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 자한의 중앙아시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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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아우랑제브의 파견
3.2. 힘든 철수
4. 결과와 영향


1. 개요[편집]


티무르의 후예인 무굴 제국 황제 샤 자한이 1646-47년에 걸쳐 조상들의 땅인 페르가나 분지를 수복하려 벌인 대규모 원정으로, 샤 자한의 북벌 혹은 무굴 제국 고토 수복 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에서 출정한 군대가 힌두쿠시를 넘어 정복 전쟁을 벌인 사례로,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남아시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 배경[편집]


17세기 중반, 티무르 제국을 붕괴시킨 우즈벡 칸국의 후예인 부하라 칸국이 내분을 겪자, 샤 자한은 대대로 무굴 제국의 국시였던 북방 고토 수복을 고려하게 된다.[1] 여기에는 역시 전성기이던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더욱 동진해 인도까지 노릴 것이라는 위기감도 작용했다. 1640년대 아메드나가르 술탄국의 붕괴로 데칸 전선이 안정화되자 샤자한은 본격적으로 중앙아시아 원정을 준비했다. 주력인 5만의 기병과 함께 포병, 화승총병, 공병 등을 포함한 1만의 보병이 카불에 집결했다.

3. 전개[편집]


1646년 6월, 샤자한의 막내 아들 미르자 무라드 바크쉬의 지휘 하에 6만 원정군은 출정했다. 원정군은 힌두쿠시의 산간 마을들을 점령하며 페르가나 협곡으로 행하는 관문인 발흐에 당도했고, 대군의 위용에 당황한 총독 나자르 모하메드는 황급히 도주하였다. 따라서 1646년 7월, 무굴 군대는 발흐를 무혈 점령하였다. 동시에 동쪽 파미르 고원의 바다흐샨 역시 정복되었다. 하지만 샤자한의 예상과 달리 우즈벡, 하자라 주민들은 '인도 출신' 원정군을 타자화하며 보급품을 판매하지 않았다.

현지인들의 비협조와 다가오는 가을의 찬바람에 지친 무라드 바크쉬는 부왕에게 서신을 보내 회군을 청하였고, 답장이 오지 않자 임의로 일부 병력과 함께 카불로 돌아가버렸다. 이에 분노한 샤자한은 그를 직위해제하고 발흐 주둔군의 사기 저하를 우려하여 궁정을 라호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동시에 와지르 (재상) 사둘라 칸을 발흐로 파견했다. 그러나 성큼 다가온 1646-47년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일부 병사들은 추위에 못이겨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또한 폭설로 인해 카불과의 산간 보급로가 막히자 완전히 고립된 발흐 일대의 주둔군은 굶주림에 시달림과 동시에 추위에 익숙한 우즈벡 부족들의 끈질긴 습격을 당하며 더욱 약화되었다.

3.1. 아우랑제브의 파견[편집]


1647년 4월, 발흐를 구원하기 위해 샤자한은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가 이끄는 증원군을 파견했다. 그의 3만 5천 병력은 선봉의 자이푸르 영주 라자 자이 싱과 후위의 코타 영주 라오 마도 싱 하다로 구성된 라지푸트 병력이 주를 이루었다. 증원군이 힌두쿠시 산지를 지나자, 우즈벡 부족들은 쿠틀루그 모하메드의 지휘 하에 데러가즈 협곡에서 기습 공격을 가했으나 무굴 군대의 압도적인 화력에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격퇴되었다. 다음날, 원정군이 평지로 진입하자 우즈벡 기병대는 그 선봉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라지푸트 부대가 버텨내는 동안 아우랑제브는 남은 병력으로 우즈벡 기병들을 삼면에서 포위하여 재차 격파했다. 연이어 승리한 아우랑제브는 1647년 5월, 발흐에 입성하였다.

기존 주둔군에 보금품을 나눠준 그는, 성채를 라오 마도 싱에게 맡긴 후 아무다리야를 건너 사마르칸트 점령을 목적으로 북진하였다. 아우랑제브는 우즈벡 부족들과 부하라 칸국군에 맞서 몇차례 격돌했지만, 이미 무굴 군대의 위력을 경험한 유목민들이 전통적인 치고 빠지기 전술로 일관하자 고전하였다. 비옥한 북인도에 비해 생산력이 매우 낮고 척박한 지리 조건과 적대적인 현지 부족들 때문에 카불에서의 보급에 의존하던 무굴 군대의 보급로는 점차 길어져 습격에 더욱 취약해졌다. 여기에 북인도의 안락한 삶에 익숙해져 있던 장군들의 불만으로 점차 사기가 저하되었고, 우즈벡 군대를 회전으로 끌어내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는 당초 계획이 틀어지자 결국 아우랑제브는 회군을 결정했다.

3.2. 힘든 철수[편집]


다만 엄청난 전비를 소모하고도 그냥 철수한다면 크나큰 불만에 직면할 것이 뻔했기에, 아우랑제브는 이전 총독 나자르 모하메드에 접근하여 발흐와 바다흐샨을 돌려주는 대가로 샤자한에게 복속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샤자한 역시 현실을 직시하며 이를 수용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별 의미가 없었지만, 명목상으로나마 힌두쿠시 너머까지 영토를 확장한 무굴 제국군은 철군을 준비했다. 1647년 10월, 나자르 모하메드의 손자들에게 발흐를 넘긴 아우랑제브는 서둘러 겨울이 오기 전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으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400km에 달하는 산길은 눈으로 덮혀 있었고, 금화 자루 등 풍요로운 무굴 제국의 보급품을 탐낸 우즈벡 부족들은 줄곧 습격을 가하였다.

이미 많은 양의 물자와 대포들을 운송하느라 느려져 있던 무굴 군대는 설상가상으로 추위로 인해 군마들이 다수 동사하자, 병사들이 직접 물자를 짊어지고 가게 되며 진군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따라서 후퇴하는 무굴 군대는 우즈벡 부족들의 손쉬운 약탈 대상이 되었고, 낙오병들은 가차없이 살해되었다. 고달픈 철수는 가파른 가즈니야크 고개에 이르러 절정을 맞았고, 무굴 군대는 라지푸트 부대와 바하두르 칸이 용맹하게 후방 엄호에 나선 틈에 겨우 사지를 탈출할 수 있었다. 1647년 10월 말엽, 아우랑제브는 마침내 카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눈보라로 대오가 흩어진 무굴 군대는 며칠에 걸쳐 복귀하였다. 특히 사투를 벌이며 부상병과 낙오병을 데려온 라지푸트 부대는 보름이 지난 후에야 카불에 당도할 수 있었다.

4. 결과와 영향[편집]


위풍당당하게 출정했던 무굴 제국의 북벌군은 1년 반만에 거의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고, 샤자한의 야심찬 고토 수복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원정은 4천만 루피가 소모되었고, 6천 의 병사들이 병사 혹은 전사하였다. 소모적인 원정 후로도 무굴 제국의 영토는 카불의 북쪽 80km를 넘지 못했고, 나자르 모하메드의 립서비스..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였다. 사실 재정에 있어서는 (군주둔비도 충당 못하는)[2] 연간 100만 루피의 세수만이 걷히는 발흐와 바다흐샨을 정말로 정복했더라도 여전히 손해인 것인데, 그마저도 얻지 못했으니 중앙아시아 원정은 샤자한의 최대 흑역사 중 하나로 남았다. 한편, 그간의 승리들로 자만에 차 있던 무굴 군대는 북벌의 실패로 불패 신화가 깨지며 위축되었고 1649년 사파비 제국에게 칸다하르까지 상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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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기조 자체는 후임잌 아우랑제브까지 이어진다[2] 보급 문제 등 때문에 2천만 루피가 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