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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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강대학교 이름의 유래
2. 결코 작지 않은 캠퍼스
2.1. 서강고등학교
2.2. 건축학도들의 성지, 서강대 본관
3. 한국 대학의 현실
4. 장영희 교수 이야기
5. 감정가 9,999,999,999원
6. 배구부의 전설
7. 여러가지 물적, 금전적 지원 루머
8. 총장 관련 이야깃거리
9. Excuse me, can you speak Korean?
10. 2012년도 서강대 축제 관련 논란
10.1. 이후의 축제들
11. 라이벌?
12. 외국인 학생들
13. 서강대 라면
14. 캠퍼스 내 동물 친구들
14.1. X관 고양이
14.2. 서강대 황제, 킹 레오
14.3. 로욜라 토끼
15. 서강 성탄 구유
16. 가톨릭대학교와의 통합 떡밥
17. 헤어초크 광장
18. 길이니까 잔디를 심지 마시오
19. 인지도에 관한 진실



1. 서강대학교 이름의 유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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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길로련 신부님께서 완강히 ‘서강’을 고집하셨다. 학교 이름을 지을 때는 그 학교 주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였다.

"옥스퍼드란 ‘[牛] 우리’를 뜻하는 겁니다. 오늘날 옥스퍼드 대학교는 전 세계적으로 학구적인 명망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
1960년 1월, 모교 이름이 ‘장안(長安) 대학교’로 잠정적으로 결정돼 대외적으로 쓰이고 있던 당시의 일이다. 학교 이름이 너무 평범하다는 지적에 학교 이름을 새로 정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장안(長安), 광화(光化), 성지(聖志), 성지(誠志), 명덕(明德), 명도(明道), 상지(上智), 진단(震旦), 진성(珍聖), 대건(大建), 명진(明珍), 경서(京西), 한성(漢城) 등 여러 후보 가운데 ‘서강(西江)’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당시 학교 이름을 정하는 데 관여했던 이들은 이해남 교수를 비롯한 예비 교직원들과 길로련, 게페르트, 김태관, 헙스트, 프라이스 신부 및 신학생 도일 등이었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은 ‘한강의 서쪽 줄기’라는 뜻을 가진 ‘서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강’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면, 그 시절 학교 근처에서 팔던 지독한 새우젓 냄새가 연상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로련 신부님께서 완강히 ‘서강’을 고집하셨다. 학교 이름을 지을 때는 그 학교 주변의 명칭을 따서 짓는 게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였다. “옥스퍼드 대학을 보세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옥스퍼드란 ‘소 우리’를 뜻하는 겁니다. 오늘날 옥스퍼드는 전 세계적으로 학구적인 명망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한참 동안 계속된 학교 명칭에 대한 토론은 ‘서강’으로 결론났다. 새우젓 냄새도 날려버린 ‘서강’이었다. (출처: 370호 서강옛집 '김인자 명예교수가 이우진(60 사학) 동문에게 들려준 이야기')


2. 결코 작지 않은 캠퍼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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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서 보이지 않는 캠퍼스 후문 쪽 사진엔 없지만 무려 야구도 할 수 있는 잔디구장도있다

'건국대학교 일감호에 서강대학교가 빠지고, 그 넘친 물에 한국외국어대학교가 잠긴다' 이런 말도 안되는 루머를 실제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어림도 없는 말이다. 건국대 일감호의 서류상 면적은 55,661㎡인데 반해 서강대의 면적은 무려 192,175㎡에 달한다. 서류상 면적에 따르면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가 182,730㎡,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가 82,291㎡, 광운대학교 62,913㎡, 세종대학교 111,676㎡, 명지대학교 55,792㎡, 숭실대학교 125,654㎡, 상명대학교 152,207㎡ 그리고 숙명여자대학교 65,009㎡ 등등 서강대학교 캠퍼스 크기와 비교하기도 우스운 인서울 대학들이 많다.

또한 서울에 있는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보다 크다. 서강대 캠퍼스 면적에 노고산까지 포함시키고 성균관대도 국가 소유의 각종 문화재와 뒤에 산 및 잡다한 것 모두 포함했을 시 서강대 면적은 192,175㎡, 성균관대 면적은 155,412㎡, 서강대 면적에서 노고산을 빼고 성균관대도 각종 문화재와 산을 모두 뺐을 시[1] 서강대는 154,698㎡, 성균관대는 겨우 80,973㎡로 서강대-성균관대 차이가 2배 정도로 확 벌어진다. 성균관대 인사캠 재학자가 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1인당 면적은 훨씬 큰 셈이다.

그렇다면 왜 서강대학교는 작은 캠퍼스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일까? 주변에 위치한 신촌의 두 거대한 대학(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덕분에 상대적으로 작은 캠퍼스가 부각된 것일 수도 있고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 때문일 수도 있다. 왜 그런진 아무도 모른다 그 외 서강대를 정문에서만 바라볼 경우 본관 뒤 넓은 부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수도 있다. 또는 타 대학보다 적은 정원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2.1. 서강고등학교[편집]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은 캠퍼스 면적보다는 빡센 서강대학교/학사 제도와 함께 구 리치관(구R관)이 한 몫을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정하상관 자리에는 2010년까지 구 리치관(구R관, 자연대)이 있었는데, 그 외양이 흡사 고등학교 건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학사제도를 대표하는 독후감 제도와 무관하지 않은데, 교내외를 통틀어 구R관을 가장 잘 볼 수 있었던 곳이 X관이다. 갓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와서 처음 듣는 수업에서 갑자기 독후감을 쓰라고 하는 통에, 마침 창밖에 보이는 건물이 고등학교 건물같이 생겼다면 그걸 보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학교 밖에서 구R관을 본 경우를 생각한다면, 길 건너 숭문고등학교와 비교되어 그 옆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2.2. 건축학도들의 성지, 서강대 본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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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철 지난 1960년대 풍경처럼 보이지만, 두 건축가가 한국 현대 건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보나 두 건물 자체의 조형적 완성도로 보나 그리 간단하게 평가할 대상은 아니다. 최근 대학교 건물에 Office Building 양식이 유행하면서 Campus조형 환경이 점점 산업주의에 물들어 삭막해져 가는데, 이곳 서강대학교 본관과 예수회 교수회관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Modernism의 기하주의와 회화주의의 정수를 보여준다." -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임석재


서강대학교 정문에 입성하면 보이는 아담한 본관 건물을 보며 "아니, 왜 J관이나 GN관은 삐까뻔쩍한데, 저 건물은 뭐하는 건물이길래 저렇게 낡아 보일까?" 하는 생각을 재학생이라면 한번쯤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서강대학교 본관은 대한민국 현대 건축을 이끌었던 김중업의 작품으로, 김중업의 초기작 중 작품성 측면에서 손꼽히는 그야말로 작품이다. 보존 상태가 원형에 가까워서, 건물 안팎의 외관이라든지 인테리어를 하나라도 바꾸려면 건축계의 반발이 세다. 그만큼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건물이고 건축관련 교양 서적에 등장하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국가문화재는 아니나,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당시엔 최고급 최신식 건물로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자부심이 대단한 건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화장실은 국내 대학 중 최초이자 유일한 수세식 화장실이고, 다른 대학에서는 엄두도 못내던 난방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본관에 들어가보면,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특이한 점을 여럿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관 바로 옆에 위치한 예수회 사제관도,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을 설계한 시대가 낳은 건축가라 불리는 이희태의 작품이다.
서강대학교 본관 투어 1
서강대학교 본관 투어 2
서양건축 1대 유학파 김중업, 서울 곳곳 숨은 작품


3. 한국 대학의 현실[편집]



혹여 '한국 대학의 현실'이라는 동영상을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해당 동영상은 연기자를 고용한 실험이며, 실험 내용인즉, '한국 대학에서 교수한테 적극적으로 질문을 하면 교수와 주위 학생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이다.

실험 학생의 질문에 다른 학생이 딱히 흥미를 보이지 않는 건 예상해볼 법 하지만,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심각했다. 실험 학생이 질문을 할 때마다 심각할 정도로 눈쌀을 찌푸리고 비웃는 학생들이 자못 보이며, 주위 학생들도 어처구니없어 하며 적잖이 눈치를 주는 모습이다. 또한 질문을 받는 교수마저도 마지못해[2] 대답을 해주지만, 번거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실험이 끝나고 다른 학생들에게 계속 질문을 한 그 남학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자, '나대는 느낌'이었다(?!)'라는 충격적 발언까지 한 것.

이 동영상은 이미 조회수가 8만 회에 가까우며, 동영상 속 내용을 본 사람들은 질문하는 학생을 비웃고 눈치주는 해당 학교 학생과 교수의 처참한 수준에 격노, 신랄하게 비판하는 댓글이 줄을 잇는 상태다. 혹자는 '소위 지잡대라서 저러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겠지만 이 실험이 진행된 학교는 바로 서강대학교였다.(서강대학교, '바다의 이해' 강의) 뒤늦게 서강대학교라는 걸 안 사람들은 경악을 하고 있는 상태다. 서강대학교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는 것.

다만 이는 주의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당시 실험이 진행될 때 수업을 같이 들었던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수님은 바다에 자주 가시나요?" 정도 수준의 질문이 이미 십수번 나왔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원하는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수업의 진행을 극도로 방해한 것이 된다. 게다가 영상에서 질문자에게 심하게 눈치를 주어 가루가 되게 까인 학생은 학점교류로 온 타학교생임이 뒤늦게 밝혀지는 등 방송 후 아직까지 말은 많지만 무엇 하나 확실히 드러난 게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이제 와서 확인이 불가능한 만큼 진실은 저 너머에...


4. 장영희 교수 이야기[편집]


파일:external/news.unn.net/200951515336.jpg
서강대학교 내에서 치러진 장 교수의 장례식

"당연히 입학 시험을 볼 수 있죠!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


장영희 마리아 교수는 대한민국의 수필가이자, 번역가, 영문학자이다. 1975년에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에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85년에 '19세기 미국 작가들의 개념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자아여행(Journeys between Real and the Ideal)'이라는 논문으로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장영희 교수는 어릴 때 병을 앓아 장애인이 되었다. 어렵사리 고등학교까지 마쳤지만, 장애인에게 대학입학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차별 탓에 공부할 대학교가 없었다. 아버지인 장왕록 서울대학교 교수가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교에 딸의 입학시험 여부를 문의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서강대학교의 영문과장이던 미국인 브루닉 신부에게도 딸이 시험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했다. 다른 대학의 반응과는 달리 브루닉 신부는 이런 말로 입학시험을 보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당연히 입학시험을 볼 수 있죠!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

나는 서강대 교수이며, 서강대 교수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께서 알아주셨으면 한다.
사실 나는 그냥 서강대 교수가 아니라 뼛속까지 "서강인"이다.
서강대 학부를 졸업했고 석사 학위도 서강에서 받았으며
지난 10여년 동안 서강에서 젊고 반짝이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인생의 반 가까이를 서강에서 보낸 셈이다.
과거의 어떤 추억을 되돌아보든지, 그 무대는 언제나 서강이다.
노고산, 로욜라 도서관, 알바트로스 탑, 그리고 그밖의 정겨운 건물들.
물론 캠퍼스보다는 서강이라는 이름의 그 의미가 내 삶을 뒷받침해준 것이겠지만 말이다.
서강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 이 칼럼을 쓰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고,
어쩌면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가톨릭 신자로 유아 세례를 받았지만, 종교적인 이유에서 서강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서강대학교는 가톨릭 예수회 재단의 학교이다.)
사실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원시적이고 비문명화된" 70년대 한국에서, 서강대학교는
신체 장애가 있는 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했던 유일한 대학이었다.
학창시절의 내게 있어 상급 학교 진학이라는 것은 인생의 고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의 진학도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야했을 때에는
고등교육을 향한 모든 문이 굳게 닫혀있다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운 좋게도─아니, 아이러니컬하게도─나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고,
실력으로만 보자면 원하는 학교를 마음대로 골라서 갈 수 있는 입장이었으나
그 어떤 학교도 신체 장애인 학생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대학에 원서를 낼지 결정도 하기 전에,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나의 아버지는
각 대학을 돌아다니며 입학처장을 만나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모두 정중한 거절만이 되돌아왔다.
심지어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였던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마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자네 딸을 당장이라도 받아주고 싶네만, 다른 교수들이 찬성하지 않을 거야."
몇 군데 다른 대학을 찾아가 똑같은 대답을 들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서강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영문학과 과장이셨던 브루닉 신부님께 똑같은 부탁을 드렸고,
신부님은 아버지의 말에 그 큰 눈을 경악으로 둥그렇게 뜨고는,
"뭐라구요? 당연히 입학 시험을 볼 수 있죠!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봅니까?"
하고 되물으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 때 상황을 회고하시며
신부님이 마치 아버지를 정신나간 바보 아니냐는 듯 반문하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신나간 바보라도 너무 행복하셨다고...
이렇게 나는 서강과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었지만,
그래도 나의 대학시절은 좋은 사람들─특히 스승님들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로 가득하다.
그 때는 영문과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에도 많은 미국인 신부님들이 교수로 계셨었다.
브루닉 신부님은 처음부터 서강을 내게 집처럼 포근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분이다.
신부님의 전공이 어느 분야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희곡 쪽이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서 영어 연극을 공연하는데에도 열심이셨지만,
강의실에서의 신부님은 그야말로 "연극적"이셨다.
한번은 영문학 시간에 프랜시스 톰슨의 <천국의 사냥개>에 대해 강의하시다가
"나는 밤낮으로 그를 쫓는다/ 나는 시간의 복도를 따라 그를 쫓는다"하고 낭송하시며
온 강의실을 사냥개 흉내를 내며 킁킁거리고 돌아다니시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내 마음 속 미로와도 같은 길을 따라 눈물의 안개 속에서도"
나를 쫓아다니며 보살펴주는 사냥개의 모습이다.
불그스름한 얼굴에 언제나 밝은 미소를 띤 신부님은 학생들에게 인사할 때도 "연극적"이셨다.
연극 <라 만차의 사나이>에서 돈키호테 역을 맡았던 남학생을 부르실 때면
느닷없이 허공으로 창을 던지는 제스처를 쓰기도 하셨다.
브루닉 신부님은 나를 세례명인 마리아로 부르셨는데,
나를 보시면 두 팔을 벌리며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하고
당시 유행하던 패티 김의 노래를 부르시곤 했다.
신부님은 당시 우리말을 배우고 계셨지만 환갑에 가까운 나이라 많이 힘들어 하셨다.
한번은 강의하시다 말고 "한국어에는 도저히 발음이 불가능한 단어가 2개 있다"고 하셨다.
교통순경과 욕심꾸러기.
그리고는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나 당신이 생각하시는 욕심꾸러기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셨다.
부와 권력을 탐하는 욕심꾸러기는 나쁘지만
배움과 사랑과 꿈을 탐하는 욕심꾸러기는 좋은 욕심꾸러기라는 것이었다.
브루닉 신부님은 온화하고 다정하신 분이었지만,
나는 딱 한번 신부님이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 해에 체육이 전교생 교양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었는데
(하반신 장애인인 나는 체육 수업에 참여할 수가 없었으므로)
담당 체육 교수님은 내가 한 시간도 빠짐없이 수업을 참관해야만 학점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체육관은 언덕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야 하는 캠퍼스 외곽에 있어서
사실 나에게는 체육관까지 가는 것이 "체육"을 넘어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들었다.
게다가 비가 오기라도 하면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마침내 교수님께서는 비오는 날에는 체육관에 오지 않아도 결석으로 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해 여름은 장마가 일찍 시작한데다 1달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가 왔다.
나는 3번 수업 참관을 빠졌는데 그 때문에 FA를 받았다.
(FA는 출결불량 F로 서강에 아직도 존재하는 학점제도이다.)
FA 학생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나는 충격을 받아 멍해졌다.
성적표에 F학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신부님은 너무 화가 나서, 앉아 있던 의자에서 튀어오르다시피 하셨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How could he…" 만 연발하셨다.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신부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어쨋든 신부님은 나중에 개인적으로 나의 체육 교수님을 만나 말씀을 나누셨고,
교수님은 내게 F 대신 D를 주셔서 결국 무사히 마무리가 지어졌지만,
나는 아직도 신부님 눈에 고여 있던 그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5. 감정가 9,999,999,999원[편집]


파일:external/www.cha.go.kr/1613778.jpg
문화재청 보물 제745-1호

TV쇼 진품명품 597회 방송분을 통해 서강대가 소장한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月印釋譜)>가 공개된 적이 있다. 당시 손병두 총장이 직접 가지고 나간 자리에서 감정가는 무려 9,999,999,999원으로 책정되었으며 전광판이 표시할 수 있었던 최고 금액이었다. 감정단은 “정말 소중한 우리 자산이기에 가격을 책정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해서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 대장경으로, 조선 전기 훈민정음 연구와 불교학 및 문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다. 15장 30쪽으로 이루어진 <훈민정음 언해본>은 여러 판본이 현존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서강대가 소장하고 있는 <월인석보> 첫머리에 실려 있다. 조선 전기의 임금이 2대에 걸쳐 편찬·간행한 <월인석보>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월인석보> 이외에도 서강대는 1,6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아루페관(동문회관) 6층에 자리한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출처


6. 배구부의 전설[편집]


파일:attachment/soganglegend.jpg

한국 학원 스포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그러나 학교 수뇌부에 의해 안타깝게 쓰러진 전설

서강대에 정식 운동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서강대 출신 중에서도 배구부 존재를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하지만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강에는 정식 운동부로서 배구부가 있었다. 돌연 해체되면서 전설로만 남아버렸지만, 당시 서강대 배구부는 전국대회 우승까지 차지했을 정도로 우수했다.

3-4대 총장이었던 스킬링스태드 신부는, 재학생들의 애교심과 자부심을 고취하고 서강인의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구부 창단을 결심했다. 감독에는 이근삼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코치에 이용관 前 국가대표를 임명했다. 창단 당시 일부 학생들은 서강대에 운동부가 창단됨으로써 기존 대학 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병폐가 서강대에도 전염돼 서강대의 학문 전통에 누를 끼칠까 우려하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거액을 들여 선수를 스카우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들은 교칙에 의한 예외 조항을 제외하고는 일반 학생들과 똑같은 학사규정을 지켜야 했다. 덕분에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대학원에 재학 중인 선배들로부터 공부 지도를 받아야 하고, FA를 걱정하거나 독후감을 쓰느라 낑낑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서강배구부 출신인 박주점(경영학과) 現 KOVO 경기감독관[3]은 "당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고 회상하며 "팀을 운영하고 선수들은 지도하면서 그 당시 경영학을 공부한 덕을 보고 있다. 모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오늘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발편이 됐다"고 덧붙이기도 했었다.오오 완전체 근데 사실 도로공사 감독 시절 성과를 낸 게 별로 없었다는게 함정.

학업과 운동 모든 면에 충실할 것을 강요받은 서강 배구부는 창단 첫해부터 좋은 성적을 올렸다. 제36회 전국 종별 배구선수권 대회 대학부 3위 수상을 시작으로, 1983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8회 전국남녀종별 배구연맹전에서 다시 3위를 차지했다. 서울대 배구부와의 친선경기는 학생들의 열띤 성원 속에서 치러졌고, 해를 거듭할수록 선수들의 기량은 향상되어갔다.

마침내 배구부는 창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올렸다. 1983년 12월 16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 11회 체육부장관기쟁탈 전국대학배구선수권대회에서 4전 전승으로 우승한 것이다. 지적 활동과 스포츠 활동을 조화시켜 대학스포츠의 새로운 풍토를 조성한다는 취지 아래 창단된 서강대 배구부의 우승은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값진 성과였다.

그러나 서강대 배구부의 전설은 어이없게 사라지고 말았다. 기량이 향상되어 여러 대회에서 입상하자 점차 배구부원들은 "우리도 다른 학교처럼 좀 예외로 쳐주면 안되겠습니까?"라고 요구[4] 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해 학교 측에서는 "그래, 그런 소리 할 거면 아예 사라져라"라고 하며 없애버린 것이다.

위와 같이 간단히 해체된 것은, 당시 외국인 신부들의 학내 입지가 약화되면서 그 지원 아래 운영되던 배구부의 입지도 약해졌기 때문이다. 일부 선수들은 다른 대학으로 이적하고[5], 나머지 선수들은 너무나도 어이없고 안타깝게 배구선수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학생으로 남았다. 억울하다 하느님 성령예수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우리의 억울함을 알아주세요 [6]# 지금의 후문 쪽 국제학사 자리가 이전에는 생활관이었고, 그 이전에는 배구부 숙소였다.

어쨌든 서강대의 자랑이자 대학 운동부의 특이 케이스였던 서강대 배구부는, 공부와 운동 모두에 능한 운동부가 있었다는 전설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7. 여러가지 물적, 금전적 지원 루머[편집]


박정희 대통령이 딸 박근혜가 서강대에 입학하자, 서강대 이사장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라는 제안에 직원 통근 버스만 요구한 일도 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신촌을 달라고 했으면 주려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면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신촌 지역 지도[7]를 꺼내며 대흥동과 창천동을 아우르는 동그라미 친 자리에 캠퍼스 부지를 주겠다고 했고, 이사장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때 총장이 지나치게 긴장하여 손을 떨다 펜을 떨어트려 생긴 점[8]만큼이 서강대의 부지가 되었다는 농담도 있다.[9]

그 외에, 정문 앞 도로가 비포장도로였는데 박근혜 대통령 졸업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군부대를 동원하여 3일 만에 도로를 포장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또 다른 '카더라'도 있는데, 원래 알아보던 대학은 숭실대학교였다고 한다. 그런데 숭실대에서 거부하고 서강대에서 받아주자, 서강대에는 서울시장과 군부대가 직접 나서서 도로포장을 해 주고 동시에 숭실대는 학교 부지 한가운데로 도로[10]를 뚫어버렸다는 '카더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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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에게 받은 통근 버스는 실제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툭하면 시위대와 데모대의 표적이 되었기에 애물단지 취급을 받아 치워두었다가, 결국 폐기 처분되었다. 안습.

소문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준 차가 1대 더 있었다. 번호판 떼고 학내에서 작업용 및 화물 운반용으로 관리실이 쓰는 소형 코란도가 1대 있었는데, 그 차가 박정희 대통령이 준 차라는 소문이 있었다. 해당 차량은 2000년대 초에도 돌아다녔으나 지금은 운용되지 않는 듯 하다가, 2013년에도 목격담이 이어지고 있다. 어쨋든 쌍용 마크가 붙은 코란도라는 자동차 모델이 생산되기 시작한 연도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코란도가 실제 생산된 시기를 언급하며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돌아다니던 차량은 쌍용마크가 붙은 코란도였다. 쌍용에게 인수된 후에 생산된 차량이라는 거다. 상식적으로 그 시절 생산된 차량을 곱게 사용한 것도 아니고 작업용으로 굴렸는데, 2000년대까지 버틸 리가 없다.

그 외에도 롯데에서 학교가 위치한 곳이 교통면에서 호텔자리로 최고의 입지라고, 강남의 땅 10만평을 주고 새로 학교를 세워준다고 했던 적이 있다. 물론 거절. 결국 롯데는 가까운 위치인 공덕에 롯데시티호텔마포를 오픈하고야 만다.

또한, 옛날에 삼성그룹에서 서강대학교에게 여러 번 러브콜을 보냈지만 '우리 학교는 주님의 학교다'[11]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병원(+의대 건물)을 지어주겠다는 제안도 '서강의료원' 이라는 이름으로 짓지 않을 거면 관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역시 파워거절. 그 당시에는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이, 그 때는 삼성그룹이 지금처럼 잘 나가던 기업도 아니었고, 신부님들의 신앙적 신념이 워낙 강하니까 그렇다는 진실 혹은 거짓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2000년대에는 삼성의 지원을 받긴 해서, 삼성 가브리엘관이란 이름의 건물이 지어졌다. 정문으로 들어 오면, 왼쪽에 크게 보인다.

2011년도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서강대학교를 후원하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고 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현대자동차그룹은 삼성이 성균관대 기존의 재단을 대체한 것과 달리 예수회 재단을 대체하지 않고, 예수회 재단을 통해 서강대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현대차그룹이 가진 사업과 서강대 공대를 연계하는 등의 막강한 지원을 해주려 하였으나, 재단에서 '우리 예수회는 그런 재벌의 돈을 사용하지 않는다' 며 거절했다카더라. 이 썰을 수업시간에 들은 학생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고.


8. 총장 관련 이야깃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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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총장이 모두 예수회 신부였으나, 21세기에 들어서서 평신도 교수도 총장이 될 수 있도록 바뀌었다. 손병두[12] 총장이 최초의 비성직자 출신 총장이다. 다만 일단은 가톨릭 신자여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역대 총장 중 자칭 하느님의 안기부장 박홍 루카 신부가 유명. '대한민국에 주사파가 5만명 있다'… [13]


9. Excuse me, can you speak Korean?[편집]


이미 인터넷에서는 전설이 된, 1999년에 있었던 영어회화 시험 에피소드가 있다.

1999년 X월X일
서강대학교 XX관 1층의 영어회화 강의실.

중간고사 대신 상황설정에 따른 영어실력으로 점수를 준다고 했다.


교수: 다음… 김군하고 최군… 앞으로.
너희들은 미국에서의 있을 법한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의 실력을 발휘하도록.


아직 앞서 하던 몇몇 학생들이 버벅거리며 비지땀 흘릴 때,
자꾸 화장실 가고 싶던 최군과 김군. 중간고사 성적 직결인데…


교수: 김군은 한국에서 미국에 관광차 찾아간 한국인,
그리고 최군은 미국에 사는 현지인…
자, 시작해 볼까. 제한시간은 3분…


최군과 김군의 등은 이미 무너진 제방이었고, 머릿속에선 현기증마저 느낄때
김군이 재치를 발휘했다.


김군 (한국인 관광객): Excuse me, can you speak Korean?

최군 (미국 현지인): Yes, I can.

김군 : 한국 분이시군요, 반가워요. 자유의 여신상 가려면 어떡해요?

최군: 네, 저기서 녹색버스 타구 4정거장 가서 내리세요.

김군: 감사합니다.

최군 : 타국에서 모국인에게 그정도는 해야죠. 안녕히 가세요.

교수: '있을 법한 상황'이므로 인정한다.


교실은 뒤집어졌고, 교수님은 이를 패러디할 경우 F에 처한다는 저작권보호성 경고까지 했다.

그후 가칭, 최군과 김군은 A와 A+를 받았다는데,
성적이 다른 이유는 현지인의 한국어 실력이 이민자치고는 너무 능숙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군도 김군이지만 교수님의 대인배적인 센스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네이버 웹툰 스쿨홀릭에서 상황만 중학교 영어 수행평가로 바꾸어 나온 적이 있다.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단, 이 학생은 대화 소재를 잘못 잡아 김군과는 달리 A+을 받지는 못했다...


10. 2012년도 서강대 축제 관련 논란[편집]


그전까지 서강대 축제라인업의 기조는 적은 수 출연진이지만, 확실한 한방과 무대 장악력이 있는 출연진을 섭외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타 대학에 비해 축제 예산이 반도 안 되는 실정에서 축제 호응도가 낮은 서강대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저비용으로 양질의 무대를 제공하기 위한 자구책이였던 것이다. 2007년부터 축제 라인업의 메인 게스트를 보면, 싸이[14], DJ DOC, 웃찾사팀, 애프터스쿨, UV+노브레인이었는데, 웃찾사팀이라는 쌩뚱맞은(?) 섭외를 했던 해를 제외하고는 나름 당대 최고의 공연팀을 섭외했고, 학생들의 호응도 괜찮았다.[15]

그러나 2012년도 서강대 축제는, 학생들이 어우러져 노는 장으로서 축제가 작용하지 못했다(좀 더 직설적으로는 '축제가 재미없다')는 기존의 학생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는 평.

먼저 행사 진행 과정에서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버너 2개를 이용해 하나의 큰 판 위에서 요리하는 실책으로 인해 부탄가스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10여 명의 새내기들이 얼굴 등에 화상을 입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사실 화기 관련 교육은 이전에 부재했던 것으로, 사고가 터지면서야 문제로 부각되어 결과적으로 축제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을 불렀다.

한편 축제 당시 초대가수 라인업이 전부 한국 인디밴드들이었는데[16], 다른 유명 대학교가 유명 가수, 아이돌을 모시려고 하는 것에 비하면 판이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인디팬들 입장에서 보면 밤섬해적단 등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이에서 유명한 밴드들이 많았지만, 비인디팬인 일반 학생 입장에서 보면 "아이고 저기 연세대학교소녀시대, 고려대학교원더걸스도 부르고 하는데 우리 대학교만 어디 듣도보도 못한 인디밴드들을 불러오나"라는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밴드 중 상당수는 사회활동도 겸하고 있는 인디밴드들로, 정치 성향이 한쪽에 치우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여기에 더해 이 인디밴드 섭외과정에서 총학 쪽의 강행이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서강대 사이트는 물론 음악을 다루는 커뮤니티에서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동아리 연합회와도 마찰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아리 공연과 인디밴드 공연을 함께, 2곳에서 나눠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축제의 인기가 낮은 서강대학교 입장에서는 그만큼 부담을 져야 했다.

그러나 이런 인디밴드의 섭외 시도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도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시사in기사 다만 대학 축제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축제'에 대한 모색은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인터넷 상에서는 정치성 논란으로 축제에 대한 시각이 어지러워지고, 오프라인에서는 어차피 축제에 관심이 적었는데 장소도 둘로 나뉜데다 인디밴드 팬층을 제외하고는 결과적으로 관심을 많이 주지 않는 장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런데 유명 연예인 섭외를 하지 않음으로써 축제 예산이 1/3이 되는 기적을 행했고(…) 애초에 연예인 불러도 서강대생들은 안 오잖아 인디밴드들이 실질적으로 축제 현장에서 정치 선동을 한 것도 아니기에 운동권인 총학에 반발하는 학우들이 지나치게 꼬투리를 잡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디밴드의 정치적 성향까지 모두 안배해 우파 30%, 좌파 30%, 중도 40% 식으로 성향별 동률 섭외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자세한 경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수정바람

축제 마지막 날 학교 주변에 밤 늦게까지 울려펴지던, 97년대 전후의 아이돌 노래가 그렇게나 학우들의 향수를 자극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번에 '0'자가 안들어가는 학생들은 이게 무슨 노래인가 했다고…

이때 42대 총학생회 <와락>은 25대 동아리연합회와 마찰을 빚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축제 때 동아리 공연이 거의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이 축제는 인디밴드의 길거리 공연이 컨셉이었으므로, 동아리 공연에 필수적인 무대 설치를 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대를 짓는 것 자체만으로도 크게 예산을 잡아먹는데다가 총학생회가 길거리 공연을 컨셉으로 잡은 만큼, 한곳에 시선이 쏠리면 인디밴드는 그야말로 찬밥이 되므로, 이로 인해 두 단체가 갈등을 빚었다.

결국 총학생회와 동아리연합회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축제를 각각 따로따로(날짜도 다르게) 여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동아리연합회의 축제 예산은 동아리연합회 자체 예산과 학창시절 동아리에 애정이 많으신 교수님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했다.

결과적으로 동아리연합회의 축제가 더 인기가 좋았다.[17] 게다가 이 때 총학생회는 축제 예산을 저렴하게 했는데, 그 남은 돈을 어디다가 썼는지 출처를 밝히라며 큰 비난 여론이 일기도 했다.[18] 42대 총학생회는 1년 내내 비판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총 비판의 절반 이상을 이 당시 받게 되었고 그나마 있던 지지기반조차 싸그리 무너지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10.1. 이후의 축제들[편집]


2013년 열린 축제에서는 NS윤지가 오후 3시의 이른 시각에 찾아와서 직접 그녀를 영접하지 못한 학우들의 한탄이 쏟아졌다. 메인 게스트로는 아메바컬쳐 소속의 랩퍼들이 공연을 펼쳤으나, 수장인 다이나믹 듀오는 더 큰 페이를 부른 지방대로 가 버렸고… 어쨌든 2012년의 제대로 망한 축제 때문이었는지, 2013년 공연은 학생들의 만족도가 꽤 높았다고 한다.


서강TV에서 촬영한 NS윤지 공연


서강TV에서 촬영한 슈프림팀 공연

2015년에는 산이, 걸스데이, 울랄라세션, 원더걸스의 라인업을 보여주었는데, 산이와 걸스데이는 소위 "먹튀"였다고 불릴 정도로 핵노잼의 정석을 보여줬지만, 울랄라세션이 왔을 때는 거의 락페급의 호응을 보여줘 울랄라세션이 거의 10곡을 부르고 갔다.


11. 라이벌?[편집]


서강대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SOFEX (서강 - 죠치 스포츠교류전)을 통해 일본죠치대학과의 정기전을 진행하고 있다. 죠치대 역시 서강대처럼 예수회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가톨릭 미션스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성원은, 죠치대를 라이벌이라기보다는 '물 건너 친구들'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연고전과는 다른, '자매대학 사이의 교류'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강대생들은 타 학교와의 비교 자체에 아무 관심을 두지 않는다. 풍토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12. 외국인 학생들[편집]



상당히 많은 재외국민과 북한이탈주민이 재학하고 있다. 또한 서강대 부설 한국어 교육원이 외국인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다 보니, 여기를 졸업한 후 곧바로 유입되는 외국인 학생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한국어 교육원은 여타 교육원들이 그렇듯 면접 정도만 보면 입학이 가능하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이 한국어 습득이 상대적으로 쉬운 일본인이나 몽골인 학생들이 주류. 그러다 보니 한국어로 능숙하게 대화하는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더니 중국인이거나 일본인인 경우도 잦다.


13. 서강대 라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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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 초콜릿, 연세대우유, 고려대이 있다면 서강대에는 라면이 있다. 2015년에 대차게 단종. 자세한 사항은 알통통 스마트면 항목을 참조.


14. 캠퍼스 내 동물 친구들[편집]



14.1. X관 고양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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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욜라 도서관 앞 한복판에 드러누운 취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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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배우의 역변

서강대 길냥이의 시초 되시겠다.

엑스묘(猫), 저스틴, 엑뚱이, X냥이, 로욜라 냥이, 로냥이, 고얌이 등등의 애칭으로 불리던 서강대학교의 상주 생물. 사실 상주하는 동물로 무섬이라는 거대토끼도 있지만, 인지도는 X관 고양이가 독보적. 대략 2006년부터 새끼의 모습으로 학교에 출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이는 2012년 기준으로 6살 전후로 추정되었다. 수놈이었지만, 중성화수술을 거쳤기 때문에 남자 구실은 할 수 없었다.

짬타이거스러운 포스를 풀풀 풍기며 교정을 활보하는 것이 일상으로, 귀찮을 때는 그늘 한켠에 식빵자세를 취하며 시크하게 그윽한 눈빛만 보내지만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특히 여학생들이 가까이 올 때 배를 보이며 애교를 부렸다. 덕분에 다른 도둑고양이들과는 달리 많은 학생들에게 먹이를 수급받을 수 있었다.

고양이 외에도 교정을 거니는 고양이는 많지만, 대개 사람이 오면 도망가고 사람들을 피해 노고산을 끼고 다니는 반면에, 이 녀석은 대로 한복판을 제 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게다가 사람이 엄청나게 지나다니는 로욜라 도서관 앞에서 배를 내고 훌러덩 드러눕는 잉여로움의 극치를 보여준 덕에 팬 층(?)을 형성할 수 있었다.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사료를 깔아놓고 집을 마련해주고 하는 여러 노력도 있었고, 페이스북 계정도 만들어졌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양이도 저리 이쁨 받고 사는 데 내 팔자는 뭐냐'는 비아냥도 있었을 정도.

2011년 들어 X관 공사로 거처를 로욜라 도서관 앞으로 옮겼다. 그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여름 방학 동안 로욜라 도서관 앞도 공사가 진행되면서 정처 없이 방황했다가 볼라벤이 지나간 이후 사라져 버렸는데, 현재까지 소식이 없다.

서강대 출신인 듯한 인턴 기자가기사를 내기도 하고, 고양이의 행방불명을 알리는 정식 기사도 나왔지만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근처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확정적인 듯. 학교 어디에서 고양이를 봤다는 간헐적인 소식이 있으나 비슷한 줄무늬를 가진 다른 도둑고양이를 착각했다는 의견이 다수의 것이다(X관 고양이처럼 피둥피둥 살찌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사람 가까이에 오려 하질 않는다).

X냥이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지만, X냥이는 06년도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중성화가 되어 있었으니…

이외에 '노랑이'라고 불리는 고양이 가족이 있었으나 2011년에 잠깐 보이다가 2012년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때 X관 고양이와 싸워서 X관 근처를 잠시 점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행방을 알 길이 없다.

2015년, 교내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이 늘면서, 서강고양이모임이라는 동아리형 애묘가 모임이 생겼다. 교내 고양이들의 먹이와 건강과 집을 챙기고 있다.


14.2. 서강대 황제, 킹 레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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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의 황제 킹 레오님의 용안이다. 2013년 가을 출생(11세). 정복활동 및 인간 교화운동은 2014년 가을부터 시작한 듯. 서강대 커뮤니티 서담이나 페북 커뮤니티 Sogang Univ.에서 킹갓엠퍼러레오로 추앙받고,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오늘도 서강대학교/캠퍼스에서 팬미팅을 벌이고 있다. 냥봉꾼이라 불리며, 교내에만도 그의 아내가 3~4마리 있고, 학교 바깥에도 그의 처자식들이 있을 거라고 추정된다. 남학우들보다는 여학우들에게 더욱 친절하다. 이 때문에 서담에서 여자한테만 잘해준다고 비난 받기도 한다. 서강대에서 제일 인기 많은 남성

레오라는 이름이 붙게 된 계기는, 예전에 한 학생이 레오몬을 닮았다고 해서 '레오야' 하고 부르다가 점점 퍼졌다는 설이 제일 유력하다. 어찌나 인기가 좋았는지 페이스북 팬페이지가 개설되었다. 마스킹 테이프 등 굿즈까지 제작되었고, 2018년 가을 서강문화제에서는 레오 에코백을 판매하는 부스가 운영되기도 했다.

언론보도도 탔다. 서강 길고양이 대선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기사가 났고, 서강대 안팎의 고양이들을 자세히 다룬 르포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8년 7월 초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다. 상기한 서강고양이모임에서는 레오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모아 2019년 10월 초에 로욜라 도서관에서 '레오대왕실록'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14.3. 로욜라 토끼[편집]


일명 로토라 불리는 로욜라 토끼는 로욜라 도서관 1관 입구 앞 엠뚜와 로욜라 동산을 주 활동영역으로 삼고 있는 토끼들이다. 로욜라 앞을 지나갈 때나 학식을 먹으러 엠마오관에 들어갈 때, 삼삼오오 모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인간 무리가 있다면, 필히 거기에 로토가 있을 것이니 잔디를 뜯어 먹이로 건네주자. 로토는 그대가 건네준 풀쪼가리를 씹으며 시크한 무관심으로 답해줄 것이다.

로토는 어디서 왔을까? 흔히 노고산에서 학교로 내려와 길들여진 야생 토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근거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소문이다. 로토는 서강대 구성원들이 풀어놓은 집토끼이다! 사람이 가까이 와도 도망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

로토에 대한 큰 오해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천년만년 불로장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몇 마리의 로토들이 자연사하거나, 천적인 노고산의 족제비의 먹이가 되어[19] 유명을 달리했으니... 그러니 귀여운 로토를 보면 꼭 사진을 찍어두자. 언제 토끼별로 돌아갈지 모르니까 말이다.


15. 서강 성탄 구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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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이 되면 서서히 지어져서 겨울시기에 정문 앞에 등장하는 서강 성탄 구유. 밤에 보면 조명 덕분에 엄청 예뻐 보인다. 다른 성탄절 기념 조명 장식들과 어우러져 서강대 성탄절 풍경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성탄 구유란 오늘날 전세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때 예수 탄생 장면을 각 문화권의 특유 풍습과 민속 의상을 동원하여 갖가지 모양의 구유를 꾸미는 것을 말한다. 아기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성 요셉, 동방박사, , , 등으로 꾸며진다. 성탄 무렵이면 모든 성당가톨릭 관련 기관에서 반드시 성탄 구유를 아름답게 꾸며 놓는다. 가톨릭 미션스쿨인 만큼 서강대학교에도 성탄 구유가 있는 것!

성탄구유는 그 재료와 방법 또한 다양하며, 오늘날에는 성탄 구유를 위한 조각이 하나의 예술로까지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매년 구유의 모양 뿐만 아니라 속의 배경이 달라진다. 위 사진의 경우 세월호가 연상되는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다.


2015년 구유 제작 영상


16. 가톨릭대학교와의 통합 떡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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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 가톨릭대 통합을 염원하는 서담 유저의 합성 로고

서강 사랑방 커뮤니티 시절에도 그리고 2017년 현재 커뮤니티 서담에서도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가톨릭대와의 통합 떡밥. 두 학교 모두 가톨릭 미션스쿨이지만, 가톨릭대천주교 서울대교구학교법인 가톨릭학원에서 운영하고 있고, 서강대수도회예수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대와의 협정이나 공동연구 같은 성과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루머로 실현 가능성은 현재 그리 높지 않다. 가톨릭대 의대서강대학교가 학생교류와 상호 학점 인정 등은 물론 공동학위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고 공동연구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재단의 문제로 통합은 힘들거라는 예상이 많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1993년 즈음에 서강대와 가톨릭대는 통합이 성사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1994년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던 성심여자대학교를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서울대교구에 기증하고 가톨릭대로의 통합을 갑작스럽게 선언하면서, 서강대-가톨릭대 통합이 물건너가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가톨릭대는 서강대와 통합을 추진하려 했으나, 서강대는 매우 잘나가는 가톨릭대 의대만 가져가고 싶어했다. 그리고 무산

두 학교의 통합 떡밥은 가톨릭 교황청에서도 관심을 가질만큼 큰 사건이고 가톨릭대서강대의 명성(네임벨류)을 득하고 예수회의 오랜 교육기관 역사의 노하우를 살릴 수 있으며, 의대와 약대가 없는 서강대가톨릭대 의대약대를 비롯한 생명과학과 의학분야를 가져올 수 있어 서로 윈윈이라 볼 수 있다.

이후 가톨릭대학교와의 교류전 (일명 서가전)을 2018년 가을 기획했으나 교내의 엄청난 반대여론으로 무산되었다. 특징이라면 가톨릭대학교에서는 이 교류전에 매우 기대가 컸지만 반대로 서강대에서는 교류전 자체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20]


17. 헤어초크 광장[편집]


청년광장에는 1998년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방문해서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대통령의 이름을 따 "헤어초크 광장"으로 개명당했던 흑역사가 존재한다. 당시 재학 중이던 학생들조차 코웃음을 쳤고 지금 재학생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흑역사. 지금도 청년광장을 지나다 보면 '헤어초크 대통령이 다녀가시다.'라고 쓰인 검은 비석을 확인할 수 있다.

덤으로 로욜라 도서관 벽의 빨갛고 파란 페인트칠[21]도 이때 한 것으로, 그 전에는 다른 부분과 같은 황색이었다. 또한 2013년 경 사라진 마치 노란 강정 같은 캠퍼스 내 인도의 노란 돌포장도 이때 했다. 그 전에는 그냥 시멘트였다. 현재는 평범한 돌포장.


18. 길이니까 잔디를 심지 마시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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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관과 정하상관에 있는 곤자가 플라자는 원래 삼민광장이라 하여 재학생들의 쉼터인 잔디밭이었다. 이 삼민광장에는 잔디가 억세게 자란 가운데 길 하나만이 후문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이 길에 대한 전설 하나가 60년대 선배들로부터 지금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50여년 전, 삼민광장에는 길이 없어서 후문으로 나가려면 잔디와 한바탕 사투를 벌여야 해서 학생들 사이에 불만이 가득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제발 길 좀 만들어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학교는 "잔디를 밟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박아놓은 채(??) 학생들의 잔디밭 출입을 통제하는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여줬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 측은 여전한 고집불통

그때 어느 용감한 학생 한 명이 삼민광장의 잔디를 길 모양으로 죄다 뽑아버려서 길을 만들어 버린 다음, 팻말의 글귀를 "길이니까 잔디를 심지 마시오"라고 바꿔버렸다고 한다. 그날 이후부터 학생들이 그 길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학교도 포기해버려 정식 길로 인정받았다고 카더라. 그리고 나중에는 이 길을 따라 차도까지 뚫렸으니 가히 흠좀무.


19. 인지도에 관한 진실[편집]


전체 학부생이 약 8,000여명으로, 국내 주요 대학치고는 규모가 작아 졸업생 머릿수에서 밀린다. 주요 학과의 정원도 타 대학의 70~80% 수준이며, 학과가 개설되어 있어서 정원이 매우 적은 단과대도 있다. 예컨대 구 법대의 경우 40명 정도의 정원이었다. 학과에 따라서는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실상 존재감이 전혀 없는 학문 분야가 공존한다. 물리학계와 건축학계가 이것의 한 예시인데, 서강대학교 물리학과는 대한민국 물리학과 교수 배출 수 2위다. 1위가 워낙 넘사벽이여서 그렇지 반면에 건축학 계통에서 서강대 출신은 그 존재를 찾을 수 없다.애초에 건축학 이름을 단 학과가 없다

지방에서의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경상도 출신 서강대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원서 쓸 때 처음 알았다고. 대구광역시에서는 경북대학교 수학과 학생보다도 과외 따기가 힘들다는 말도 있다. 전라도 쪽에서는 전문대로 아는 경우도 많은데 서영대학교의 변경 전 교명이 서강정보대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공학과 70학번 박근혜 동문이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중장년 층 앞에서 서강대를 언급하면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아~ 거기 대통령 나온 대학교!' 정도. 특히, 박근혜 동문이 이공계(전자공학과) 출신이라는 점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던 공대가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이미지가 바닥까지 떨어지게 되었다.(...)그래도 인지도는 올랐다

서강대 공대는 1990년대까지 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 2개 학과였으며, 1993년에 기계공학과가 신설되었고 과거 이과대학 전자계산학과가 공대로 넘어오면서 컴퓨터공학과로 변경해서 4개의 학과가 있다. 다시 말해, 건축학 및 건축공학, 토목공학이나 신소재공학 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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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서강대와 달리 문화재와 산 부지는 성균관대 소유가 아니니 정확한 비교는 노고산 일부 부지 포함 서강대 면적과 문화재를 뺀 성균관대의 부지인 192,175㎡와 80,973㎡[2] 즉, 상식적으로 학생이 질문을 하는 건 잘못된 것이 아니기에[3]한국도로공사 여자배구단 감독(2007~2009), 고려증권 배구단 선수[4] 특히 빡쎈 출석=FA에 대한 완화 요구가 가장 컸다고 한다. 독후감까진 안 바랍니다. 경기 출전하게 출석만이라도 빼주세요[5] 대표적으로 경기대학교로 간 이상열(現 경기대학교 감독, SBS 스포츠 해설위원)과 故 김은석(고려증권).[6] 홍성진 현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前 현대건설 감독)이 이 때 일반 학생으로 남은 선수 중 한명이었다.[7] 혹은 서울 시내 지도로 과장되기도 한다.[8] 연필로 그리려다가 부러져 생겼다는 버전도 있음[9] 그렇다고 서강대가 땅 욕심이 아예 없지는 않다. 교문 옆 유명 식당인 거구장을 매입해서 부지를 좀 넓히려고 했는데, 도리어 거구장 주인이 "서강대 얼마냐"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0] 지금의 숭실대입구역-총신대로 넘어가는 고갯길[11]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세요." 라고 했다 한다.[12] 손병두는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출신으로, 삼성그룹 퇴사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을 시작으로 각종 사회단체 이사, 자문위원 직함을 수십 개씩 수집한 인물이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총장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으로 사립학교법 완전폐지를 주장하고 개정반대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최초의 기업인 출신 대학총장으로 화제를 모았으나, 서강주식회사식 운영 때문에 내부반발로 총장 연임을 포기하였다. 2009년부터는 KBS이사장를 거쳐서 삼성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있다.[13] 여담으로 북한에서는 박홍 루카 신부가 워낙 반공정신을 투철하게 홍보해서 그런지 서강대학교를 부정적으로 보며, 서강대학교의 총장을 아직도 박홍 신부라고 안다고 카더라.[14] 병역문제로 재입대 직전의 싸이였다. 당시 축제에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정말 멋진 공연을 보여주었다. 즉석에서 관객이 준 소주 1병을 나발 불었다! 그러면서 '솔직히 서강대 조용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노는 사람들인지 몰랐다'며 음주가무를 즐겼다. "연세대보다 잘 노시네요"는 덤[15] 애프터스쿨은 유이가 오지 않아 뭇 남학생들의 원성을 샀지만, 유이가 오지 않는 조건의 게런티가 이미 3,00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해는 서강대학교 50주년 기념식이 축제와는 따로 열린 해라 그 기념식에 2AM티아라가 초청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특A급의 게스트를 축제무대에 세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6] 라인업은 링크(@) 참고.[17] 당연한 결과다. 두 축제 모두 연예인이 오지는 않았지만, 동아리 공연들은 서강대학교 학생으로써 친구들이라도 보러 올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18] 예산에 관한 부분은 공개된 회계 내역을 참고하면 될 듯하다.[19] 당장 가장 최근에 죽은 로토만 해도 2019년 9월 7일 0시 20분경에 족제비에게 물린 채 발견되었고, 곧 생을 마감했다.[20] 사실상 학교의 종교가 가톨릭교라는 점만 빼면 두 대학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입결, 운영주체, 지리적 위치, 학교의 특성 등)[21] 처음 도색했을 때 반응이 '서강고등학교란 별칭도 모자라 이젠 서강유치원이냐'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