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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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5대 왕으로 샤를 6세와 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멸망 위기까지 몰리던 백년전쟁을 결국 승리로 종결시켰으며, 귀족들이 강세를 보이던 중세시대 봉건제도에서 벗어나 중앙집권 정책을 폈다. 이에 따라 승리왕(le Victorieux)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리고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백성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과 귀족들간의 갈등은 상당했고, 자신의 목적과 이익 달성을 위해서 냉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403년 2월 22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 호텡 생폴에서 출생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11번째 자녀였으며, 샤를이라는 이름을 가진 3번째 아이였다.[2] 첫해에 퐁티외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두 형 루이, 장 왕자가 있었기에, 그가 왕이 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고, 그저 나중에 영지를 받고 프랑스 왕이 된 형에게 경의를 표한 뒤 영주로 지낼 듯 보였다.
그가 출생했을 당시 프랑스 왕국의 상황은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샤를 6세는 1392년 정신병에 걸린 이래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 섭정을 둘러싸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그러다가 그가 4살 때인 1407년 11월 23일,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용맹공 장이 사주한 암살자들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하는 부르고뉴파와 어린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을 대신하여 용맹공 장에 맞선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를 중심으로 뭉친 아르마냑파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1413년 12월 18일,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는 루이 2세의 딸 마리를 샤를 왕자와 약혼시키기로 합의하고 루브르 궁전에서 약혼식을 거행했다. 당시 샤를은 9살이었고, 마리는 10살이었다. 1414년 2월 5일, 샤를과 마리는 루이 2세의 아내인 아라곤의 욜란다의 인도 하에 앙주로 이동했다. 이에 대해 이자보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공유한 당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자보는 이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은 아들을 제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파리의 상황이 갈수록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막내 아들을 보호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으리라 추정한다. 그 후 샤를은 1416년까지 앙주와 프로방스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고,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2.2. 프랑스의 도팽[편집]
1415년 12월 18일, 큰형 루이 드 기옌이 어머니를 방문하던 중 심한 감기에 걸렸고, 이것이 합병증으로 악화되는 바람에 돌연사했다. 이후 이자보는 젠네가우 궁정에 사절을 보내 당시 니더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작 빌헬름 2세의 외동딸 에노의 자클린과 결혼한 뒤 에노에서 지내던 장 드 투렌을 도팽으로 삼고자 하니 파리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장 왕자는 1417년 1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보호를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해 4월 4일 콩피에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아르마냑파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머리와 목에 난 종양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자보는 막내 아들 샤를이 살던 앙주 궁정으로 사절을 보내 샤를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아라곤의 욜란다는 이에 대해 다음의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연인과 함께 사는 여성에게는 아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소. 나는 그 아이가 그의 형제들처럼 당신의 보살핌 아래 죽도록 키우지 않았고, 당신이 그를 당신처럼 잉글랜드인으로 만들거나 그의 아버지처럼 그를 미치게 만들지 않았소. 그는 나와 함께 남을 것이며, 감히 그를 빼앗아 가려고 노력하지 마시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자보가 이후에도 욜란다와 서신을 주고받았음이 확인되는데, 이렇듯 통렬한 질책성 서신을 받은 뒤 그럴 수 있을 리 없다며 서신의 진위를 의심한다. 아무튼 샤를 왕자는 1417년 4월 5일 장인인 앙주 공작 루이 2세가 사망한 뒤 1417년 4월 29일 파리로 돌아갔고, 어머니와 프랑스 무관장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의 섭정을 받았다.
그런데 이자보는 얼마 후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귀족 루이 드 부아부르동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 샤를 6세가 빙센 성 주변을 걷고 있던 중 이자보의 신하 중 한 명인 루이 드 부아부르동과 마주쳤다. 이때 루이 드 부아부르동은 말에서 내려 왕에게 절하는 대신 말을 타고 지나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에 격분한 샤를 6세가 명을 내리자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이 지휘하는 종자들이 부르동을 말에서 강제로 끌어내 바스티유로 데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고문당한 뒤 이자보와 친밀한 관계임을 자백한 후, 다음날 아침 목이 졸려 죽었다. 이후 그의 몸은 "왕의 정의를 위해 길을 가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가죽 가방에 꿰매어 센 강에 던져졌다고 한다. 공식 평결에는 부르동이 "많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며,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권력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 이자보를 축출하기로 했다고 추정한다. 당시 파리에서 이자보가 애인을 끝없이 사귀고 있으며 남편을 독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아르마냑파는 용맹공 장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그녀를 불신했다. 베르나르 7세는 이런 점을 이용해 그녀를 가신과 간통한 부정한 여자로 몰아가서 추방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리에서 축출된 이자보는 격분했고, 트루아에서 용맹공 장과 합세했다. 장은 그녀를 앞세워 트루아 정부를 세우고 아르마냑파에 대적했다.
루이 샤를 오귀스트 쿠더 작, <도팽을 구출하는 타네기 뒤 샤스텔>, 1828년.
1418년 5월 29일 새벽, 부르고뉴군이 파리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들은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해 하루 동안 4,000명을 살해했다. 며칠 후, 군중이 살아남은 아르마냑파가 갇혀 있던 감옥을 공격해 수감자 1,600명을 추가로 살해했다. 아르마냑파 수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특별 감옥에 갇힌 뒤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다가 6월 12일에 처형되었다. 한편 호텔 생폴에 있던 도팽 샤를은 부르고뉴군이 파리에 쳐들어왔을 때 침대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원수 겸 총독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은 그를 침대에서 끌어내 감싸 안은 뒤 파리 요새의 동쪽 끝인 바스티유 생 앙투안으로 데려갔다. 이후 앙브루아즈 드 로레의 도움에 힘입어 멜룬으로 데려갔고, 뒤이어 베리 공국의 수도인 부르주로 피신했다.
도팽 샤를은 부르주에 감사원을 설립하고 푸아티에에 의회를 별도로 설립한 뒤 아르마냑파의 보좌 아래 용맹공 장이 잉글랜드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있으며 왕국을 그릇된 길로 이끌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도팽 샤를은 투르, 멜룬, 모, 콩피에뉴, 몽뜨흐 같은 여러 도시들의 지원을 받으며 부르고뉴파에 대적했다. 용맹공 장은 부르주로 피신한 도팽 샤를에게 사절을 보내 저항을 포기하고 수도로 돌아와서 부모인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드 바비에르 왕비의 보호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이때 왕비는 아들에게 적극적으로 서신을 보내 부르고뉴 파와 화해하라고 설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보낸 편지는 현존하지 않지만, 도팽 샤를의 답신의 발췌된 내용은 전해진다. 그는 이 서신에서 어머니를 "매우 존경하는 여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결국 아르마냑파의 조언에 따라 파리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이에 장은 1418년 9월 16일 생모르데포세에서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만나 아르마냑파가 도팽 샤를의 두 형(루이 드 기옌, 장 드 투렌)을 살해했고 도팽 샤를을 납치했다고 성토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반포했다. 그러면서도 도팽 샤를이 이 성명서에 서명하고 파리로 돌아온다면 그를 유일한 왕위 후계자로 받들 의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용맹공 장과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던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9월 22일 소뮈르에서 도팽 샤를에게 사절을 보내 이 성명서를 비준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도팽 샤를은 왕실 영토의 행정 및 관리를 맡고 있던 장 루베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부르고뉴파 연대기 작가들은 장 루베가 아르마냑파의 부르고뉴파에 대한 보복을 주도했다며 비난했다.
2.3. 용맹공 장 암살 사건[편집]
1419년, 용맹공 장은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루앙을 끝내 구원하지 않은 일로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고,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도팽 샤를에게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장 루베는 부르고뉴 공작을 절대로 믿지 말라며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도팽 샤를은 앙주 공작부인 아라곤의 욜란다 등의 권유에 따라 용맹공 장과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7월 8일, 푸이르포르에서 양자간의 첫번째 평화협상이 열렸다. 용맹공 장과 도팽의 고문들은 부르고뉴 공작이 제안한 평화 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고, 용맹공 장을 정식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퐁소 평화 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은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의 동맹과 프랑스에 공동으로 대항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다만 아르마냑파는 장이 부르고뉴인들이 점령한 요새를 포기하고 잉글랜드에 대한 적대행위를 재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샤를 왕세자와 장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자, 프랑스 전역에서 내전 종결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1419년 7월 31일, 잉글랜드군이 우아즈강의 요충지 퐁투아즈를 기습해 점령했다. 파리의 중요한 방어 거점인 퐁투아즈의 함락과 겁에 질린 난민들의 도착은 수도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장과 이자보 왕비는 파리 방어를 포기하고 샤를 6세를 데리고 라니쉬르마른으로 황급히 도주했다. 이후 클라렌스 공작 랭커스터의 토머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파리 주변을 약탈했다. 이로 인해 파리를 지키지 못한 장의 명성은 추락했다.
용맹공 장의 최후.
1419년 9월 10일, 샤를 왕세자와 아르마냑파는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논의하자며 몽뜨흐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몽뜨흐 다리에서 샤를 왕세자와 대면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을 거라는 첩보를 듣고 보안을 강화하기로 했다. 장과 샤를 왕세자는 각각 10명의 호위를 받으며 다리에 입장하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다리로 향하는 모든 문을 닫기로 했다. 그들은 신의를 지키겠다는 맹세를 한 뒤 오후 5시부터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주치의인 장 드 마이시를 포함한 도팽 샤를의 고문들은 장이 다리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를 향해 전진하며 외쳤다.
“이리 오십시오, 각하. 그분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Venez devers, Monseigneur, il vous attend!)
이후 시작된 협상에서, 도팽 샤를은 장이 이전의 협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와 싸우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며 비난했다. 이에 장은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전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qu'il avait fait ce qu'il devait)
그 다음의 일에 대해 부르고뉴 측과 아르마냑 측의 기록이 상반된다. 부르고뉴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장은 토론을 시작하지도 않고 즉시 공격받았다고 한다. 반면 아르마냑 측 연대기 작가들은 장이 너무 오만했으며, 도팽 샤를에게 "나는 당신의 아버지인 왕을 보호하고 있으니, 파리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했으며, 자기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작을 취했고, 이 모습에 위협을 느낀 도팽 샤를의 호위 기사들이 대응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장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 기욤 2세 드 나르본, 아르노 기욤 드 바르바잔을 비롯한 아르마냑파 기사들의 집중 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4] 장의 유해는 1407년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암살된 후 장의 하수인들이 했던 것처럼 오른손이 절단되었다.
2.4. 트루아 조약[편집]
용맹공 장이 피살당하자, 선량공 필리프를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으로 옹립한 부르고뉴파는 도팽 샤를이 암살을 계획했다고 성토했다. 이자보 역시 이 사건에 크게 놀라 도팽 샤를을 비난하는 대열에 참여했다. 이후 선량공 필리프는 샤를에 대한 충성 맹세를 포기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협상했다. 하지만 본래 신중한 성격이었던 그는 헨리 5세에게 가급적 많은 것을 양보하지 않고 동맹을 이끌어내기를 희망했다. 1419년 10월, 잉글랜드군이 묄랑 다리를 점령하면서, 파리 시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고뉴파 주둔군은 필리프에게 파리 시민들이 잉글랜드군에 항복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헨리 5세와 조속히 합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필리프는 그래도 헨리 5세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헨리 5세가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자 결국 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이기로 했다.
1420년 5월 21일, 정신병에 시달리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필리프와 이자보 왕비의 거듭된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며,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고,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 사이의 아들이 그 뒤를 잇는다. 반면 도팽 샤를의 계승권은 박탈되었다. 이후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의 권한으로 필리프가 미셸과의 결혼에서 받은 지참금, 즉 솜, 페론, 루아, 몽디디에의 소유를 확인했다. 이에 대해 도팽 샤를과 아르마냑파는 샤를 6세가 광기의 영향으로 트루아 조약에 서명했으니 무효이며, 프랑스의 왕관은 왕의 소유물이 아니니 왕이 처분할 수도 없으므로,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병합되는 건 있을 수 없다며 끝까지 맞서 싸울 뜻을 표명했다. 1420년 7월 1일 몽뜨흐를 공략한 필리프는 아버지의 유해를 발굴한 뒤 디종의 샴몰 샤르트뢰즈 성당에 할아버지 호담공 필리프의 관과 나란히 안장했다. 이후 필리프는 파리 법정에서 열린 궐석 재판을 통해 도팽 샤를을 비롯한 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5. 보제 전투[편집]
부르주에 본거지를 둔 도팽 샤를과 아르마냑파는 병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프랑스의 오랜 동맹인 스코틀랜드에 지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실권자였던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는 잉글랜드가 너무 강해지면 자국에 좋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상당한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다. 1419년 10월, 6,000명의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라 로셸에 상륙했다. 올버니 공작의 아들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위그턴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군대를 지휘했으며, 전체 병력 중 2/3이 궁수병이었다. 그들은 앙주, 멘, 투르 및 일드 프랑스 일대의 아르마냑파 요새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이 온 뒤에도 1420년 3월 3일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프레네를 구하려 했다가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에게 격파당하는 등,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군에게 계속 밀렸다.
샤를 도팽과 측근들은 패전 원인을 따져본 끝에 스코틀랜드인들을 여러 요새에 분산시켰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스코틀랜드군을 집결시킨 뒤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리한 조건으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기회를 모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여러 요새에서 소환된 스코틀랜드인들은 후방에서 출격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던 1421년 1월, 헨리 5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침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들을 분쇄하고 본국에서 더 많은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카트린 왕비와 함께 잉글랜드로 떠났다. 클라렌스 공작이자 헨리 5세의 동생인 랭커스터의 토머스는 헨리를 대신해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아쟁쿠르 전투의 영웅인 형을 동경한 토머스는 자신 역시 역사에 길이남을 전공을 세우길 갈망했다. 그는 루아르 강 하류의 앙주 지방을 목표로 삼기로 마음먹고, 4,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킨 뒤 1421년 3월 중순 파리 서쪽 베르네에서 출발해 앙주의 수도 앙제를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에는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 헌팅던 백작 존 홀랜드, 멘츠와 샤토 가이야흐의 수비대장인 존 로스, 월터 피츠월터, 탱커빌 백작 존 그레이, 리즈데일 남작 길버트 5세 드 움프라빌 등 유수의 기사들이 참여했으며,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존 보퍼트의 형제인 토머스 보퍼트도 참여했다. 이들은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앙제를 향해 천천히 행진했다.
3월 21일. 잉글랜드군이 목적지인 앙제에 도착했다. 하지만 토머스는 그곳이 높은 벽과 많은 타워를 갖추고 있어서 쉽사리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동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보퍼트앵발레 마을로 철수시킨 뒤 그곳에 진을 쳤다. 한편, 도팽 샤를은 적의 기세가 대단하니 섣불리 싸우지 말고 농성에 전념하기로 했지만, 전투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조속히 승부를 내길 희망했다. 스코틀랜드 지휘관인 뷰컨 백작은 앙주에 적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투렌에 주둔하고 있던 스코틀랜드군을 이끌고 질베르 모티에 드라파예트가 지휘하는 소규모 프랑스군과 함께 루아르 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진군해 3월 21일 밤 보제 마을 인근에 숙영했다.
3월 22일, 적이 어디에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정찰을 나갔던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어 토머스 앞으로 끌려왔다. 그들은 심문 끝에 아군이 보제 마을에 진을 치고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토머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길버트 5세와 존 홀랜드 등은 대부분의 장궁병들이 식량을 수집하기 위해 진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며, 잉글랜드군의 핵심 전력인 장궁병이 모두 모일 때까지 출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적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방어 상태가 어떤지 등의 정보가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지금 즉시 기습을 가하면 적이 전의를 잃고 도망칠 거라며 반대 의견을 일축하고 진영에 남아있던 2,5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면서 솔즈베리 백작에게 장궁병들을 소집한 뒤 아군을 뒤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보제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사령관 랭커스터의 토머스, 존 로스, 길버트 5세 드 움프라빌이 전사했고,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와 보퍼트 형제가 사로잡혔으며, 장병 1,054명이 전사하고 500명이 사로잡혔다. 반면 스코틀랜드-프랑스 연합군의 손실은 미미했다. 샤를 도팽은 대승 소식에 기뻐하며 스코틀랜드 장군들을 영주로 만들어줬다. 존 스튜어트는 오비니쉬르네르 등지의 영지를 받고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되었고,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롱그빌 백작에 선임되었고 던 쉬르 오롱을 추가로 하사받았다. 여기에 24명의 스코틀랜드 궁수병을 "왕의 경호원"으로 삼았다. 다만 샤를은 잉글랜드군이 회복하기 전에 노르망디를 침공해야 한다는 뷰컨 백작의 조언에 병력이 아직 부족해서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방어에 전념했다.
2.6. 헨리 5세의 공세와 죽음[편집]
보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무렵, 헨리 5세는 트린의 왕비 대관식을 거행한 뒤 잉글랜드 북부를 순시하며 스코틀랜드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친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격노해 복수를 다짐했다. 1421년 6월, 그는 4,000 ~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칼레로 향했다. 이후 노르망디의 잔여 잉글랜드군, 부르고뉴파 프랑스군, 베네치아, 제노바, 플란데런 용병대 등을 규합해 총 2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마냑파를 응징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헨리 5세는 먼저 드뢰를 공격해 손쉽게 공략한 뒤, 방돔으로 진군하지만 프랑스군 주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오를레앙 방향으로 후퇴하다가 강행군으로 루아르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 중인 프랑스군을 기습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조이니와 빌노븨 르 로이로 방향을 돌려서 그곳들을 공략했다. 이후 1421년 10월 6일 파리 주변의 일드프랑스 일대에서 왕세자파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새인 모 요새를 포위해 8개월간 모 공방전을 치른 공격한 끝에 1422년 5월 10일에 함락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6,000명 이상을 전투와 이질로 상실하는 큰 손실을 입었고, 헨리 5세 본인도 이질에 걸렸다.
한편, 선량공 필리프도 헨리 5세의 도팽 샤를을 향한 공세에 참여했다. 그해 8월 29일, 필리프는 아르마냑군이 피카르디 서부에서 행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1,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1,000명 가량의 아르마냑군은 르 크루투아 인근에서 다른 부대와 합류하려 했지만 솜강이 불어나는 바람에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부르고뉴군에 따라잡혔다. 이후의 전투에서 아르마냑군 절반이 전사하고 대다수 생존자는 생포되었지만, 부르고뉴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기에 더 이상 헨리 5세를 돕지 못하고 철수했다.
헨리 5세는 데본 출신의 행정관 존 포테스큐를 모 수비대장으로 임명한 뒤 벵센 성으로 가서 건강을 회복한 뒤 1422년 6월 말에 샤를 도팽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코스느쿠르쉬르루아르로 진군했지만, 무더운 날씨 속에서 완전한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온종일 행군했다가 질병이 재발하면서 다시 쓰러졌다. 결국 원정을 포기하고 파리로의 귀환길에 올랐지만, 말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해 가마에 실려갔다. 8월 벵센 성에 도착한 그는 병상에서 카트린 왕비와 측근들을 불러모았고, 외아들 헨리 6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고, 친동생 베드퍼드 공작 존을 잉글랜드의 섭정,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를 프랑스의 섭정으로 삼겠다고 유언했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는 숨을 거두었다. 이후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의 섭정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베드퍼드 공작이 프랑스의 섭정을 맡았고,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잉글랜드의 호국경이 되었다. 험프리는 자기가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가 이를 강력하게 막아서는 바람에 성사하지 못했다. 이후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는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2달 후인 1422년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하면서, 갓난아기 헨리 6세는 트루아 조약에 의거해 프랑스의 국왕을 겸임했다.
2.7. 부르주의 왕[편집]
1422년 10월 30일, 도팽 샤를은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등극에 불복하여 왕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역대 프랑스 국왕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장소인 랭스는 부르고뉴파가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부르주의 생테티엔 대성당에서 아내 앙주의 마리와 함께 즉위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칭했다. 이에 부르고뉴파와 잉글랜드 측은 그를 "부르주의 왕"이라고 조롱했고, 정당한 국왕 헨리 6세에 맞서는 반역자, 찬탈자라고 몰아세웠다.
2.7.1. 크라방 전투[편집]
샤를 7세는 갓난아기 헨리 6세가 왕위에 갓 올라서 정세가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대대적으로 반격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력이 닿는 지역에 전령을 잇따라 보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으려 하니 프랑스를 구하는 데 앞장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남부 전역의 장정들이 부르주로 몰려들었고, 아라곤, 롬바르디아에서도 용병이 추가로 고용되었다. 이 용병들은 이미 프랑스에 와서 보제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스코틀랜드군과 통합되었다.
1423년 여름, 보제 전투를 이끈 스코틀랜드 장군이자 프랑스 무관장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와 방돔 백작 루이가 이끄는 8,000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부르주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오셰르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욘 강에 있는 크라방을 먼저 공략한 뒤 강을 따라 북상하여 부르고뉴로 진격하기로 했다. 베드포드 공작은 이 소식을 접하자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 크라방을 구원하게 했다. 여기에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아르투아의 본은 1,000명의 부르고뉴군을 파견해 잉글랜드군과 합류하게 했다.
이후 1423년 7월 31일에 벌어진 크라방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200명을 상실했으며, 스코틀랜드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스코틀랜드 사령관 존 스튜어트, 프랑스 사령관 방돔 백작 루이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스튜어트는 한쪽 눈을 잃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미미했을 것이다. 샤를 7세는 생포된 장군들을 데려오기 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다만 1423년 9월 26일 앙주와 멘을 약탈한 뒤 노르망디로 귀환하던 잉글랜드군이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습격을 받고 섬멸되기도 하는 등, 양측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승패를 주고받았다.
2.7.2. 베르뇌유 전투[편집]
1424년, 헨리 6세의 섭정으로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등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는 프랑스 북부 지역을 통치하던 베드퍼드 공작 존은 프랑스 중부의 앙주와 멘을 공략하고 부르주를 압박하기로 마음먹고, 8,000~9,000 가량의 병력을 모집했다. 여기에 부르고뉴에서 파견된 3,000명도 가세했다. 샤를 7세와 아르마냑파는 이에 맞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세력이 보유한 도시와 성을 가능한 한 많이 공략하기 위해 프랑스 장정들을 대거 징발했고, 해외에서 용병대를 대거 모집했다. 특히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1424년 3월 7일 6,500명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이끌고 라 로셸에 상륙한 뒤 샤를 7세로부터 "프랑스 왕국 전역에서 전역을 수행하는" 중장 직위를 수여받고 투렌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렇게 해서 끌어모은 프랑스군의 전력은 14,000~16,000명에 달했다.
당시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이브리 성은 샤를 7세를 지지하다가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될 기미를 보이자 1424년 8월 14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브리 성으로 전군을 집결시킨 뒤 이곳을 구하러 오는 적군을 섬멸한 후 앙주와 멘으로 진격하려 했다. 실제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이브리를 구하기 위해 이브리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노낭쿠르에 이르렀다. 하지만 베드퍼드의 군대가 이브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심각한 논쟁에 휩싸였다.
프랑스 장성들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 대규모 야전에서 참패를 겪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지형상 절대 우세하는 등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 그들은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이브리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의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반 잉글랜드 정서가 매우 극렬했고,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자신들이 맹활약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기 때문에 잉글랜드군과 대규모 야전을 벌일 때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크라방 전투 때 프랑스인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최선을 다해 싸우던 동족들이 몰살당했다고 여겼기에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샤를 7세로부터 지휘권을 부여받은 장 8세 다르쿠르의 뜻대로 이브리를 구원하지 않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대신, 베르뇌유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있는 잉글랜드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잉글랜드 본대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뇌유를 무력으로 공략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기발한 꾀를 고안했다. 그들은 동포의 목에 갈고리를 씌운 뒤 피를 잔뜩 묻힌 후 베르뇌유 성채로 데려가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으며 이들은 겨우 살아남은 포로라고 소개했다. '잉글랜드 포로'로 가장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목놓아 통곡하며 "이제 잉글랜드는 끝났다. 우리는 패망했다."라고 소리지르자, 베르뇌유 수비대와 시민들은 정말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다고 착각하고 프랑스군에 귀순했다.
한편, 8월 14일 이브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베드퍼드 공작은 다음날 베르뇌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능한 한 빨리 그곳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3,000명의 부르고뉴 파견대를 피카르디에 별도로 보내 별도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눈앞에 두고 부르고뉴 부대를 다른 곳에 보낸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8월 16일 잉글랜드군이 베르뇌유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많은 노르만인들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잉글랜드군에서 이탈해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한편,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잉글랜드군이 근처에 이르자 이들과 맞붙어야 하는지를 놓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 우위이며 저들은 멀리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승리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프랑스 장군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이에 설득되었다. 그럼에도 장 8세 다르쿠르는 교전을 섣불리 벌였다가 일을 망칠까봐 망설였지만, 이번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프랑스를 떠나겠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1424년 8월 17일에 벌어진 베르뇌유 전투는 프랑스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베드퍼드 공작이 전투 후 브르타뉴 원정을 이끌던 토머스 램프스턴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7,262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 6,000명 중 단 40명 만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프랑스 지휘관 장 8세 다르쿠르,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드 나르본 등 여러 프랑스 장교들이 사살되었고,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 등 스코틀랜드 장성들도 살해되었다. 나르본 자작은 지난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을 살해한 전력이 있었기에 시신이 4등분되고 머리는 교수대에 매달리는 수모를 겪었다.
대승을 거둔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로 돌아와서 시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남부로 곧장 진격했다가 형 헨리 5세가 겪어야 했던 것처럼 적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기 보다는 멘과 앙주의 복속을 완료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후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잔존했던 도팽 샤를의 요새들이 모조리 잉글랜드군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라 이르가 이끄는 현지 프랑스군은 루아르 강 너머로 철수했다.
2.7.3. 브르타뉴 공국과의 타협[편집]
베르뇌유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뒤 스코틀랜드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된 샤를 7세는 새로운 동맹을 모색했다. 그는 어린 아들 루이 3세를 대신해 앙주 공국을 이끌고 있으며 자신의 시어머니이기도 한 아라곤의 욜란다에게 의지했고, 욜란다의 조언에 따라 1423년 아미앵 조약을 맺고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던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에 잉글랜드에 맞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하기로 했다. 1424년 11월 30일, 샤를 7세는 마콩에서 부르고뉴 및 브르타뉴 측 대표와 협상해, 두 세력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당시 랭커스터의 험프리와 저지대 국가를 놓고 심한 갈등을 벌였던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이어가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었기에 협상에 응했다. 그는 샤를 7세가 1419년 당시 어려서 아르마냑파 인사들에게 휘둘렸을 뿐, 아버지 용맹공 장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며, 아르마냑파를 궁정에서 축출한다면 그를 지원할 의향이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자신의 주요 지지 세력인 아르마냑파와 척지는 건 정치적 자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결국 부르고뉴 공국과 손을 잡는 건 실패로 돌아갔고, 그 대신 브르타뉴 공국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역시 아르마냑파를 궁정에서 축출해야 지원해 줄 의사가 있다고 밝혔지만, 장기간의 협상 끝에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한 장 8세 다르쿠르의 뒤를 이어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하고,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정부에서 지분을 받는 대가로 아르마냑파 지도층은 지위를 유지한다는 타협이 이뤄졌다. 1425년 3월 7일, 리슈몽은 시농에서 샤를 7세가 하사한 무관장의 검을 받아들고 정식으로 무관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해 4월, 리슈몽은 아라곤의 욜란다의 설득을 받아들여 프랑스의 몰락을 초래한 아르마냑파를 축출해 도팽 샤를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일으켰다.
6월 초, 리슈몽과 욜란다의 군대는 부르주 인근에서 아르마냑파 지도자 장 루베와 샤를 7세의 군대와 대치했다. 샤를 7세는 브르타뉴의 지원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결국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부르주로 돌아와서 귀족과 도시 유력자들 앞에서 그동안의 잘못된 통치를 반성하는 연설을 한 뒤 장 루베를 해임했다. 1425년 10월 초, 소뮈르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샤를 7세가 접견했다. 브르타뉴 공작은 샤를 7세에게 신하로서 선서한 뒤, 부르고뉴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아르마냑파가 숙청되었으니 샤를 7세와 화해하라고 권유했다. 이 소식을 접한 베드퍼드 공작 존은 격분해 브르타뉴 공국에게 2년 전 아미앵에서 맺은 조약에 따라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응징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했다.
2.7.4.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의 갈등[편집]
1426년 2월 중순, 리슈몽은 브르타뉴군을 이끌고 퐁토르송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진군해 생잠을 포위했다. 이후 생잠 요새 공방전을 한창 벌이던 3월 6일, 리슈몽이 잉글랜드 구원군이 오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브랑슈로 파견했던 기병대가 돌아왔다. 그런데 브르타뉴군은 이들이 잉글랜드 구원군인 것으로 오해해 무질서하게 패주했고, 생잠 주둔군은 이 때를 틈타 출격해 브르타뉴군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리슈몽은 참패를 면치 못하고 도주했다. 이후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를 침공하자,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4,500프랑을 배상금으로 내고 휴전 협약을 맺었다.
무관장을 맡은 후 처음 치른 전투에서 형편없이 패한 리슈몽은 브르타뉴 공작의 상서인 장 드 말레트르와를 납치해 시농으로 끌고 간 뒤, 샤를 7세에게 생잠에서 패한 이유는 말레트르와가 잉글랜드와 내통해 기밀을 누설하고 전비를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후, 장 5세가 잉글랜드군의 연이은 공세로 인해 궁지에 몰린 끝에 평화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를 더 이상 적대하지 않기로 하면서, 그의 입지가 급속도로 위태로워졌다. 리슈몽은 더이상 브르타뉴 공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샤를 7세와 신하들은 그의 진의를 의심했다.
이에 리슈몽은 무관장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강경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1427년 2월 8일, 리슈몽은 왕의 총애를 받아 일개 종자에서 시종장으로 발탁된 뒤 정계와 군부에 많은 간섭을 하고 자기 사람을 대거 임용하던 피에르 2세 드 지악을 잡아 죽이고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샤를 7세는 자기가 아끼던 신하를 죽여버린 자들의 지지 없이는 왕권이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고 넘어갔다. 오베르뉴의 소귀족 출신인 시종무관 장 베르네가 뒤를 이어 시종장이 되었다.
하지만 장 베르네 역시 정부의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해 자신의 부하들이 왕의 주변을 채우게 했다. 이에 리슈몽은 장 드 브로세에게 그를 죽이라고 지시했고, 장 베르네는 1427년 6월 12일 푸아티에에서 말을 타고 클레인 강둑을 따라 가던 중 피살당했다. 장 베르네의 두개골은 쪼개졌고, 한 손이 절단되었으며, 몸통은 강물에 던져졌다. 샤를 7세는 이에 격노했지만,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과 힘겹게 싸우는 상황에서 리슈몽과 갈등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라는 걸 깨닫고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이렇듯 리슈몽은 정치 테러를 통해 자신에 대한 도전을 배제하려 했지만, 샤를 7세가 자신의 총신들을 잇따라 죽이는 것에 반감을 품게 만들었다.
2.7.5. 몽타르지 공방전[편집]
1427년, 베드퍼드 공작 존은 앙주, 멘 지역을 어느정도 복속시킨 뒤 파리에서 60마일 떨어진 몽타르지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은 렁 강, 베흐니쏭 강의 교차점에 자리잡은 곳으로, 운하가 잘 깔려 있어서 상업 및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 또한 루아르 강, 센 강과도 가까워끼에 프랑스 남부로의 해운 수송에도 적합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곳을 공략하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고, 아직도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하고 있는 샤를 7세를 압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에게 도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1427년 7월 15일, 워릭 백작은 3,000 병력을 이끌고 몽타르지를 포위했다. 하지만 몽타르지 요새가 상당히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고 운하가 사방에 깔려 있어서 포위망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기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는 포병대를 활용해 포격을 며칠간 벌였지만, 수비대와 주민들이 매일 밤 손상된 곳을 수리하고 대포로 맞대응했기 때문에 좀처럼 뚫지 못했다. 그러나 2달간 포위가 이어지면서, 도시 내에서 기근의 징조가 일기 시작했고 목재와 탄약도 고갈될 조짐을 보였다. 한편, 샤를 7세는 몽타르지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몽타르지를 구원할 병력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맨앳암즈 1,600명과 라 이르, 장 포통 드 생트라유, 질 드 레 등 유수의 기사들이 모집되었다. 하지만 리슈몽은 마지막으로 남은 정예 병력을 이번 전투에서 손실할 것을 우려해 출진을 그만두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샤를 7세는 격분해 리슈몽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25세의 젊은 귀족 장 드 뒤누아를 새 지휘관에 선임했다. 구원군은 루아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북상하여 9월 2일 몽타르지 인근에 상륙했다. 당시 점심을 먹고 있었던 잉글랜드군은 적이 나타나자 전투를 벌이기 위해 로잉 강을 도하했다. 이때 수비대가 수문을 열자, 홍수가 발생해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일부 잉글랜드군이 고립되어 수비대의 공격을 받았다. 강을 건너간 잉글랜드군 역시 프랑스 구원군의 공격을 받았고, 두 잉글랜드 군대 모두 압도되어 모든 공성 장비와 대포를 남겨두고 도주했다. 워릭은 최선을 다해 일부 병력을 수습한 뒤 파리로 귀환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500명 이상이 전사했고 600명 이상이 생포되었다. 샤를 7세는 적을 상대로 용감하게 항전한 몽타르지에 세금을 면제하는 등 갖가지 특권을 부여했다.[5]
몽타르지 공방전이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된 후, 몽타르지를 구원하지 않으려 했다가 지휘권을 박탈당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군사적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여기에 새 시종장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가 샤를 7세의 마음속에 리슈몽에 대한 의심을 키우도록 부추겼고, 리슈몽은 점점 샤를 7세의 궁정에서 배제되었다. 이에 리슈몽은 1427년 10월에 정부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된 귀족들을 결집해 반란을 일으켜 시농을 점령한 뒤, 간신인 트레무아유를 제거하고 정부를 개혁하겠다는 선언문을 반포했다. 그러나 1428년 왕실군이 반격을 가해 시농을 탈환했다.
이에 리슈몽은 부르주를 기습해 공략했지만, 샤를 7세가 7월에 군대를 이끌고 부르주에 도착하자 겁을 먹은 반란군은 트레무아유를 해임하라는 요구마저 철회하고, 그 대신 푸아티에에서 삼부회를 소집해 모든 국민들이 정부의 운영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고, 샤를 7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428년 9월에 시농에서 삼부회가 소집되었을 때, 리슈몽은 불출석했지만 반란에 가담했던 동료들은 그를 버리고 국왕의 소집에 응했다. 이후 리슈몽은 무관장으로서 받아야 할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해임된 뒤 1,200명 가량의 브르타뉴 병사들만 이끌고 파르테네와 퐁트네 르 콩트 등지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르는 데 만족해야 했다.
2.7.6. 오를레앙 공방전, 그리고 잔 다르크의 등장[편집]
1428년, 베드퍼드 공작 존은 전쟁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샤를 7세를 끝장내기 위한 오를레앙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사실 베드퍼드 공작 본인은 처음엔 오를레앙보다는 앙주의 중심지인 앙제 요새를 공략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는 앙제를 공략한들 도팽 샤를의 저항은 계속 이어질 거라며, 루아르 강변의 핵심 거점인 오를레앙을 공략한 뒤 루아르 강을 도하한 후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를 포위해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당시 잉글랜드의 포로였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소유인 곳을 압수하는 것은 기사로서 가치가 없는 일로 여겼기에 망설였지만, 다른 장성들이 솔즈베리 백작의 주장에 동조하자 마음을 달리 먹고 오를레앙 공략을 지시했다. 1427년 7월 17일 오를레앙 백작과 서퍽 백작, 부르고뉴 대표가 런던에서 오를레앙 공국이 침략당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했지만, 존은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6]
그러나 오를레앙 공방전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초기에 오를레앙 공략을 맡은 토머스 몬타구는 구원군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붓다가 1429년 10월 24일 오를레앙 인근의 요충지인 투렐 요새의 2개 탑 중 하나에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던 중 오를레앙의 노트르담 탑에 설치된 대포가 그쪽으로 쏜 포탄에 맞아 죽었다. 이후 새 사령관으로 부임한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은 공성전을 감행했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자명하니 포격을 도시로 끊임없이 퍼붓고 철저하게 봉쇄해서 적을 굶겨 죽이기로 하고, 수비대가 파괴한 수녀원 폐허 위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수많은 목조 요새가 도시 주변에 세워졌지만, 도시를 완전 포위하기에는 병력이 매우 부족했기에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생 세베르, 롬바르드인 용병 테오돌트 드 발페르그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이 미처 봉쇄하지 못한 지점을 통과해 요새로 진입했고 보급품도 꾸준히 전달되었다.
12월 1일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포위군을 돕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12월 7일 수비대가 투렐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오를레앙 수비대는 12월 29일까지 도시 외곽에 남아있는 여러 교회를 불태웠다. 이듬해인 1249년 1월,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의 서쪽 요새 주변에 울타리와 도랑으로 연결된 일련의 요새를 세우고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429년 4월까지 오를레앙 동쪽 강둑의 생 루에 추가 요새를 세웠다. 그 동안 보급품이 도시의 북쪽과 북동쪽 도로를 통해 오를레앙으로 들어왔다. 잉글랜드군은 이를 막기 위해 요새화된 기지를 그쪽에 세우려 했지만, 그러기엔 병력이 부족해서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렇듯 잉글랜드군의 공세가 지지부진하던 1429년 2월 8일, 한 처녀가 오를레앙에 곧 나타날 것이며 프랑스가 그녀에게 구원받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2월 11일,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1,000명의 기마 궁수 및 기사들이 300대의 마차에 식량, 화살, 화약, 대포, 그리고 사순절 기간에 병사들에게 먹일 청어를 가득 싣고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루브레 마을 인근 평원에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가던 클레르몽 백작 샤를 1세와 에브뢰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장군인 단리의 존 스튜어트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 4,000명과 마주쳤다. 하지만 이어진 루브레 전투(일명 '청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했고, 잉글랜드 수송부대는 유유히 아군 진영으로 가서 보급품을 전달했다. 오를레앙 수비대를 지휘하던 장 드 뒤누아는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은 뒤 오를레앙으로 가까스로 돌아왔다.
뒤누아는 구원군이 격파된 것에 낙담해 적 진영에 저명한 시민 대표단을 보내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 넘기고, 잉글랜드인과 부르고뉴인들이 루아르 강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도시의 세금 중 절반을 잉글랜드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오를레앙 공작의 몸값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이 제안에 혹해 파리로 달려가서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이 곧 함락될 거라 확신했던 베드퍼드 공작은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게 넘기기 싫었기에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필리프는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한 부르고뉴군에 철수를 명령했고, 부르고뉴군은 1429년 4월 17일에 전장을 떠났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부족했던 포위 병력은 더욱 부족해졌고, 오를레앙 북쪽 도로를 막기 위해 설치될 예정이었던 북쪽 초소는 취소되었다.
이렇듯 오를레앙 공방전이 반년 째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1429년 2월 25일, 동부 로렌 지방의 시골 동레미에서 온 16세 소녀 잔 다르크가 시농 성에 거주하고 있던 샤를 7세를 알현했다. 샤를은 그녀가 적이 보낸 첩자나 암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믿을 수가 없어 자신의 부하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자기 자리에 앉혀놨고 자신은 대신 초라한 옷을 입고 신하들 사이에 숨었다. 그런데 소녀는 변장한 샤를이 누군지 알아보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량한 도팽이시여, 나는 주 하느님을 대신하여 당신이 프랑스 왕좌의 진정한 상속자임을 알립니다."
그녀는 자신이 오를레앙을 구하고 그를 프랑스의 왕으로 삼으라는 환상을 봤다고 주장했다. 샤를 7세는 그녀의 신통력에 깜짝 놀랐고, 그녀와 독대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직도 그녀가 마녀, 첩자일지도 모른다며 경고했고, 샤를 7세는 잔을 푸아티에로 보내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했다. 잔은 성직자들의 강도높은 심문을 거뜬히 통과했고, 샤를 7세는 3월 22일 그녀를 믿기로 하고 판금 갑옷, 배너, 검, 종자를 하사했다. 1429년 4월 17일, 잔 다르크는 알랑송 공작 장 2세가 이끄는 3,000명의 맨앳암즈와 함께 블루아에서 출발했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욕설을 하지 말고, 수용소에 여성을 풀어놓지 않으며, 모두 미사에 참석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고, 모두가 이에 복종했다. 여기에 여러 성직자가 오를레앙을 구원하기 위해 진격하는 프랑스군과 동행했다.
1429년 4월 29일 오를레앙에 입성한 잔 다르크는 5월 7일까지 오를레앙 공방전을 이끈 끝에 잉글랜드군의 핵심 요충지인 투렐 요새를 공략하면서 포위망을 와해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투렐 요새가 함락되면서 오를레앙을 공략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과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는 5월 8일에 잔여 병력을 오를레앙 요새 앞에 집결했다. 그 모습을 본 프랑스군도 전투를 준비했고, 일부 사령관들은 아예 성밖으로 나가서 저들을 쓸어버리자고 외쳤다. 하지만 잔은 이 날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전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출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적이 출격하지 않자 파리로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적이 물러나는 것을 본 주민들은 텅 빈 잉글랜드 요새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성벽 인근에서 추수감사절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오를레앙 공방전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2.7.7. 루아르 원정과 파테 전투[편집]
오를레앙에서 철수한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오를레앙 주변의 요새들에 군대를 배치시켜 프랑스군의 예상되는 공세를 저지하면서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서퍽 백작 본인은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를레앙에서 9마일 떨어진 루아르 강 남쪽 기슭의 쟈흐고(Jargeau)로 이동했고, 존 탈보트와 토머스 스케일스 역시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이끌고 각각 멍(Meung), 보장시(Beaugency)에 자리를 잡았다. 이 세 도시는 루아르 강을 가로지르는 요새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한편, 오를레앙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 장 2세 달랑송, 장 드 뒤누아는 오를레앙 주변의 루아르 강 계곡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신속히 몰아내기로 했다. 하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병력 만으로는 부족했기에, 투르에 있는 샤를 7세에게 가서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샤를은 이에 따라 각지에 소집령을 내렸고, 성녀의 활약으로 오를레앙이 구원받았다는 소문에 흥분한 장정들이 대거 응하면서 한 달 만에 병력 규모가 6,000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프랑스군은 잔 다르크의 독려 아래 루아르 원정을 단행해 쟈흐고, 보장시를 잇따라 접수했다.
한편, 프랑스 궁정에서 배척당하고 있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은 6월 15일 1,200명 가량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루아르 원정을 한창 이끌고 있던 원정군에 접근해, 자신도 함께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일전에 장 2세 달랑송에게 리슈몽과 힘을 합치지 말라는 밀명을 내린 바 있었고, 이 때문에 장 2세는 리슈몽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에 대한 향후 작전에 아르튀르의 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며 아르튀르를 변호했고, 다른 프랑스 장군들도 그녀의 의견을 지지했다. 잔은 아르튀르에게 자신이 도팽을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서면 보증을 하도록 요청했고, 아르튀르는 기꺼이 따랐다. 이에 장 2세는 아르튀르가 원정에 가세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세로 오를레앙 주변 요새들을 더 이상 지킬 가망이 없어지자, 존 파스톨프와 존 탈보트는 철수길에 올랐다. 하지만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수송 마차와 포병대를 보호햐기 위해 선두에 세웠기 때문에, 5,000 가량의 잉글랜드군의 행군 속도는 매우 느렸다. 파스톨프는 선두에서 수송 부대, 포병 부대, 숙영지 경비병, 소규모 기마병들과 함께 했고, 탈보트, 스케일스는 노르망디와 프랑스 점령지에서 모집한 프랑스 민병대와 함께 중군에 있었다. 후위대에는 잉글랜드 맨앳암즈 및 장궁병들이 배치되었다. 이 사실을 첩보를 통해 접한 장 2세를 비롯한 프랑스 장군들은 섣불리 추격했다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같은 참혹한 패배를 겪을 것을 우려해 추격하기를 주저했다. 이때 잔이 그들을 독려했다.
"저들이 그대로 돌아가게 내버려둔다면 랭스로 행차하실 샤를 왕자님의 대관식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들과 싸우러 갑시다! 그들이 구름에 걸려 있더라도 우리가 잡을 겁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벌하려고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쓸 때입니다!"
프랑스 수뇌부는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1,500명의 기마병이 선두에서 질주하는 동안, 장 2세, 잔, 리슈몽 등이 이끄는 프랑스 본대가 뒤따라갔다. 1429년 6월 18일, 라 이르는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 잡고 2,500명에 달하는 적병을 사살하고 존 탈보트를 사로잡는 대승을 거뒀다. 해가 저물 무렵 전투 현장에 도착한 프랑스 본대는 프랑스 기병대를 피해 사방으로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잔 다르크는 치명상을 입은 잉글랜드 병사를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은 뒤 위로를 건네고 죽기 전에 자신이 생전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평온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전해진다.
2.7.8. 랭스 행진[편집]
루아르 원정과 파테 전투로 잉글랜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뒤, 잔 다르크는 샤를 7세에게 랭스로 행진해서 대관식을 거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의 지배를 받고 있는 랭스로 가기를 거부했다. 그는 슐리슈흐르와흐에 한동안 머물다가 군대를 오를레앙으로 철수시킨 뒤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하지만 잔은 역대 프랑스 국왕들이 대관식을 거행한 랭스로 가야만 프랑스 백성들이 그를 진정한 국왕으로 받들 것이라며 자신의 뜻을 고집했다. 6월 21일, 잔은 플뢰리 수도원에서 샤를과 대면해 하느님의 뜻이 그가 프랑스 국왕으로 군림하는 데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고 랭스로 행차해달라고 호소했다. 잔 다르크에게 감화된 많은 장군과 병사들도 그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1429년 6월 22일, 대평의회는 장시간 논의한 끝에 기옌에서 군대를 집결하여 랭스로 진군하기로 결의했다. 6월 29일, 프랑스군은 기옌에서 랭스를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당시 잔 다르크에게 매료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에, 프랑스군의 규모는 12,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파리에 도사리고 있는 잉글랜드군이 중도에서 요격할 수 있고, 부르고뉴파가 순순히 자기 땅인 랭스를 내줄 리 없었기에, 이 진군은 상당히 위험했다. 그래서 샤를은 아내 앙주의 마리와 아들 루이가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않도록 했다.
이후 감행된 랭스 행진은 샤를 7세의 우려와는 달리 무척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부르고뉴파와 잉글랜드군은 이권다툼을 벌이느라 사이가 매우 소원해졌고, 개별적으로 작전을 세우고 서로 협력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일전에 잉글랜드군이 파테 전투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이 부르고뉴를 도울 의지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부르고뉴 측이 단독으로 아르마냑파를 막아야 했지만, 민심이 그쪽으로 완전히 쏠려서 많은 도시가 곧바로 항복하고 병사들도 전의를 상실했으니 승산이 없었다. 결국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민심을 등에 업고 압도적인 기세로 밀어붙이는 잔 다르크의 프랑스군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관했다.
1429년 7월 16일, 프랑스군이 랭스에서 21km 떨어진 샙트소에 있는 랭스 대주교의 성에 도착했다. 이후 샤를은 랭스 시민들에게 성문을 열 것을 촉구했고, 주민들은 선량공 필리프와 잉글랜드군이 구하러 올 때까지 6주 동안 저항하겠다는 서약을 했음에도 이를 받아들였다. 샤를은 내일 거행할 대관식에 관해 랭스 유력 인사들과 협상했다. 협상이 끝난 뒤, 샤를은 "부르고뉴와 잉글랜드에 대한 묵인과 불복종으로 인해 랭스 주민들에게 선고된 처벌, 벌금 및 몰수를 폐지하는 특허 서신"에 서명하고 저녁 식사를 한 뒤 랭스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잔 다르크는 논의가 이어지는 동안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1429년 7월 17일 일요일, 샤를 7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당시 왕관, 홀, 지구본 등 역대 대관식에 사용되는 중요한 물건들은 여전히 잉글랜드가 소유한 생드니에 있었고, 대관식에 참석한 성직자는 랭스의 르노 드 샤르트르 대주교, 라온의 기욤 주교, 샬롱의 장 자르브뤼켄 주교 등 3명 뿐이었다. 샤를은 샤르트르 대주교 르노로부터 신성한 암풀라(Holy Ampulla)에 담긴 기름에 머리를 적심으로써, 자신이 프랑스의 진정한 국왕임을 널리 알렸다. 이날 대관식에 참석한 잔은 한쪽 무릎을 꿇고 샤를에게 경의를 표하며 말했다.
"고귀하신 왕이시여,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고 당신을 이 랭스 시로 데려가서 거룩한 대관식을 치르기를 바라셨던 하느님의 뜻이 이제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왕이며 프랑스 왕국이 속해 있어야 할 사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퍼드 공작 존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431년 12월 16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수운 봉쇄로 인한 파리 시의 물자 부족,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한 잉글랜드인들에게 파리 감수성이 부족한 탓에 행사는 엉망으로 치러졌다. 대관식이 프랑스 전통이 아닌 잉글랜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루머까지 퍼졌고 동군연합의 환상은 무너졌다. 이제 수많은 프랑스인들은 샤를을 프랑스의 국왕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잉글랜드는 갈수록 수세에 몰렸다.
2.8. 프랑스 국왕[편집]
2.8.1. 1차 파리 공방전[편집]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 샤를 7세 정부는 앞으로 어찌할 지 논의했다. 잔 다르크, 장 2세 달랑송, 질 드 레 등은 가까운 시일 내에 파리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적이 거듭된 패배로 상실한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지 말고 공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대관식 때 샤를 7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르노 드 샤르트르 주교와 시종장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등은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이상 부르고뉴파와 협상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때까지 전쟁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파리의 방비가 매우 막강하니 섣불리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볼 것이므로 부르고뉴파를 회유하는 데 중점을 두기를 희망했다.
두 정파의 대립이 가중되고 있을 때,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측근인 다비 드 브리모가 이끄는 부르고뉴 대표단이 찾아와 15일간의 휴전을 제안하면서, 파리를 샤를 7세에게 넘길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샤를 7세는 파리 진군을 미루기로 하고 루아르 강 주변의 도시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복속시키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루아르 강 주변 지역을 돌며 영주와 주민들에게 샤를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해 열띤 호응을 얻어냈다. 그러나 샤를 7세의 측근들이 잔의 인기가 갈수록 치솟는 것에 깊은 경계심을 품으면서, 잔과 왕실간의 갈등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르마냑파가 이렇듯 가만히 있는 사이, 베드퍼드 공작은 칼레에 상륙한 3,500명의 맨앳암즈와 장궁병들을 이끌고 7월 25일 파리에 입성했다. 여기에 선량공 필리프가 지휘하는 피카르디 병사 700명도 가세했다. 8월 2일, 베드퍼드 공작은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프랑스 지역의 모든 귀족들에게 한 달 안에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프랑스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파리를 떠나 8월 4일 멜룬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잉글랜드군을 쳐부수고자 낭기스로 이동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파리로 돌아갔고,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가 잉글랜드를 저버리고 자신들에게 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측근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루아르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최근에 복종을 표명했던 브레이가 잉글랜드군의 급습으로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불쾌감을 느낀 샤를은 파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진군 과정에서 수뇌부간의 의견 충돌이 거세지면서 행군이 멈추거나 지연되기 일쑤였다. 베드퍼드 공작은 그런 적의 행보를 지켜보다가 파리를 떠나 상리스로 이동한 뒤 샤를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샤를을 "이전에는 자신을 도팽이라 칭하고 이제는 왕이라고 칭하며 정당한 왕에게서 왕좌를 빼앗으려는 자", "남장을 한 방탕한 여인이자 하느님을 거역하는 이단자와 동맹을 맺은 자", "용맹공 장의 살인자"라고 지칭하면서, 전장에 나와서 분쟁을 완전히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상리스 마을과 노트르담 드 라 빅투아르 수도원 인근에 전투 대형을 세우고, 방어벽과 수송 마차들을 전방과 측면에 잔뜩 세워두고 후방에 강을 둔 채 프랑스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8월 11일 베드퍼드 공작의 서신을 받고 분노한 샤를은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 이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가 먼저 출격했고, 프랑스 본대가 뒤따라갔다. 8월 13일 티에우 마을 인근에서 양측 기병대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8월 15일 상리스 인근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적군이 강력한 방어 진형을 갖춘 걸 보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일부러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서 잉글랜드군이 진영을 떠나서 자신들을 쫓아오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잘 훈련받은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속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군이 크레피로 물러나자, 베드퍼드 공작도 파리로 돌아갔다. 한편, 르노 드 샤르트르가 이끄는 프랑스 사절단이 선량공 필리프와 접촉하여 협상을 벌였다.
8월 17일, 샤를 7세는 잉글랜드 수비대를 추방하고 자신에게 항복한 보베 주민들로부터 도시 열쇠를 접수했다. 8월 18일 콩피에뉴에 입성한 그는 잉글랜드군이 떠난 뒤 방돔 백작 루이 1세, 라 이르 등이 상리스를 접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얼마 후 선량공 필리프가 파견한 룩셈부르크의 장과 아라스 주교 등이 샤를을 찾아왔다. 샤를은 부르고뉴 측이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끊고 파리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길 희망했지만, 사절단은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크리스마스까지 센강 북쪽의 아르플뢰르 등지에서의 적대행위를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샤를은 이에 불만족했지만, 부르고뉴 측이 적대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지역에 파리를 넣지 않은 것을 보고 파리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보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콩피에뉴에서 양측의 서명과 날인으로 합의가 이뤄졌고, 샤를은 크리스마스까지 4개월 동안 파리 북쪽의 도시들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잔은 이러한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에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파리를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장 2세 달랑송의 회고록에 따르면, 잔은 그를 자신의 숙소로 초대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훌륭한 공작님, 제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파리를 보고 싶다는 사실을 당신의 부하들과 다른 장군들의 부하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장 2세는 잔의 설득에 넘어가 군대를 파리 근교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에 여러 부대가 즉시 호응해 그들을 따라 나섰다. 8월 25일 생드니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관료 및 성직자들이 급히 파리로 도피했기 때문에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입성했다. 샤를은 이러한 군사 작전에 동의한 바 없었지만, 다들 잔 다르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가야 했다. 한편 베드퍼드 공작은 노르망디의 상황이 매우 불온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곳곳에서 잉글랜드의 억압에 반발한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보베와 오마르 당국은 샤를 7세의 사절과 협상했으며, 루앙 시민들은 도시를 프랑스에 넘겨주려 했다. 이에 베드퍼드 공작은 노르망디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다수 잉글랜드군을 노르망디로 이동시켰고, 장 빌리에와 시몽 모르히에가 이끄는 파리 민병대 4,200명만이 파리 수비를 맡았다.
8월 26일 파리에 도착한 장 2세 달랑송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파리에 사절을 보내 도시를 개방한다면 어떠한 약탈이나 살육을 하지 않을 것이며, 샤를 왕에게 반역을 저지른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알렸다. 시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프랑스군은 북쪽에서 도시로 접근하면서 도시 교외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이후 파리 성벽 앞에서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고, 장 2세와 잔은 모든 전투에 참여해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파리 민병대의 무장과 전술은 물론 도시의 방어 상태를 점검했다. 잔은 샤를에게 어서 이곳으로 와서 군대를 친히 이끌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샤를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9월 1일, 장 2세가 직접 샤를을 찾아가서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9월 5일 장 2세가 재차 찾아가 설득하자, 샤를은 그제야 요청에 응하기로 했고, 파리 근교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9월 6일, 생 드니에 주둔한 군대는 도시에 더 가까운 라 샤펠로 이동했다. 그들은 "성녀가 이번에도 왕을 파리에 입성시킬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잔은 생 드니 드 라 샤펠 예배당에 들어가서 하느님께 이번에도 승리로 인도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9월 8일, 잔과 장 2세, 질 드 레, 장 드 브로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파리의 성문 중 하나인 포르트 생토노레(Porte Saint-Honoré)를 공격하기 위해 라 샤펠에서 출발했다. 잔은 생 로크 언덕에 컬버린(Couleuvrine: 소형 대포)을 설치하고 포병대를 친히 이끌면서 아군이 성문을 공격하는 것을 지원했다. 포병들은 정밀하게 성벽을 강타했고, 성벽 위에 설치된 대포들을 잠재웠다. 하지만 파리 민병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생토노레 성문이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이에 잔은 공격을 일시 중지시킨 뒤 군기를 흔들며 성벽으로 다가가며 파리 시민들을 향해 외쳤다.
"이 도시를 프랑스 왕에게 넘기십시오!"
그러나 시민들이 자신을 향해 "창녀", "마녀", "암캐" 등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끝까지 싸우려 들자, 잔은 공격을 재개하게 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첫번째 해자를 메웠고, 뒤이어 외부 성벽 하나를 돌파했다. 뒤이어 두번째 해자 앞에 선 잔은 깃대로 깊이를 측정한 뒤, 공성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 때, 알려지지 않은 궁수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석궁을 발사했다. 화살은 그녀의 허벅지를 관통했고, 잔은 바닥에 쓰러졌다. 프랑스군은 이에 분노해 거센 공격을 가했지만, 민병대의 결사적인 항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철수했다. 잔은 도랑 앞에 누워 있는 채로 병사들에게 계속 공격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장 2세 등이 그녀를 억지로 말에 태운 뒤 라 샤펠 마을에 있는 프랑스 숙영지로 데려갔다.
다음날 새벽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잔은 절뚝거리면서 장 2세에게 가서 병사들을 소집하고 말에 안장을 얹어서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라고 설득했다. 장 2세는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했지만, 질 드 레 등은 무의미하다고 여겨 따르지 않았다. 장 2세와 잔을 따르는 프랑스군은 이번에는 남쪽으로 은밀히 이동하여 파리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사전에 이미 끊겨 있자, 프랑스군 내부에서 적과 밀통하는 자가 있다는 의심이 퍼졌다. 이때 앙주 공자 르네가 달려와서 모든 장군이 군대와 함께 생 드니로 철수하라는 샤를 왕의 명령을 전했다. 왕명을 감히 어길 수 없었기에, 프랑스군은 즉시 숙영지를 철거하고 생드니로 후퇴했다.
9월 13일, 샤를은 생드니에서 부르주로 철군하기로 했고, 잔은 생드니를 떠나면서 자신의 갑옷을 성모 마리아와 성 디오니시우스 성당에 바쳤다. 그녀가 파리를 공략하지 못했다는 것에 깊이 슬퍼하자,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달랬다. 이리하여 파리 공방전은 부르고뉴-잉글랜드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성녀로 칭송받던 잔의 위상은 이때를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2.8.2. 잔 다르크와의 갈등[편집]
1429년 9월 13일 1차 파리 공방전을 중단하고 부르주로 돌아온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의 협상에 전념하기 위해 4개월간의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러는 한편, 루아르 강변에서 아직까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몇몇 도시들을 복속시키기로 했다. 11월 4일, 파리 공방전 도중 허벅지에 석궁 화살을 맞은 부상을 입은 뒤 몇달간 요양하다가 회복된 잔 다르크는 왕명을 받들어 드뢰 백작 샤를 2세와 함께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생피에르르무티에로 진격했고, 1429년 11월 4일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을 치른 끝에 생피에르르무티에를 공략했다.
그 후 잔 다르크는 라 사리테 공략에 착수했다. 그곳은 잘 요새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오랜 포위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보급품을 보유했다. 또한 잔이 이끄는 군대에는 포병이 없었다. 잔은 11월 7일 부르주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11월 9일 샤를 1세 드 부르봉과 함께 재차 요청했다. 그러나 샤를 7세 정부는 한참 동안 보내주지 않다가 한 달 후에야 약간의 병력과 포병을 보내줬지만, 그 때는 이미 겨울이 시작되어서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다. 결국 잔은 라 사리테 공략을 포기하고 귀환해야 했다. 이후 부르주로 돌아온 잔은 샤를 7세에게 공로를 치하받고 가족과 함께 귀족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봉토나 병사를 거느릴 권한이 없는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했다. 일각에서는 샤를이 그녀에게 문장과 귀족위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은퇴하길 희망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잔은 끝까지 전쟁에 참여하고자 했고, 외교를 통해 이득을 챙기고자 했던 샤를 7세는 그런 그녀를 점차 멀리 했다.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껄끄럽게 여긴 이유는 기록상에선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현대 학자들은 아래의 이유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먼저, 중세 시대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유럽에서는 왕이 되려면 형식적으로나마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황만이 신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황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황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한 잉글랜드와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고, 되도록이면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했다.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르고,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 프랑스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투를 지속하는 것조차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2.8.3. 잔 다르크를 저버리다[편집]
1430년 3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휴전 기간이 종료되자 자신을 따르길 거부하고 샤를 7세를 받드는 파리 북쪽의 도시들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세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샤를 7세 궁정은 방돔 백작 샤를에게 이들 도시에 사절을 보내 부르고뉴 공작에게 복종하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다른 도시들은 이에 순종했지만, 콩피에뉴 시만은 끝까지 저항할 뜻을 포명하고 기욤 드 플라비를 수비대 지휘관으로 세웠다. 1430년 4월 4일, 리니 백작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가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를 공략하기 위해 출진했고, 4월 15일 콩피에뉴에 도착한 뒤 도시를 에워싸고 공세를 펼쳤다.(콩피에뉴 공방전)
콩피에뉴 시는 샤를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이런 일로 부르고뉴파와의 협상이 깨지길 원하지 않은 샤를 7세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프랑스 기사 플로랑 달리에, 이탈리아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바로타를 비롯한 인사들을 설득해 300~400명의 자원병들을 구성한 뒤 콩피에뉴로 출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출진에 대해 명시적인 허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잔이 왕의 명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고 비판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녀가 왕실의 암묵적인 허가를 얻지 않았다면 출진할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그 후 잔은 멜룬에 도착해 부르고뉴 수비대를 몰아낸 뒤 라니쉬르마른으로 진격하여 셀레스 영주이자 기사인 프랑케 다라스(Franquet d' Arras)가 이끄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용병대 300명과 교전해 격파하고 다라스를 비롯한 많은 포로를 생포했다. 잔은 프랑케가 프랑스의 여러 마을과 농지를 약탈하고 많은 주민을 죽인 일을 성토하고, 라니쉬르마른 주민들이 2주 동안 재판을 진행한 뒤 프랑케와 용병들을 학살하는 것을 묵인했다.[7]
5월 14일 콩피에뉴에 도착한 잔은 5월 23일 콩피에뉴에서 출격한 수비대와 동행하여 도시 북동쪽의 마르니에 있는 부르고뉴 전초기지를 공격했다. 초기에는 적군을 압도하고 기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리니 백작이 파견한 증원군 6천 명이 반격해오자 상황이 불리해졌다. 잔은 끝까지 항전하자고 호소했지만, 사령관들은 이를 묵살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이때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한 후위대가 편성되었고, 잔은 깃대를 든 채 말을 타고 후위대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이후 잔과 후위대가 콩피에뉴 성으로 들어오려 했을 때, 돌연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들어올려지면서 고립되었다. 이에 대해 도시 수비대장 플라비가 순전히 적군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다리를 올렸을 뿐이라는 설과 잔이 제거되기를 바란 샤를 7세 측근들의 밀명을 받은 플라비가 일부러 다리를 일찍 올렸다는 설이 대립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잔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생포되었고, 후위대는 그대로 항복했다. 그 후 콩피에뉴는 6개월간 항전을 이어가다가 11월 초 샤를 7세가 파견한 구원군이 인근에 이르자 부르고뉴군이 공성을 중단하고 철수하면서 해방되었다.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는 잔 다르크를 생포한 뒤 보부아르에 포로로 보냈다. 높은 탑에 갇혀 있던 잔 다르크는 높은 탑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했지만, 외상은 없었으나 의식을 잃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잔을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인들과 같이 식사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했다. 그러면서 샤를 7세에게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고 제의했지만, 샤를 7세는 거부했다. 이때 잔과 가까이 지내던 그의 이모인 잔 드 뤽상부르생폴은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마라. 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당국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자, 결국 그는 1만 리브르 트르누아의 거액을 받고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넘겼다.
그 후 잔 다르크는 루앙에서 1년여간 재판받았다. 그녀는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탁월한 언변과 논리를 구사해 이단 심문관들을 쩔쩔매게 했지만, 애초에 그녀를 이단으로 낙인찍기로 작정하고 열린 재판이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잔 다르크의 동지였던 라 이르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1431년 루앙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지만, 부르고뉴군에게 요격되어 사로잡힌 뒤 도르당 지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432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고,[8] 샤를 7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잔은 이단 혐의로 화형을 선고받았고,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죽기 직전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말을 남긴 뒤 경건한 태도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2.8.4. 안통 전투[편집]
오랑주 공국의 공작인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부르고뉴 공국과 사보이아 공국의 지원을 토대로 도피네 전역을 석권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 사실 필리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부르고뉴의 대리권을 부여받은 것을 근거로 자신과 갈등을 벌이기도 했고, 샤를 7세 편을 들었던 적도 있었던 그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잘만 이용하면 샤를 7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지원했다. 한편,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는 그를 통해 프랑스를 충분히 약화시킨 뒤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기에 역시 상당한 장병과 군자금을 제공했다.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상당수의 부르고뉴군이 합세한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세에 착수했지만, 1430년 6월 11일 안통 전투에서 라울 6세 드 고쿠르 등이 이끄는 1,600명의 프랑스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라울 6세는 오랑주군이 빼앗았던 모든 성채를 탈환한 뒤, 오랑주로 진군해 6월 말부터 포위했고, 오랑주 시는 7월 3일에 항복했다. 뒤이어 오랑주 공국의 다른 지역도 잇따라 항복했다. 이후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부르고뉴 공국에서 찬밥 취급받다가 1432년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받았다.
2.8.5. 라니쉬르마른 공방전[편집]
1432년, 베드퍼드 공작 존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 주변 지역인 일드프랑스에 대한 통제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상황을 어떻게든 만회하기로 했다. 그는 마른 강과 센강의 교차점에 세워진 라니쉬른마른 요새에 자리잡은 프랑스군이 파리로 들어오는 수송선들을 지속적으로 습격해 파리 시민들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부르고뉴군 사령관 장 드 빌리에, 장 2세 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6,000 가량의 군대를 일으켜, 1432년 5월 중순에 라니쉬르마른을 포위했다. 당시 라니쉬르마른 요새에서는 생제르맹 영주 장 푸코와 기사 앙브루아즈 드 로레가 600~800명 가량의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다.
존은 마을 주민들을 겁주기 위해 공성 첫날에 마을을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일부 성문과 성벽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는 포격을 잠시 중단한 뒤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주민들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이에 존은 장병들에게 성벽을 공략하라고 명했지만, 며칠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존은 요새를 가만히 포위해 수비대와 주민들은 굶주려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수비대는 샤를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장 드 브로세, 장 드 뒤누아, 라울 6세 드 고쿠르,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장 포통 드 생트라유, 질 드 레, 라 이르 등에게 800~1,000명의 병력을 줘서 도시를 구원하게 했다. 이들은 오를레앙에서 멜룬 방향으로 진군한 뒤 센 강을 건너 브리를 지나 라니쉬르마른으로 향했다. 도중에 샤를 7세를 지지하는 민병대가 끊임없이 가담하면서, 8월 초에 이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5,000명으로 불어났다.
존은 프랑스 지원군부터 격파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군 사령부에 사절을 보내 야전을 벌이고 싶으니 원하는 전투 날짜와 시각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진영은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싸울 것이다"라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이후 프랑스군은 도시 남쪽으로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다가 전장 인근에 작은 숲을 따라 진영을 세웠다. 프랑스 사령부는 논의 끝에 군대를 2개로 나누기로 했다. 첫번째 부대는 성을 포위한 적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수행하고, 두번째 부대는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로드리고의 지도하에 적의 포위망이 가장 약한 지점을 돌파하며, 라울 6세 드 고쿠르가 요새에 보급품 및 증원군을 전달하기로 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에 대응해 기병대를 최선두에 세워서 아군 포위망으로 접근하는 적을 분쇄하게 했고, 두 번째 부대는 장 드 빌리에의 인솔하에 요새로 들어가려는 적을 저지하게 했다. 또한 세번째 부대는 요새 공격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8월 10일, 양군이 교전을 개시했다. 양측 선두에 선 기병대간의 교전은 초원에서 벌어졌는데,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끝났다. 반면 생트라유와 로드리고가 이끄는 2번째 프랑스 부대는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앞을 가로막은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온종일 뙤양볕에서 전신 갑옷을 입은 채 있었기에 심각한 열사병에 시달리다가 300명 이상이 쓰러져 사망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전투 전에 숲 속에서 푹 쉬웠기 때문에 상태가 좋았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적이 요새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진입해야 하는 보루에 올라가서 존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했지만, 프랑스군의 강력한 공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요새화된 숙영지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요새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보급품과 병력을 지원한 뒤 유유히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성벽 기슭에 여전히 진을 치고 버텼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며칠 후 폭풍이 강타하면서 마른 강의 수위가 1.50m 높이로 올라가 범람했고, 잉글랜드 숙영지가 물에 잠겼다. 그래도 잉글랜드군이 계속 버티자, 장 드 뒤누아와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분견대를 이끌고 수로를 통해 파리로 거슬러 올라가서 적의 보급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적이 파리로 향하는 걸 목격한 존은 이러다가 파리가 포위당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8월 20일에 포위를 풀고 철수했고, 라니쉬르마른 민병대가 이들을 추격해 많은 잉글랜드 병사를 사로잡고 수많은 보급물자를 탈취했다. 존은 파리 인근에서 라울 6세 드 고쿠르의 분견대와 마주쳐서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라울 6세는 이를 회피하고 철수했다.
존은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 900만 프랑에 달하는 군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큰 피해만 입은 채 대포와 식량을 전부 버리고 귀환해야 했다. 이후 일드프랑스의 시골 지역 다수가 프랑스군에 넘어갔고, 파리로 향하는 식량 운송은 더욱 방해받았다. 파리에서는 굶주림이 일상이 되었고, 전염병 마저 돌았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점차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고, 그중 많은 이가 샤를 7세에게 파리를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음모를 적발하는 대로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등 강경책을 동원해 어떻게든 민심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전세가 갈수록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2.8.6. 아라스 조약과 2차 파리 공방전[편집]
잔 다르크를 저버린 뒤,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를 회유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필리프는 아버지 용맹공 장이 살해된 사건의 배후자로 의심되는 샤를 7세를 개인적으로 혐오해 수년간 속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드퍼드 공작 존의 아내이자 자신의 누이인 안이 사망하면서 그와 맺었던 결혼 동맹이 끊어졌고, 베드퍼드 공작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하고 있으며, 노르망디, 일드프랑스 등지에서 반 잉글랜드 반란이 연이어 터지자, 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이어가봐야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협상에 진지하게 임했다.
1435년, 프랑스군은 일련의 공세를 개시해 파리 근교의 요새들을 공략하고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과 도로들을 모조리 봉쇄해 파리 시민들이 물자난에 시달리게 했다. 이에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측은 샤를 7세에게 협상을 제의해 승낙을 얻어냈다. 1435년 8월 5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부르고뉴 간의 평화 협상이 아라스에서 개최되었다. 잉글랜드 협상가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와 샤를 7세의 딸을 결혼시키고 영구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 정도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던 샤를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에 잉글랜드와의 협상은 중단되었고, 프랑스와 부르고뉴가 별도로 협상한 끝에 9월 21일 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필리프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한다. 그 대신,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바칠 의무를 면제받는다.
2. 샤를 7세는 필리프의 아버지 용맹공 장의 살인자를 처벌한다.
3. 부르고뉴 공국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프랑스에게 군대를 지원한다.
4. 프랑스는 부르고뉴가 오세르와 볼로뉴 지방, 솜과 페론 강변 도시, 퐁티외, 저지대 국가 등 주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용인한다.
5. 부르고뉴 공국은 톤네르 백국을 프랑스에 반환한다.
이리하여 부르고뉴가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게 하는 데 성공한 샤를 7세는 파리를 탈환할 준비에 착수했다. 때마침 잉글랜드와 프랑스 섭정이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이 병환을 이기지 못하고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기 1주일 전인 1435년 9월 14일에 사망했고, 섭정 직을 놓고 권력분쟁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노리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여지가 사라졌다. 샤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하고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파리를 공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436년 3월 말 5,000여 병력을 일으켜 파리로 진군한 리슈몽은 도중에 부르고뉴 지원군과 합세한 뒤 4월 6일 생드니에서 잉글랜드군 3,000명을 격파하여 생드니 요새를 공략하고 그들을 파리 성내로 밀어냈다. 4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고, 파리 시민들은 밀 가격이 4배로 뛰어오르는 심각한 물자난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주아인 미셸 드 랄리에, 장 드 라 퐁텐 등 4명의 시민이 찾아와서 협상을 요청하자, 샤를은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그동안 잉글랜드군에 협력해 자신과 맞선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4월 16일, 프랑스군은 우회로를 이용해 파리 동쪽 끝에 있는 샹자크 항구로 진입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레 알르와 노트르담에 도착했다. 로버트 윌러비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이들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지만, 주민들이 창문에서 원거리 무기나 돌멩이를 던지는 등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자신들을 공격하자 바스티유 생 앙투안 요새로 도피했다. 4월 17일, 요새가 완전히 포위되고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자, 잉글랜드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약속받고 요새를 떠나 루앙으로 철수했다. 그 후 샤를 7세는 1437년 11월 12일 파리에 입성하고, 난리를 피해 도망친 파리 시민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도시에 돌아오는 것을 허용했다. 이리하여 파리는 잔 다르크의 입성을 거부한 지 8년만에 프랑스의 수도로 돌아왔다.
2.8.7. 부르주 조례[편집]
1438년, 샤를 7세는 프랑스 교회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주교, 수도자 신학자들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공의회를 부르주의 생트 샤펠 대성당에서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7월 7일, 바젤 공의회에서 승인한 20개 법령을 일부 수정한 조례가 반포되었다. <부르주 조례>는 서문에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교황권을 남용하고 있다고 강력히 비난했고, 첫 번째 조항에서 교황청에 대한 공의회의 우월성을 선언하고 교황의 권한을 제한했으며, 지부와 수도원에 의한 주교와 대수도원장의 자유로운 선출이 허용되었다. 이는 교황청의 지명과 예비권을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국왕은 주교 및 수도원 선거에 대한 후보자를 지부에 '추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또한 부르주 조레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대한 항소를 제한할 수 있는 관할권을 왕에게 부여했으며, 추기경이 되기 위한 최소 연령을 설정하고, 교황이 특정한 세금을 프랑스 교회에 부과하는 것을 막았으며, 파문 및 성무금지령의 효력을 제한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샤를 7세는 바젤 공의회가 선출한 대립교황 펠릭스 5세 대신 에우제니오 4세를 교황으로 받들겠다고 선언했다. 에우제니오 4세는 특사 피에트로 델 몬테를 파견해 부르주 조례가 교황청에게 지나치게 불리하다며 시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프랑스 성직자들 전원이 부르주 조례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고 삼부회도 승인하면서 무산되었다. 학계에서는 이 사건이 프랑스 정부가 교회를 통제할 권한이 있다는 '갈리아주의'로 향하는 첫번째 단계로 간주한다.
2.8.8. 오를레앙 칙령과 프라그리 반란[편집]
1439년 10월, 샤를 7세는 오를레앙에서 삼부회를 개최했다. 그는 자유 용병대가 프랑스 각지를 약탈하면서 초래한 무질서를 종식하기 위해 전면적인 개혁을 이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오를레앙 삼부회는 논의 끝에 11월 2일 아래의 2가지 개혁안을 내놓았다.
1. 왕은 무장 부대를 조직할 수 있는 독점권을 보유하며, 앞으로는 자유 용병대가 금지된다. 오직 농민들만이 약탈자 무리를 파괴하기 위해 모여서 무장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2. 왕은 프랑스 왕국의 영구 군대 창설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영주세를 희생하면서 규모에 맞는 왕실세를 통합한다.
이후 샤를 7세는 군대에 규율을 확립하고 자유 용병대의 약탈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용병과 직업군인을 왕실군에 통합하고 귀족들의 군권을 제한했다. 이로 인해 사병대 유지가 어려워지고 왕실의 군사력이 매우 강해진 것에 위협을 느낀 대귀족들은 이를 막기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의 음모는 15세기 초 프라하에서 발발한 후스 전쟁을 암시하는 '프라그리(Praguerie)'로 일컬어진다. 음모에 참가한 인사들은 샤를 1세 드 부르봉,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 장 2세 달랑송, 장 드 뒤누아,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장 5세 드 브르타뉴, 그리고 부왕이 자신을 제대로 기용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느낀 도팽 루이였다.
1440년 2월, 프라그리 반란이 발발했다. 그들은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제압하고 도팽 루이를 권좌에 올리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샤를 7세가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앞세워 재빨리 반격에 착수했다. 병사들이 감히 왕에게 대적할 엄두를 못 내고 도주하자, 음모자들은 오베르뉴로 피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베르뉴의 지역 귀족들이 왕을 대항하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궁지에 몰린 그들은 7월에 화평을 맺자고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급했기에 받아들였고, 도팽 루이가 1440년 7월 17일 쿠세트에서 아버지와 화해한 뒤 7월 24일 음모자 전원이 왕에게 벌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사면받는 협약이 맺어지면서 종결되었다.
2.8.9. 퐁투아즈 공방전[편집]
1441년 5월, 프랑스군 5,000명이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샤를 7세는 프랑스군의 명목상 사령관을 맡았고, 실질적인 지휘는 리슈몽이 맡았다. 5월 8일 크레일 성채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장 뷔로의 중포 부대의 활약에 힘입어 2주 만에 성벽을 뚫었다. 크레일 사령관 윌리엄 페이토가 5월 24일 수비대를 이끌고 출격했으나 속절없이 패배하고 다음날 노르망디로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이제 프랑스군은 일드프랑스의 유일한 잉글랜드 거점이 된 퐁투아즈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의 경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파리의 물자 수송을 보장하려면 반드시 공략해야 했다.
6월 6일, 프랑스군이 퐁투아즈를 포위했다. 샤를은 모뷔송 수도원에 본부를 세웠고, 도팽 루이는 생마르랭 수도원에 자리잡았다. 장 뷔로의 포병대는 언덕에 자리를 잡은 뒤 퐁투아즈 성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의 근거지인 루앙에서 퐁투아즈로의 보급품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센강에 루비에 요새를 세웠다. 그러나 존 드 클린턴이 지휘하는 퐁투아즈 수비대와 시민들이 요새를 철저히 경비하고 무너지려는 성벽을 재빨리 수리하는 터라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6월 중순, 잉글랜드군 사령관 존 탈보트가 이끄는 구원군이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은 야밤을 틈타 루비에 요새 수비대의 감시를 뿌리치고 퐁투아즈에 보급품과 대포를 전달했다. 이후 탈보트는 6월 16일부터 9월 5일까지 다섯 차례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퐁투아즈 시의 상류 수문을 통해 군대와 식량을 전달했다. 그의 군대가 워낙 신속하게 이동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기에, 프랑스군은 이들을 제때에 저지하지 못했다. 이에 샤를 7세는 리슈몽에게 탈보트의 군대를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7월, 요크 공작 리처드 드 플랜태저넷이 이끄는 맨앳암즈 900명과 장궁병 2,700명이 아르플뢰르에 이르렀다. 그는 첩자들을 통해 적진을 살펴본 뒤, 도팽 루이가 맡고 있는 전방의 적 진영을 공격하기보다는 우아즈 강을 도하해 샤를 7세의 진영을 공격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작전을 개시했다. 샤를 7세는 적의 접근에 놀랐지만 즉시 요격하자는 부하들의 진언을 거부하고 푸아시로 물러났다. 탈보트가 철수하는 샤를 7세의 군대를 뒤쫓아가며 여러 차례 전투를 신청했지만, 샤를 7세는 끝까지 무시했다.
이후 요크 공작은 우아즈 강을 여러 번 건너서 파리에서 포위군의 공급을 방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프랑스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들을 무찌르러 출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일절 대응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8월 중순에 노르망디로 철수했다. 요크 공작이 물러나자, 샤를 7세는 재차 군대를 이끌고 퐁투아즈를 포위한 뒤 포격전을 재개했다. 탈보트는 프랑스군을 도발하고자 주변 농지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 흩어진 적병들을 습격할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퐁투아즈만 공격했다.
9월 15일, 피카르디 하급 귀족이었던 로베르 드 플로크스가 이끄는 소규모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의 국경도시인 에브뢰를 급습해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시선이 분산되었고, 퐁투아즈에 대한 지원은 갈수록 약해졌다. 9월 16일, 프랑스군 분견대가 성벽을 뚫고 진격해 요새화된 성당을 점령하고 잉글랜드 수비병 30명 중 24명을 사살했다. 9월 19일, 프랑스군이 총공격을 가했다. 퐁투아즈 성채는 수많은 중포의 공격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수비대가 사력을 다해 저항했기에, 포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최전선에 서서 부하들을 끊임없이 격려했고, 장병들은 그런 왕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이를 악물고 돌격했다.
결국 성벽이 돌파되었고, 프랑스군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적병 400~500명을 사살하고 수비대 사령관 존 드 클린턴을 포함한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탈보트는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일드프랑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병사들을 수습한 뒤 루앙으로 철수했다. 샤를 7세는 항복이 아닌 무력으로 점령된 퐁투아즈 시의 모든 재산을 압수했고, 몸값을 지불한 존 드 클린턴과 장교 대부분을 석방했지만, 돈을 지불하지 못한 이들을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이리하여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이 일소되었다.
2.8.10. 타르타 원정[편집]
샤를 7세가 일드프랑스 공략에 전념하고 있던 1440년 8월 2일,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가 지휘하는 맨앳암즈 300명과 장궁병 2,000명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에 상륙했다. 이들의 임무는 프랑스군의 압박으로부터 가스코뉴를 보호하고 샤를 7세를 따르는 프랑스 남서부 도시 및 마을들을 공략하고 약탈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타르타를 첫번째 목표로 삼았고, 가스코뉴 지방 의회는 타르타를 6개월간 포위하는 데 들어가는 군사 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여기에 토머스 램프스턴이 이끄는 100여 명의 맨앳암즈, 400여 명의 장궁병, 몇 개의 대포도 가세했다.
1440년 8월 31일, 헌딩턴 백작과 램프스턴은 타르타 포위에 착수했다. 알브레 공작 샤를 2세 달브레와 그의 조카인 로마뉴 백작 장은 타르타 인근 잉글랜드 영지, 특히 샬로세와 쿠두레스, 오디뇽, 생콜롬브, 에레스 등지를 약탈함으로써 적의 포위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포위를 굳건히 이어갔다. 하지만 타르타의 방비가 강건했기 때문에 함락이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잉글랜드로 소환되었다. 램프스턴은 타르타를 포위한 잉글랜드군 사령관이 되었지만, 가스코뉴 방면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은 정해지지 않았다.
어느덧 6개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자 초조함을 느낀 램프스턴은 샤를 2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마침 샤를 2세 역시 포위된 부하들로부터 성의 식량이 바닥나서 기아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심란해져 있었기에 협상에 응했다. 양자는 생세베르에서 협상을 시작했고, 1441년 1월 20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2세는 타르타 마을을 어린 아들인 샤를에게 넘기고,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하는 가스코뉴 인사들의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타르타는 친 잉글랜드파 가스코뉴 인사들과 알브레 가문의 공동 통치를 받는다.
평화 협약은 여기에 더해 한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양자는 3개월간 휴전을 맺고, 휴전 기한이 끝나는 날 프랑스와 잉글랜드 군주 또는 대리인이 타르타 마을의 소유권을 가리는 재판에 군대를 이끌고 참석해 승부를 보기로 했다. 만약 잉글랜드가 승리한다면, 알브레의 땅은 샤를 2세의 미성년 아들인 샤를에게 주어지고, 샤를 2세와 아들 샤를은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한다. 만약 이것을 거절한다면, 알브레 가문 영지는 몰수되어 랭커스터 왕조의 직할지로 흡수될 것이었다. 이 특이한 조항은 샤를 7세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사고 싶지 않았던 샤를 2세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잉글랜드 측은 이 조항을 넣더라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여겼다. 당시 샤를 7세는 일드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총력전을 벌이던 중이라 가스코뉴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가스코뉴의 조그마한 도시일 뿐인 타르타에 연연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설령 타르타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 해도, 샤를 7세의 본거지에서 수백 km에 달하는 먼 거리를 행군하는 동안 친 잉글랜드 영주들의 거센 저항과 잉글랜드군의 방어와 역습에 직면해야 하니, 신중한 샤를 7세가 그런 모험을 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상황은 잉글랜드가 예상한 것과는 딴판으로 흘러갔다. 1440년 말 헌딩턴 백작이 소환된 이래, 잉글랜드 내부의 정쟁이 갈수록 극심해져서 가스코뉴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고, 가스코뉴 당국은 잉글랜드의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에 '재판'에 투입할 병력을 동원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재판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442년 6월 24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는 사이, 퐁투아즈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모조리 몰아낸 샤를 7세는 타르타에 관심을 돌렸다. 조그마한 소도시인 타르타가 잉글랜드에 넘어가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프랑스 남서부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알브레 가문이 잉글랜드로 돌아서는 것은 큰 문제였다. 최악의 경우, 많은 귀족들이 알브레 가문을 뒤따라 잉글랜드에 귀순함으로써 프랑스 남부에 대한 발루아 왕조의 지배력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1442년 5월, 샤를 7세는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 포병대장 장 뷔로, 외 백작 샤를 다르투아 등을 대동한 12,000 가량의 대군을 이끌고 타르타로 출진했다. 6월 8일 툴루즈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6월 11일 그곳을 떠나면서 2개 부대로 나뉘어 리슈몽이 좌익을, 샤를 7세가 우익 부대를 맡았다. 리슈몽의 군대는 리슬과 그흐나드를 거쳐 잉글랜드군이 주둔한 생세베르를 우회하여 아두르강을 도하했고, 샤를 7세의 군대는 오슈, 비흐, 노가로, 르 호가를 통과했다. 여러 마을이 샤를 7세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샤를은 굳이 이 곳들을 정벌하다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주변의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의 규모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주둔지를 지키기만 했다.
1442년 6월 21일 몽드아르상에서 샤를 7세와 리슈몽의 군대가 합류했다. 샤를 7세는 6월 23일 푸아 백작이 소유한 메일한에서 휴식을 취한 뒤 재판 예정일인 6월 24일에 타르타에 도착했다. 잉글랜드군과 가스코뉴 동맹군은 타르타에 나타나지 않았고, 어린 샤를과 샤를의 스승을 맡던 카우나 영주와 오제로 드 생페르는 타르타 성문 열쇠를 리슈몽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타르타를 접수한 샤를 7세는 여세를 이어가 가스코뉴 방면 공세를 개시해 닥스, 콩돔, 마르망드, 생세베르 등지를 공략했다. 다만 가스코뉴의 핵심 도시인 보르도와 바욘 공략에는 실패했다. 프랑스군은 12월 8일 라 레울을 공략한 뒤 몽토방으로 철수하여 겨울을 보냈다. 1443년 봄 재차 가스코뉴 전역을 개시한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상당수 영토를 프랑스에 귀속시켰다. 가스코뉴의 친 잉글랜드파 정부는 잉글랜드에 구원을 호소했지만, 심각한 정쟁에 시달리던 잉글랜드는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2.8.11. 디에프 공방전[편집]
디에프는 노르망디의 주요 항구 도시로, 1420년 2월 헨리 5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항복한 뒤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다가 1435년 10월 28일 프랑스 하급 기사 샤를 데스마레가 이끄는 프랑스 분견대가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잉글랜드 수비대를 몰아내고 성채를 접수하면서 프랑스 왕국에 돌아왔다. 디에프는 영국해협간 해상 무역과 경비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잉글랜드군은 디에프 탈환을 여러 차례 게획했지만 어린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직을 놓고 전개된 심각한 정쟁으로 인해 9년이나 미뤄졌다. 그러던 1442년, 존 탈보트는 지난해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에브뢰를 기습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방향을 돌려 디에프로 향했다.
존 탈보트는 여러 성채에서 끌어모은 병력과 잉글랜드에서 파견된 베테랑 무장병들을 규합해 총 800명 가량의 군대를 이끌고 11월 2일 디에프를 포위했다. 이후 디에프의 지형을 살펴보다가 디에프의 교외 지역인 폴레트 언덕에 목조 요새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곳은 동쪽에서 디에프 시를 내려다볼 수 있고 썰물 때 디에프와 연결되기 때문에, 디에프 수비대와 시민들을 압박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탈보트는 플레트 언덕에 포대를 설치한 뒤 도시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특히 도시의 민간 건물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해, 시민들이 공포에 굴복해 수비대를 압박하여 항복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한달이 지나도록 포격을 퍼부었는데도 샤를 데스마레와 수비대는 굴복하지 않았고, 샤를 7세가 수비대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파견한 장 드 뒤누아의 프랑스군 300명이 11월 29일 디에프에 입성했다. 탈보트는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추가 병력과 탄약을 구하기로 하고, 윌리엄 페이토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잉글랜드군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권력 분쟁에 집착하는 권력자들은 탈보트의 간절한 설득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지원군은 끝내 파견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도시를 계속 포격했고, 썰물 때마다 디에프로 쳐들어가서 적 수비대와 교전했으나 격퇴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수비대 역시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기에, 공방전은 8월까지 이어졌다. 1442년 7월 24일, 도팽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 구원군 1,600명이 퐁트누아에서 출발해 디에프로 진군했다. 8월 10일 디에프 근교에 도착한 루이는 윌리엄 페이토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페이토는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방어하겠다"라고 답했다. 루이는 500~600명의 군인을 적 성채 앞 숙영지로 보내 봉쇄하게 했고, 성벽에 내걸 다리와 바퀴가 달린 공성탑 5~6개를 건설했다.
8월 14일 오전 8시, 프랑스군은 나팔 소리에 맞춰 잉글랜드 요새를 공격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을 상대로 분전했고, 프랑스군 100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프랑스군 장병들은 이를 악물고 공세를 이어갔고, 도시 수비대와 시민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서 성채를 향해 석궁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성채는 함락되었고, 300명이 전사하고 페이토를 비롯한 나머지는 체포되었다. 루이는 잉글랜드 포로 중 "프랑스어를 하는" 자들을 프랑스인인데 잉글랜드를 위해 싸운 반역자로 간주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잉글랜드군이 세웠던 요새는 루이의 명령으로 철거되었고, 대포는 디에프 무기고로 옮겨졌다. 페이토는 사로잡힌 뒤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445년 3,000에쿠스의 몸값을 지불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2.8.12. 투르 조약[편집]
프랑스 전선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유일한 잉글랜드군 장성이었던 존 탈보트의 디에프 공략 실패는 잉글랜드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여기에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역을 단행해 상당수 영토를 상실하자, 잉글랜드 당국은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샤를 7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샤를 7세 역시 거듭된 전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 군대를 재편성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1444년 5월 28일, 샤를 7세는 잉글랜드 외교 대사 윌리엄 드 라 폴과 협상한 끝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와 앙주의 르네의 딸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2년간의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투르 협약을 맺었다.
이때 투르 협약에는 노르망디 바로 남쪽에 있는 멘을 프랑스에 돌려준다는 비밀 협약이 있었다. 1446년 8월, 잉글랜드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프랑스와의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윌리엄 드 라 폴과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퍼트 등은 글로스터 공작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음모를 꾸몄다. 1447년 2월 18일, 글로스터 공작과 가신들이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후 서퍽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고호소에 연금되었던 그는 2월 23일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후 프랑스 측이 멘을 양도하는 걸 차일피일 미루는 것에 항의하며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앞세워 무력으로 멘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자, 윌리엄 드 라 폴은 곧바로 협상을 재개했다. 멘에 지분이 있었던 잉글랜드 지주들이 토지와 재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합의가 지연되었지만, 결국 1448년 3월 15일 잉글랜드인 지주들에게 10년치 지대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주는 조건으로 멘이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2.8.13. 노르망디 원정[편집]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샤를 7세는 전투력이 떨어지거나 충성심이 의심되는 병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무능한 장군들을 해임한 뒤 공적을 세운 하급 장교들을 승진시키고 신병들을 모집해 체계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1445년 프랑스 각지를 돌며 약탈을 일삼는 도적 용병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을 창설했다. 9,000명 가량의 무장병들이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여러 도시에 주둔한 채 영구적으로 유지되었고, 왕이 언제든지 무력을 행사하는 기반이 되어줬다. 무장병들을 맡은 도시들이 유지 비용을 대신 지불했기에, 왕은 이 군대를 유지할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할 필요가 없었다.
1448년, 샤를 7세는 프랑스 백성을 50가구씩 묶고 잘 장비되고 훈련이 잘 된 궁수를 각자 편성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대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이 무장병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대신 세금을 감면해줬다. 그 결과 8,000명 가량의 궁수병이 양성되면서, 잉글랜드군의 장기인 장궁병에 필적할 원거리 부대가 갖춰졌다. 여기에 기마병의 양과 질을 대폭 개선했고, 기술자들을 동원해 공방전에서만 사용하던 대포가 야전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재정비된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 공작 지기스문트의 도움 요청에 따라 도팽 루이의 지휘를 받으며 스위스 칸톤과 전쟁을 치르면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군대 개편을 완료한 샤를 7세는 휴전을 깰 명분을 모색했다. 그러던 1449년 3월 24일,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의 아라곤 용병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하자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샤를은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그 후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프랑수아 1세가 브르타뉴에서 노르망디로 동진했고, 장 드 뒤누아와 피에르 드 브레제가 일드프랑스에서 북상했으며,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이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피카르디에서 노르망디로 서진했다. 그들은 각각 코탕탱 반도, 하류 노르망디, 상류 노르망디로 진격해 강력한 대포를 활용하여 요새들을 빠른 속도로 공략했다. 당시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은 1444년 투르 조약 체결 후에도 심각한 정쟁에 휘말린 잉글랜드 정부로부터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거나 탈영하는 등 군기가 지극히 문란해졌기에, 프랑스군의 합동 공세에 제대로 당해내지 못했다.
급기야 1449년 11월 1일 노르망디의 수도 역할을 맡았던 루앙이 샤를 7세의 진두지휘에 힘입은 프랑스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1449년 12월 프랑스 포병대장 장 뷔로가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아르플뢰르를 공략했고, 1450년 1월엔 몽플뢰르가 함락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 전역이 발칵 뒤집혔고, 수많은 시민이 길거리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를 벌였다. 잉글랜드 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잃어버린 노르망디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토머스 키리엘에게 2,500명 가량의 병력을 맡겼다. 키리엘은 포츠머스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1450년 3월 노르망디로 출항하여 3월 15일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키리엘은 바이외에서 프랑스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비대를 강화하기 위해 행군하다가 프랑스군이 점령한 발로뉴를 포위했다. 이때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의 군대가 가세하면서, 그의 군대는 4,000명에 이르렀다. 4월 18일 발로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키리엘은 바이외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발로뉴를 공략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사이, 프랑스군이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클레르몽 백작 장 2세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코탕탱 반도로 이동해 카랑탄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2,000명은 쿠탕스에서 북상했다.
키리엘은 행군 도중에 적이 기다리고 있는 카랑탄을 지나는 대신 썰물 때만 접근할 수 있는 수 마일 길이의 둑길을 통해 바레 강 하구를 건넜다. 장 2세는 적의 이같은 행보를 확인했지만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리슈몽에게 적군의 이동에 대해 알리는 전갈을 보낸 뒤 멀리서 잉글랜드군을 추격했다. 4월 14일 밤 바이외에서 10마일 떨어진 포미니 마을에 숙영한 키리엘은 자신들을 추격하는 장 2세의 프랑스군을 이곳에서 격퇴하기로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그 후 1450년 4월 15일에 벌어진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4,000명이 전멸하고 토머스 키리엘과 헨리 노베리가 생포되었다. 반면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0~1,000명에 불과했다.
포미니 전투 소식은 노르망디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수많은 도시들이 잇따라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잉글랜드 정부는 패전 소식을 듣고 급히 존 파스톨프가 이끄는 3,000명의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잔여 병력은 서머셋 공작의 지휘하에 캉에 들어가서 농성했지만 6월 12일 샤를 7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군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그리고 1450년 8월 12일 노르망디 내 최후의 잉글랜드 거점인 셰르부르가 함락되면서,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완전히 상실했다.
2.8.14. 가스코뉴 원정과 백년전쟁의 종결[편집]
노르망디를 석권한 샤를 7세는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노르망디 총독으로 삼아서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게 했다. 이후 그의 시선은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 내에 소유한 최후의 영지인 가스코뉴로 향했다. 1450년 11월, 클레르몽 백작 장 2세와 장 드 뒤누아는 왕의 명령에 따라 생통주의 코냐크와 생메그랭을 점거했고, 팡티에브르(Penthièvre) 백작이자 리모주 자작인 자크 1세 드 샤반은 베르주라크(Bergerac)를 포위해 며칠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이들의 계획은 각자의 진로로 이동하여 가스코뉴의 수도 보르도 인근에 집결한 뒤 보르도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가스코뉴 전역의 친잉글랜드 영주들과 잉글랜드군은 보르도에 대거 집결했다. 당대 연대기들은 잉글랜드 출신의 보르도 시장 가디페르 쇼트호세가 이끄는 이들 잉글랜드 맨앳암즈, 가스코뉴 기사단, 가스코뉴 민병대의 규모가 7,000~10,000명이었다고 밝혔는데,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가스코뉴 당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동원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보르도에서 출발해 프랑스군을 상대하러 북상하던 중 블랑크포르(Blanquefort) 마을 인근에서 오발 영주 아마니외 달브레(Amanieu d'Albret)와 스코틀랜드 용병대장 로빈 페틸로우가 이끄는 프랑스 선봉대 3,000명과 조우했다.
이후 벌어진 블랑크포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1,500~1,800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2,600명이 생포되었고, 나머지는 보르도로 도주했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미미했다. 그 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 전역을 휩쓸었고, 1450년 겨울 보르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프랑스, 브르타뉴,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함대는 지롱드 어귀를 봉쇄해 잉글랜드군이 보르도에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을 차단했다. 보르도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캡탈 드 부흐(Captal de Buch)는 즉시 항복하라는 뒤누아의 요구에 1451년 6월 14일까지 잉글랜드에서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밝혔다. 그때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았지만, 그는 미련을 못 버리고 온갖 핑계를 대며 6월 30일까지 항복을 미뤘다. 그러나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2달 후 가스코뉴의 또다른 대도시였던 바욘 역시 항복하면서, 프랑스 왕국은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가스코뉴를 가져간 지 300여 년만에 가스코뉴를 재정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수백 년간 우호 관계를 맺었던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 주민들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호락호락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잉글랜드에 은밀히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고, 오랫동안 왕실에 막대한 세금을 안겨줬던 가스코뉴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던 잉글랜드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1452년 10월 17일 30여 년간 프랑스군과 전쟁을 치른 65세의 노장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이 가스코뉴에 상륙하자, 10월 23일 보르도 시민들이 봉기해 수비대를 몰아내고 탈보트를 환영했다.
탈보트는 가스코뉴 주민들의 열띤 호응에 힘입어 몇 주 동안 가스코뉴 서부 일대의 요새화된 마을들을 순조롭게 공략하고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냈다.여기에 도르도뉴 계곡으로 진출해 리부른과 카스티용을 공략함으로써 프랑스군이 보르도를 쳐들어올 때 이를 저지할 교두보를 확보했다. 1453년 4월 말, 탈보트의 넷째 아들인 리슬 자작 존 탈보트가 2,400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가스코뉴에 상륙해 아버지와 합세했다. 탈보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해 군자금을 마련했고, 가스코뉴 민병대를 징발하여 엄격한 훈련을 실시해 다가올 일전을 준비했다.
한편, 탈보트가 가스코뉴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그를 무찌르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샤를은 군대의 전반적인 지휘권을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에게 맡겼고, 포병대 지휘권을 장 뷔로에게, 기병대 지휘권을 팡티에브르 백작 자크 1세 드 샤반에게 맡겼다. 이 중 장 뷔로는 평민계급의 법률가였으나, 늦은 나이에 화약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프랑스 포병대의 개혁을 주도한 프랑스 최고의 포병전문가였다. 1453년 봄 공세를 시작한 프랑스군 15,000명은 보르도로 천천히 진군하면서 잉글랜드군이나 가스코뉴군이 점령한 요새를 하나둘씩 공략했다. 탈보트는 이에 맞서 도르도뉴 강의 지류인 이슬 강에 있는 프홍삭 요새를 빠르게 공략했지만, 곧 보르도로 철수했다. 그 해 초여름, 프랑스군은 가스코뉴의 메독에 진을 치고 보르도를 공략할 기회를 노렸다.
6월 21일, 탈보트는 프랑스 사령관들에게 마르티냐에서 한 판 붙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멀리 행군하느라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탈보트가 회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응하지 않았다. 탈보트는 일단 보르도로 돌아간 뒤 적이 자신보다 2배 이상 많은 상황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3개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을 보르도로 최대한 끌어들인 뒤 각개 격파하는 것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적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1453년 7월 초, 프랑스 중앙군이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작은 성벽 도시인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카스티용 주민들은 즉각 보르도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탈보트는 적이 보르도로 좀더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보르도 시민들이 조속히 카스티용을 구원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그는 보르도와 카스티용 시민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했지만, 그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보르도 당국 조차 그가 프랑스인을 두려워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탈보트는 그들의 뜻에 따라 카스티용을 구원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453년 7월 17일에 벌어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또다시 완패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잉글랜드군 4,000명이 전사했고 나머지는 보르도 시로 도주했으며, 프랑스군 사상자는 1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과장이 있겠지만 잉글랜드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데 비해 프랑스군의 손실은 미미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총사령관 존 탈보트 역시 아들인 리슬 자작 존 탈보트와 함께 전사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보르도 시를 포위했고, 3,000명의 잉글랜드인과 가스코뉴인 수비대는 3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10월 19일 무조건 항복했다.
샤를 7세는 자신의 권위에 대항한 보르도 시에 100,000금 크라운의 벌금을 부과했으며, 잉글랜드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추방했고,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를 이끈 장 뷔로를 보르도의 종신 시장이자 몽그라스의 영주로 임명했다. 한편 잉글랜드는 장미 전쟁에 휘말리면서 프랑스에 공세를 가할 여력이 더이상 없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상실했고,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프랑스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마지막 유럽 대륙 영토로 남은 칼레는 그 후로도 약 100년 정도인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으면서 잉글랜드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 기능했고, 왕실 재정 수입의 35%를 담당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잉글랜드의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했다가 패배해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잉글랜드는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에 개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8.15. 오를레앙의 처녀의 명예회복[편집]
잔 다르크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의 부당한 죽음을 교황청과 프랑스 가톨릭 교회에 호소하며 재심을 요청하자 그에 동의하여 1456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10] 을 교황청이 열게 했고, 25년 전 있었던 그녀에 대한 이단 판결을 공식적으로 취소시켜 잔의 마녀와 이단자라는 오명을 벗게 만들어주었으며 피에르 코숑 또한 이단자로 선언하고 주교 자리에서 파문시켜 추방했다. 물론 잔 다르크의 복권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마녀나 이단자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다는 오명도 씻을 필요가 있었고, 잔 다르크 사후 25년이나 지나 잔 다르크 화형에 관여한 핵심 인사들 상당수가 죽었으니 복권에 대한 부담감도 덜했을 것이다.[11]
2.8.16. 말년[편집]
샤를 7세의 말년은 1440년 프라그리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아버지를 밀어내려 했던 도팽 루이와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1446년, 도팽 루이는 단검을 들고 아버지의 애첩인 아녜스 소렐을 해치려 했지만 실패했고, 아녜스는 가까스로 왕의 거처로 도망쳤다. 샤를 7세는 이 일로 크게 분노해 도팽 루이를 궁정에서 쫓아냈다. 그 후 도팽 루이는 도피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알프스 산맥 양쪽에 광대한 영지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사보이아 공작 루도비코와 동맹을 맺고, 루도비코의 딸 카를로타와 결혼했다.
1456년, 샤를 7세는 아들 루이가 도피네에서 자신을 향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앙투안 드 샤반과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에게 아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그르노블로 진격해, 루이가 그곳에서 도망쳐서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보호를 받도록 강요했다. 일설에 따르면, 아들이 부르고뉴 공국으로 도주했다는 소식을 접한 샤를 7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르고뉴 출신의 사촌이 집에 여우 한 마리를 사육했군. 그 여우는 언젠가 그의 닭을 잡아먹겠지."
그 후 백년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샤를 7세는 1458년 다리에 생긴 궤양이 심해지면서 열병에 시달렸다. 그는 부르고뉴에 망명 생활 중이던 아들 루이를 불러들였지만, 루이는 함정일 거라 의심하고 거부했다. 일설에 따르면, 루이는 점성술사를 불러 아버지가 죽을 정확한 날짜와 시각을 예언하게 했다고 한다. 1461년 7월경, 병들고 지친 왕은 자신이 아들에게 충성하는 반역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가 입에 농양이 생기더니 너무 커져서 생애 마지막 주 동안 음식이나 물을 삼킬 수 없었다. 결국 1461년 7월 22일 므욍쉬르예브르에서 병사했다. 향년 58세. 사후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때까지 부르고뉴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루이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파리로 돌아와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로 등극했다.
3. 가족[편집]
- 앙주의 마리(1404 ~ 1463):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아라곤의 욜란다의 딸.
- 루이 11세(1423 ~ 1483): 프랑스 국왕.
- 라드공드(1425/1428 ~ 1445): 요절
- 카트린(1428 ~ 1446):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부인.
- 자크(1432 ~ 1437): 요절.
- 욜랑드(1434 ~ 1478):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9세의 부인.
- 잔(1435 ~ 1482): 부르봉 공작 장 2세 드 부르봉의 부인.
- 필리프(1436.2.4 ~ 1436.6.11): 요절.
- 마르그리트(1437 ~ 1438): 요절.
- 잔(1438 ~ 1446): 마리와 쌍둥이. 요절.
- 마리(1438 ~ 1439): 잔과 쌍둥이. 요절.
- 이자벨(1441): 요절.
- 마들렌(1443 ~ 1495): 비아나 공 가스통 드 푸아의 부인. 푸아 백작이자 나바라 왕국의 국왕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와 푸아 여백작이자 나바라 여왕 카탈리나 1세의 어머니.
- 샤를(1446 ~ 1472): 베리 공작, 노르망디 공작. 루이 11세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한 뒤 형과 화해하고 아키텐 공작이 되었다.
- 아녜스 소렐(1422 ~ 1450): 샤를 7세의 정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공식 정부.
- 마리(1444 ~ 1473): 타이르부르 백작 올리비에 드 코에티비의 부인.
- 샤를로트(1446 ~ 1477): 몰레브리에 백작 자크 드 브레제의 부인. 1477년 6월 1일 루브르 성에서 피에르 드 라베르뉴와 간통하다가 남편에게 살해되었다. 자크 드 브레제는 샤를로트를 살해한 뒤 파리 의회에 소환되어 100,000리브르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1477년부터 1481년까지 투옥되었고, 영지는 몰수되어 장남 루이 드 브레제에게 넘어갔다.[12] 루이 11세 사후 유죄 판결이 억울하다며 항소했고, 1486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사면되었다.
- 잔: 이름만 전해진다.
- 앙투아네트 드 마젤레(1434 ~ 1474): 1450년 아녜스 소렐이 급사한 후 16세의 나이에 왕실 침실 관리인을 맡던 빌르키에 남작 앙드레와 결혼했지만 실제로는 샤를 7세의 정부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는 부르고뉴에 망명 중이던 도팽 루이에게 샤를 7세에 대한 정보를 은밀히 보냈다고 한다. 1461년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정부가 되었다. 루이 11세는 그녀가 프랑수아 2세의 정보를 자기에게 넘기기를 바랐고, 그녀 역시 이에 따랐지만, 나중에는 프랑수아 2세에게 진심으로 빠져들어 프랑스에 대항하는 브르타뉴군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보석을 팔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이 11세는 프랑스에 있는 그녀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4. 평가[편집]
위인전에는 대개 운좋게 잔 다르크를 얻어 위기에서 벗어나자, 그녀를 질투해 발목만 잡다가 토사구팽해버린 배은망덕한 왕으로 적혀있지만 결코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잔 다르크 덕만 보지도 않았다. 샤를 7세는 아주 유능한 정치가로,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백년전쟁을 종식시키고, 하나의 프랑스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사실 잔 다르크의 경우도 필요성이 있을 때까지는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샤를은 딱히 잔 다르크만 배신한 것이 아니라 평생 수많은 신하들을 이용해먹다가 나중에는 토사구팽했으니 정적으로 여겼다고 할 순 있어도 질투하거나 차별했다고 할 순 없다.[13] 잔 다르크와 방향성의 차이는 있었으나 어쨌든 샤를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판을 짰고,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완승을 이끌어냈다. 물론 이 모든게 잔 다르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잔 다르크의 위업 역시 샤를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백년전쟁의 승리는 샤를과 잔 두 사람이 함께 거둔 업적이지 누구 한 명이 일방적으로 업혀간 게 아니다.
백년전쟁의 승리로 얻은 권위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이고 조세를 확보할 수 있는 정책을 펴서 프랑스의 봉건시대를 사실상 끝내게 만들고 근대로 나아가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계산적인 행보로 부하들을 이용하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나중에는 매몰차게 버렸기에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끊이지 않아서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평가는 낮다.[14]
외침으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갔으나 신하들의 분전으로 극복해냈고, 그 신하들을 견제했다는 점, 유능한 정치가지만 지독하게 의심이 많아 아무도 믿지 않으며 신하들을 토사구팽했다는 점, 후계자인 왕세자와 관계가 좋지못해 항상 견제하며 갈등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선조와 자주 비교되는 군주.
잔 다르크가 유명해서 샤를 7세는 그냥 무능한 왕, 배은망덕한 왕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인물들이 재평가되고 이것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시대에 들어서면서, 잔 다르크 역시 결점이나 실수를 했음이 알려지고, 동시의 샤를 7세의 업적이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실 이전부터 전문가들은 샤를 7세를 무능한 왕이 아니라 교활하고 날카로운 정치가, 위기를 겪고 패배할 뻔 했지만 운과 기회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써먹은 계산적인 인물로 보고 있었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서 일반인들에게도 퍼진 것. 그는 4대에 걸쳐서 선대 왕들이 해내고자 했지만 실패한 일을 자기 대에 이루어 프랑스를 강하게 만들었고, 로마시대 이후 프랑스 왕 최초로 상비군을 만들어 이를 굳히는 데 성공했으며, 왕권을 강화했다. 즉 샤를 7세는 유럽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들 중 하나였다.
5. 기타[편집]
샤를 7세의 치세는 조선의 세종 ~ 세조의 재위기간과 겹친다.
생전 영조처럼 선왕의 소생이 아니라는 루머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버지 샤를 6세의 초상화만 봐도 샤를 7세와 붕어빵처럼 닮아서(창백한 피부와 길쭉한 코) 어디까지나 반대파의 악선전일뿐이다.
프랑스 국왕 중 처음으로 공식적인 정부를 두었다.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었던 서양에서는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삼아 첩이나 후궁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왕이 왕비 이외에 다른 여성을 애인으로 두기는 했지만 원론적으로 그런 행위는 부정한 불륜이자 죄악으로 여겨져 터부시됐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공공연한 사실이라 해도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애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아녜스 소렐이란 여성을 애인으로 삼고 궁에 두어 보란 듯이 총애를 퍼부었으며, 소렐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얻었다.[15]
6. 대중 매체[편집]
냉혹하지만 유능한 정치가였고 인간적으로도 복잡한 인물이었음에도 대중 매체에선 잔 다르크를 일방적으로 배신한 것때문에 소인배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일본 라이트노벨 및 애니메이션인 율리시스: 잔 다르크와 연금의 기사에서 샤를로트란 캐릭터로 TS당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의 잔 다르크 캠페인에선 프랑스의 왕세자의 칭호였던 도팽으로 언급된다. 이후 중반후에 잔느가 랑스를 점령하면서 대관식을 올려 왕위에 즉위한다. 이후 파리 공성전에서 지원 병력을 보내준다면서 시민군과 정찰기병 달랑 1명만 보내는 짓을 한다. 이후 결정판 DLC로 추가된 부르고뉴쪽 캠페인에서 부르고뉴에게 붙잡힌 잔을 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의 백년 전쟁 캠페인에선 역시 잔 다르크가 붙잡혔을 때 돕지 않는다. 잔 다르크가 죽은 후 20년간 프랑스군을 개혁하여 새로운 정예부대와 대포를 이용해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백년 전쟁을 끝낸다.
Fate/Apocrypha에선 룰러로 참전한 잔 다르크가 셰익스피어의 보구인 '퍼스트 폴리오'를 통해 재현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카리스마 능력에 대해 "너는 허무맹랑한 계시를 믿게 할 수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그러지 않았냐. 날 설득할 수 있었는데 안 했으니 네가 날 배신한 거다" 라고 적반하장으로 개소리를 하는 배은망덕하고 찌질한 개쓰레기로 묘사된다(...)[16] . 그리고 Fate/Grand Order에서는 당연하게도 업보를 받아서 1장에서 잔 다르크 얼터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특이점으로 변하기 전의 세계에서 죄를 쌓기 전의 유령 상태로 지내다 칼데아의 서번트가 된 잔느 얼터가 자신의 막간에서 이전에 자신이 지은 죄를 청산하고 이들이 죄를 쌓아 악령이 되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샤를 7세들을 포함한 유령들을 퇴치한다.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에서는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 The Legend of Jeanne d'Arc의 등장 인물인 라핀의 마법소녀 스토리에서도 라핀이 직접 "피가 이어진 형제" 라며 샤를 7세의 존재를 언급한다. 라핀을 포함한 자매 들과 샤를 7세의 어머니가 타루토 마기카에서 어떤 인물들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세계관의 샤를 7세 역시 흔히 알려진 인식대로 어머니랑 자매들과 똑같은 악질 개쓰레기 빌런(...)이었다는 사실이 인증된 셈이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시작 시점 1444년에 능력치 4/2/4의 평범한 왕으로 등장.
대체역사소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는 부르고뉴에 가담한 주인공과 잔 다르크에 의해 오를레앙이 함락당하고 포로로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