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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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0호
서울 한양도성
서울 漢陽都城
Hanyang City Wall, Seoul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산1-29 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면적
639,217.6㎡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4~18세기


파일:서울한양도성낙산일원.jpg

한양도성 낙산 일원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한양도성 관련 영상
1. 개요
2. 축성
3. 시련
4. 복원
4.1. 세계문화유산 우선등재목록 등재
5. 한양도성 순성길
5.1. 인왕산 구간
5.2. 백악(북악) 구간
5.3. 낙산 구간
5.4. 흥인지문 구간
5.5. 남산(목멱산) 구간
5.6. 숭례문 - 정동 구간
6. 기타
7. 외부 링크
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cha.go.kr/20080623131656896000.jpg

〈도성도〉(18세기 제작 추정)
한양도성()은 조선수도였던 한성의 주위를 둘러싼 성곽과 문을 일컫는 말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96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궁궐과 도시를 방위하기 위해 지은 도성이다. 흔히 한양도성하면 성벽만을 생각하는데 숭례문, 흥인지문을 비롯한 서울 4대문과 그외 문도 한양도성에 포함된다.

'서울 성곽'이라는 이름도 한때 이 도성의 공식 명칭이었지만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 성곽이라는 단어는 통용되고 있으며 문화재 안내판에도 서울 성곽이라고 표기된 곳이 많으며 서울시가 정한 도성 순례길의 명칭도 '서울 성곽길'이다.


2. 축성[편집]


1395년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이성계는 도성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를 위해 도성건축 담당기구인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영의정 조준의 감독하에 건설했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1](肅淸門: 북대문)·흥인문(興仁門: 동대문)·돈의문(敦義門: 서대문)·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4대문과 혜화문(惠化門: 동소문)·광희문(光熙門: 시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2]

초축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태종, 세종, 숙종 연간 등의 여러 시기에 걸쳐 유지보수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그에 따라서 성석을 쌓은 모습이 차이가 있다. 그 양상의 변화는 태조 시절에는 일정한 패턴 없이 자연석을 쌓는 모습에서, 점차 정방형(정사각형)의 석재로 가공해서 쌓는 방법으로 변화하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정교한 정방형의 형태가 완성된다. 북악산 안내소의 팜플렛에 이러한 시대별 축조 차이가 설명되어 있으며, 성벽을 조금만 살펴보면 쉽게 볼 수 있으니 알아두면 투어의 소소한 재미가 될 것이다.한양도성 성벽의 시대별 쌓기 변화 성벽 바위에는 그 구역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놓아 결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소실된 높은 구간은 10 m가 넘었지만 낮은 구간은 5m 남짓이었고 해자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시에 방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적이 한양까지 쳐들어오면 한양을 버리고 도주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모두 그러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에도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성은 전쟁이나 내란 방어용 성곽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상징이란 의미가 더 컸고, 실용적 시설이라는 측면보다 인의와 예를 강조하여 평온을 기원하고자 했던 관념적으로 운영된 성격이 컸다고 설명한다.[3]

여러 전란을 겪는 동안 한양 방위체제는 계속해서 개편되었다. 또한 한양도성이 토성이 아닌 석성이 된 이유는 조선 전기 동아시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석성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했을 때 사대문을 제외한 대부분 성곽 축성기간이 49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군사적으로도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지키기 힘든 곳이다. 규모가 너무 커서 방어하려면 병력이 많이 필요하고, 숭례문, 흥인지문 일대는 완전한 평지라서 지형상 불리하다. 게다가 성 바깥에 잇는 안산, 인왕산, 남산, 북한산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성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감제고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 자체의 방위력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요새화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주둔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조선도 한양도성 자체의 방위력은 최소화하고 대신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이 인근의 요새화한 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하는 방위전략을 세운 것이다.


3. 시련[편집]


임진왜란 당시 성곽의 일부가 부서지고 광해군이 복원 작업을 진행하였지만 이후의 병자호란때 청나라와의 조약 중 성곽을 복원도 추가로 쌓지도 하지 말라는 조약으로 그냥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년)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종·숙종 때의 것이다. 이때까지 만 해도 한양도성은 상당히 90%가량 복원되었으나 일제강점기6.25 전쟁으로 도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4대문의 경우 북대문은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남대문동대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곳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일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서대문은 얄짤없이 헐려버렸고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버려 현재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남대문은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복원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적은 4소문은 더 심각하다. 북소문의 경우 북대문과 비슷하게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부터 온전히 살아남은 유일한 4소문이 되었다. 서소문 역시 서대문과 비슷하게 일제에 의해 헐린 뒤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소문동소문의 경우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현재 복원되긴 했으나, 원래 있던 제자리에 복원되지 못했다.


4. 복원[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46072696.1.jpg

서울성곽 복원 개요도. 2012년 자료이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국방 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에 따라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75년 광희문 문루 복원을 시작으로 훼손된 체성과 여장 복원, 주변 가옥 매입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복원에 이어 2013년까지 진행된 인왕산 정상구간까지 총 길이 18,627m 중 69%인 12,771m의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하지만 이때 이루어진 복원은 광화문과 같은 박정희 정권 특유의 엉터리 복원이었다. 성곽을 복원하는 데 15개월 밖에 들이지 않은 날림공사였으며 문화재의 원형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콘크리트 떡칠만 해놓았다. 당시 복원사업에 참여했던 이태기 서울대 교수가 "문화재의 비중은 그 역사성에 있으므로 새로운 조형은 문화재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보수를 하기 전 상태를 상세히 기록, 원형 유지에 힘써야 하고 콘크리트는 전도체이므로 문화재에 해를 끼칠 우려가 많은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묵살되었다. 결국 그 결과 당시에 복원된 성벽을 보면 시멘트를 떡칠해놓아서 원래의 성곽과는 전혀 다른 구조이며 시각적으로도 이질적이다. 이 정도면 복원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고 그냥 모조품을 세워 놓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복원까지 마무리 됐으며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 동대문 성곽공원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2019년 정동길에서 돈의문터에 이르는 순성길을 정비하기로 했다. 그동안 사유지였거나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창덕여자중학교에 속해 있어 우회해야 했던 순성길을 원래 도성터 근처로 정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성곽이 건물에 가려져 있거나 아직도 땅속에 파묻혀 있으며, 일부는 여장이 없는 채로 복원 된 곳도 있다. 그리고 숭례문같은 대문에 비해 성곽은 인지도가 많이 떨어져 일반인들의 관심도 필요할 듯 하다.

땅에 묻혔던 서울 남산 한양도성 유적 100여 년 만에 공개된다.


4.1. 세계문화유산 우선등재목록 등재[편집]


2012년 11월 23일 서울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르면 1년 뒤부터 등재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유네스코 권고 기준에 맞는 보존 관리를 하기 위해 올해 한양도성 전담부서를 신설한 데 이어 내년에 한양도성 연결 사업 등에 71억 원 가량을 우선적으로 투입할 계획이다. 2013년부터는 연차별로 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 이를 바탕으로 2014년 초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만약 서울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성곽은 물론 그 외 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같은 서울 4대문도 세계유산에 등재될수 있다.[4] 서울시는 체계적인 한양도성 관리를 위해 시 내부에 전담조직인 한양도성도감을 올해 하반기에 새로 만들고 책임자로 ‘도제조’[5]를 두기로 했다. 책임자는 4급 공무원이 맡게 될 예정으로 규모는 시 조직의 1개 과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공간을 활용해 한양도성 박물관과 연구소도 설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2017년 3월 21일 이코모스로부터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반려되었다.#

현재 2022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자료를 보강하여 재추진하는 중이다. 참고로 이 성 내에 자리한 5대 궁궐중 하나인 창덕궁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22년 12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한 데 묶어《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제목으로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등록 성공하여 추진 중이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한양도성 순성길[편집]


한양도성은 서울 도심을 순환하며 수록이 적당히 우거져 시원하면서 보기 좋고 높낮이도 적당히 있어서 산책하기에 매우 좋다. 과거에도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는 여행을 순성(巡城)놀이라고 하며 조선시대 당시 한성부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하였다. 현대까지 풍경이 잘 남아있는 인왕산-북악산 지역은 물론이고 낙산, 목멱산(남산)등지 또한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명승지였다. 최근들어 한양도성 순성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시내에 위치한 순성길 주변에 많은 편의 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했으며 외국인 들에게도 인기코스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 산책의 소소한 재미로 각 대문 인근에 스탬프가 있으며, 같은 함에 들어있는 스탬프투어 종이에 각 대문의 스탬프를 모두 찍으면 완주기념배지를 준다. 스탬프투어 종이 뒷면에는 꽤 잘만들어진 서울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가 인쇄되어 있다. 동대문이 있는 동대문역한양도성박물관도 있다.



파일:213C6200-E9A2-44FA-89A8-241C3CDCD3B5.jpg

한양도성 순성길 세부지도, 2012년 자료[6]


5.1. 인왕산 구간[편집]


강북삼성병원 입구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 정상, 창의문에 이르는 인왕산 구간은 비교적 최근 지어진 경희궁자이 단지를 끼고 있어 무난히 출발할 수 있다. 가는 길 중간에 홍난파 가옥과 사직터널 위를 통과하며 세븐일레븐 편의점 앞 길을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 코스가 시작된다. 평소에 운동을 좀 했다면 무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꽤 힘든 여정이 될 수 있다. 의외로 외부 순성길에서 바라보는 성벽이 훨씬 멋지므로 외부 순성길을 통해서 오르다가 인왕산 정상에 가까워 질 무렵 내부 순성길로 들어갈 수 있다. 참고로 해가 지기 1시간 반 정도 전부터 강북삼성병원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서울 사대문 도심의 마천루들이 조명을 켜는 순간을 볼 수 있으므로 일몰 시간을 체크한다면 멋진 서울 도심의 야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파일:fullsizeoutput_2213.jpg

인왕산 중턱에서 본 사대문안 도심
참고로 인왕산 정산 뿐만 아니라 인왕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 창의문, 윤동주 기념관 방향으로 5-10분 가량 걷다보면 시야가 홍제동, 한강 하류 방향과 서울 사대문 도심 방향이 모두 보이는 포인트가 있으니 참고할 수 있다. 입산 시간이 한정되는 북악산 구간에 비해 산행이 자유로우며 풍경은 그에 못지 않아 야경을 보기 위해서는 낙산 구간과 더불어 서울 야경을 위한 멋진 코스이다.


파일:3679A633-6AE3-4508-AD7A-11A9E9E34CD5.jpg

창의문 방면 야경 포인트에서 바라본 사대문안
참고로 반대편에 보이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남산서울타워에서 보는 서울 야경보다 인왕산-창의문 구간에서 보는 서울 아경이 더 멋지다고 하는 외국인 후기들도 많다. 인왕산을 거쳐 창의문으로 들어오게 되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기념관이 있는데, 운영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윤동주 관련 동영상(12분)뿐 만 아니라 윤동주의 일생에 대해서도 훑어볼 수 도 있다. 저녁 때 창의문까지 왔다면 북악산 구간을 입산 제한 시간으로 바로 들어갈 수는 없으므로, 버스를 타고 광화문 인근으로 와서 삼청동에서 택시를 타고 삼청터널을 거쳐 한성대학교 쪽에 있는 혜화문-낙산 구간으로 이동하거나, 삼청동-계동길을 거쳐 와룡공원-경신고-혜화문 구간을 거쳐 낙산 구간을 향할 수 있다. 계동길중앙고등학교창덕궁 후원, 북촌한옥마을, 사대문안 종로 도심과 더불어 상당히 멋진 풍경을 제공한다.


5.2. 백악(북악) 구간[편집]


숙정문 부터 혜화문까지의 순성 구간으로, 북악산을 지난다. 한옥 건축가로 유명한 황두진이 지은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2005년 출판, 해냄출판사)를 보면 그 당시만 해도 개방되지 않은 구간이라 상상으로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사대문안을 스케치한 이미지를 실을 정도로 이 구간에서 바라본 사대문 도심,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이 매우 아름다울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악산, 청운대 뿐만 아니라 구간 대부분에서 서울 사대문안이 멋진 모습으로 보이며 인왕구간의 곡장처럼 이곳도 곡장이 있어 아리랑 고개 뒷편과 성북동 방향도 아주 잘 보인다. 창의문 방향에서 숙정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1.21 소나무(68년 무장공비 침투 때 생긴 총탄 흔적)도 볼 수 있다. 2007년에야 개방되었기에 나무가 꽤 우거졌다. 말바위 안내소에 있는 화장실은 사용된 물을 정화해서 다시 사용하는 순환수세식 화장실이다.


파일:BCB57F55-AE54-413C-85AC-DB72B1946612.jpg

백악 구간 스케치[7]


파일:종로전경.jpg

실제 모습
창의문 안내소-말바위 안내소 구간의 순성길은 탐방시간과 출입구에 제한이 있다. 1968년 김신조 일행이 침투해온 루트였기 때문에 국가보안상 중요한 곳이기 때문. 사건 이후 40년 동안 민간인 통행 불가지역이었던 이곳은 2007년 4월 오픈되었는데, 양끝의 안내소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며, 신분증[8]을 보여주고 신청서를 작성하면 표찰을 빌려주며 반대편 안내소로 나갈때 반납하면 된다. 오픈시간은 하절기는 09시부터 18시까지(입산은 16시까지), 동절기는 09시부터 17시까지(입산은 15시까지)였다. 2019년 4월 5일부터 탐방시간이 확대개방되었다. 겨울(4개월, 11~2월)은 09시부터 17시, 봄가을(4개월, 3~4월/9~10월)은 07시부터 18시, 여름(4개월, 5~8월)은 07시부터 19시까지이다. 동시에 탐방절차가 간소화되어, 신분확인 절차가 생략되어 바로 표찰을 빌려준다. 신분증은 필요하지 않게되었지만 수시로 등산복 차림의 군인들이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확인하고 곳곳에 CCTV와 탐조등과 감지장비가 있으니 허튼 짓은 생각도 하지 말자. 특히 드론 촬영 역시 군사지역이라 허가 없이 불가능하니 꼭 주의하시길...


5.3. 낙산 구간[편집]


혜화문 옆을 통과하는 창경궁로를 건너면 바로 낙산 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 한양도성 성곽의 산 구간 중 가장 완만하고 듬성 듬성 있는 장수마을 카페나 외부 순성길의 도성은 특히 저녁이나 밤에 로맨틱한 광경을 제공해 내국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길게 연결된 도성에 비치는 조명이 상당히 독특하면서 로맨틱한 장면으로 보이는 듯. 낙산공원 정상에서 동숭동, 서울대 병원 방면으로 나즈막히 보이는 도심 풍경과 멋진 구간이다. 이후 암문을 거쳐 내부 순성길을 통해 이화벽화마을로 진입할 수 있으며 이후, YWCA방면으로 갈 수도 있다. 계속 순성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보면 한양도성박물관 - 서울성곽공원 - 흥인지문까지 갈 수 있다.


파일:482B4819-69D8-4D41-8E2B-129BB2C79DF0.jpg

낙산공원 인근의 한양도성


5.4. 흥인지문 구간[편집]


이곳 흥인지문 구간은 흥인지문을 걸쳐 이간수문, 동대문 운동장 터에 세워진 DDP, 광희문을 연결한다. 간선도로 및 전차도선이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놓였기 때문에 숭례문-정동 지역더불어 한양도성이 가장 많이 파손된 지역이다. 오간수문도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복원 같지 않게 복원되었다. 사실 사대문안을 관통하여 물길이 빠져나가는 청계천은 이전 조선 시대부터 사대문안 구역의 하수도 역할도 맡았으며 운반된 퇴적물이 막혀 바닥 준설을 주기적으로 해줘야 했던 곳이다. 이후 한양공고부터 광희문(수구문, 시구문)에 이르는 구간은 그 한양도성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5.5. 남산(목멱산) 구간[편집]


광희문에서 이어져서 서울신라호텔, 국립극장, 남산서울타워를 거쳐,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백범광장을 거쳐 서울 힐튼호텔, 숭례문까지 이르는 구간이다. 목멱산(남산)에는 굳이 입장료를 내고 N서울타워에 오르지 않더라도 경관이 좋은 전망대가 여러군데 있다[9].


파일:772B7657-1E29-484A-BCC9-E922D8D9213E.jpg

목멱 구간의 한양도성


5.6. 숭례문 - 정동 구간[편집]


한양도성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소의문(소덕문, 서소문)과 돈의문(서대문, 새문)의 멸실 과정에 대해 많이 들어봤을 것이며 이후,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이 구간 대부분의 도성이 멸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지역도 그 위에 빌딩이나 학교가 들어서 있어 앞으로의 실질적인 복원에도 매우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왕 구간 중 사직터널 윗 구간도 마찬가지. 본 지역도 소실된 곳이 많아 별도의 구간을 형성하지 못하고 인왕구간에 포함되어 있다


파일:F48B495E-95AE-4920-962E-D031FC1A3F5D.jpg

성문 폐문 시간 이후 소의문 근처 성벽을 넘는 외국인과 안내인 소년: 한양도성박물관 내 모형 촬영
한양도성박물관에 가면, 폐문 시간에 급한 일이 있어 소의문 근처 도성 낮은 부분을 넘어가는 외국인과 그를 안내한 소년의 모습을 모형으로 전시한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실제 있었던 일을 재현한 듯. 숭례문 양측의 성벽이 복원되기 이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인근에 있던 소의문을 잊고 살았음을 느끼게 해준다. 외국계 회사 지사, HSBC빌딩, 상공회의소 건물에 가려져 있고 파손되어 잊혀져가는 이 구간의 한양도성 터를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6. 기타[편집]


  •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은 객관적인 높이 자체는 높지 않지만 서울이 낮은 평지가 많다보니 꽤 경사가 있다. 특히 북악산을 창의문(북소문)쪽에서 올라가기 시작한다면 단번에 200m를 계단으로 걸어올라가야 하니 급격히 증가하는 운동량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말하면 넓은 평지 위에 드문 산이니 올라가면 서울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잠실 롯데월드타워63빌딩으로 동서남북 가늠하기도 쉽다 나름 굉장한 장관이니 운동을 겸해서 종종 올라가면 재미가 있다.

  • 성벽 위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위험하다고 곳곳에 써있지만, 감시가 느슨한 곳에서 위에 걸터앉거나, 올라서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극소수의 조선시대의 벽돌이 아직까지 남아서 사용되고 있으니 잘 찾아보면 보인다. 한자로 축성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길이가 상당히 긴편에 속하는데 한양도성의 총 길이는 18.627㎞이고 현재 길이는 12.344km이다.[10] 해외의 도시성곽과 비교해보면 세계 최장의 성은 중국의 남경성으로 총 길이는 약 34km이고 현재 길이는 약 25km이다.출처 비교해보면 길이가 남경성의 절반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긴 성벽으로 역사상 총 길이가 약 19km였던 로마시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나 그보다 더 거대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한양 도성보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가장 두꺼운 삼중성벽 부분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경우 3분의 2 정도 남았지만 한양도성의 현재 길이보다 약간 짧다. 과거 춘추전국시대 중국 최대의 도시였던 임치의 성벽둘레는 21km였고 전한시대의 장안성벽의 둘레는 25km,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36.7Km에 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고고학 조사를 통하여 그 흔적을 찾을수 있을 뿐이다. 국내에 소재하는 도시성곽과 비교해보면 개경 나성은 길이가 약 16km, 개경성 총길이는 23km로 더 길고출처[11] 평양성은 총 길이가 약 16km로 약간 짧으며 성벽의 총 연장길이까지 따지면 약 23km로 더 길다.출처 태봉국 철원성은 총 길이가 약 12.6km이며 수원 화성은 총 길이 약 5.5km이다.

  • 역사적으로 1980년대 무렵까지 '서울 시내' 는 한양도성이 있던 전통적 중심지인 사대문 안 중구, 종로구 일대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지만 이후 부도심이 발전하고 서울 내에서 생활권이 분산되면서 근래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7. 외부 링크[편집]




8.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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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는 숙정문(肅靖門)[2] 위키백과[3] 나각순. 2012. "서울 한양도성의 기능과 방위체제". 향토서울 80. 서울역사편찬원 자료제공[4] 돈의문은 아직 복원을 못했다.[5] 실지 제조, 도제조는 대게 판서, 정승급의 대신들이 겸직했다. 그리고 도제조는 정일품 관료들의 명예직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우측 링크를 참조. # 대장금 등 드라마에 나온 개념을 차용한 티가 팍팍 난다.[6] 연합뉴스 인터랙티브 미디어 랩에서 원본 이미지 열람 및 다운로드가 가능하다.[7] 그림 출처 -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황두진 저, 2005, 해냄출판사.[8] 반드시 원본이 필요하고 사본이나 사진은 인정되지 않는다.[9] 잠두봉[10] 4. 복원 단락 이미지 참조[11] 개경성은 한양도성처럼 1단 구조가 아닌 4단 겹구조이다. 가장 바깥의 외성만 있는것이 아니고 내성, 황성, 궁성이 외성 안에 또 있었다. 개경성은 강감찬 제의 왕가도 건설으로 1009년~1029년의 21년간 30만 4,000여명의 인력으로 나성(외성), 황성(발어참성), 궁성 3중 구조로 건설하고 여말선초 1391년~1393년 8.5㎞의 내성 축조로 총 둘레 약 23㎞의 나성(외성), 내성, 황성(발어참성), 궁성 구조의 4중구조, 25개 성문으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