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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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明史) | |||||||||||||||||||||||||||||||||||||||||||||||||||||||||||||||||||||||||||||||||||||||||||||||||||||||||||||||||||||||||||||||||||||||||||||||||||||||||||||||||||||||||||||||||||||||||||||||||||||||||||||||||||||||||||||||||||||||||||||||||||||||||||||||||||||||||||||||||||||||||||||||||||||||||||||||||||||||||||||||||||||||||||||||||||||||||||||||||||||||||||||||||||||||||||||||||||||||||||||||||||||||||||||||||||||||||||||||||||||||||||||||||||||||||||||||||||||||||||||||||||||||||||||||||||||||||||||||||||||||||||||||||||||||||||||||||||||||||||||||||||||||||||||||||||||||||||||||||||||||||||||||||||||||||||||||||||||||||||||||||||||||||||||||||||||||||||||||||||||||||||||||||||||||||||||||||||||||||||||||||||||||||||||||||||||||||||||||||||||||||||||||||||||||||||||||||||||||||||||||||||||||||||||||||||||||||||||||||||||||||||||||||||||||||||||||||||||||||||||||||||||||||||||||||||||||||||||||||||||||||||||||||||||||||||||||||||||||||||||||||||||||||||||||||||||||||||||||||||||||
※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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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계 徐光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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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서광계(徐光啓) |
자 | 자선(子先) |
호 | 현호(玄扈) |
출생 | 1562년 4월 24일 |
대명 남직예성 송강부 상해현 | |
사망 | 1633년 11월 8일(향년 71세) |
대명 북경 순천부 | |
국적 | 대명 |
1. 개요[편집]
흔히 알려진 사진[1]
보면 알겠지만 배우 신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관리. 자는 자선(子先). 세례명은 바오로.
2. 생애[편집]
군사/문화/종교/서양학 모두에서 활약한 다재다능한 인물로 16세기 말~17세기 초 당대 명나라의 엘리트 중에선 거의 먼치킨급이었던 이지조 및 양정균과 콤비를 이루었다.
1600년 마테오 리치로부터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천문학 등 각종 서적을 번역했다. 《기하원본》, 《측량법의》, 《측량이동》, 《구고의》 등을 번역하고 역법을 배웠다.[2]
이 과정에서 기존의 중국 별자리 체계에 남반구 별자리 23개를 새로 추가하기도 했다. 또한, geometry를 지허(機何)로 음차해 '기하'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서광계였다.
천주교 사상을 통해 중국 유학을 보충하고, 불교를 바꿀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해나갔다.
1616년 남경교안 당시 이를 막기 위해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결국 교안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기를 시키고 천주교의 맥을 잇는 데는 성공하게 된다.
또한 홍이포의 위력을 알아본 후, 네덜란드로부터 홍이포를 수입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서광계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의 인맥을 이용하여 마카오를 통해 30문의 홍이포를 수입했다. 그 중 11문은 천하의 요충지인 산해관에 설치했고, 나머지는 수도인 북경성에 설치했다. 원숭환은 이후 영원성 전투에서 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후금의 대군을 박살냈다.
앞서 1619년에 일어난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작전 미스, 기후 불안 등의 2중 3중의 악재가 겹쳐 철저히 참패했다. 이를 계기로 서광계는 국방 체계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희종 천계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환관 위충현이 까는 바람에 관직을 집어치웠다. 그런데 영원성에서 단 11문의 홍이포가 맹활약하며 승리하자 홍이포의 위력이 명과 후금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숭정제가 즉위하고 나서 명나라는 홍이포의 대량 생산에 들어갔는데 서광계가 그 담당자를 맡았다. 이렇게 아담 샬의 도움을 받아 서광계가 첫 해에만 찍어낸 홍이포의 숫자가 무려 400문이었다.[3]
비슷한 시기 지방 정부에서도 홍이포를 생산했는데 양광총독부에서만 무려 500문을 생산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광계는 이렇게 화포를 만들고, 복지 시설을 건립하다가 1633년에 7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4]
당시 명나라는 1627년에 바로 이자성의 난(초기 시점)이 시작되었고 이 당시 기후적인 문제로 기근과 흉작이 계속 지속되었고 이것은 전 중국으로 휩쓴다. 또한 명청전쟁으로 급증한 군사비 재원을 충당하기위해 3향과 같은 부가세들을 더욱 걷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또 후금은 내몽골을 통해 우회하여 중국 북부지역에 주기적으로 침공해서 엄청난 약탈을 감행했었다. 서광계가 선종할 당시 망국의 조짐들이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터지고 있을 때였다.
3. 여담[편집]
아담 샬을 명나라 조정에 천거해 흠천감 관직을 맡겼다. 후일 아담 샬은 청나라 때에도 계속 활동한다.
상하이 시의 한 구역 쉬자후이(徐家匯)는 그의 집안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쉬후이 구(徐匯區)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본인도 천주교인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손녀 캔디다도 유명했는데, 남편을 신자로 만든건 물론 전국 선교사마다 금 200냥씩을 나누어주고, 교당 수십여채를 지으며 130여권의 종교서적을 인쇄하는데 돈을 대기도 하며 수주등지에서 부유한 상인들과 공동으로 아동입양사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먼 후손 중에서도 과거에 낙방하자 천주교당에 서기로 취업하여 한문에 서투른 서양 출신 선교사들의 조정 상주문 등 공문서 작성을 돕는 예가 있었을 정도로 아예 서광계 혼자만이 아닌 가문 전체가 천주교에 입교하고 천주교 신앙이 가풍처럼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5]
이러한 예는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선조가 배교를 선언했음에도 후손들이 몰래몰래 신앙을 이어가며 원복했을 정도이며, 김해 김씨에서는 아예 복자 김진후 비오를 시조로 하는 천주교성인공파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1607년 명대 과학자 서광계와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기하학 원론> 1~6권을 함께 번역하여 <기하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서광계는 <기하원본>을 극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네 가지가 불필요하다. 첫째 의심, 둘째 추측, 셋째 검증, 넷째 수정이다.
또한 이 책은 네 가지가 불가능하다. 첫째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고, 둘째 반박할 수 도 없으며, 셋째 줄일 수도 없고, 넷째 앞뒤에 덧붙일 수도 없다.
서광계는 <기하학원론>을 완역하고자 했지만 마테오 리치가 1610년에 선종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언제 누가 대업을 이어갈 수 있을지 기다릴 뿐이라며 탄식했으나, 미완에 그친 기하원본은 사고전서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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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면 알겠지만 배우 신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2] 이 과정에서 기존의 중국 별자리 체계에 남반구 별자리 23개를 새로 추가하기도 했다. 또한, geometry를 지허(機何)로 음차해 '기하'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서광계였다.[3] 비슷한 시기 지방 정부에서도 홍이포를 생산했는데 양광총독부에서만 무려 500문을 생산했다고 한다.[4] 당시 명나라는 1627년에 바로 이자성의 난(초기 시점)이 시작되었고 이 당시 기후적인 문제로 기근과 흉작이 계속 지속되었고 이것은 전 중국으로 휩쓴다. 또한 명청전쟁으로 급증한 군사비 재원을 충당하기위해 3향과 같은 부가세들을 더욱 걷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또 후금은 내몽골을 통해 우회하여 중국 북부지역에 주기적으로 침공해서 엄청난 약탈을 감행했었다. 서광계가 선종할 당시 망국의 조짐들이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터지고 있을 때였다.[5] 이러한 예는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선조가 배교를 선언했음에도 후손들이 몰래몰래 신앙을 이어가며 원복했을 정도이며, 김해 김씨에서는 아예 복자 김진후 비오를 시조로 하는 천주교성인공파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