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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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병호.jpg


송암(松嵒)
본관
대구 서씨[1]
출생
1885년 7월 7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2][3]
(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
사망
1972년 6월 7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278-19번지 자택
직업
독립운동가, 교육자
학력
경신학교 (졸업)
금릉대학 (졸업)
약력
신한청년당 당수
제헌의정원 내무위원
경신중학교 교장
경신학원 이사장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121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가족관계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5년 7월 7일 황해도 장연도호부 서대면 송천동(현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아버지 경조(景祚) 서상우(徐相祐, 1852 ~ ?)와 어머니 민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이후 경신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905년에 졸업한 뒤 황해도 해서제일학교, 평양 대성학교, 모교인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출국하여 난징 금릉대학에서 공부하다가 1918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상하이에서 김규식, 선우혁, 신채호, 신성모, 신규식, 여운형, 이광수, 장덕수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고 당수에 추대되었다. 이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국내로 잠입한 후 국내 독립운동 동지들 간의 연락과 독립운동 자금모금 활동 등을 진행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모국으로 돌아와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본적을 두었고, 경신학원 이사장,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해 다양한 교육활동에 전념했다. 또한 새문안교회에서 원로 장로를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에 헌신하다가 1972년 6월 7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278-19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사후, 정부는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1980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당초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08년 11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아들 서재현은 김석, 김영재 등과 상하이한인청년당을 조직하고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 해군 준장, 조선기계공작창 관리인, 강원산업그룹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손자 서경석은 목사로 조선족 선교 및 탈북자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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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 25세 병(丙) 항렬.[2] #[3] 이 마을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김규식의 부인인 김순애(金淳愛)를 비롯하여 김낙영(金洛永), 김순길(金順吉), 서재현(徐載賢), 서병호(徐丙浩), 윤익선(尹益善)등 도합 8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