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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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제7대 국왕
샤를 8세
Charles VIII

이름
샤를 드 발루아
(Charles de Valois)
출생
1470년 6월 30일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성
사망
1498년 4월 7일 (향년 27세)
프랑스 왕국 앙부아즈 성
재위
프랑스 왕국의 국왕
1483년 8월 30일 ~ 1498년 4월 7일
배우자
브르타뉴 여공작 안 (1491년 결혼)
자녀
샤를 오를랑
아버지
루이 11세
어머니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형제
안, 잔
서명
파일:샤를 8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제7대 왕이자 루이 11세의 아들이다. <킹덤 오브 헤븐>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발리앙 디블랭의 먼 후손이기도 하다.[1]


2. 생애[편집]


유년기에는 부왕과 멀리 떨어져서 앙부아즈 성에 있었고, 즉위할 때 13세의 어린 나이라서 큰누나인 안 드 프랑스가 국정을 대신 다스렸다. 다만 이 섭정기간이 마냥 평화롭진 못했는데 왕실 일원이 섭정을 맡게 되자 중앙집권화를 우려한 프랑스 대귀족들이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2]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3] 이 반란은 1485년부터 1488년까지 3년간 이어졌는데 이 내전을 광기 전쟁이라고 한다. 광기 전쟁 종전 후 4년 뒤인 149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이 생겨 2년 후인 1494년에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을 개시했으며, 피렌체를 점령했다.

그후 샤를 8세는 25,000명의 군대를[4] 이끌고 나폴리 왕국으로 향했다. 나폴리 외곽의 몽 산 조반니 요새는 수백년 동안 수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던 요새였다. 프랑스군은 성벽에서 90m 되는 거리에 대포를 설치한 후 45kg의 포탄을 쏘아댔다. 8시간 동안 포탄은 쉼 없이 성벽을 두들겼고, 성벽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샤를 8세는 나폴리에 무혈로 입성했으며, 스스로 나폴리 왕위에 즉위했다(1495. 2).

이런 프랑스의 공세에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 등이 힘을 모아 반 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샤를 8세는 격파하려 했으나 동맹군이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함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이탈리아 반도를 모두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단념하게 되었다.[5] 그리고 본의 아니게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면서 그의 군대가 매독을 프랑스로 전파시켰다. 왜냐하면 이때 프랑스 군대가 나폴리를 점령했을 때, 프랑스 병사들이 나폴리의 사창가에 들러서 매춘부들과 방탕하게 놀아나는 바람에 매춘부들이 갖고 있었던 매독이 병사들한테 옮았고, 그 매독에 감염된 병사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프랑스 여자들과 성관계를 벌일 때 매독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1498년 왕비 안 드 브르타뉴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요절했고, 본인마저 상속자없이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은 사인이 상당히 어이없는데 고향인 앙부아즈에서 테니스 경기를 보러가다가 문의 상인방[6]에 머리를 부딪힌 것이었다. 처음엔 멀쩡했으나 두세 시간 뒤 현기증을 호소하다가 쓰러졌는데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뇌졸중이 원인으로 보인다. 시신은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지만 심장만은 부모님이 안장되어 있는 클레리 노트르담 성당에 묻혔다.

왕위는 샤를 8세의 고조부 샤를 5세의 아들 루이 드 발루아의 손자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2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이는 《살리카법》에 의한 것으로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자였던 샤를 8세의 누나 잔 드 프랑스의 남편이 바로 루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루이 12세는 즉위 후 잔과 이혼하고[7] 매형 샤를 8세의 왕비였던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해서 두 딸 클로드와 르네를 낳았다.

발루아 왕조의 직계는 이렇게 샤를 8세에서 끊겼고, 이후에는 방계 왕조라 봐도 무방하다. 재미있게도 같은 왕조 내인 샤를 8세와 루이 12세의 아버지대 촌수관계가 카페 왕조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와 발루아 왕조의 초대 왕인 필리프 6세의 촌수관계보다 더 멀다. 샤를 4세와 필리프 6세는 사촌지간이었지만 샤를 8세와 루이 12세는 칠촌지간이었다. 즉, 전자에 비하면 거의 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3. 여담[편집]


  • 밀덕이었다고 한다.[8] 각종 병기들을 모아서 그걸 지켜보는 게 취미였다고. 일설에는 잔 다르크의 갑옷도 수집했다고도 한다. 단순한 밀덕일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능력도 뛰어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휘도 했으며 열세인 병력으로 우세한 적군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 루이 3세도 샤를 10세와 마찬가지로 상인방에 이마를 박고 낙마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 동로마 제국 제위의 마지막 합법적 계승자였던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서 헐값에 로마 황제 직위를 사들였지만, 이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후 안드레아스는 샤를 8세의 라이벌인 아라곤 왕국페르난도 2세카스티야 연합 왕국이사벨 1세에게 또 다시 팔았는데[9] 그 후 금방 사망했기 때문에 돈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뒤 명목상으로 남아있는 로마 제위는 흐지부지 소멸하게 된다. 결국 거지에게 적선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 실제로도 학자들은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이후 작위를 산 스페인에 대한 프랑스의 항의도 없었다는 걸 보고 샤를 8세가 작위를 산 건 동정심에 말미암은 적선의 일환이었다고 보고 있다.
  •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원역사대로 1494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건 동일하나 원역사에선 밀라노 대공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설득으로 원정을 시작한 것이라면 소설상에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설득으로 나폴리 왕위를 찬탈자 루도비코 스포르차[10]에게서 되찾겠다고 선언하고 원정을 나선다. 그러나 호기롭게 나선 원정에서 헝가리의 흑군에게 군대가 발려버리고 후퇴하나 끝내 포로로 잡히며 그나마 몇번의 승리를 거뒀던 원역사보다 더 비참한 꼴이 되고 만다. 이후 이탈리아에 대해 관심을 접고 신대륙과 부르고뉴, 저지대 쪽에 집중하며 주인공과 협력 관계가 되며 원역사보다 꽤 오래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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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조모 안 드 뤼지냥이 키프로스 왕국 출신이다.[2] 훗날 샤를 8세가 승하하고 나서 루이 12세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왕좌에 오른다.[3] 특히 루이 2세는 샤를 8세를 납치하려고 하다가 안에게 적발되어 지엉에 감금되었다 탈출하는 등의 소란이 있었다.[4] 이들 중 8,000명은 스위스 용병이었다.[5] 사실 샤를 8세는 포르노보 전투에서 1만의 병력으로 2배나 되는 동맹군 2만을 격파하는 대승을 겨두었지만 그가 전쟁에 워낙 돈을 많이 쓰는 바람에 국가 부채가 많이 증가하여 재정난이 심각해졌다. 그래서 샤를 8세는 약탈로 메우려했지만 그래도 모자랐으며 이 약탈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를 크게 샀다. 게다가 장기간의 원정과 보급의 문제로 보급을 제대로 못하여 식량까지 부족해지자 더는 전쟁을 할수가 없었다.[6] 문의 위쪽 틀을 이루는 기둥.[7] 이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잔이 불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이 12세와 잔이 결혼한 이유도 루이 11세가 잔이 불임인 것을 알고 왕위 계승전에서 본인의 가문에게 조금 껄끄러웠던 루이 12세 가문의 후계를 끊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8] 미드 <더 보르지아>에서는 샤를 8세가 지휘하는 프랑스 군대가 대포에 쇠사슬을 넣고 발사하자, 그 쇠사슬탄을 맞은 이탈리아 병사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장면이 등장한다.[9] 샤를 8세 입장에선 뒤통수 맞은 것과 다름 없었지만 이때 샤를 8세는 이미 사망한 뒤였고 이후 프랑스에서도 딱히 이를 가지고 스페인에 항의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다.[10] 소설상에서는 주인공과의 정치 싸움에서 패해 바리 공작이 되어 바리로 향했고 거기서 오스만의 오트란토 침공 때 공을 세워 지방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뒤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와 내전을 벌여 승리해 나폴리 왕이 된 상태다. 당연히 주인공과는 화해는 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