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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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2. 프랑스 파리의 독립운동가
3. 해방 이후



1. 생애[편집]


徐嶺海. 1902-?. 한민족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작가, 언론인, 교육인이다.

1902년 부산에서 태어난 서영해는 본래 이름이 서희수로 1919년 17살의 나이에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한 서영해는 그곳에서 김규식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게 된다. 본래 서영해는 미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김규식은 그에게 유럽의 중심국가이자 세계 외교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갈것을 권했다. 임시정부 입장에서도 세계외교의 중심지인 파리에 상주하면서 식민지배를 당하는 한국의 현실을 알리고 외교전을 펼칠 인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서영해는 생각을 바꿔 프랑스 유학을 가기로 한다.

하지만 당시로선 프랑스로 가는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식민지배를 받는 한국의 상황에선 나라가 없는 탓에 일본인 국적으로 여권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는 독립운동가로선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서영해는 한 중국인양자로 입적해서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 여권을 발급받아서 프랑스로 가는 비자를 발급받을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중국 여권을 발급받은 일이 서영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줄은 그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2. 프랑스 파리의 독립운동가[편집]


파리로 간 서영해는 본래대로라면 프랑스에서 초등학교부터 다시 시작해 고등학교까지 12년동안 교육과정을 밟아야 했지만, 재정이 빠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현실에서 12년동안이나 공부를 하고있기는 어려웠다. 결국 서영해는 악착같이 공부에 전념해 6년만에 모든 교육을 마치게 된다. 이후 자신의 숙소에 고려통신사를 세우고 한국 관련 서적을 출판하면서 임정의 파리 외교특파원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서영해는 출판을 통해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데 힘썼는데, 1929년 출판한 책이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이라는 프랑스어 소설이었다. 이소설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프랑스어 소설로서, 식민지배를 받는 한국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서영해는 이 책의 말미에 프랑스어로 번역한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을 수록하기도 했다. 이 책은 출간 후 5쇄까지 찍을 정도로 꽤 화제가 되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가 프랑스 조계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체포하자, 임정으로부터 안창호의 체포 사실을 전해들은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안창호 체포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프랑스 정부와 접촉해 외교적으로 일본에 항의하도록 맹렬한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1936년에는 브뤼셀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홀로 참가해 각국 대표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1933년에는 리튼 보고서에서 한국 관련 내용을 발췌한 후 논평한 이승만의 저서 <만주의 한국인들>을 발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팜플렛은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한 선전자료로서 제작된 것이었다. 1937년에는 "거울, 불행의 원인"이라는 작품을 냈는데 한국의 전래동화들을 번역해 수록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런 서영해의 저작들은 프랑스에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프랑스에서 발간되던 국제정치평론지인 "에스프리"에 "한국의 문제"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여기서 서영해는 "한국인들은 일본에 의해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당했다"고 말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다.

서영해는 프랑스의 한 일간지의 기자시험에 합격해 기자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의 주 프랑스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으며, 파리를 무대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서영해는 1937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예술가 엘리자베스 C.브라우어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이후 임신을 해서 출산을 위해 고향인 으로 향했는데, 하필이면 이때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서영해는 엘리자베스와 생이별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엘리자베스는 고향에서 스테판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1]

1940년, 프랑스나치 독일에 점령된 이후 서영해는 3년간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나치가 패망하면서 서영해는 이승만과 연락해 프랑스와의 외교에 대해서 협의하기도 했다.


3. 해방 이후[편집]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조국이 해방된 가운데 서영해는 프랑스 파리에서 조국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프랑스 일간지에 한국 독립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한국은 조만간 예전의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게 될것이다"라고 희망찬 기대를 피력했다. 이후 1947년 서영해는 인천항을 통해 30여 년만에 떠나온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영해는 해방된 조국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나가는데 내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서영해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파리에서 자신의 활동을 감시하고 일본대사관에 밀고하던 밀정들이 해방공간에서 외국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로 행세하는 모습을 보고, 서영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더욱이 서영해는 정치적인 입장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보다 남북 분단을 막고자 했던 김구의 편에 서면서, 정치적으로도 외면받는 신세가 된다. 그나마 프랑스에서 활동한 경력을 살려서 연희전문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의 학교에서 프랑스어 강사로 활동했다. 이때 일본인이 저술한 프랑스어 교재를 모두 내다버리게 하고 자신이 직접 저술한 "초급 불어"라는 교재를 내놓기도 했다. 1948년에는 부산 경남여자중학교에서 프랑스어 강사를 했는데, 이곳의 교사 황순조와 재혼을 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가 신혼살림을 차렸고, 한편으론 김구김규식이 추진한 남북협상에 기자 자격으로 방북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서영해는 심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결국 서영해는 부인과 함께 프랑스로 가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자 결심하고 1948년 10월, 서울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서 프랑스 비자를 발급받아 파리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당시 국공내전 중인 중국의 정세 때문에 프랑스의 비자 발급은 늦어졌다. 그러던 차에 1949년 5월 27일 상하이가 인민해방군에 함락되었고 서영해와 황순조 부부를 비롯한 상하이의 한국 교포들은 공산당 당국에 의해 억류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정부 차원의 막후협상이 진행되어 상하이의 한국 교포들 중 한국 국적자는 추방 형식으로 귀국을 허용하는 걸로 합의를 보았고 1949년 11월 한국 국적자를 태우고 인천으로 향하는 수송선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기서 서영해에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닥쳤다. 한국 국적임이 확인된 황순조는 수송선에 탈 수 있었으나, 서영해는 중국 여권을 가지고 있던 탓에 중국인이라면서 수송선에 타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부부는 그렇게 헤어졌고 이후 서영해의 소식은 끊어지고 말았다.

서영해의 행방은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중간에 외교가 단절된 탓에 오랫동안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가, 근래에 와서야 수송선에 타지 못한 이후의 서영해의 행적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서영해의 평전을 저술한 정상천 박사[2]는 "중국의 기록을 탐색한 결과, 서영해가 1956년 상하이의 조선인민인성학교의 교사로 있었다는 사진을 입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상천 박사는 "서영해는 6.25 전쟁 당시 북으로 납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신 인사인 조소앙 등과 연락이 닿아 북한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이들이 주선하여 김일성의 초청 형식으로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유력한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으로 들어간 서영해는 납북된 임정 요인들이 살던 평양 창광산 일대에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임정 요인들이 발간한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다고 한다.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한 경력을 살려서 로동신문에도 자주 글을 기고했으며 허헌의 딸 허정숙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북한의 공식기록에는 서영해의 이름이 전혀 없고, 북한이 애국지사들을 장례지낸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이나 삼석 특별묘지에서 그의 묘를 찾을수 없다는 점이 미스테리이다. 정상천 박사는 임시정부 출신이자 독립운동가인 서영해가 흔적도 없이 북한에서 사라진 것은, 아마도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면서 정적들을 숙청하던 1963년에서 65년사이에 김일성을 비판하다 숙청된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조소앙 등의 납북된 임정 요인들이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가 반혁명분자로 몰려 탄압을 당했는데 서영해도 이를 찬성해서 김일성에게 탄압을 받은게 아닌가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이 당시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가 탄압받은 조소앙, 엄항섭등은 그래도 북한이 애국열사릉 등에 모셨는데 서영해는 그런 대우조차 받지 못한걸 보면 그의 최후가 심상치 않았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할 듯하다.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서영해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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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영해의 후손이자 스테판의 자녀인 스테파니와 수지는 2019년에 부산 박물관에서 열린 서영해 전시회에 방문하기도 했다.[2] 파리1-팡테옹 소르본대학에서 역사학박사를 취득하였고 한국-프랑스 관계사를 연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