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학부/인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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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학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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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홈페이지


파일:서울대인문대.jpg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1. 개요
2. 상세
3. 연혁
4. 학과
4.9. 아시아언어문명학부
4.9.1. 일본언어문명전공
4.9.2. 동남아시아언어문명전공
4.9.3. 인도언어문명전공
4.9.4. 서아시아언어문명전공
4.10. 역사학부
4.10.1. 한국사학전공[1]
4.10.2. 동양사학전공[2]
4.10.3. 서양사학전공[3]
4.11.1. 고고학전공
4.11.2. 미술사학전공
6. 인문대 학생회
7. 동아리
8. 사건 및 사고
8.1. 2015 새내기새로배움터 새터비 도난 사건
8.2. 2016학년도 1학기 수강신청 대란
8.3. 2016년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과 논란
8.4. 2016년 아우토반 카톡방 언어성폭력 사건
9. 여담
9.1. 2004년 학제 개편안
9.2. 역사학 계열 학과의 세분화와 통합 논의
9.3. 언어덕후의 천국?


1. 개요[편집]


서울대학교인문대학.


2. 상세[편집]


서울대학교의 17개 단과대학 중 하나.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 나열 순서는 옛 문리과대학 전통에 따라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그 외 단과대 가나다순이므로 제일 먼저 나열되는 단과대학이다. 인문대가 주로 사용, 관리하는 건물은 1동~8동, 9동(일부), 14동[4]. 학장단실/교수회의실과 행정실은 8동[5], 학생회실은 7동에 위치한다.

언어, 예술, 역사, 사상 분야에서 전국에서 가장 다양한 학과를 편제하며 가장 많은 수의 전임교수진을 갖추고 있다. 국어국문학부터 노어노문학, 언어학은 물론 아시아언어문명학부를 통해 일본, 아랍 등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의 언어/예술, 힌디어 등도 포괄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역사학 분야가 국사학, 동양사학, 서양사학(, 고고학) 등으로 나뉘어 심도있는 교육/연구를 진행해왔으며 현재는 역사학부로 통합되었다. 상대적으로 희소한 종교학과, 고고·미술사학과 또한 설치되어 있다. 더불어 여타 대학교의 인문대학과 마찬가지로 학교 전체의 교양교육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학부생 전체의 졸업필수 교양인 글쓰기의 기초(구 대학국어)와 대학영어의 경우 상당부분 강사진 등 실무는 기초교육원으로 이관되었지만 강의계획서 상 담당 학과는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 그 외에도 제2외국어 언어/예술/사상/역사 등의 관련 교양을 담당하고 있다. 때문에 인문대학은 강사 수요가 항상 많으며, 강사료 지출이 상당하다고 한다.

물론 세계의 여러 대학들과 비교하면 모든 핵심 인문학 학과가 다 개설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하버드대학교 등 대부분의 세계 명문대학교 인문대학에서와 달리 음악사학과가 정식 설치되어 있지 않다.[6] 이는 한국에서 아직까지 상당히 보편적으로 인문학의 하위분과를 이른바 “문사철(文史哲)”로 구분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2012학년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입학생까지는 인문계열 1, 2로 나누어 뽑았는데, 이 구분이라는 것이 계열 1의 경우 소위 언어학과 문학을 전공하는 어문계열[7] 학과, 계열 2는 편의상 역사학·철학계열(사철계열)[8] 학과로 진입시키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은 이미 "인문대학 발전방안 연구"(1995, pp. 7-8)에서 이 체계가 “1950·60년대 대만 학계에서 쓰인 적이 있는 것”으로 그 역사가 짧고 결코 절대적 권위를 지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9] 인문계열 1,2 같은 구분도 2013학년도 입시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같은 문제점들은 차츰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인문계열 광역 입학생(전공을 정하지 않고 들어오는 학생)[10]의 경우 수시 결과가 나온 직후(12월 중순)와 정시 결과가 나온 직후(1월 말~2월 초) 두 차례에 걸쳐 반 배정[11]을 진행한다. 반 배정은 인문대 학생회에서 맡아 진행하며, 각 과반의 학생 수와 성비를 고려하여 반 별로 TO(남자 X명, 여자 Y명)[12]를 작성한다. 그리고 이 TO에 따라 신입생을 배분한다. 인문계열 1과 인문계열 2가 나누어지던 시절에는 이 또한 고려 대상에 들어갔고, 2014년까지도 신입생의 어문계열/사철계열 지망을 조사하여 반 배정에 반영하였다. 2015년 입학생과 2016년 입학생의 경우에는 아시아언어문명전공 지망여부만을 조사하여 여명반에 배정할 뿐 어문계열/사철계열 지망여부는 조사하지 않았다. 2017년부터는 희망 학과에 대한 조사 없이 전부 무작위 추첨으로 반 배정을 진행하고 있다.


3. 연혁[편집]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13]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및 학과/학부 연혁을 보면 대체로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의 연혁을 기록하고 있는데,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 개교 연도를 1946년으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인문대학의 경우는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발족을 직접적인 개교로 규정하면서도 그 설명에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에 관한 법령’ 공포에 따라 경성제대 법문학부 문과 계통과 이공학부 이과 계통을 통합하여 문리과대학(문학부, 이학부) 출범"이라고 소개하면서 경성제국대학과의 연관성을 직접 밝히고 있다. 인문대학 공식홈페이지의 인문대 발자취 참조. 법과대학이나 공과대학처럼 구제전문학교와 합쳐지지 않은[14] 순수한 경성제대의 후신으로서 문리과대학은 당시 대학 중의 대학으로 인식되었으며, 문리대의 후신인 인문대/사회대/자연대는 지금까지도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소개에서 가나다순과 무관하게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학과/학부 연혁에서는 경성제대 시절의 역사와 관련해 과마다 상이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국사학과 홈페이지의 소개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전공을 전신으로 하는 문리과대학 사학과로 창설되었다고 하나, 똑같은 사학과에서 분리되어 나온 동양사학과 홈페이지에서는 1945년 김상기 교수의 동양사 강의가 시작된 것을 동양사학계의 출발로, 1969년의 사학과 분리를 동양사학과 역사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부분은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 출범 당시 해당 학과의 교원 출신에 따라 설명이 달라지는데, 국사학과는 경성제대 출신이 절반 가량 되었으나[15] 동양사학과(당시 사학과 동양사연구실)는 경성제대 출신 교수가 남아있지 않았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국문과나 중문과처럼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으로 교수진이 구성된 경우는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경향이 강하다(중문과 소개 참조).

뿐만 아니라 '미학과'의 존재, 고고·미술사학 전공의 공존, 음악사학과의 부재 등을 일제강점기 경성제대에서 이어진 것으로 본다. 또 국어국문학과 등의 학과는 경성제국대학과의 연속성을 긍정한 바 있으며[16] 국대안 과정에도 불구하고 이희승 등 인적구성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밖에도 서울대학교 역시 (특히 총동창회를 중심으로) 개교와는 별개로 '개학(開學)'연도를 관립 법관양성소 개소년인 1895년으로 잡고 있는 점,[17] 경성제국대학을 전신으로 하고 있는 학과 중 적지 않은 수가 학과의 역사나 동창회 운영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 혹은 경성대학과 서울대학교 간 연속성을 긍정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아직까지 개별 학과의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 간의 연속성은 뜨거운 감자인 셈.

그러므로 학과 연혁을 볼 때 해방 이전의 연혁에 대해서는 주의하자. 아직까지 관련 논란에 종지부를 찍지 않은 사항이기 때문.


4. 학과[편집]


총 14개의 학과/부가 존재한다. (2개 학부, 12개 학과)

4.1. 국어국문학과[편집]


Dep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조선어조선문학전공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조선어조선문학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국어국문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과반 슬로건: 국문과반[18]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조선어급조선문학전공(제1강좌 주임교수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제2강좌 주임교수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이 출범하여 조윤제(제1회), 이희승(제2회), 방종현(제5회) 이숭녕(제5회), 김형규(제8회) 서울대 교수[19] 등의 저명한 국어국문학자를 배출하며 일제강점기부터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여 우리말과 한글의 과학적 연구에 힘써왔다.(조선어문학회 참조)


4.2. 중어중문학과[편집]


Dept. of Chinese Language and Literature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지나어지나문학전공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중국어중국문학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중국어중국문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과반 슬로건: 너와 나 우리, 심장반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지나어급지나문학전공(강좌 주임교수 고지마 겐키치로(兒島獻吉郎))으로 출범하여 중국어학 담당강사로 북경대학 출신 웨이젠궁(魏建功)을 두고(참조) 최창규(제1회)[20], 김태준(1905)(제3회), 차상원(제8회), 이명선(제11회)[21], 박노태(선과생)[22] 등을 배출한 우리나라 중어중문학계의 산실이다.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로 독립한 후 차상원 교수[23]가 수제자인 김학주 교수로 이어진 본과 교수진 외에도 국내 각 대학에서 중어중문학과를 개창한 교수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연구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이곳 서울대 중문과로 통하게 된다.


4.3. 영어영문학과[편집]


Dept. of English Language and Literature

1924
경성제국대학 예과 영어교과목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영어영문학전공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영어영문학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영어영문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과반 슬로건: 살아있다면? 움직이겠니! 영어영문/생동반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영어 강좌가 개설되어있었고[24] 담당교수는 아놀드 하워즈[25], 레지널드 블라이스(Reginald Horace Blyth)[26] 등이었다. 1926년 법문학부 문학과에 영어영문학전공(강좌 주임교수 사토 기요시(佐藤清))으로 출범하여 제1회 이종수, 이재학 그리고 제2회 이효석, 제3회 최재서, 제4회 조용만 등 많은 유명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광복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영어영문학전공,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거쳐 1975년 관악캠퍼스 종합화로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가 되었다.


4.4. 불어불문학과[편집]


Dept. of French Language and Literature

1924
경성제국대학 예과 프랑스어교과목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프랑스어강의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불어불문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불어불문학과

과반 슬로건: 異반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프랑스어강좌가 개설되어있었고[27] 담당교수는 에밀 마르텔(Émile Martel)이었다고 한다.[28] 1926년 법문학부 본과 수업이 개시되고 나서는 문학과에 프랑스어강의(담당 조교수 야마자키 토모지(山崎知二))가 개설되었고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불어불문학과로 독립하게 되었다. 신설된 불어불문학과 이외에도 경성제대 예과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교양과정부에 불어 담당 전임교수들이 다수 있었는데, 1975년 관악캠퍼스 종합화 이후 학과에 합류하면서 현재까지도 독어독문학과와 함께 (학생수에 비해 상당히 많은)전임교수 수를 유지해오고 있다.


4.5. 독어독문학과[편집]


Dept. of German Language and Literature

1924
경성제국대학 예과 독일어교과목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독일어강의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독어독문학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독어독문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과반 슬로건: 아우토반

1924년 개교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독일어강좌가 개설되어있었고[29] 담당교수는 크리스티안 후퍼(Christian Hupfer)였다고 한다.[30] 1926년 법문학부 본과 수업이 개시된 이후에는 문학과에 독일어강의가 개설되었으며, 해방 직후인 1945년 경성대학 법문학부의 독어독문학전공[31]을 거쳐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독어독문학과로 독립하게 되었다.[32] 경성대학 법문학부 독문전공의 유일한 졸업생으로 주오대학에서 편입한 한낙구(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있다. 신설된 독어독문학과 이외에도 경성제대 예과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교양과정부에 독일어 담당 전임교수들이 다수 있었는데, 1975년 관악캠퍼스 종합화 이후 학과에 합류하면서 현재까지도 불어불문학과와 함께 (학생수에 비해 상당히 많은)전임교수 수를 유지해오고 있다. 2022년 반학생회 재건에 성공했고 2023년에도 학생회가 꾸려져 운영되고 있다.


4.6. 노어노문학과[편집]


Dept. of Russian Language and Literature

1930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러시아어강의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노어노문학과[33]
1949
학과 폐지 및 언어학과에 흡수
198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노어노문학과

과반 슬로건: 이슬반[34]

1930년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에 러시아어강의(담당강사 세르게이 치르킨(Сергей Чиркин))가 개설되었다.[35]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노어노문학과로 독립되었으나, 냉전의 격화로 인해 1949년 학과가 폐지되고 재학생은 언어학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러시아어 연구는 언어학과가 담당해왔다.

폐지되었던 학과는 30여 년이 훌쩍 지난 1984년에 인문대학 노어노문학과로 복설되며 부활하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스탠퍼드대학에서 슬라브학과를 졸업한 이인영교수가 당시 30세 최연소교수로 부임해 학과를 처음 이끌어나갔다. 이후 서울대 독문과 출신으로 뮌헨대학에서 노문학을 전공한 김희숙 교수, 한국외대 러시아어과 출신으로 캔자스대학에서 노문학을 전공한 권철근 교수 등이 학과의 기틀을 다졌다.[36]


4.7. 서어서문학과[편집]


Dept. of Hispanic Language and Literature

198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어서문학과

과반 슬로건: 너와 나의 어울림 서어서문/어울반

한국외대 스페인어과 교수 출신인 김현창 명예교수가 학과의 기틀을 닦아놓았으며, 학과의 중진교수들 또한 한국외대 스페인어과 출신들로 시작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대학원 석박사 과정 설치를 완료하며, 서울대 학부 출신 교수들이 본격 임용되기 시작하였고, 현재는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출신의 교수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스페인어 과목이 제2외국어 교양과목 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현재 가장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인기 학과 중 한 곳으로 브라질 관련 전임교수도 채용해 포르투갈어 및 문화관련으로도 연구영역을 넓힌 적이 있다.(2021년 현재 브라질 관련 전임교수는 없다.)


4.8. 언어학과[편집]


Dept. of Linguistics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언어학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언어학과/라틴어과/이어이문학과/희랍어과/노어노문학과
1947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언어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과반 슬로건: 너울반

전국에 존재하는 5개의 언어 관련 학과[37] 중 하나이다.

교육과정은 정통을 중시하는 학교답게 이론언어학 중심으로, 이론언어학의 각 하위 분야의 경우 전임교수가 수업 및 연구를 담당하는 반면 응용언어학의 경우 대부분 강사가 담당한다. 석사 과정에 입학할 때 이론적인 기초가 빈약하다고 판단되면 학부 수업을 청강하게 한다.[38]

2015–2018년 들어선 통사론과 자연언어처리(NLP) 관련 과목들이 인기가 많다. 심지어 인기가 없어야 마땅할 전공 필수 수업들에 상당히 많은 타과 학생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순식간에 빈 자리가 없어진다.[39] 일반적으로는 이론 언어학의 각 하위 분야들 가운데 통사론, 형태론, 음운론, 음성학의 경우 전임교수가 수업 및 연구를 담당한다. 그러나 형태론과 음성학은 강사가 교편을 잡는 일도 있다. 사회언어학, 심리언어학, 그리고 언어 장애 및 치료와 같은 응용언어학의 경우는 대부분 강사가 담당한다. 전통적인 이론에 열중한 나머지 최근의 트렌드인 심리언어학이나 인지언어학 분야에는 다소 소홀한 면이 없지 않다.

전공 이수를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몇몇 강의들이 꽤 악명높다. 보통 저학년 때 통사론을 듣고 고학년 때 컴퓨터 언어학과 역사비교 언어학을 듣는다. 통사론의 경우 MIT에서 수학한 고희정 교수가 수업을 맡는다. 사용하는 교재에 수록된 문제는 석사과정을 마쳐도 완벽하게 풀 수 없을 정도로 악명이 높다.[40] 게다가 기말 과제 또한 난이도가 상당한데, 이를 정리하여 나중에 졸업 논문으로 제출하는 학생들도 종종 등장한다. 수업의 난이도가 상당하여 학생들 개개인이 따로 덤볐다간 각개격파 당하기 쉽다. 교수 또한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서로 협동하길 권고한다.

컴퓨터 언어학은 R와 파이썬을 기반으로 자연언어 처리 기법을 배운다. 문제는 이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기 위해선 앞서 말한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지식과 문제 해결 능력은 기본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것. 이것을 바탕으로 요즘의 대세인 머신 러닝을 배운다.[41] 사실상 “딥 러닝과 자연언어 처리” 과목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본 수업을 위해선 회귀 분석과 같은 지식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학적 백그라운드가 있는 학생들이 비교적 덜 고생한다. NN의 기본 구조에서 RNN과 CNN도 잠시나마 다루며 후반부는 PANDAS나 KERAS를 사용하게 된다.[42] 그래서인지 이 수업을 위한 예비 수업들이 무려 3개나 존재한다. ‘언어학과를 위한 컴퓨터 개념 및 실습’, ‘언어와 컴퓨터’ 그리고 ‘언어 정보 처리’가 이에 해당한다. 위에 열거한 수업들을 듣는다면 나름 덤벼 볼만 할지도 모른다. 파이썬을 선행학습하는 것이 권장된다.

역사비교언어학은 앞서 말한 두 과목들과는 초점이 조금 다르다. 언어의 처리보다는 다양한 언어들의 현상태를 비교하는 데 초점이 있다. 학부 수준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음운론과 형태론에 대한 선행학습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좀 부담스럽다.

언어학 자체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에 독립된 학과가 개설되지 않은 각종 외국어 과목의 교수 역시 담당하고 있다. 2016년 1학기 현재 이탈리아어, 몽골어, 스와힐리어, 핀란드어, 히브리어, 만주어(전공선택) 수업을 개설하고 있으며[43], 아시아언어문명학부가 생기기 전에는 터키어, 아랍어, 힌디어, 일본어 등 별도의 어문학과가 설치되지 않은 언어 수업을 담당하였다. 핀란드어를 가르치기도 한다.[44] 전공선택에 "일본어의 구조"라는 수업이 개설되거나, 만주어의 선이수 과목으로 터키어를 지정했던 흔적으로부터 수많은 언어 수업을 담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타 학과의 언어 수업들이 언어 구사에 초점을 두는 반면, 언어학과 수업의 경우 언어의 언어학적 특성을 탐구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수업을 운영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박종철 열사(당시 22세·84학번)가 본 학과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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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아시아언어문명학부[편집]


Dept. of Asian Languages and Civilizations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국어학국문학전공[일어일문학]
1945
학과 폐지
201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일본언어문명전공

과반 슬로건: 여명반

서울대학교의 무수한 학과 중 가장 '젊은' 학부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국어학급국문학[일어일문학]전공(강좌 주임교수 다카기 이치노스케(高木市之助))이 출범했으나, 광복 직후 식민잔재 타파를 강조하는 민족 감정에 의해 폐과되었다. 이후 일문과를 개설하려는 서울대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하였으나 2012년 일본언어문명전공과 동남아언어문명전공·인도언어문명전공·서아시아언어문명전공 등을 포괄하는 아시아언어문명학부로 부활하였다.

아시아언어문명학부라는 형태로 이 학과가 탄생하는 데 크게 세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 연구 학부과정의 개설 필요성이다. 일본이 갖는 지리적 인접성, 거대한 경제적 규모, 오랜 역사적 관계,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등을 고려할 때, 서울대학교에서 일본학 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비판받을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꾸준히 일본 관련 학과 개설논의가 있어왔고, 2000년대 사범대에서 일어교육과가 설립될 뻔 했었다. 그러나 사범대 내의 정원조정 문제 및, 타 단과대 교수진의 필요성에 대한 비판 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설립 전까지 일본학에 대한 수요는 잠재된 상태였다. 둘째로, 2000년대 이후 아랍, 인도, 동남아시아의 인구팽창 및 경제발전, 국제사회에서의 영향의 증가로 인한 이들 지역학에 대한 수요 증가가 하나의 원인이었다. 9.11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2000년대 들어와 한국이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문명권에 대한 연구 수요가 증가했으나 연구인력 및 자원은 부족한 것이 서울대의 당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종교학과를 문명종교학부로 개편하려는 논의가 인문대 내에서 있었다. 셋째, 서울대 인문대의 학문 중심이 중국과 소위 구미 열강에 치우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흐름이 하나로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아시아언어문명학부이다. 교수진은 아직 신설학부인 만큼 상당수가 동양사학과, 종교학과 등 타 학과 소속 교수직을 겸직하고 있지만 최근 외국인 교수 채용으로 자체 교수진을 확보하였으며, 지속적인 교수 충원 계획을 가지고 있다. 재학생 전공 선택 비율은 일본:서아시아:인도+동남아=2:1:1 정도의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016년 현재는 동남아시아 전공 인원이 일본과 비슷한 수를 유지하고 있다.)(이젠 동남아가 더많은듯)

그러나 실제 이러한 지역학적 성격 때문에 사회과학대학과 국제대학원의 반대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45]. 어떻게 보면 이들의 '우려'대로 얼마전 아시아언어문명학부에서 "서아시아학(현대 이란 역사 혹은 사상)" 분야 임용 공고가 났는데 '중동정치'전공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외국인이 전임으로 들어왔다.


4.9.1. 일본언어문명전공[편집]



4.9.2. 동남아시아언어문명전공[편집]



4.9.3. 인도언어문명전공[편집]



4.9.4. 서아시아언어문명전공[편집]



4.10. 역사학부[편집]


Dept. of History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 조선사학전공/동양사학전공
1927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 조선사학전공/동양사학전공/국사학전공[46]
1928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 조선사학전공/동양사학전공/국사학전공/서양사학강좌
194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조선사학전공/동양사학전공/국사학전공/서양사학강좌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사학과 조선사학전공/동양사학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학과
196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양사학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서양사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202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부 한국사학전공/동양사학전공/서양사학전공[47]


4.10.1. 한국사학전공[48][편집]


과반 및 슬로건: 파괴/건설/해방의 그날까지 진군하는 국사/새날반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사학전공(제1강좌 주임교수 이마니시 류(今西龍), 제2강좌 주임교수[49] 오다 쇼고(小田省吾)으로 출범하여 신석호(예과 1회), 류홍렬(예과 7회), 이인영(학부 9회 졸업)[50] 등을 배출하였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사학전공은 광복 후 경성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거쳐 1946년 국대안으로 성립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가 되었다. 문리대 사학과는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류홍렬·이인영·김성칠 교수, 와세다대학 사학·사회학과 출신의 이병도, 김상기, 손진태 교수 그리고 게이오기주쿠대학출신의 강대량[51] 교수 등이 부임하여 교수진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여 손진태 교수와 이인영 교수는 납북되어 곧 세상을 떠났고, 강대량(강진철) 교수는 학교를 그만두었으며,[52] 김성칠 교수는 1951년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등 큰 파동을 겪었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 이병도·류홍렬 두 교수가 외롭게 국사학을 이끌어갔다. 전쟁 후에 불어닥친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민족주의적 학풍이나 마르크스주의적 학풍은 사라지고, 엄밀한 아카데미즘이 학계를 지배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그동안 국사학계의 원로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병도 교수가 1961년, 류홍렬 교수는 1966년 정년퇴임하면서 사학과에는 한 차례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다. 한우근(서울대 1회), 김철준(서울대 3회) 등 신임 교수들이 임용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1969년 문리대 사학과의 국사연구실/동양사연구실/서양사연구실 등이 3사과로 독립하면서 국사학과가 되었고 관악캠퍼스 종합화에 따라 문리대가 인문대/사회대/자연대로 나눠지며 국사학과는 인문대학 소속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국사학과 소개 참조.

'헬사과'로도 불리는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에 비해 커리큘럼이 상당히 널널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대학원 진학자가 적지도 않지만, (과 규모가 일단 크기도 하고..) 이러한 특성 때문에 고시생들이 유독 많고, 경영대나 경제학부 등으로의 전과를 위한 유용한 '회전문'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커리큘럼을 빡시게 굴려도 별 소용이 없다는 뜻.

교수진은 역시 다른 인문대 학과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대학들에 비해 다양한 전공의 전임 교수들이 많이 재직 중이다. 한국사 전공의 전임교수가 두 자리수로 존재하는 학교는 서울대 국사학과가 유일하다. 고대사 1명(백제사 및 역사고고학), 중세사 1명, 근세사(조선시대사) 4명(정치사, 과학사, 사회사, 사회경제사), 근대사 2명(정치사, 사상사), 현대사 3명(정치사, 과학사, 냉전사), 불교사 1명으로 총 12명에 달한다. [53] 발해사 전공이었던 송기호 교수의 정년퇴임 후 자리가 빈 고대사 전공을 충원하지 않고 현대사(한미관계사) 전공인 이동원 교수가 임용되었는데 대학원생의 전공 수요도 그렇고 근현대사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1981년 노태돈 교수가 임용되면서 김철준, 노태돈(1981~88), 노태돈, 송기호(1988~2021)로 40여년간 2인체제로 돌아갔던 고대사 전공의 규모가 줄어드는 모양새다.


4.10.2. 동양사학전공[54][편집]


과반 슬로건: 용화반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동양사학전공[중국사전공](강좌 주임교수 오타니 고스케(大谷勝眞))과 이듬해 증설된 국사학전공[일본사전공](강좌 주임교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으로 출범하였고, 예과 3회 신입생 양주화[55]·엄무현[56]부터 18회 이기영 등을 배출했다. 이 중 경성제대 사학회보에 조선인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논문이 실린(참조) 예과 4회 김종무(참조)는 해방 후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출범 초기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임했으나 1948년 경기고등학교(당시 6년제 경기중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가면서 서울대 동양사학과(당시 사학과 동양사학연구실)는 와세다대학 출신의 김상기 교수 위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시절 국사학연구실, 동양사학연구실, 서양사학연구실이 1969년 3사과로 독립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2000년대 들어 학부제 도입 풍조에 따라 3사과 통합 논의가 이뤄졌으나 한 표 차이로 부결된 바 있고, 최근 역사학부 통합을 가결하여 결국 통합되었다.

학점은 서사과보다 좀 덜 짤지 모르나, 학사과정의 '빡셈'으로는 인문대 최악을 자랑하는 학과이다. 학사논문을 세번 이상 퇴짜 맞은 사례도 있으며, 심지어 이래서 결국 졸업을 못한 케이스도 있다고 한다. 반대로 잘 쓴 학사논문은 학과에서 내는 학술지에 실어준다.

중국사학의 거두인 민두기 선생이 싹수가 보이는 대학원생들에게 중국의 각 시대별로 전공을 던져주고 석사과정이 4~5년씩 걸릴 정도로 극도로 엄격하게 교육한 것에서 유래한 '민두기 스쿨'의 근거지이다.[57] 이는 한국의 동양사학(특히 중국사학) 발전에 큰 역할을 했지만, 이와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은 극렬한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58] 이런 학풍은 현재도 남아있어 학부생이라도 한문을 읽지 못하면 학과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구범진 교수는 자신의 학부강독수업(전공필수)에서 (번역은 고사하고 표점도 찍혀있지 않은) 조선시대의 외교문서들을 가지고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59] 여기에 중국어와 일본어[60]도 거의 필수로 꼽힌다.

학부 입학 초기 또는 외부인이 보기에는 이 같은 커리큘럼이 매우 경악스러울 수 있지만, 1-2년쯤 구르다보면 자연스레 일본어 학원을 등록하고, HSK 급수 준비를 하며, 적당히 한문 번역을 해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언어에 베이스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지 않더라도 입학이나 진입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다.

전체적으로 중국사가 강세를 보이지만, 일본사나 (튀르키예를 포함한) 중앙유라시아사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사 4명(고대, 중세, 근세, 근대전공), 일본사 2명(중세, 근현대전공), 서남아시아사 1명(오스만제국사전공), 동남아시아사 1명(베트남 근현대사 전공), 중앙아시아사 1명으로 총 9명의 교수진이 구축되어 있다. 타 대학 사학과의 동양사 전공에 비하면 교수진이 적지 않으나, 아시아 전 지역을 다루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앞의 서술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중국(정확히 말하자면 북경대학을 제외하고는 그닥 올바른 표현도 아님)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현재 한국의 동양사학의 현실에서는 나름 선전하는 편이다. 예컨대 2021년 2월 현재 고려대 사학과의 경우 중국근현대1 일본사1, 연세대는 중국근세1 중국근현대1 일본사1, 서강대는 중국근현대1 일본사1, 성균관대 중국중세1 일본사1, 한양대 중국중세1 중국근현대1, 중앙대 중국근현대1, 경희대 중국근세1 중국근현대2, 외국어대 중국중세1 중국근세1, 시립대 중국중세1 등이다. 최근 일본의 경우도 중국사를 적어도 시대별로 한 명씩 채용한 학교는 없다.(단적으로 동경대학은 중국사 전공 교수는 딱 2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동양사학과의 교수 구성이 다소 아쉽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구성을 갖추고 있는 학과도 드물다.

이전에는 동남아시아사 전공 영역도 있어서 원래 일본사 전공 한 자리가 동남아시아사 전공 티오였다. 그러나 유인선 교수(월남사 전공) 퇴임 이후 몇 차례 동남아시아 전공자를 채용하려는 공고가 있었으나, 적격자를 찾지 못하고 동남아시아 TO를 일본사 TO로 충당하고, 대신 동남아시아 TO는 본부의 외국인 교수 TO로 충당하여, 외국인 교수를 채용했다. 그러나 임용된 외국인 교수는 재임용 심사를 앞둔 시점까지도 review 혹은 article 한 편 제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실 해당 외국인 교수는 서울대를 발판 삼아 해외로 임용을 준비 중이었고, 당시 인문대학 모 학과의 펀딩을 이용하여, 해외 학자를 초빙하는 기회를 발판삼아, 해외로 run하였다. 대신 모 학과 동남아시아 전공자를 통해 동남아시아사 강좌를 개설하려고 했으나, 이것이 성사되지 않고 대신 국내 연구자를 초빙하여 동남아시아사 강좌가 개설되었다. 덕분에 최근에는 일본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학부생들도 늘고 있는 추세다. 앞으로도 인도/동남아시아사 연구는 아시아언어문명학부가 전담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19년 3월부로 베트남 근현대사를 전공한 외국인 교수가 동남아사 전공 담당으로 임용되었다. 꾸준히 동남아사 교수를 데려오고 있는걸로 보아 동남아사 연구를 아언문에 내주고 싶지 않은듯. 하지만 이를 꾸준히 유지하려면 데려온 외국인 교수들이 성과를 잘 내면서 한국에 꾸준히 체류해야 하는게 과제다.

대표적인 학과 동문으로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이 있다.


4.10.3. 서양사학전공[61][편집]


과반 슬로건: 역사를 바꾸는 동력, 역동반[62]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본과 개교(1926년) 당시에는 국사학 1개 강좌, 조선사학 2개 강좌, 동양사학(중국사) 1개 강좌로 서양사학 강좌가 설치되지 않았으나,[63] 1928년 법문학부 서양사학강좌(강좌 주임교수 가네코 고스케(金子 光介))로 출범하였다.[64][65] 이후 경성대학 법문학부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거쳐 1969년 3사과가 독립하면서 오늘날 서양사학과에 이른다.

인문대에서 제일 학생들을 하드하게 굴리기로 소문난 학과 중 하나다. B-를 날리기로 유명한 교수님들 하며[66], 강독의 난이도도 꽤나 살벌한 편이다. 심지어 정치성향도 양극단에 계신 교수님들도 계시는 박/안/배(보수, 우파)vs최/한/박(진보, 좌파)[67] 구도가 가장 선명하다.[68] 전직 교수까지 넓힌다면 이인호 KBS 이사장도 유명한 보수인사이다.[69] 인문대의 낭만 같은 거 없다. 졸업을 위해서는 불문사적강독, 독문사적강독, 노문사적강독 중 한 과목을 수강해야 한다.[70] 다시 말해서, 서양사학과를 졸업하려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 적어도 하나는 원문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셋 모두 한국인이 배우기에 쉬운 언어는 아니다. 물론 공부하는 동안은 죽을 맛이지만, 학부를 졸업하고 나면, 한국어와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나 독일어, 러시아어와 같은 제2외국어도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이득이다.

서울대 대부분의 학과들이 그렇듯이 서양사학과도 학과생들이 영어는 기본적으로 다 잘 할 것이라고 전제하는 학과여서, 영문사적강독 역시 졸업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들어야한다.[71] 또, 졸업논문 심사도 빡센 편이여서, 학부생 졸업논문에도 '퀄리티 저질'을 이유로 빠꾸를 놓는 일이 꽤 있다고 한다.

여하튼 결론은, 참 빡센 학과라는 것이다. 물론 빡세게 공부를 시키는 만큼, 얻어가는 것은 많을 것이다.

한편 서양사 관련 해외 서적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번역되고 있으며, 서양사학과 교수들의 저서 역시 지속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대중적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교수로 주경철 교수를 들 수 있다.

정기적으로 유럽 답사를 가는 학과다. 많은 학과생들이 유럽 답사 시기만을 목빼고 기다린다. 2017년에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 답사를 간다.

인문대 전체에서 '공간적'으로 가장 여유로운 학과다. 서양사학과/반(역동반)은 과방과 반방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모든 학과들이 과방과 반방을 독립적으로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과방과 반방을 모두 갖추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서양사학과/반의 반방은 인문대 전체에서 가장 넓은 규모를 자랑한다.

고대사, 중세사, 미국사, 독일사, 프랑스사, 러시아사, 네덜란드/해양사, 이탈리아사, 과학사 전공 등 총 8명의 전임이 재직 중이다. 영국사 전공의 박지향 교수 및 프랑스사 전공의 최갑수 교수가 퇴임하고 2019년 9월 1일자로 프랑스 혁명과 노예제, 아이티 독립혁명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권윤경 박사가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19-20세기 이탈리아사를 중심으로 파시즘과 유럽 민족주의 등을 주로 연구해온 영남대 사학과 장문석 교수가 부교수로 부임하였으며 고대사(즉 그리스, 로마, 초기 기독교 등) 분야의 경우, 본과 출신으로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재직 중인 김덕수 교수가 가끔 대학원으로 강의하러 온다.[72] 고대사는 2023년 2학기부터 전북대 교수로 있던 이지은 교수(학부는 이화여대 출신)가 새로 부임해 담당하고 있다.

2016년 학생회 재건에 성공하여, 2017년 기준으로 제34대 역동반 학생회장이 재임 중이다.


4.11. 고고미술사학과[편집]


Dept. of Archaeology and Art History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미학·미술사전공
194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미학·미술사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인류학과
1946
폐지
196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고고인류학과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학과
1983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2009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고고학전공/미술사학전공

과반 슬로건: 함께 만들어가는 변화의 울림, 공명반

경성제국대학 시절에도 법문학부 철학과에 미학·미술사전공(제1강좌 담임교수 우에노 나오테루(上野直昭), 제2강좌 담임교수 다나카 도요조(田中豊藏))이 개설되어 있었고 고유섭(참조) 등을 배출하였으나 고고학 단독 전공은 개설되지 않았다.

광복 후 194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창립 당시 인류학과가 개설되었으나 이내 폐지되었다. 그러다 김원용 교수 등의 활약으로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었고, 1975년 단과대학 개편 과정에서 고고인류학을 다루는 인문대의 고고학과와 문화인류학을 다루는 사회대의 인류학과로 분리되었다. 인문대학 고고학과는 이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으로부터 미술사학자 안휘준 교수를 전입시켜 오면서 미술사학을 포괄하는 고고미술사학과로 발전하였으나, 고고학자와 미술사학자를 겸한 원로세대가 은퇴한 현재, 고고학, 미술사학 각 전공은 발전적으로 독립하는 수순을 밟고 있으며 2009년에는 세부전공이 구분되었다. 다만 소비자아동학부, 물리천문학부와 같은 학부가 아닌 학과 체제이므로 입시에서는 수시 일반전형 10명으로 합쳐서 선발한다. 그래서 자기소개서에서는 둘 중 더 관심 있는 한 전공을 약간 강조해서 쓰되, 다른 전공에 대한 역량도 어필하는 것이 좋다. 합격하면, 1학년 때는 세부전공 소속 없이 자유롭게 전공탐색 강의를 듣고, 2학년 때 세부전공에 진입하게 된다. '공식적으로' 두 전공 모두 각자 분리 및 승격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5동에 위치해 있는 고고미술사 학과 사무실에 두더지 그림이 붙어 있는데, 그 두더지 밑에는 한자로 "고고인류학과"라고 써 있다. 이 두더지는 현재 학과의 마스코트 격으로 쓰인다.

본래 공명반방은 리모델링 이전의 14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크기와 괜찮은 시설을 자랑했는데, 14동이 리모델링에 들어가게 되면서 쫓겨났고 그렇게 배정받은 7동의 반방은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고, 이전보다 좁은 공간이었다. 이 무렵 인문대 내에서 공간문제가 공론화되기도 했었다.

2014년 하반기에 과/반 학생회가 학생회칙 제정과 함께 새롭게 구성된 후, 매년 9월 경에 선거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제4대 학생회장이 재임 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4.11.1. 고고학전공[편집]


고고학전공으로 한정하면 서울대 내에서 가장 소수과다. 고고학전공은 한 학번에 많아봐야 3~4명이다. 따라서 보통 재학 중인 모든 주전생을 다 합해도 15명이 안 된다. 복전생도 거의 없다보니 그야말로 극소수과다. 어느 정도냐면, 전필 과목도 수강생이 많아봐야 10명이다. 전선 과목 중에는 고작 3명이 수강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수강신청 때문에 졸업이 꼬일 일은 없다. 대학원은 더 심각해서, 매년 1~2명이 입학한다고 알려져 있다.


4.11.2. 미술사학전공[편집]


반면 미술사학전공은 매년 10명 정도는 진입, 거기다 워낙 복전생이 많아서 합치면 학번당 20명은 넘는다. 고고학전공과 미술사학전공은 전공과목이 전혀 달라, 진입 뒤에는 거의 만날 일이 없다.


4.12. 철학과[편집]


Dept. of Philosophy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철학·철학사전공/지나철학전공/윤리학전공
194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철학·철학사전공/지나철학전공/윤리학전공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철학·철학사전공/중국철학전공/윤리학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철학과
196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철학과 철학전공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철학전공
198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과반 슬로건: 思考뭉치반

서울대학교 철학과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연원은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라 할 수 있다. 경성제대 철학과의 철학·철학사전공, 지나철학전공, 윤리학전공이 각각 서양철학전공, 중국철학전공, 윤리학전공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해방 이후 경성제대는 '제국'이라는 글자만 종이로 가리고 경성대학으로 운영되었다. 경성대학 철학과는 안호상, 김두헌, 박종홍, 김규영 교수가 취임하고 경성제대 철학과와 예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으로 학과를 구성하였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경성제대 연구실, 도서, 기자재 등 물적 자산과 학생 등 인적자산들이 그대로 이어지고 경성제대 출신이 교수로 취임하였으므로 경성제대가 서울대로 계승된 것은 사실이지만 서울대학교 측은 1946년을 창설로 잡는다. 1946년에 헤겔 전공의 김계숙 교수, 1947년에 하이데거 철학 전공의 고형곤 교수가 부임하는 등 경성제대에서 주로 독일 철학을 수학한 이들이 학과의 교과 내용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곧 대학원과정이 설치되었다. 1952년에는 윤리학 전공의 최재희 교수, 1954년에 분석철학의 김준섭 교수, 이어서 박홍규 교수가 부임하였다. 1962년에는 현대윤리학 전공의 김태길 교수, 1966년에 실존철학 전공의 안상진 교수가 부임하였고 1965년에 부임하여 70년에 사임한 조가경 교수 후임으로 현상학 전공의 윤명로 교수가 1972년 부임하였다. 1969년 문교당국에 의해 미학과와 종교학과가 철학과에 통폐합되었다. 1972년에 학술지 「철학논구」가 창설되었다.

1975년 대학종합화계획에 따라 다른 단과대학에 소속돼 있던 박상현(실존철학), 한전숙(현상학), 정진(인식론), 이상철(역사철학), 소광희(형이상학)가 철학과에 합류하였다. 1977년 처음으로 시행한 교수공개채용제도로 사회철학 전공의 차인석, 분석철학 계통의 김여수, 이명현을 채용하였다. 1980년에는 불교철학 전공의 심재룡, 1982년에는 인도철학 전공의 길희성 교수를 맞아서 1983년부터는 대학원과정에서 전공분리가 이루어졌고, 1985년에는 종교학과 미학과의 원상회복되었다. 1982년 서양고대철학의 이태수, 85년에 김남두, 윤리학의 황경식 교수가 부임하였다. 1988년에는 근대영국철학의 김효명, 논리학 전공의 김영정, 중국철학의 송영배, 독일고전철학 전공의 백종현 교수가 부임하였다. 1989년에는 철학사상연구소를 인문대학 부설로 신설하였다. 철학사상연구소는 콜로키엄, 저명학자 초청강연 등을 진행하는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철학사상」이라는 학술지를 발간한다. 1992년에 한국철학 전공의 허남진 교수가 충원되었다.

1995년에는 독일현대철학의 이남인, 프랑스철학의 김상환 교수가 부임하였다. 1999년에는 분석철학의 김기현, 존재론의 박찬국, 사회철학의 정호근 교수가 부임하였고 조인래 교수가 편입해왔다. 2002년에는 곽기 교수를 초빙하였다. 2004년에는 성리학 전공의 정원재 교수, 불교철학의 조은수 교수가 부임하였고 2006년에는 언어철학 전공의 강진호 교수, 2009년에는 인도불교철학 전공의 안성두 교수, 서양고중세철학 전공의 강상진 교수가 부임하였다. 2010년에는 서양근대철학사 전공의 이석재 교수가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이직해왔다. 2012년에는 중국선진제자백가 전공의 장원태 교수, 2013년에는 분석형이상학전공의 한성일 교수, 2014년에는 서양고대철학의 강성훈 교수, 윤리학의 김현섭 교수가 부임하였다. 2018년에는 과학철학 전공의 천현득 교수가 이화여대에서 옮겨왔고, 2019년에는 서양근대독일철학의 이행남 교수가 부임하였다. 2022년 신유학 전공의 이현선 교수, 인식론, 메타윤리학 전공의 이우람 교수, 서양고전학 전공의 이은수 교수가 부임하였다.

꽤나 강경한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 존재론을 주장하는 한성일 교수, 칸트 철학에서 'transzendental'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지에 대해 '선험적'이라 번역하는 학계 대다수의 의견과 달리 '초월적'이라는 번역어를 쓰는[73] 백종현 교수라든지, 조선 성리학 연구에서 이이가 이황을 비판하며 주자학을 이황보다 충실하게 계승했다는 학계의 정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이이를 주자학의 배신자로 보는 정원재 교수처럼 학계에서 이단아 취급 받는 비주류 학설의 교수도 있다. 물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이남인 교수, 이석재 교수, 한성일 교수, 김현섭 교수, 이우람 교수 등 정석적이면서도 명망있고 훌륭한 교수도 많다.

서울대 철학과 학부생들 중 학자로서의 꿈을 가진 경우가 많지는 않으나, 철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소위 '마니아'들이 매학번 존재하고 그 중 실제로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타 학과 학생들에게 철학과 교양수업이 매우 인기가 많다. 강의의 수준도 발군이며 재미있게 수업하는 교수님도 많다. 그만큼 진지하고 끈기를 가지고 공부하는 학부생도 많다. 또한, 다양한 대학원 수업이 열리는 것이 강점이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지원할 생각이 있다면 참고해 볼 만한 부분.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설치와 함께 철학·철학사전공[75], 지나철학전공[76], 윤리학전공[77], 종교학·종교사전공[78], 미학·미술사전공[79], 심리학전공[80], 사회학전공[81], 교육학전공[82] 등으로 구성되어 출범한 철학과가 시초이다. 이 중 오늘날 인문대 철학과와 직결되는 전신은 철학·철학사(서양철학)전공, 지나철학(중국철학)전공, 윤리학전공으로 광복 이후 국대안을 통해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여타 각 전공은 종교학과(종교학·종교사전공), 미학과(미학·미술사전공), 사회대 사회학과(사회학전공), 심리학과(심리학전공) 그리고 사범대 교육학과(교육학전공) 등으로 분리되었다.

서울대 철학과는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 김계숙(예과 1회), 고형곤(예과 5회), 박종홍(5회 상당 선과생), 최재희(예과 10회) 교수를 통해 그 학맥이 직접적으로 이어졌으며, 신남철(예과 3회), 박치우(예과 5회), 이본녕(예과 10회) 등 월북한 교수들 역시 1940년대에 잠시 재직하기도 했었다. 서울대로 개편 후 철학과는 중간에 종교학과와 합병되어 2개 전공으로 나뉜 적은 있었지만 과거처럼 철학 자체의 세부전공은 나누지 않고 있다. 다만 사범대 윤리교육과 및 사회교육과에 각각 '서양윤리학' 및 사회윤리 전공으로 철학과 출신 교수들이 재직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출신 학과이기도 하다.

한국철학사, 기호논리학 두 과목이 전공 필수 과목이었으나, 2014학번부터 윤리학이 전공 필수 과목으로 추가지정되었다.
한때 미학과와 체육대회인 철미전을 개최하기도 하였으나 2017년에 행사가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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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종교학과[편집]


Dept. of Religious Studies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종교학종교사전공
194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종교학종교사전공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종교학종교사전공
194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종교학과
196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철학과 종교학전공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종교학전공
198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과반 슬로건: 상상반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철학과 소속 종교학·종교사전공(강좌 담임교수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으로 설치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시절 종교학은 실제 종교학 이론보다는 신학과 불교학으로 오해되었다. 따라서 철학과와 겹쳐지는 측면이 있었고, 철학과 종교학 전공으로 존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서구 종교학 이론을 들여오고 점차 신학이 아닌 종교학으로 자리를 잡아갔고,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단일전공으로 확정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철학과와 접점이 있으나, 유불도의 사상뿐만 아니라 의례, 신화, 공동체 등을 실증적이고 역사적인 자료로 다루기 때문에 그 방법론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사실 국립대에 신학과를 설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를 위해 신학과를 설치한다면 형평성을 위해서 한국에 있는 모든 종교를 위해 신학과를 하나씩 설치해야하므로 큰 낭비가 일어날 수 있어서 차라리 탈종교적인 종교학과를 설치한 것이다. 모든 종교를 위한 신학과를 설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커리큘럼이 잡탕으로 되어버리고 학생과 교수들의 충돌이 매우 심할테니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소개란에도 "종교학은 특정종교의 신앙을 변호하는 입장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규범적인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인간의 본질 속에 내재하는 종교성과 그것이 표현되는 사실들을 서술하고 분석하며 해석하는 인간학의 한 분야이다. 따라서 종교학은 종교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슬로건을 명실상부히 지키고 있는 서울대학교이니 만큼, 어느 종교관에 얽매이지 않은 순수한 종교학 연구가 충분히 가능하다. 종교학과 혹은 종교문화학과를 두고 있는 타 대학교는 모두 종교재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다.

종교학 개설과목이 어느 한 종교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고, 상당히 다양한 종교들과 종교학 분야들을 수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굳이 특이사항이 있다면 2학년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영향을 가진 불교와 기독교 개론 수업을 듣는다는 것 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사이트에 기재된 정보 기준, 정교수 4명, 부교수 3명, 조교수 1명으로 한국 종교학과 가운데 가장 많은 교수진을 두고 있다.

관련 기관으로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가 있다.

다만 서울대의 학풍상 철저히 기초학문에 가깝고 성직이수 과정이 없으므로 각 종교에 대해 신학과에 비해 얕게 배우고 종교계의 실제 사정을 체험할 수 없어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기는 하다. 사실 신학도 원래 순수학문이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발전하면서 응용학문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져서 그렇다. 하지만 서울대 자체가 순수학문의 전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론을 매우 중시하는 학풍을 가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서울대의 학벌 때문에 정말로 종교계로 진출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것도 흠. 성직자가 되려는 학생보다 성적에 맞춰 서울대 간판 따러온 학생이 많긴 하다. 그러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만 봐도 알겠지만 타대학 신학과/불교학과도 사실 똑같다. 해당 종교를 깊게 접하면서 신앙심을 갖고 개종하거나 해당 종교학에 매력을 느껴서 성직자/종교학자로 진로를 변경하는 경우가 더 많을 뿐이다.

하지만 서울대 철학과 출신들이 종교계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며 거기가 역사가 더 깊어서 종교계 아웃풋이 더 많긴하지만 어차피 성직자는 학부보다 신대원이 더 큰 영향을 미치므로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종교계에서는 서울대를 나올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학생을 환영한다. 그래서 종교학과를 비롯한 인문학 출신 서울대생들이 꾸준히 종교계에 진출했다. 학벌의 수혜를 톡톡히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종교계는 성직 취득에 석사 학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고 박사 학위 소지자도 많아서 학력 인플레가 너무 심하다는 건 각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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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미학과[편집]


Dept. of Aesthetics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미학미술사전공
1943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문학과 미학미술사전공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미학미술사전공
1946
폐지[83]
1948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미학과
1953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
1960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미학과
1969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철학과 미학전공
197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미학전공
1984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과반 슬로건: 동트는 꽃새벽 해방 미학/모反

고유섭(참조) 등을 배출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미학·미술사전공(제1강좌 담임교수 우에노 나오테루(上野直昭), 제2강좌 담임교수 다나카 도요조(田中豊藏))이 연원이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서울대학교 미학과의 연원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미학미술사전공이라 할 수 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미학과는 예술대학 소속이었다. 미학과가 단독으로 창설되고, 예술대학에 속하게 된 이유는 경성제대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한 묶음으로 취급하는 관행으로 인한 혼란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미학은 철학의 하위 분야로 여겨지기에 단독 학과로 창설되기 어려우나, 과거 일본 제국대학에서 미학을 단독으로 다루다 보니 그 영향을 받아 정식 학과로 설치되었다. 또한 당시에 미학에 대한 이해가 낮아 미술이론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예술대학 소속으로 설치된 것이다.

1960년 박의현 교수 주도로 문리과대학으로 복귀하였고 1961년 동양미학의 김정록 교수, 1962년에 독일 현대미학 담당의 조가경 교수, 1968년 고중세미학의 백기수 교수, 1970년 영미미학의 오병남 교수가 합류했다. 1969년 12월 철학과의 전공으로 통폐합되었고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1981년에 박사과정이 신설되었고 1985년 독립 학과로 다시 분리되었다. 1990년 학과 주관으로 예술문화연구소를 인문대학 부설연구소로 창립하였다. 2016년에는 세계미학자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현재 미술이론의 김진엽 교수, 영미미학 및 매체이론의 이해완 교수, 사회미학의 신혜경 교수, 프랑스미학의 Peter W. Milne 교수, 동양미학 및 한국미학의 이정환 교수, 사진 및 영상미학의 박상우 교수, 서양고대미학의 권혁성 교수, 근대독일미학의 박정훈 교수가 재직하고 있어 8명으로 구성된 교수진을 갖추고 있다. 이에 바탕을 두고 미학이론, 음악이론, 미술이론 분야와 영상매체이론, 대중예술 분야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공연예술학 협동과정 등 여러 협동과정의 개설 및 운영에도 참여하고 있다.

국내에 유일하게 설치된 학부 미학과이자 전 세계적으로 드문 학과로 미학에 대해 깊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이 강점이다. 그러나 미학과가 단독으로 설치된 것이 일제의 영향이라는 점, 국내에서 미학이 철학과 독립적인 학문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대학원 미학과 중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다음으로 많은 대학원생이 재학 중이며 여학생의 비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위 연혁에서 보이듯, 인문대학 학과 중 가장 모진 부침을 겪었던 학과이다. 가장 주된 이유로는 전 세계적으로 철학의 분과학문에 불과한 미학을 단독으로 다루는 정식 학과가 학부과정에 설치된 대학의 예는 그 전신이 과거 일본 제국대학이었던 곳 외에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84]에서 '식민지배의 잔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식민지배의 잔재라는 비판이 적절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일단 일본 제국대학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을 바탕으로 식민지배의 잔재라고 주장은 되고 있다. 물론 대학에서 미학을 독립분과로 만들어놓은 것이 일제만의 독특한 독단이었다면 식민지배의 잔재라는 주장이 엄청난 힘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미학과 설립이 서구에서 전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판자들의 주장은 일본 제국대학이었던 곳 외에 미학과가 독립 분과인 곳은 찾아보기 힘들기에 일제의 잔재라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미학과가 독립 분과로 있는 곳이 적은 것은 당연하다. 일단 순수 인문학은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원래부터 그 수요 자체가 적다. 적을 수밖에 없으니 적은 것이다. 한국에 철학과도 사실 그 중요성에 비하면 현재 있는 대학 수가 많다고 할 수 없다. 4년제 인서울 대학교라면 전부 다 철학과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솔직히 말할 때 미학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철학보다 범위가 상당히 협소한 것은 사실인 미학과가 전세계적으로 그 숫자가 몹시 적은 것도 당연하다.

또 미학의 기원을 따지면 인문학 치고는 비교적 근대에 발생했으며 그 장소는 독일이다. 그 전까지의 원형, 원류야 당연히 이곳저곳에 흘러넘치도록 존재해 왔지만 본격적인 미학은 1700년대 중반에 독일인 교수 바움가르텐에 의해 창시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창시 이후 제대로 자리잡히기까지는 칸트와 헤겔 등을 거쳤다고 봐야 한다. 즉 1800년대 중반 독일에서야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매우 독일적인 학문이 미학이다. 당연히 독일을 제외한 다른 독자적 전통을 가진 유럽 여러 곳에서는 미학을 독립적 분과로 설립한 나라와 대학은 당시에 없었고 독일 내부에서도 1800년대 중반에서야 자리가 잡힌 미학과가 그 이후 새로 설립되어 있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일본이 영국, 프랑스, 독일에 시찰단을 보내 그들의 문물과 제도를 많이 참고했고, 서양철학 전통이 사실상 없는 일본이 그 과정에서 미학과 역시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해 제국대학에 설립한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흐름은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고 나서야 독일에서 어느 정도 학문으로서의 꼴이 생긴 미학, 그리고 미학과 - 그것을 받아들인 일본 - 이후 경성제대에 설립된 미학과라는 흐름인 것이지 다짜고짜 미학과가 있는 곳은 제국대학 말고는 거의 없으니 일제 잔재라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에 어두우며 유학이래봤자 미국 유학만 잔뜩 가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견식이 짦음을 드러내는 격이다.

근데 이게 말이 안되는게, 미학이 독립학과로 설치된게 옛날 일본만이 그랬으므로 일제의 잔재이고 비판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전형적인 NL식 일제 잔재몰이이다. 그렇게 따지면 일본식 학제인 정경대학을 유지하고 있는 대학들(고려대 등)도 일제의 잔재이며, 일본이 했던 학교와 관련된 정책들이 남아있는 학교들도 모두 일제의 잔재라고 비판받아야 한다. 일제의 잔재라는 표현은 일제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에 한해서만 해당되어야 하는 표현이지, 일본이 했던 게 남겨졌다고 무작정 일제의 잔재라고 몬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뜯어고쳐야 한다. 언어, 행정, 사법, 건축 등 어느 분야에서나 일본이 남긴 영향은 아직 미미하게나마 잔존하고 있기 때문다. 일례로, 최근 어느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자교의 교가가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것이니 일제의 잔재라며 직접 적곡해서 교가를 바꿔달라고 한적이 있다. 저 논리대로 따지면 이 주장도 정당한 주장이어야 한다. 하지만 누가 이걸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가?

그나마 현재 도쿄대학 등 일본 본토 대학은 미술사학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미학미술사학과'인 것을 감안하면 미학만을 단독으로 다루는 학과가 학부과정에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다.[85] 다만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도시샤대학에 철학과와 분리되어 미학예술학과가 설치되어있고, 미학 관련 학과들은 일본대학에 확실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에서 기원한 학문을 일제가 받아들여서 한국에 이식했으니 잔재를 없애는 차원에서 없애야 한다, 어차피 이 세계에 미학과는 일제의 영향 외에는 거의 없으니 그럴 만하다는 주장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 다시 말하는 바지만 이 세계에 미학과가 독립 분과로 아예 없는 전통과 경향이 강한 것이 영어권, 즉 미국과 영국이다. 그 외의 나라에는 드문드문 미학과나 예술학과가 따로 있는 대학들이 있다. 이 나라들도 일제의 영향을 받은 학과이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드시 미국과 영국의 제도를 본받아서 미학과를 없애야 하는가? 물론 미학과가 존치될 가치가 모자랄 수는 있겠으나 그 근거가 저 두 가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은 식견이 넓은 얘기라고 할 수는 없다. 재언하는 바지만 한국에 미학과가 독립된 분과로 존재할 가치나 이유가 아예 없을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고작해야 학부 과정으로의 미학과가 한국에 서울대 하나 있는데, 한국에서 이것마저 아예 없애버리고 미학 전통을 끊어버리자는 근거로서 저 두 가지가 과연 충분히 타당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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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계/연합/학생설계전공[편집]


서울대학교 학칙 제 77조 1항에 따르면 학부과정에서 학생이 소속한 전공(주전공) 이외에 다음에 해당하는 전공을 이수한 뒤 학위를 취득할 수 있으며, 이들은 하나의 독립된 정식 전공으로 간주된다.

  • 2개 이상의 학과(부)·전공이 연합하여 별도의 전공을 설치하는 연합전공
  • 학과(부)가 다른 학과(부)의 전공과 연계하여 교과과정을 확장 편성하는 연계전공(해당 학과 학생만 신청 가능)
  • 학생이 교과과정을 새로이 구성하여 관련 전공 교수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심의 후 학장과 총장의 승인을 받은 학생설계전공

연합전공은 하나의 독립된 전공으로 간주되어 연합전공을 이수할 경우 복수전공처럼 별도의 학사 학위가 주어지지만 자유전공학부가 아닌 이상 소속 학과(부) 전공을 이수하지 않고 연합전공을 단일전공으로 이수할 수는 없다. 한편 연계전공은 연합전공과 달리 부전공 개념이다. 학생설계전공의 경우 인문대 학생이 개설하기에 인문대학 소속 학생설계전공으로 인정된다.

인문대학에 공식 개설된 해당 전공들은 다음과 같다.

  • 연계전공 : 크게 지역학 전문가 육성을 골자로 하는 지역학 연계전공(러시아학, 라틴아메리카학 등)과 CORE 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연계전공(고전문헌학, 인문데이터과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 러시아학
    • 라틴아메리카학
    • 고전문헌학
    • 인문데이터과학
    • 정치-경제-철학

  • 연합전공 : 하단의 CORE사업 관련 내용 참고.
    • 동아시아비교인문학


6. 인문대 학생회[편집]


단과대학 학생회 슬로건: 멈출 수 없는 변혁의 심장, 행동하는 민중 지성[86]

학생회 싸이월드 클럽# 페이스북 계정#

전해년도 11월 선거에서 당선된 학생회를 기준으로 한다.

2010
제28대 관악 인문대 학생회
2011
제29대 관악 인문대 학생회
Action Again!
2012
제30대 관악 인문대 학생회
너와 내가 만드는 진짜 대안, ACT.U.ALL[87]
2013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직무대행 2013 반학생회장연석회의
2014
제31대 관악 인문대 학생회
당신을 위한 구체적 약속, 디테일[88](3월 선거)
2015
제32대 관악 인문대 학생회
당신이 꿈꾸던 인문대, 바야흐로[89]
2016
제33대 관악 인문대 학생회
당신의 바람을 담아, 한걸음[90]
2017
제34대 관악 인문대 학생회
변화를 위한 즐거운 눈맞춤, 마주보기
2017
2017 관악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
2018
2018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91]
2018
제35대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상상 속 대안을 우리의 현실로, PLAN A[92]
2018
2018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93]
2019
제36대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시작을 알리는 소리, 고동[94]
2020
제37대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당신과 함께 피어날 변화의 불씨, 불꽃
2021
2021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
2022
2022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
2023
2023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
2023
제38대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인문대에 울리는 새로운 소리, 울림[3월선거]
2024
2024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

학생회칙상 정식 명칭은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95]이지만, 주로 '관악 인문대 학생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96]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학생회가 광역 입학생의 반 배정을 담당한다. 2018년부터 '관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로 통일하였다.

2016년 11월 인문대 학생회장이 새터에서의 성폭력 사건 가해자로 지목되어 탄핵소추되었다. 이에 따라 학생회장은 자진사퇴하였다. 사건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아래 '사건 및 사고' 탭으로 옮겨서 서술하기 바란다.

새로 당선된 제34대 인문대 학생회장 또한 폭행과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인문대 단대운영위원회에서 사퇴를 권고하였다. 이후 학생회장과의 연락이 두절되자 제34대 인문대 학생회는 2017년 1월 초에 2017 관악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로 전환하였다. 한 달 정도 후 제34대 인문대 학생회장이 공식적인 사퇴문을 제출했으며, 3월 경에 제35대 학생회 선거가 진행되었으나 선거 기간 중 후보자가 성폭력 문제 제기를 받아 사퇴함으로써 역시 무산되었다. 이 사건의 해결 과정은 상당히 길어지고 있으며, 진상 조사 및 사건 정리가 완료되면 아래 '사건 및 사고' 탭으로 옮겨서 서술하기 바란다.

제36대 인문대 학생회 '고동'이 2015년 이후 4년 만에 처음으로 임기를 마친 학생회가 되었다.[97] 인문대학 7동 리모델링, 광역생 네트워크 사업, 인문대학 학생총회, 인문대 학생회칙 전부개정 등 4년 간의 공백 동안 학생회가 하지 못했던 사업들을 잘 이행했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인문대 학생회 홈페이지인 싸이월드 카페가 폐쇄되는 등의 이유로 회의록, 속기록 등은 아직 정리 중이라고 하며 학생회를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필요하지만 품이 많이 드는 사업들을 힘있게 추진했다는 점, 7년 만에 인문대 학생총회를 성사시켰다는 점 등의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19년 초 서어서문학과 A교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제36대 인문대 학생회는 학생회장 단식 투쟁[98], 4.2인문대학 학생총회, 5.27서울대학교 전체학생총회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A교수 파면 투쟁'을 진행했다. 결국 2019년 8월 30일 해당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해임된다. 서울대학교 성폭력 교수 파면 운동 중 운동을 통해 실제로 교수를 끌어내린 적은 이번이 처음. 이후 2학기에는 국어국문학과 P교수의 표절 논란이 있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P교수 파면 투쟁 역시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서어서문과 A교수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후 제37대 인문대 학생회 '불꽃'에서 P교수 투쟁을 이어받았으며 이후 2019년 12월 국어국문학과 P교수 역시 해임되었다.[99]

제37대 인문대 학생회 <불꽃>이 연장투표 1일차에 당선되었다. 서울대학교 커뮤니티 등에서 36대 학생회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사실무근. 전후임 회장단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 37대 인문대 학생회장 신귀혜, 부회장 김인우는 36대 학생회와 함께 서문과 A교수 파면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들이다. 선거에서 '인문위키 사업' 등 참신한 공약을 선보였다.

2020년 1월 제36대 인문대 학생회장 이수빈이 '서어서문학과 A교수 투쟁'의 지도부라는 이유로 서울대학교 학생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이에 인문대 학생회 및 A교수 투쟁을 주도한 학생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100] 사건 정리가 완료되면 아래 '사건 및 사고' 탭으로 옮겨서 서술하기 바란다.

2020년 11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인해 취소된 연례 인문대학 축제를 대체하는 목적으로 '2020 인문대학 가을 문화주간'이라는 전면 비대면 행사가 진행되었다. 보통 축제에 외부 인사를 초빙하지 못하던 인문대였지만 행사 마지막 날 학생회 유튜브 채널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성우 이용신을 초빙하여 온라인 공연을 진행하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2023년 3월에 <울림>이 선출되어 제38대 인문대 학생회가 구성되었다. 연장투표 없이 선출.

2023년 11월 정상적으로 제39대 선거가 치러졌으나 정후보가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타인을 사칭해서 익명으로 커뮤니티에 올리는(...) 사고를 치면서 선거운동본부가 말 그대로 폭발해 선거가 무산되었다. 연석회의가 꾸려질 예정

7. 동아리[편집]


  • 시소
인문대학 시 동아리.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을 읽고 이야기하는 동아리이다. 주로 2000년대에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시집을 읽는다. 매학기 초에 새로운 부원을 모집한다.
  • 야메(JAME)
인문대학 밴드 동아리로 남자보컬, 여자보컬, 건반, 베이스, 드럼, 기타로 구성되어 있다. 인문대 축제, 정기 공연 및 연합 공연 등에 참가한다.
  • 이스끄라
인문대학 축구부. 총장배 등등 연합 축구대회에 주로 출전. 가끔 모여서 축구하고 밥먹고 그런다. 단톡방도 그냥저냥 활발한 편.
  • 더샷
인문대학 농구부.
인문대학 소속 혼성 어반댄스동아리로 다양한 단과대학에 소속된 부원들이 활동 중이라고 한다. 매 학기 정기공연, 학교 축제의 폐막제, 거리 공연 등에 참여해 어반 댄스의 매력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 인문대 풍물패 너름새
서울대학교 단과대학풍물패연합 소속 인문대 풍물패이다.
  • 중화문화카페
중국인과 대화하며 교과서 상의 중국어가 아닌 '진짜'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어 실력을 키우고 싶은 중국인이 모여 교류하는 동아리라는 모토를 가지고 활동한다.
중국 대륙 출신의 원어민들과 대만/홍콩/기타 화교권 출신 원어민들 간에 은근한 알력이 존재한다.
  • 에스누레뇨스
서어서문학과 과동아리. 스페인어권 교환학생들과 스페인어로 친목도모를 한다.
  • 인문대 야구부
인문대학 야구동아리. 종합체육대회에 참여한다.
  • 외국어 연극제 (외연제)
상설 동아리는 아니지만, 중어중문/독어독문/불어불문/노어노문/영어영문/서어서문학과는 매년 여름방학 즈음 배우와 스태프를 모집하여 2학기 초반인 9월에 외국어로 연극을 올리는 축제를 연다. 이 때 참가는 반드시 해당 학과 소속이 아니어도 되고 심지어는 사범대, 자연대나 공대 등 타 단과대학에서도 꽤 많이 참여하지만, 배우의 경우 외국어로 모든 대사를 외워야 하기에 적어도 여름방학의 상당부분을 연극에 올인해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연극을 같이 꾸린 멤버들끼리는 끈끈한 사이가 되기에 대학생활 내내, 그리고 종종 졸업 이후에도 가장 절친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계기가 되고는 한다. 일례로 중어중문학과의 경우는 "화양연화"가 외연제를 담당하고 있으며, 불어불문학과는 떼아뜨르 빵따스띠끄가 있다.


8. 사건 및 사고[편집]



8.1. 2015 새내기새로배움터 새터비 도난 사건[편집]


201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새내기새로배움터를 2015년 2월 14~16일에 진행한 후, 당시 새터에서의 응급의료비 명목으로 인출한 100만원 중 영수증이 존재하는 10만원 정도를 제외한 금액과 새터에서 받은 인문대학 학장단 격려금 50만원을 합친 약 143만원의 현금을 인문대 학생회실에 두었다가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다. 인문대 학생회는 이 사실을 인문대 단과대학 운영위원회 및 각 반 새터책들에게 공지하였으며, 학장단에도 알리고 관악경찰서를 통해 CCTV를 확인하기까지 했으나 인물 특정이 어려워 범인 찾기에 실패했다. 당시 단과대학 운영위원회에서는 공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총책임자였던 제32대 인문대 학생회장이 책임을 지고 사비를 이용해 해당 금액을 모두 채워넣기로 의결했다. 인문대 학생회장은 연초의 이 사건 때문에 이후 임기를 인턴 활동을 병행하며 월급을 떼어 돈을 모았고, 결국 2015년 11월 경 완납했다. 일반적으로 새터를 다녀온 후 남은 금액을 인문대 학생회에서 각 반들에게 환급해주는데, 143만원 도난 때문에 당시 새터 직후에 이것을 진행하지 못했었다. 인문대 학생회장이 2015년 11월에 해당 금액(실 지급액 과/반별 9만원으로 144만원, 실제로는 동아리지원금까지 157만원)을 모두 채워넣은 후, 환급도 함께 진행되었다. 현금 143만원 절도가 누구의 소행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8.2. 2016학년도 1학기 수강신청 대란[편집]


서울대학교 수강신청은 재학생/신입생 순으로 진행하며, 새내기가 대거 입학하는 1학기에는 과목마다 재학생/신입생 비율이 정해져 있다. 교양 수업의 경우 재학생 50%, 신입생 50%가 기본이며(과목에 따라 재학생 70%인 과목도 있다), 전공의 경우 1학년 전공을 제외하면 재학생 비율 100%인 경우가 많다. 수강신청 사이트 상으로 나타나는 정원은 정원(재학생)의 문법을 따른다. 따라서 모 과목의 정원이 40(20)으로 나와 있다면 해당 과목의 정원은 40명이며 재학생 정원은 20명이라는 뜻. 수강신청은 홀수 학번/짝수 학번(입학년도가 아니라 학번 전체의 마지막 자리) 순서대로 진행되므로 정원 20명인 교양 강의가 있다면 수강신청 첫날 홀수 학번 재학생의 정원은 20명 X 50%의 절반인 5명이 된다. 대개 수강신청은 닷새 동안 진행되는데, 첫째날은 홀수 학번, 둘째날은 짝수 학번이 수강신청을 하고 셋째날 부터는 학번 제한 없이 수강신청을 하게 된다.[101]

서울대학교 항목에 나와 있듯 2015학년도 2학기 수강신청 첫날 서버가 터지면서 홀수 학번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015년을 풍미한 수저 드립과 함께 홀수저/짝수저 드립까지 탄생하였을 즈음에, 2016학년도 1학기 수강신청에서 기어이 또 사고가 터지고 만다.

학교 측(책임 소지자가 중앙전산원인지 인문대 행정실 담당자인지는 모른다)이 인문대학 개설 전공 교과목의 재학생 정원을 설정해놓지 않은 까닭에 서울대학교 학생 전체가 인문대학 개설 전공 교과목을 수강신청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강신청이 시작되는 7시 직후 커뮤니티 사이트와 SNS에는 수강신청에 실패한 학생들의 불만+공황이 속출하였으며, 전공을 못 넣어서 멍때리다가 교양까지 덩달아 놓치는 사태도 빈발하였다. 특히 전공과목 위주로 수강신청을 하게 되는 인문대학 재적 고학년 학생들의 피해가 컸다.

사태가 벌어진지 1시간 쯤 되어서 인문대학 측에서는 둘째날 둘째날 짝수 학번의 인문대학 개설 전공 교과목 수강신청 제한 + 셋째날 전체 학생이 인문대학 개설 전공 교과목 수강신청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인문대 홀수 학번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교양+전공을 한번에 수강신청해야 하는데 전공이 망하면서 교양 수강신청까지 덩달아 망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짝수 학번의 경우 둘을 따로따로 수강신청하게 되어서 홀수 학번의 불이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수강신청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초안지의 경우 교수 재량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이 커서 불이익을 만회할 수 없다는 점 등이 불만으로 제기되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피해를 입은 대상은 2016학년도 1학기 기준 서울대학교 재학생으로서 인문대학 개설 전공 교과목을 수강할 계획이 있었던 모두이지만 해당 내용이 인문대학 항목에 작성된 이유는, 이 사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다름아닌 인문대학생들(그 중에서도 홀수 학번)이기 때문임을 밝힌다.


8.3. 2016년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과 논란[편집]


교육부는 2016년 대학 인문학 발전 계획에의 재정 지원을 위한 450억원 규모의 이른바 CORE사업을 기획했고 서울대를 포함한 16개 대학의 인문대학을 선정하였으며, 서울대 인문대는 이 중 37억원을 할당받았다. 크게 연합전공 동아시아비교인문학, 연계전공 고전문헌학, 인문데이터과학, 정치-경제-철학 등 총 4개 전공의 신설과 대학원 석사과정 및 대학원 진학예정 본교 학부생을 위한 장학금지금 및 연구지원프로그램 용도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예컨대 일부 학생들은 이 사업 자체가 소위 "산업수요와 교육과정의 괴리론"을 들고 나온 현 정부가 취업률이라는 지표를 두고 인문학을 평가하기 위해 벌이는 사업이기에 "인문학의 위기"를 외려 심화시킬 것이며, 정부에 의해 대학교육의 자율성과 공공성 또한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오랜 기간 사업 저지 투쟁을 벌여왔다.

2016학년도 가을학기 현재 사업의 부작용이 일부 현실화되고 있다. 먼저 인문대학은 오래전부터 국어국문학과, 국사학과, 국악과 등이 참여한 연합전공 한국학 내지는 연계전공 문학과철학 등 연합(계)전공들을 상당수 '학생수부족'등의 이유로 폐지시킨 바 있다. 기존에 있던 전공들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인문대학이 고고미술사학과 세부전공(고고학, 미술사학)의 전공 분리를 통한 전공 교육의 내실화 같은 방안도 아니고 오히려 기존의 부차적인 연합(계)전공들보다도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치-경제-철학', '동아시아비교인문학' 등을 급조하는 형식으로 예산을 낭비한 것이다. 실제 연계전공 정치-경제-철학에 그나마도 29명이 선발된 것에 비해 연합전공 동아시아비교인문학에는 단 3명만이 지원했다. 이외에도 연계전공 인문데이터과학에서는 '피자세미나'라는 실소를 금치 못할 예산낭비쇼를 보여준다고 버젓이 광고하기도 했다.

장학지원의 경우에도 졸속행정이 맹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예컨대 사업 발표 직후 인문대학 부학장은 타 장학금과 중복지원이 가능하다고 했으나 순식간에 중복불가로 방침을 바꿔 학생들의 혼란을 야기했다. 또 홍보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102] 대학원 진학예정자 장학금의 경우 재공고만 3번이나 났다. 모름지기 장학금선정 발표라는 것은 등록금 조달 문제에 학생들의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에 학기 시작 직전, 예컨대 8월 말 등록기간에는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데 이 재공고 때문에 발표일이 기한없는 '9월초'로 미뤄졌고, 9월 첫째주에 언제 발표나냐고 문의를 하니 셋째주에 심사가 시작된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결론적으로 둘째주에 최종결과가 발표된 황당무계한 경우도 있다.


8.4. 2016년 아우토반 카톡방 언어성폭력 사건[편집]


2016년 7월 11일, 독문과 과반인 아우토반이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와 해당 반 피해자 대책위원회로부터 카톡방 언어성폭력사건을 고발당했다.[103] 고려대학교에서 단톡방 사건이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하였기 때문에 논란이 일고있다.

이후 해당 반 학생회와 피해자 대책위원회, 인문대학 학생회, 총학생회가 참여한 '서울대 인문대 X반 단체카톡방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기자회견 해당 공대위는 첫째, 피해 학생의 인권 회복 및 보호, 둘째, 가해 학생의 반성과 책임 요구, 셋째, 대학당국의 책임 있는 조치 요구, 사건발생 공동체의 자정적 극복, 다섯째, 학생사회 차원의 교훈 마련을 목표로 활동한다.

최근 해당 학생들의 사과문이 걸렸고, 이들은 적절한 징계조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9. 여담[편집]



9.1. 2004년 학제 개편안[편집]


정운찬 총장 및 이태수 학장 재직 당시 입학정원 감축 등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 인문대학에서도 학제 개편안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대학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그 개편안의 핵심적인 부분은 대략 아래와 같다.

  • 국어국문학부 - 존속 (국어국문학과)
  • 영미어문학부 - 존속 (영어영문학과)
  • 언어학과 - 존속
  • 역사고고학부 -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고고학과[104]
  • 동아시아어문학부 - 중어중문학과, 일본어문학 [105]
  • 철학종교학부 - 철학과, 종교학과, 미학철학 [106]
  • 예술학부 - 미학과, 음악학과, 미술사학과, 대중예술학 [107]
  • 유럽어문학부 -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노어노문학과, 서어서문학과, 이태리어문학, 슬라브어문학 [108]

사학과 통합, 구미 어문계열 편중극복, 음악학과 신설 및 미술사학과 승격을 통한 예술 학문 진흥 등 인문대학 발전에 꼭 필요한 혁신적인 방안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무리한 기존 학과 통합이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과적으로 혼란만 가중시키면서 학과장회의도 통과되지 못했다. 10년이 흐른 지금 일부가 다른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예컨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신설과 사학계열 학과 통합 등이 있다.

한편 정운찬 총장은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을 학부대학 형태로 바꾸고 그 이외의 단과대학은 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하는 학부대학(University College) 체제를 구상하였고, 이태수 당시 학장도 동의하였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9.2. 역사학 계열 학과의 세분화와 통합 논의[편집]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대학 30년사>, 2005에 따르면,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및 단과대학 재편 과정에서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 교수가 모여 어느 단과대로 갈지 표결했는데, 인문대로 가는 쪽이 사회대 쪽보다 한 표가 많아 인문대 소속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대에 역사계열 학과 통합 투표에서도 한 표 차로 부결되어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는 살림을 따로 차리고 있다.

1969년 삼사과 분리 이후 삼사과 통합 떡밥은 심심하면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분리 이후 세 학과의 학풍이 워낙 차이가 나서[109] 어떻게 될 지는 미지수. 학내 자치언론 <서울대저널> 104호에 따르면, 2000년대에 들어서 삼사과 통합 논의가 두 차례 이루어졌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삼사과 교수 투표는 2005년에 이루어졌으며 교수회의 결과 27인 중 17인이 찬성, 통합안 가결 정족수인 18표에 한 표차로 미달되어 부결된 적이 있다. 기사에 실린 서양사학과 교수의 인터뷰에 따르면 "찬성이 다수지만, 반대가 굳건한 소수"라며, 교수진 설득이 우선이라고 밝혔으며, 당시 인문대 학장이던 변창구 교수도 인문대 내에서는 통합의 필요성이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삼사과와 인문대 내 분위기는 통합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인터뷰가 나온 지 4년이 넘은 지금까지 삼사과 통합 논의는 요원한 듯하다. 결국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가 사학부통합된다고 한다. 고고학 전공도 상고사 일환으로서 사학계열에 포함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의견이 있으나, 원래 문리대 '고고인류학과'로 창설되었던 전공이었고, 역사뿐만 아니라 물질문명이나 동물고고 등 사회/자연과학적 성격이 강한 분야도 연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학계열로 엮이기에는 모호하다.

하지만 삼사과 통합안이 가결되었다는 기사가 뜬 이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통합 절차는 요원해보인다. 다만 2017년부터 '삼사과 통합과목'이 2학기에 1과목 신설되어 운영되는 중이고, 세 학과에서 돌아가며 운영하며, 각 과에서 나눠서 강의, 토론, 과제, 시험을 진행한다. (2017, 2018년에는 한국사특강2, 2019년에는 역사학 세미나 이름으로 개설) 2018학번부터는 이 강의가 삼사과 막론하고 전공필수가 되었는데, 통합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보인다.

드디어 2023년에 삼사과를 역사학부로 통합하기로 결정되었고 학칙 개정도 완료되었다. 다만 "학과"가 아니라 "학부"로 통합되어 역사학부 안에 한국사학전공, 동양사학전공, 서양사학전공이 존재해서 2학년 때 세부전공으로 진입하는 형태로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통합이 학부생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인문대 특성상 본래부터 1학년 때는 대체로 전공과목을 많이 수강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으로 보기에는 그냥 삼사과 통합 과목이 몇 개 더 생기는 수준일 것으로 보인다.


9.3. 언어덕후의 천국?[편집]


매우 다양한 제2외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목록은 다음과 같다. 순서는 학과 순이다.

◎: 전공 과목으로만 존재하는 언어[110]
★: 초급1-초급2-중급 커리큘럼이 아니라 1-2 커리큘럼만 존재하는 언어[111]
☆: 단학기 과목
†: LAB 실습 없음

  • 중국어 (중어중문학과)
  • 한문† (중어중문학과)
  • 프랑스어 (불어불문학과)
  • 독일어 (독어독문학과)
  • 러시아어 (노어노문학과)
  • 스페인어 (서어서문학과)
  • 포르투갈어★ (서어서문학과)
  • 몽골어☆ (언어학과)[112]
  • 이탈리아어★ (언어학과)
  • 스와힐리어★ (언어학과)
  • 핀란드어★ (언어학과)
  • 만주어◎☆† (언어학과)
  • 루마니아어◎☆† (언어학과)
  • 헝가리어◎☆† (언어학과)
  • 히브리어◎★ (언어학과,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113]
  • 일본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일본 언어문명전공) [114]
  • 말레이-인도네시아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동남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베트남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동남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태국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동남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힌디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인도 언어문명전공)
  • 산스크리트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인도 언어문명전공)
  • 아랍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터키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페르시아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고대 이집트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수메르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아카드어◎☆†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
  • 라틴어★† (협동과정 서양고전학[115] → 연계전공 고전문헌학[116]
  • 고전 그리스어★† (협동과정 서양고전학 → 연계전공 고전문헌학)

이 중 루마니아어헝가리어는 언어학과의 '특수언어특강'으로, 고대 이집트어, 수메르어, 아카드어 등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고대)서아시아 언어의 세계'에서 학기에 따라 배우게 된다. 예컨대 이번 학기에 특수언어특강이 루마니아어 강의로 개설되었다면 그 다음은 헝가리어 강의로 개설되는 식. 참고로 핀란드어와 페르시아어 역시 특수언어특강에서 다루던 언어였지만 각각 언어학과 교양,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전공과목으로 재편되면서 핀란드어1, 2 및 집중페르시아어 1,2(및 강독) 과목으로 변경되었다.
[1] 구 국사학과.[2] 동양사학과.[3] A B 구 서양사학과.[4] 9동은 원래 사범대학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왜냐하면 14동이 한동안 리모델링하느라고. 일부 학과 강사실이나 대학원생 연구실이 있다. 가뜩이나 과도 많은데 건물 수도 적은 사범대학의 반응은 강력반발 혹은 무관심 사이인듯. 왜냐하면 설치 학과는 가장 많은 단과대학이지만 학과당 학생수가 가장 적은 단대이기 때문[5] 행정실은 원래 5동에 있었음[6]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음악학과(구 작곡과 이론전공) 및 대학원에서 음악학(Musicology, 음악미학 Music Aesthetics 포함) 분야, 음악이론(Music Theory) 분야, 그리고 음악사학(Music History) 분야로 구성된 3대 “음악을 책으로 공부했어요“ 분야를 모두 담당하고 있다. 과 이름을 잘 봐야 하는데, 음악(Music)학과가 아니라 음악학(Musicology)과이다! 학사과정의 음악학과(구 작곡과 이론전공)는 오래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독보적인 이론연구 노선을 타고 있다. 그들은 다들 연습하는 소리를 내는 음악대학에서 자기들만 조용히 책을 읽고 연구를 하자니 위화감이 들며 마치 인문대생이 음대 건물을 빌려쓰는 것 같다고 하소연을 하고, 실기전공 학생들과 수업도 거의 안 겹치니 교류할 기회가 적어서 인문대 지방캠마냥 따로 다니기 쉽다. 한편, 실기전공은 학사과정의 경우 기악과, 성악과, 관현악과, 작곡과, 국악과에서 각각 레슨과 이론교육을 잘 섞은 컨서바토리 방식으로 운영하지만, 대학원 석박사는 실기전공으로 지원해도 자동으로 하나의 큰 “음악과”(구 대학원 음악학과) 소속으로 입학해서 논문연구를 한다.[7] 아시아언어문명학부도 공식적으로는 어문계열로 취급된다.[8] 이 경우 고고미술사학과는 역사학계열, 종교학과는 철학계열로 취급된다.[9] 영미권(Rens Bod : A New History of the Humanities - The Search for Principles and Patterns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Oxford :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및 독일어권(Helmut Reinalter · Peter J. Brenner : Lexikon der Geisteswissenschaften - Sachbegriffe, Disziplinen, Personen. Wien ; Köln ; Weimar : Bohlau Verlag, 2011, XX-XXI)의 최신 인문과학 편람 등을 봐도 문사철 구분 개념은 전혀 보편적이지 못하다.[10] 2016년 기준으로 지역균형선발전형, 기회균형선발특별전형 I, II, 정시 일반전형 학생들이 광역으로 입학한다.[11] 과반체제에 대해서는 이곳 참조.[12] 이는 인문대의 기형적인 성비에 기인한다.(2015학년도 신입생의 성비는 약 2:3이다.) 대체로 어문계열은 여초, 사철계열은 남초인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면 전공예약생 중에 남자가 없는 과도 나타난다. 각 과반의 성비 균형을 위해 아직 전공이 정해지지 않아 어느 반으로 가도 자유로운 학생을 성비에 따라 배분하게 된 것이다.[13] 단 1946년의 경우, 문리과대학을 3부로 구분하여 운영했는데, 각각은 제1부 문학부, 제2부 사회과학부, 제3부 이학부로 구성되었다. 사상, 역사 계열 학문을 사회과학으로 분류한 것이 특징이다.[14] 법과대학은 사실상 경성법학전문학교가 후신이며, 경성제대 법문학부 소속 학생/교원은 거의 전부가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문리과대학에 남겠다고 하면서 문리과대학에 정치학과를 창설하여 소속을 문리대로 옮겨버렸다(상세내용은 문리대-법대 강의실 분쟁 참조). 또한 공과대학의 경우는 경성제대 이공학부 공과 계통(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광산야금학과, 응용화학과 등)을 졸업한 조선인은 극소수였던 데다가(이공학부는 1941년에 설치되어 1945년 9월까지 단 3회의 졸업생을 냈는데, 일제 말기 대학생 징병유예가 폐지되면서 내지의 일본인 학생들까지 전부 이/공학 전공으로 몰리는 통에 50%에 가까웠던 법문학부나 30% 가량의 의학부와 달리 조선인 비율이 10%대에 불과했다. 반면 오랜 역사를 가진 경성고등공업학교와 경성광산전문학교에서는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했기 때문에 광복 후 공과대학 설립 과정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세로 주도권을 쥐었다.[15] 창립 초기 경성제대 출신 이인영 교수의 위상이 높았으나 한국전쟁으로 납북되었고, 이후 와세다대학 출신의 이병도 교수와 함께 경성제대 출신 류홍렬 교수가 중심이 되어 제자들을 양성했다.[16] 서울대학교 학생안내(1963)[17] 이는 특히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의 구한말 제중원-관립의학교 논쟁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18] 2012년 말(2013년 입시부터 적용) 학과제 전환 후 난장반이 해체되었고, 이후 국문과 학생회가 새로 조직되었다. 현재는 그냥 '국문과반'으로 부른다. 이후 고고미술사학과/공명반 학생회와 비슷한 시기인 매년 9월 경에 선거를 진행하고 있다.[19] 김형규 교수는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 역임.[20] 서울사대부속중학교 교장[21] 구제 휘문중학교 교사(1940~1941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1946~1949년), 한국전쟁 중 사망.[22] 휘문고보 교사, 성균관대학교 교수[23] 연희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1967년 문학박사(국내 최초 중문학박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중국문학)[24] 법문학부 문학/사학/철학과 진학반인 문과을류 기준으로 주당 수업시수가 영어 14시간, 독일어 10시간, 프랑스어 8시간이었다고 한다. 한국영어학학회의 논문 한국의 영어학: 그 과거와 미래 참조.[25] 이충우 저「경성제국대학」(1980)에 따르면 옥스퍼드 대학교 출신으로 영문학사를 가르치다 1935년 원래 있었던 인도의 대학으로 돌아갔다고 한다.[26] 런던대학 출신으로 경성제대 예과교수로 있다가 일본인 처와 함께 1940년 오늘날 가나자와대학의 전신인 제4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태평양전쟁 개전 후 적국민이 되면서 고베의 외국인수용소에 갇히기도 했다. 1945년 종전 후 일본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영문과 교수를 지내며 아키히토 천황(당시 황태자)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링크 참조.[27] 법문학부 문학/사학/철학과 진학반인 문과을류 기준으로 주당 수업시수가 영어 14시간, 독일어 10시간, 프랑스어 8시간이었다고 한다. 한국영어학학회의 논문 한국의 영어학: 그 과거와 미래 참조.[28] 그는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프랑스어학교(법어학교, 또는 불어학교) 조선에 고빙되어 대한제국군 군악대장으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의 맏딸과 1905년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 링크 참조.[29] 법문학부 문학/사학/철학과 진학반인 문과을류 기준으로 주당 수업시수가 영어 14시간, 독일어 10시간, 프랑스어 8시간이었다고 한다. 한국영어학학회의 논문 한국의 영어학: 그 과거와 미래 참조.[30]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대학 진학을 위해 외국어 학습은 필수적이었고 매우 강조되어 경성제대 예과에서는 이과(의학부 진학반)는 독일어를 제1외국어(영어가 제2외국어)로, 문과(법문학부 진학반)는 독일어를 제2외국어(영어가 제1외국어)로 주당 10~12시간씩 수업을 편성했을 정도였다고 한다.[31] 전공이 오늘날의 '학과' 개념. 일본식 구제 학제 특히 제국대학은 강좌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과가 행정적 구분에 불과했다.[32] 일제가 패망하고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개편되면서, 일본 등 해외에서 대학을 다닌 학생의 편입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이 시기 여러 학과와 전공이 증설되었다.[33] 1945년에 이미 학과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34] 러시아의 한자 표기인 '노서아'에서 '노'자가 露여서 이슬반이 되었다.[35] 세르게이 비사리오노비치 치르킨(Сергей Виссарионович Чиркин, 1879–1943)은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졸업 후 러시아 외무성 부설 동방어학교에서 아랍어를 전공하고 테헤란 등 주로 이란에서 근무하던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이었다. 그는 봄베이 영사관을 거쳐 1911~1914년 경성 주재 러시아영사관에서 부영사로 근무한 바 있는데,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조선으로 와서 백계 러시아인으로 거주하면서 1930년부터 1943년 사망시까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러시아어 강사로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서는 그의 경성제대 재직 연도를 1924–1943년으로 표기하고 있으나「러시아연구」제25권 1호에 실린 김진영의 논문 일본유학생과 러시아문학에서도 1930년에 러시아어강의가 '법문학부'에 개설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경성제대 졸업생인 조용만의 회고에서도 1930년에 러시아어 수업이 처음 개설되었다고 하고 있어 이를 따랐다. 이충우 저「경성제국대학」에서 치르킨의 러시아어 강좌를 가장 열성적으로 듣던 학생이라는 김수경에 관해서는 논문 참조.[36] 이후 권 교수는 중도에 퇴임하고 다시 모교인 외대에 부임해 정년을 맞았다.[37] 고려대학교 언어학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충남대학교 언어학과, 부산대학교 언어정보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언어인지과학과.[38] 이는 다른 학과 및 다른 대학에서도 똑같은데, 아무리 커리큘럼이 표준화되었다고 하여도 학교별로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형태의 기본지식이 다르고 대학원 과정에서는 이 기본지식을 전제한 상태에서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 이상적이기 때문이다.[39] 통사론을 맡는 고희정 교수의 경우 추가 수강 신청을 절대 받아주지 않으므로 조심해야 한다.[40] 제일 큰 문제는 이게 솔루션도 없다는 것.[41] 선형 대수학, 미적분, MLE, 엔트로피를 비롯한 정보 이론들의 기초 개념, 확률·통계학 지식, 데이터 구조 등등에 대해 알고 있어야 몸이 편하다.[42] 수업 막바지에 이르면 머신러닝을 이용한 NLP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물론 중간 과제의 형태로 딥 러닝의 여러 모델들을 직접 구현해 와야 한다.[43] 라틴어, 고전 그리스어의 경우 협동과정 서양고전학 과정에서 수업을 개설한다.[44] 2016년 1학기부터 교양 제2외국어 수업으로 개편되었다. 기존 특수언어특강에서는 가르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특수언어특강 언어는 루마니아어.[일어일문학] A B 일본제국의 국어국문학으로 일어일문학에 해당.[45] 특히 정치외교학부와 인류학과[46] 일본사를 의미한다.[47] 인문대학 공식 사이트의 조직도 및 각 전공 사이트는 여전히 학과 체제다. 쉽게 말해서 세 학과를 하나의 학부로 통합하고 명목상의 분류 체계만 남겨놓은 것이다. 이전까지 독립적이었던 세 학과가 역사학부라는 하나의 학부에 종속된 것.[48] 구 국사학과.[49] 예과부장 겸임[50] 일본에서 1933년 마쓰모토고등학교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동격의 경성제대 예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법문학부로 입학하여 사학과를 1937년 졸업하였다.[51] 강진철(姜晉哲)로 개명.[52]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다시 부임.[53] 한국사학 전공의 규모가 큰 고려대 한국사학과의 경우도 전임교수가 8명에 불과하다.[54] 동양사학과.[중국사전공] [일본사전공] [55]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성동고, 경기고 교장을 역임했으나 납북.[56] 동래고보 출신으로 1931년 학부 졸업논문 "동양사 상에서 흉노민족의 흥망성쇠에 대하여(東洋史上に於ける匈奴民族の興亡盛衰に就いて)"를 「신흥」게재했으며 해방 후 납북 추정.[57] 다만 중국사만 권한 것은 아니다. 김호동 교수에게 중앙아시아사를 권한 것도 그였다고.[58] 대표적으로 고 김성칠 선생의 아들인 역사학자 김기협이 있다. # [59] 이건 약과였고 구범진교수가 시간강사이던 2004년 서울대 첫 강의에서는 아예 청나라 기밀문서인 군기처 주비유접 해석이 주가 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이 수업은 강독수업도 아니었다.[60] 2차 세계대전 관련 일본 정부 문서는 가타카나로 잔뜩 적혀있고 한자 사용도 괴리가 꽤 있다. 현대 일본어를 잘 안다면 현대 일본어로된 서적을 참고할 수 있으니 원문만 죽어라 번역할 필요는 적다.[61] 구 서양사학과.[62] '역사를 바꾸는 동력'이라는 슬로건은 2016년 공모를 통해 선정되었다.[63] 1926.3.31 조선총독부 칙령 제47호 '京城帝國大學各學部의講座의種類및그數에關한件' 참조[64] 1927년 6월 1일부 조선총독부 칙령 제154호에 따라 법제상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서양사학강좌가 부설되었으나 실제로는 경성제대 창설 당시 서양사학강좌 교수로 내정된 金子光介가 1926년부터 조선총독부 재외연구원 자격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1928년 1월부 조교수 임명을 받고 이어 4월부로 교수로 승진임명 되어 출근하면서 서양사학강좌가 시작되었다.[65] 당시 서양사학강좌에서는 서양사강좌·서양사개설·서양사학개설·서양사학강좌·특수테마강좌 등 학기마다 2개 수업 정도가 개설되어 국사학·조선사학·동양사학강좌 등 타 분야 대비 규모가 작고, 졸업생을 배출하는 개별전공이 되지는 못했다. 경성제대 자체가 동양연구의 중심지를 표방하며 설립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양사학강좌는 전문적 연구보다는 교양교육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타 제국대학 중에는 서양사학강좌 자체가 설치되지 않은 곳도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권윤경,「식민지 도서관과 이식된 근대」, pp.215~216.[66] C+부터 재수강이 가능하기에 B-를 받으면 학점을 만회할 수가 없다.[67] 서울대 교수들의 정치성향을 가장 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탄핵정국의 서울대 교수 시국선언 명단인데, 보수-우파 측으로 꼽히는 전자의 3명은 다 빠졌고, 진보-좌파 측으로 꼽히는 후자의 3명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68] 다만 박지향 교수도 미국 유학 전까지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으며, 배영수 교수 및 안병직 교수도 90년대까지는 진보적인 색채를 띄고 있었다.[69] 이인호 전 교수마저도 부친의 친일 경력 논란이 일면서 급격히 보수화되기 전까지는 학교 안에서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로 유명했다고 한다.[70] 이 중 노문사적강독은 연계전공 러시아학 개설 과목이다.[71] 영문사적강독 1, 영문사적강독 2 중 한 과목을 필수로 수강해야 한다.[72] 원래 이전에 고대 그리스사를 전공한 양병우 교수가 있었으나, 학과별 교수 정원 제한 문제로 인해 이후 양병우 교수 퇴임 이후 서양사학과에 더 이상 서양고대사 후임 교수가 충원되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서울대에서 서양고대사 강의 및 연구는 서양사학과 대신, 허승일 교수 이래로 로마제국사를 중심으로 서양고대사 전공 전임교수가 존재해 온 사범대 역사교육과가 담당하고 있었다.[73] 문제는 이 주장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칸트 번역서를 출판해버렸다. 기존에 '초월적'이라는 말도 이미 쓰고 있었기에, 이 부분은 '초험적'으로 번역했다. 주류 학자들의 번역서와 백종현 번역서의 용어가 서로 섞여있는 상태라 공부하는 학생들은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부분이다.[74] 법문학부장 겸임[75] 제1강좌 담임교수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74], 제2강좌 담임교수 미야모토 와카치(宮本和吉), 제3강좌 담임교수 다나베 시게조(田邊重三), 제4강좌 담임교수 요코야마 쇼자부로(橫山將三郞)[76] 제1강좌 담임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제2강좌 담임교수 가토 조켄(加藤常賢)[77] 강좌 담임교수 시마모토 아이노스케(島本愛之助)[78] 강좌 담임교수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79] 제1강좌 담임교수 우에노 나오테루(上野直昭), 제2강좌 담임교수 다나카 도요조(田中豊藏)[80] 제1강좌 담임교수 하야미 히로시(速水滉), 제2강좌 담임교수 구로다 료(黑田亮), 제3강좌 담임교수 후쿠토미 이치로(福富一郎), 제4강좌 담임교수 아마노 도시타케(天野利武)[81] 강좌 담임교수 아키바 다카시(秋葉隆)[82] 강좌 담임교수 마쓰즈키 히데오(松月秀雄)[83] 서울대 인문대 30년사에는 46년 설치된 기록이 있다. 서울대 공식기록물인 서울대학교 40년사, 서울대학교 50년사에 미학과가 문리대 소속으로 '창설'됐다는 기록이 전무하다.[84] 일제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에는 미학미술사 강좌조차 개설되지 않았다.[85] 홍익대학교 미학과는 일반대학원 과정이며(그나마 관련 학부는 '미대' '예술학과'), 영남대 역시 대학원 과정에 미학'미술사학과'가 있을 뿐이다.[86] 멈출 수 없는 변혁의 심장과 달리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87] 전국학생행진 계열이 이 때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인문대 학생회를 수권했다. 주로 미학과/모반 학생회와 국사학과/새날반 학생회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모날왕조'라는 별명을 얻었다.[88] 이 시기 총학생회와 같은 계열로 볼 수 있으며, 선본 이름도 같은 '디테일'이었다.[89] 제31대 인문대 학생회장이 재출마를 위해 선거 직전에 사퇴하여, 잠시 동안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 직무대행 2014 반학생회장연석회의'가 꾸려졌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선본으로 당선.[90] 제33대 인문대 학생회장이 '201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새내기 새로배움터 성폭력 사건' 가해자로 지목되어 2016년 11월 7일에 자진사퇴하여, 잠시 동안 '2016 관악 인문대 학생회 반학생회장연석회의'가 꾸려졌다.[91] 2018년부터 '관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라는 이름을 사용한다.[92] 제35대 인문대 학생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했다.[93] 제35대 학생회장의 사퇴로 2018 연석회의가 다시 꾸려졌다. 2018년 연석회의 의장이 제36대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다.[94] 4년 만에 임기를 끝까지 마친 학생회가 되었다.[95] 2019년 제36대 인문대 학생회의 회칙 전부개정 사업에서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회'를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96] 사회대 학생회도 마찬가지로 '관악 사회대 학생회'라는 명칭을 즐겨 쓴다.[97] 위에 언급했듯 제33대, 34대, 35대 학생회장이 연이어 사퇴했기 때문이다. 제32대 인문대 학생회 '바야흐로' 이후 처음으로 임기를 마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몇몇 인문대 학생들은 32대 인문대 학생회장의 이름을 따 '이은호의 저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2019년에 '이은호의 저주'를 깬 것이다.[98] 15일 간 진행되다 당시 학생회장 이수빈의 건강이 악화되어 중단되었다.[99] 국어국문학과 P교수 사건은 2015년부터 표절의 피해자 및 제보자가 대자보를 붙이고 '표절 자료집'을 발행하는 등 인문대 내의 고질적인 문제였다.[100] 관련기사 : #, # 등.[101] 이는 접속을 분산시켜 서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이다.[102] 물론 지원자 자체가 적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103] 물론, 위에서 언급된 과반체제에 따라, 아우토반 소속 학생이 반드시 독문과 소속인 것은 아니다.[104] 고고학과를 제외한 3개 사학과는 이후 역사학부로 통합되었다.[105] 하버드대학교 문리과대학 동아시아언어문명학부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일문과 신설을 골자로 했었다. 이는 2013년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신설로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106] 당시 종교학과 교수들이 종교학은 철학에 비해 경험과학적 성격이 강해 철학과와 엮일 수 없다고 반발하였다.[107] 인문대학 사상 첫 음악학과 신설 및 고고미술사학과의 전공 분리를 골자로 하였다. 대중예술학의 경우는 2002년 설치된 대학원 협동과정 공연예술학을 학부 단계에 설치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108] 이렇게 되면 2학년 때 가서야 전공 언어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어문계열 교수들이 강력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109] 밑의 동양사학과와 서양사학과 설명을 읽어볼 것. 반면 국사학과는 원하기만 한다면 상대적으로 널럴하게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 중평이다. 널럴한 이유는 한문, 영어가 필수인 동양사학과와 영어, 노어, 독어, 불어가 필수인 서양사학과에 비해 국사학과는 한국어, 한문 쪽만 커버하면 되고 다른 학과에 비해 제2외국어와 영어의 중요성이 낮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널럴하다는 거지 절대적으로 보면 이쪽도 빡세기는 매한가지. 동양사학과와 마찬가지로 한문 강독을 못하면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과에서 살아남지 못하며 좀 더 고급과정으로 가려면 일본어 역시 익혀야 되기 때문에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110] "제2외국어 n과목"과 같은 졸업 요건에 해당되지 않는 언어를 말한다.[111] 인문대학 졸업 요건 상 중급 제2외국어를 1개 이상 이수하여야 한다. "초급 XX어", "중급 XX어"와 같은 교과 편제가 아니라 "OO어 1", "OO어 2"와 같은 교과 편제를 따르는 경우 "OO어 2"가 중급 제2외국어로 인정되며 수업이 많으면 10개 이상씩 열리는 타 외국어 강의와 달리 보통 1개, 많아야 2개 열린다.[112] 몽골어1이라는 강좌명으로 개설되고 있으나 몽골어2는 수강생 부족으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강의이다. 몽골어1조차도 번번히 폐강되고 있다.[113] 원래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 언어문명전공 전공과목으로 집중히브리어가 격년(2015년 개설 확인)으로 열린다. 2016년 1학기에 히브리어 1 수업이 언어학과에서 교양으로 열린다. 특이하게도 LAB 실습이 배정되어 있다.[114]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일본언어문명전공에서 전공과목으로 집중일본어 1집중일본어 2를 개설하는데, 이 과목들이 각각 초급과 중급 난이도에 해당하고, 고급일본어 1,2 과목이 고급과정에 해당한다.[115] 대학원 과정으로 학부는 개설되어 있지 않다. 물론 라틴어 강좌는 학부생이 듣는다.[116] CORE 사업으로 신설된 연계전공. 서양고전학의 라틴어/그리스어 수업들을 학부로 내렸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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