였다고 한다.[13]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김성태, 김학용, 정미경, 서용교, 박민식, 김을동 등이다.[14] 17대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당대표 직인을 손에 넣은 추미애와 법적 대표였던 조순형 간 공천권 분쟁이 일어났는데 추미애 측에서 당대표 직인을 찍어 발급한 공천장과 조순형 측에서 법적 대표의 이름으로 새로 판 직인을 찍어 발행한 공천장이 한 선거구에 대해 동시에 제출되는 막장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법적 대표가 조순형이었던 만큼 조순형 측에서 새로 파 선관위에 신고한 직인이 진짜 직인으로 인정되었고 따라서 조순형 측이 추천한 후보자가 정식 후보로 인정되었다.[15] 도장째로 갖고 내려갔다고 흔히 알려졌지만 다음 날 김무성은 당시 도장은 안 가지고 내려갔다며 인터뷰에서 밝혔다. 도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도장을 찍는 권한이 관건이었기 때문. 당대표가 언론에 대놓고 도장 안 찍겠다고 공개선언한 상황에서 멋대로 당대표 도장을 찍었다가는 사문서위조죄로 여의도 대신 법정에 불려가야 하니까 눈앞에 도장이 있는데 왜 찍지를 못하니의 상황이었다. (사문서에 도장이 일단 찍혀있으면 그 문서는 진정성립이 추정된다.(민소 358) 다만 도장 주인이 "내가 찍은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본인의 의사를 공표한 기자회견 녹화파일을 제출해 버리면 그 진정성립이 뒤집혀버리기 때문에 도장의 효력이 부정되는 것.)[16] 각 당대표의 직인 사본이 전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으니 위조도 못 한다.[17] 당대표가 사고나 해외 출장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원내대표 등의 순서로 직무를 대행한다. 그런데 이 상황은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해당되지 않는지라 원내대표가 직무를 대행할 수 없다.[18]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으로 인해 추천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19] 물론 이 모든 건 총선에 승리한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총선에 승리했다면 김무성 대표는 당을 잘 중재한 업적으로 무난히 대권후보에 안착했겠지만 패배한 순간엔 중재는 물거품이 되고 패배 책임만 오롯이 져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해당 선거는 참패했고 김무성은 당대표에서 불명예 퇴진(사실 공천에 개입을 거의 못했는데 책임은 오롯이 지니 억울할 만하다)하게 되었다. 덕분에 2015년까지만 해도 문재인과 대권후보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지만 총선에 패배한 4월부터 지지율이 10%대에서 3%로 급락했고 탄핵 정국에선 반 박근혜 노선이 확실했던 유승민의 부상으로 아예 대권주자 여론조사 지지율에서 제외됐다.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거의 최단시간만에 급락한 셈이다.[20] 이는 김영순 후보에게 수치상 밀렸음에도 유영하가 단지 친박이라는 이유로 김영순을 밀어내고 공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낀 듯. 그런데 2023년에 이준석과 함께 한 모 유튜브 방송에서 김무성 측근인 장성철 소장이 말한 바에 의하면 사실 옥새런은 유영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유영하가 공천 심사 한참 전부터 진박 타령을 해 대며 자긴 송파 공천 무조건 받는다고 떠벌리고 다녀 이를 전해들은 김무성 대표가 미친 놈이라고 꼴도 보기 싫어했다고.[21] 김무성이 자신이 한 말을 30시간 이내에 철회한다는 데에서 나온 법칙.[22] 당장 저 위의 영상만 봐도 좋싫비가 1:6에 이른다(...) 거기다가 '옥새들고 나르샤'라는 유행어도 야권 지지자들이 임의로 만든 억지 밈이 아니라 새누리당 지들이 영상 썸네일이랑 13초쯤에 알아서 넣어 알려지게 되었다. 자폭[23] 이 때문에 이인선은 새누리당 당적을 갖고 나와서도 TK에서 낙선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4년 뒤 21대 총선에서는 김부겸 자객공천 목적으로 주호영이 수성을에서 갑으로 자리가 옮겨지면서 생긴 수성을의 빈 자리에 이인선이 다시 공천됐으나 4년 전의 주호영을 뛰어넘는 거물급 중진 의원이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수성을에 나왔다. 당연히 이인선 정도의 경력으로 홍준표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이인선은 보수당 당적을 달고 TK에서 2번 연속 낙선한 유일한 인물이 되면서 체면을 구겼다. 다만 홍준표가 다음 지선에서 대구시장 후보로 출마하려고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생긴 빈 자리에 보궐선거로 입성하면서 3수 만에 배지를 달았다. 이인선은 보궐선거에 당선된 후 어느 인터뷰에서 "20대 총선 때는 주호영 의원도 갑자기 밀려났고 나도 갑자기 수성을로 공천되어 서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주 의원과 나는 영남대학교 동기다. 그래서 '당신은 이미 한 발 앞서가 있고 나는 이제 출발이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경쟁해보자'라고 말했고, 주 의원이 나 대신 당선될 때도 이미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21대 총선에서도 지고 난 후에는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었다. 홍 대표가 19대 대선 나가셨을 때 원외 당협위원장으로서 열심히 도와드렸는데 하필 내 지역구를 치고 들어왔을까, 저분은 자체 지지도가 있으니까 다른 지역구로 가도 당선이 될 텐데 내가 쉬워보여서 온 건가 하는 원망이 들었다."고 회고했다.#[24] 이재오는 자기가 직전까지 터줏대감으로서 5선이나 해 왔던 안방 지역구에서 떨어지고 김영순은 새누리당 우세 지역이라고 평가받던 송파에서 떨어져 둘 다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다만 이때 더불어민주당 당적으로 김영순을 꺾은 최명길은 2017년 국민의당으로 이적했고 이후 벌금 200만원 당선 무효형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