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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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4대 국왕
샤를 6세
Charles VI

이름
샤를 드 프랑스
(Charles de France)
출생
1368년 12월 3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422년 10월 21일 (향년 53세)
프랑스 왕국 파리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배우자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1385년 결혼)
자녀
이자벨, 잔, 마리, 미셸, 루이, 장, 카트린, 샤를 7세, 마르그리트(사생아)
아버지
샤를 5세
어머니
부르봉의 잔
형제
루이 1세, 카트린
1. 개요
2. 치세
3. 사망
4.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4대 왕이며, 샤를 5세의 아들이다.

발작성 정신병을 가지고 있었던 왕으로 미치광이 왕이라고 불리었다.


2. 치세[편집]


1380년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세 숙부와 외삼촌 등 총 4명이 왕의 권한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1388년에서야 샤를 6세는 친정에 나서게 되었고, 초기에는 상냥한 성격과 조언자들의 도움으로 괜찮은 치세로 출발했으나, 1392년 발작성 정신병이 발병되었다. 그의 어머니, 외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몇몇 형제들, 심지어는 그의 외손자에게서도 정신병의 징후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정신병은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생동안 그의 광기는 호전되었다 악화되기를 반복했는데, 충격적인 경험을 하면서 점차적으로 악화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광기를 크게 드러낸 것은 1392년이었다. 브르타뉴로의 원정중, 광인으로 추정되는 나병환자가 행렬에 뛰어들어, 샤를 6세에게 그가 배신당했다며 돌아가라 외치자, 샤를 6세는 배신자가 있다며 아군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그를 말리자 그는 의식을 잃었고, 이때부터 정신병의 회복을 위해 휴양을 시작했다.

1393년 1월, 우울증에 걸린 왕을 위로하기 위해 측근들이 짐승으로 분장하고 부인들의 무도회장에 뛰어드는 여흥을 준비했다. 왕은 이에 동의했고, 왕과 다섯 명의 젊은 귀족이 튜닉 위에 송진을 바른 후 솜과 삼베 뭉치 등을 덮어 짐승 흉내를 내었다. 무도회장은 어두컴컴했기에 이들의 계획은 훌륭하게 실행되어 귀부인들을 공황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그들을 자세히 보려고 횃불을 들이댔고, 이것이 화재로 이어져 이들 가운데 넷이 타죽는 참사가 벌어진다. 왕은 베리 공작부인 잔이 망토로 덮어주어 무사했다. 이 사건을 발 데 아르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는 샤를 6세의 동생이자 만만치않은 야심가였고, 그가 왕의 짐승놀음을 미리 알았다는 정황이 있기에, 이 사건은 샤를 6세에 대한 루이의 암살음모라는 의혹이 있다.[1]

이후에는 그는 자신이 성 조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이 유리로 되어있다고 생각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쇠로 된 봉을 옷안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가족이나 신하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증세가 점차 심해졌으며, 급기야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은 물론 자신의 이름까지 잊어버린 그는 남은 여생을 카드놀이를 하는 데에 허비하는 신세가 된다.

아무튼 그의 그러한 증세로 인해 왕의 권한은 다시 약화되었고, 왕의 숙부이자 장 2세의 막내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2세와 왕의 남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간의 권력다툼이 가시화되었다.

샤를 6세의 병세가 심화되던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인 용맹공 장 1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사이의 권력다툼은 더 심화하였고, 그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1407년 암살당했다. 그리고 새로이 오를레앙 공작에 오른 샤를은 여러 제후 세력과 힘을 합쳐 아르마냑파를 구성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아르마냑파 역시 아키텐을 넘기는 조건으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고자 하였다.

141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본격적으로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손을 들어주고, 프랑스의 왕위를 요구하며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 백년전쟁이 다시 재개되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대승을 거두고 아르마냑파 귀족들이 대거 전사하자, 1418년 부르고뉴파에 의해 수도 파리가 함락되었다.


3. 사망[편집]


파일:병상의 샤를 6세 프랑스 이미지.jpg
《병상의 샤를 6세와 주치의》
(1400년대. 세밀화.).

전쟁의 승기가 사실상 거의 잉글랜드 쪽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1420년 샤를 6세는 헨리 5세가 자신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다는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샤를 6세보다 먼저 1422년 8월에 죽었으며, 이후 왕위계승에 대해 확실하게 정해놓지 않은 상황에서 샤를 6세 역시 그해 10월에 죽었다.

트루아 조약을 위해 헨리 5세와 결혼한 그의 딸 카트린헨리 6세를 낳았고, 오언 튜더와의 사이에서도 사생아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다.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이부형제로, 적출로 인정받아 리치먼드 백작위를 받았고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였던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훗날 장미전쟁의 최후의 승자가 되어 헨리 7세로 즉위해 절대왕정인 튜더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4. 여담[편집]


루브르 박물관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를 설치하기 위해 땅을 파던 도중 유적이 드러났고 그중 황금 투구가 발굴되었는데 샤를 6세의 투구라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유물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당시 존망의 위기로 서유럽을 돌아다니던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를 성 드니 축일연 행사에 초청했다. 루브르 궁전을 숙소로 제공하는 등 크게 환대하였는데 당시 가톨릭 세력들이 황제는 정교도의 수장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그냥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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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중 《절름발이 개구리》가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왕과 대신들에게 모욕당한 궁정광대 '절름발이 개구리'가 그들에게 가장무도회 때 성성이로 분장할 것을 제안했고, 무도회 당일날 불을 던져 그들을 몰살시킨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