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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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6년의 대지진[편집]
1906년 4월 18일 리히터 규모 8.3[2] 의 강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다. 원인은 샌 안드레아스 단층으로, 1300km에 달하는 단층 중 약 450km가 넘는 단층 일부가 최대 6m까지 어긋났다. 쉽게 말하면 서울-부산 거리가 세로로 6m 찢어졌다고 보면 된다. 이 강진으로 최소한 3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피해액이 당시 가치로 2억 달러가 넘었다.
이 지진은 특히 화재를 야기하여 샌프란시스코 구시가지의 2/3이 몽땅 타 버렸고 그나마도 건진 것은 당시의 시 소방당국이 방화지대로 가옥을 철거해서 52m의 소개공지를 확보한 덕택이었다. 시카고 대화재처럼 화재선풍이 불붙은 목재덩어리를 뿜어내는 수준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반 세기 전 시카고가 당했던 대규모 화재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진의 여파 자체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여기에 또다른 불운도 있었는데 사망자 중에는 하필이면 샌프란시스코의 소방 인력을 총지휘해야 할 소방대장인 데니스 설리번(Dennis T. Sullivan)도 있었다.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도중 지진이 발생해서 방 밖으로 나오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 건물이 무너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즉사하진 않았으나 5일 후에 사망했다.
일설에 의하면 유명 영화배우 루돌프 발렌티노도 당시 지진의 현장에 있었다고 하며 그 외에도 많은 지진 경험담이 미국에 문서로 많이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하여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인류가 겪은 대재앙'에 따로 항목이 개설되어 있다. 일본의 사상가 고토쿠 슈스이도 이때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는데 그는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진 구호행위를 보면서 더더욱 아나코-코뮤니즘으로 경도되었다고 한다.
이 지진은 지진학에서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는데 당시까지도 단층에서 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추정만 하고 있었고 확실한 근거는 없었지만 샌 안드레아스 단층에서 지진이 일어남으로써 경험론적 근거가 되었다.
위 영상은 지진이 일어나기 4일 전의 영상으로 마지막에 지진 후의 모습도 등장해 가치가 높다. 이 영상은 미국 의회도서관의 National Film Registry에서 영구히 보존하는 영상물이다.
2. 1989년의 지진[편집]
1989년 10월 17일 현지시간 17시 4분에 규모 6.9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이 지진은 진원지가 로마프리타 부근이라 로마프리타 지진으로 불린다. 부두 근처에 있던 집들이 토대부터 부서졌다.
깊이가 19km로 얕아 진동이 15초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피해가 컸는데 이 지진으로 인해 63명이 사망하고 3757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떨어지는 벽돌과 돌조각에 맞아 다쳤다.
이 지진 때문에 당일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1989년 월드 시리즈 3차전이 열흘 연기됐는데 이 경기를 ABC가 생중계했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실시간 생중계된 대지진으로 남았다.[3] 이때 경기 캐스터로 예정됐던 알 마이클스가 지진 직후 남긴 멘션도 유명하다.
당시 생중계 영상으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선명하게 담겨 있다.
여담으로 당시 미국,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한인 교포들은 이 지진 이후에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당시의 재해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극복 노력에 대해 굉장히 많은 교육을 받았다는 뒷얘기가 있다.
2.1. 대중매체에서의 묘사[편집]
Kane Pixels의 Backroom 시리즈에서 백룸과 지구가 최초로 연결됐을 당시의 충격으로 발생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3.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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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에는 375명으로 보고되었지만 이때는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기록을 알 수 없다.[2] 모멘트 규모로는 7.8로 추정[3] 최초는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