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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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연도
2005년
이름
서재응
분야
스포츠
사유
체육발전유공
체육훈장기린장(5등급)

서재응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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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0.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09

파일: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로고.svg
1998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

1998

보유 기록
선발 등판 연속 무실점
44이닝(2012년 8월 26일 ~ 9월 30일)[1]


서재응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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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츠 등번호 38번
제러드 리간
(2001)

서재응
(2002)


팻 스트레인지
(2002~2003)
뉴욕 메츠 등번호 40번
토니 타라스코
(2002)

서재응
(2003)


브레이든 루퍼
(2004~2005)
뉴욕 메츠 등번호 26번
마르코 스쿠타로
(2002~2003)

서재응
(2004~2005)


올랜도 에르난데스
(2006~200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26번
안토니오 페레즈
(2004~2005)

서재응
(2006)


토비 홀
(2006)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등번호 40번
덕 왜처
(2003~2005)

서재응
(2006~2007)


트로이 퍼시벌
(2008~2009)
KIA 타이거즈 등번호 40번
조동현
(2007)

서재응
(2008~2009)


정성철
(2010~2011)
KIA 타이거즈 등번호 26번
장문석
(2007~2009)

서재응
(2010~2015)


손영민
(2017)
KIA 타이거즈 등번호 98번
노수광
(2015~2017.4.6.)

서재응
(2018~2023)


결번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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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응
徐在應 | Seo Jaeweong

출생
1977년 7월 10일[1] (46세)
광주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광주화정초 - 충장중 - 광주제일고 - 인하대(중퇴)
신체
181cm, 93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고졸우선지명 (해태)[2]
1998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NYM)
소속팀
뉴욕 메츠 (2002~2005)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6)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2006~2007)
KIA 타이거즈 (2008~2015)
지도자
저니맨 외인구단 투수코치 (2017)
KIA 타이거즈 1군 불펜코치 (2018)[3]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18)[4]
KIA 타이거즈 1군 불펜코치 (2018~2019)[5]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19~2020)[6]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21)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22)
KIA 타이거즈 잔류군 투수코치 (2023)[7]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23)[8]
해설위원
SBS Sports 야구 해설위원 (2016~2017)
경력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 (2013~2015)
병역
예술체육요원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부문 금메달)
상훈
체육훈장 기린장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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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이주현(1977년생, 2005년 결혼 ~ 현재)
자녀
딸 서혜린(2005년 7월 25일생)[1]
아들 서태성(2007년 6월 21일생)
아들 서해성(2009년생)
본관
이천 서씨[2]
부모
아버지 서병관[3], 어머니 최경자[4]
형제자매
서재환[5]
종교
불교
응원가
Ray Charles - I Can't Stop Loving You[6]

1. 개요
2.1. 수상
3. 피칭 스타일
4. 코칭 스타일
5. 은퇴 이후
5.1. 해설자 경력
6. 여담
6.1. 10승을 못해본 투수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KIA 타이거즈의 투수이자 現 투수코치. 광주일고의 중심 축이었으며 1년 후배로 김병현, 2년 후배로 최희섭이 있다. 원래는 150km/h에 육박하는 빠른 볼로 윽박지르는 투수였지만 팔꿈치 부상 이후엔 정교한 제구력과 변화구로 승부를 보는 타입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수상[편집]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2009)


3. 피칭 스타일[편집]





아마추어 시절 최고 95마일(153km/h)까지 던지는 강속구 투수였으나, 마이너 시절 토미 존 수술 이후로 구속이 감소한 탓에 제구력과 변화구 위주의 기교파 투수로 스타일을 바꿨다. 메이저리그 통산 BB/9이 2.73일 정도로 제구력만큼은 극찬을 받았다.[9] 주로 투심 패스트볼, 커브와 체인지업을 구사했는데 특유의 제구력과 맞물려 경기가 잘 풀리는 날에는 문자 그대로 컨트롤 아티스트라는 표현이 손색이 없었다.

한국 시절을 주로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공이 느리고 컨트롤과 변화구가 좋은 기교파로 기억되나, 미국 시절 전성기의 서재응은 구속도 빠른[10] 투수였다.

구속이 유지되다가 어느 순간 폭락해 버리는 보통 투수들과는 다르게, 서재응은 노쇠화가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온 편이다. 매년 깎여나가는 구속을 매년 새로운 변화구의 추가와 우수한 컨트롤, 베테랑이 되어가며 붙는 경험에 의한 타자와의 수싸움 능력으로 버텨나간 선수. 결국 이러한 요인들로 2012년에는 나이 30대 중반에 140도 던지기 힘든 구속을 가지고도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세우는 제 2의 전성기를 꽃피울 수 있었다. 10승을 못 거둔 게 아쉽긴 하지만, KBO 시절 2010~2012년 제2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3년간 소사, 윤석민 등 1선발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솔리드한 2~3선발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양현종, 아킬리노 로페즈, 윤석민, 헨리 소사 등 이 3년간 에이스들은 매년 바뀌었지만, 이 선발들의 뒤를 받쳐주는 2~3선발은 항상 변함없이 서재응이었고 이 기간동안 KIA는 선발진이 강한 팀이라는 평가를 항상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오래 활약한 것은 아니지만 우승 이후 찾아온 혼란기 몇 년간 베테랑으로서 팀의 선발진의 중심을 잡아 준 선수.

최전성기엔 송곳같은 컨트롤로 꽂히는 140 중후반대의 포심, 투심과 체인지업의 삼지선다에 커브를 곁들이는 투수였고, 이후 구속이 점점 떨어지며 각종 변화구들로 이를 극복해, KBO리그에서 활동한 커리어 후반에는 당대 KBO 리그에서 구종 다양하기로 손꼽는 수준의 변화구 투수가 되었다. 국내에 온 후 포크, 커터, 슬라이더 등을 연마했으며, 커리어 후반부엔 체인지업보다는 포크를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짜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그가 던졌던 커터와 투심은 당시엔 국내에선 보기 드문 구종으로, 구종 보급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선수.

두 번의 WBC 참가 이후 커리어가 크게 꺾였다. 메이저리그에서 8승을 거두었던 2005년에 최전성기를 맞았다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 크게 부진하며 이듬해 시즌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를 떠나야 했다. 2012 시즌에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우는 등 KBO리그 개인 최고 시즌을 보내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나 싶었는데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후에는 신생 팀 NC를 상대로 10실점을 맞는 등 다시 크게 부진했으며 이게 결국 현역 은퇴로 이어졌다. WBC 대회가 시즌 직전에 시작하므로 평소 시즌 준비와 달리 더 이른 시기에 몸 상태를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런 부분이 선수에게 악영향을 끼치는게 아닌가 하는 의견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11]

그러나 그와 별개로 2006 WBC에는 구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가했으며, 2013년에는 관리가 필요한 상당한 노장이었음에도 참가하는 등 조국을 위해 개인의 불이익이 예상됨에도 이를 무릅쓰고 헌신한 자세는 그의 애국심과 책임감이 돋보이는, 칭찬받을 만한 자세이다.

4. 코칭 스타일[편집]


은퇴 이후 투수 코치를 맡고 있는데 투수 조련 능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은 제구를 잘 잡지 못하는 선수들의 제구를 잡는 데에 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12] 구속이 느리거나 구위가 좋지 않은 선수들에게는 투심을 장착시켜 맞춰 잡는 유형으로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코칭을 하고 있다.[13] 또 평소의 호탕한 성격을 바탕으로 선수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멘탈적인 측면에서 선수들을 잘 케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투수 교체 측면에서는 여느 팀 지도자가 그렇듯 좌우놀이나 이닝쪼개기와 같은 부분에서 비판을 많이 받는다. 우선 박전문 라인 급의 믿을만한 불펜진이 있다면 1이닝을 다 맡기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확실히 신뢰할 만한 불펜투수가 마땅치 않다면 이닝을 쪼개며 좌투수를 좌타자에게 붙이는 경우가 많으나 마땅한 좌완 불펜이 마땅치 않은 KIA의 사정상 좌우놀이의 성공률이 높지 않아 이와 관련해서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다만 투수 교체라는 것이 현장과 팬들의 관점에서의 차이가 있으며 결과론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총평하자면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투수 조련 능력에서의 강점이 명확하기에 KIA 팬들에게 좋은 평과 신뢰를 받는 투수코치다.


5. 은퇴 이후[편집]



5.1. 해설자 경력[편집]



파일:/image/468/2016/02/11/2016021101000421600027771_99_20160211095604.jpg


2016년 2월 11일, SBS Sports와 계약하면서 해설위원으로서 야구팬들을 만날 예정이다.

주간야구에서 윤석민 선발전환에 대한 우려를 표해서 KIA 팬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메이저리그까지 경험해본 베테랑이 한국 야구에서도 한 철지난 소위 '강한 마무리'론을 설파하는게 말이나 되냐는 것. 다만 맥락을 읽어보면 상위권 팀들과 달리 KIA의 타력이 워낙 약하기 때문에 잡아야 할 경기를 확실하게 잡지 못하는 것이 불안하다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는 반론도 있다. 이후 임창용 고향팀 복귀가 알려지면서 임창용 복귀떡밥을 깔기 위한 KIA 구단의 전방위 언론플레이라는 음모론까지 제기되었으나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

일단 첫날인 4월 8일은 호된 해설 신고식을 치렀는데 긴장과 경험부족이 드러난 것은 물론 편파해설 논란까지 휘말렸다. 이순철 해설과 호흡을 맞췄는데 하필 KIA vs LG전이라서 이순철 해설의 주관이 폭주했고 서재응은 예스맨이 되면서 LG 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다만 이순철 해설이 선수 편파는 몰라도 팀 편파 해설을 하는 인물은 아니고, 서재응 해설이 친분 있는 이순철 해설과 호흡을 맞추라는 SBS의 배려가 역효과를 냈다는 평가도 있다. 차라리 최원호-이종열 해설도 실력 없는 해설자들이 절대 아니고 둘 다 공교롭게 LG 출신이라 이들 중 하나와 붙여놨으면 긴장도 좀 덜하고 편파해설도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표하는 일부 팬들도 있다.

일단 자신이 잘 아는 KIA에 대해 해설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재응 본인은 분명 부분부분 해설자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에 앞으로 다른 팀 해설로 어떤 역량을 보여주냐에 따라 성공적으로 연착륙할 가능성은 충분히 남아있는 상태다. 다만 SK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욕을 먹는 중.
그리고 2017년 6월 24일 SK : KT 전 해설 과정에서 송진우의 편파해설을 하며 야구 팬들의 융단폭격을 당하고 있다

역시 그 다음 날에도 가래 끓는 전라도 사투리와 극도의 편파해설로 야구팬들의 공분을 샀다.

SBS 2016 추석특집 내일은 시구왕에 심사위원으로 나섰다.

2017년에도 이용철과 더불어 영호남 해설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정도로 평가가 썩 좋지 않다. 양준혁, 이종범을 능가하는 사투리에 부족한 언어전달력과 전형적인 스타 선수 출신 해설자들의 단점으로 지적받는 편파해설 등이 모두 겹친다. 자격미달 해설자들이 많이 퇴출된 2017 시즌 기준으로 상당히 좋지 않은 쪽으로 말이 많은 해설. 특히 지난 시즌 해설 데뷔일부터 그랬지만 이순철 해설위원과 함께 하면 서로 단점이 오히려 증폭되어서, 하필 KIA의 1위 질주와 더불어 KIA 안티를 불리는 데 본의 아니게 기여하고 있다 카더라.


5.2.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재응/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 언론에서 불리는 공식 별명은 나이스 가이지만, 벤치 클리어링과 빈볼 등 경기 내적으로도 구설수가 많아서 이젠 이렇게 부르는 사람도 없다.[14] 팬들은 보통은 그의 이름을 줄여서 서쟁이라고 부르고, 못해서 깔 땐 서재앙이라고 부른다. 진화하면 서발라마가 된다. 부상으로 로테이션을 거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2009 시즌에는 서+부서지기 쉬운 물건이라는 배리에이션이 존재했다. 서티로폼, 서프심, 서수깡, 서쿠다스 등등. 서재앙에서 재앙(disaster)를 따서 디재스터 서, 서재스터(서재응+디재스터)라고도 불린다. 또, 한창 부진했을 때 작가질을 한다고해서 서익스피어라고 불렸다. 하는 일이 없다고 응원단장이나 치어리더로 불리우던 시절도 있었다. 뉴욕 메츠 시절이던 2003년 호성적을 거두고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아진 뒤 겨울에 대단한 도전에 출연하는 등 방송활동을 좀 했다가 2004 시즌에 부진하면서 엔터서라는 별명도 얻었었다. 하지만 진짜로 본격적인 엔터질을 했던건 아니어서 몇 년 안가 사장된 별명.[15][16]

하지만 2010 시즌 들어 시즌 극초반 선발 투수들이 이닝을 못 먹고 두드려 맞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에 반해 서재응은 안정된 투구를 연달아 펼쳤던 점으로 인해 디시인사이드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선 잠시동안 무등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홈런치고 온 타자들을 맞이해주는 특유의 세레모니 포즈 때문에 이 별명을 얻게 된것이다). 하지만 서재응 본인은 불교 신도다. 때문에 무등부처나 서가모니라는 별명을 미는 팬들도 있었으나 갸갤에선 무등예수로 확정.

  • 톰 글래빈은 2003년에 뉴욕 메츠에서 통산 250승을 기록한 후 애틀랜타에서 열리는 원정경기를 앞두고 애틀란타에 있는 자택에서 팀 동료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였지만 백인 선수들만 참석하였고, 그 파티에 참석한 유일한 유색인종 선수는 서재응 뿐이었다. #

  • 2004 시즌 뉴욕 메츠 시절 북한 출신 선발투수로 소개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4월 19일 피츠버그 파이리츠 전에 선발 출장했는데, 이 경기를 중계한 폭스스포츠TV의 해설 스티브 블라스는 서재응에 대한 조사를 게을리 했는지, 북한 출신 선발투수로 소개했다. 이날 서재응은 4⅓이닝 만에 10안타를 맞고 7실점한 뒤 강판당해서,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해당 기사

  • 이름 서재응의 '응'이 영미권에서 발음하기 심히 곤란하다보니 MLB 시절에는 그냥 'Jae Seo'라는 표기를 사용한 적도 있다. 사실 한국인들의 이름을 알파벳으로 표기할 때 세 글자 이름을 기준으로 마지막 글자가 영미권에서는 미들네임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보니[17] 영어 표기에서 생략될 때도 있는데, 서재응이 마지막으로 MLB에서 뛸 당시의 등록명 표기가 'Jae Weong Seo' 였음을 감안하면 이 영향도 어느 정도 있는 듯. 봉중근의 사례와도 유사하다.

  • 자녀를 셋이나 두었다. 딸 하나 아들 둘.

  • 눈빛이 다소 진하다.

  • 신기하게 SK만 만나면 털리는 날이 많았다.





  • 2011 시즌 도중에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김상훈을 대신해 KIA 타이거즈의 주장을 맡았었다.

  • 브렛 필이 입단한 이후에는 브렛 필과 함께 "베이비 페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 2012년 6월 14일 대 히어로즈 전에서 캐스터가 최희섭에게 광주일고 시절을 물어보았는데 서재응의 광주일고 최고참이 되면서 얼차려를 비롯한 모든 가혹행위를 막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최희섭은 주장을 맡았을 때 쓸데없이 군기잡고 후임들 갈궈서 서재응과 역으로 비교돼 엄청 까였다. 물론 서재응도 김진우와 함께 애먼 포수 이홍구를 대놓고 야단치는 게 방송에 잡히긴 했다. 다만 인품이 좋다고 알려진 최영필이나 외국인인 헨리 소사도 마운드에서 이홍구의 볼배합을 보고 혼내는 장면이 목격된 적이 있어 마냥 서재응에게만 문제삼긴 애매한 듯 하다. 사실 가혹행위나 폭력을 행사하는 게 잘못된 거지 후배가 뭔가 잘못하면 말로 야단치는 정도는 선배로서 얼마든지 할 수도 있는 거고.


  • 2014 시즌 후, 박충식 선수협 사무총장과 더불어 단체훈련금지로 인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 규정은 원래 있었던 거긴 하지만 단체훈련을 하다 걸린 넥센이 한화와 김성근 때문에 그랬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해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18]

  • 메이저리그에서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팀인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 있었을 때, 웬 젊은 남자가 그에게 팀에 대해 어떤 거 같냐고 물어보자 말단 직원이라 생각해 "처음에 왔을 때는 기분이 더러웠는데, 막상 와서 지내 보니 나름 괜찮다."라고 대답해 줬다. 이 젊은 남자는 2014년까지 템파베이의 단장 겸 부사장을 맡은 앤드류 프리드먼이다. 프리드먼은 서재응보다 1살 많은 젊은 단장이었기에 나온 해프닝.

  • 널리 알려진 KIA빠 아재다. 은퇴 후에도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는 모습이 여러 번 목격됐고, 방송 인터뷰에서도 굳이 KIA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두 아들 이름인 성, 성이 해태 타이거즈에서 따왔다는 소문도 있다.

  • 파일:external/file.thisisgame.com/20101101142153_6603.jpg
사실은 장난친 거고 경기 끝난 뒤 제대로 야구공을 줬다고 한다.

  • 싸인을 잘해준다. 그것도 엄청 잘해준다. 이런 이야기를 올렸을 정도. 현역 시절에는 성인들에게는 모르겠지만 어린이 팬들에게는 팬 서비스가 좋은 편이었다. 경기 전 훈련을 마치고 버스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야구장으로 들어갈 때 어린이 팬이 사인을 요청하면 웃으면서 사인을 해주고 들어갔다. 선수들이 밥 먹으러 야구장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치 않다. 그렇다 보니 성인 팬들의 요청은 어쩔 수 없이 거절할 수밖에 없는데 어린이 팬들에게는 다 해주고 들어갔다. 은퇴 후에도 현역 때 처럼 잘 해준다.

  • 3학년 시절 에이스를 2학년에게 뺏겼다. 그 2학년은 BK 김병현. 심지어 김병현은 빠른년생으로 출생년도로는 2년차이다.


6.1. 10승을 못해본 투수[편집]


선발 투수로 오랫동안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시즌도 10승을 달성하지 못했을 정도로 승운이 없기로 유명하다. 전성기였던 2003년 뉴욕 메츠 시절에도 어메이징한 팀타선 덕분에 9승에 그쳤으며 크게 활약한 2005년에도 후반기에 뒤늦게 콜업되는 바람에 8승에 그쳤다. 그후 WBC 휴유증과 잔부상으로 하락세에 빠지며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실질적인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2010년에도 시망한 타선과 불펜의 불질로 인해 9승을 기록하며 또 한 번 10승에 실패한다. 커리어 하이인 2012 시즌에는 2.59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1선발급 에이스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불펜의 불질로 또 9승에 그치며 결국 윤석민상 유력 후보가 되었다.[19] 그후 노쇠화와 부상으로 인해 예년의 모습은 계속 보여주지 못하다 2016년 결국 은퇴하면서 10승의 꿈은 영원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0승에 근접한 시즌은 5번이나 있었다.[20]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2012년 9월 KBO 리그 월간 MVP
이호준
(SK 와이번스)

서재응
(KIA 타이거즈)


양현종
(KIA 타이거즈)
[1] 음력 5월 24일[2] 대한민국 복귀 때 이 지명권으로 KIA에 입단할 수 있었다. 반면 1999년 이후 해외진출선수부터는 규제가 생겼고 1999년에 미국으로 떠난 김병현부터는 지명권이 소멸되어 별도의 지명을 받고 돌아와야 했다.[3] ~6월 7일[4] 6월 8일~7월 17일[5] 2018년 7월 18일~2019년 5월 16일[6] 5월 17일~[7] ~6월 28일[8] 6월 29일~[9] 2003년 데뷔후 102타자 연속 무볼넷을 기록했는데 이는 1945년 공식 집계 이래 최고 신기록.[10] KBO 기준이다. 수술 후인 2005년을 기준으로 평균 87.7마일 최고 93마일까지 나왔지만 당시 우완 평속이 89.5마일이던 MLB에서도 딱히 빠르다고 하기는 어려운 구속. 그래도 당대 MLB 기준으로 빠르지는 않아도 그렇게까지 느린 구속은 아니었다.[11] 모든 WBC 참가자가 그해 시즌 부진한 것도 아니니 무조건이라곤 할 수 없다. 다만 시즌 전 대회가 선수들이 매년 하는 시즌 준비 패턴에 변화를 가져오는 건 사실이다.[12]한승혁에게 구속을 조금 낮춘 대신에 제구력을 장착시켜줬다.[13] 이 방식으로 가장 혜택을 얻은 선수가 고영창이다. 서재응이 건들기 전까지는 1군에서 볼 수 없는 선수였으나 서재응이 투심을 전수한 이후부터는 추격조 내지는 필승조로 소소한 활약을 펼치며 불펜진에 힘이 되어줬으며 그 기간 동안에는 투수조 조장까지 맡기도 했다.[14] 다만 선수 시절 구설수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팬서비스가 매우 좋은편에 속한 선수였던지라 나이스 가이라고 부르는 팬들도 존재하긴 했다. 그리고 나름 준수한 외모를 가져서 나이스 가이라고 불리는 편도 꽤 있었고.[15] 이 시기 야인생활하면서 가끔 인터뷰나 하던 김성근 감독이 젊은 투수 한 명이 괜찮은 성적 올리더니 바람이 잔뜩 들어 방송국이나 들락거린다고 돌려 깠는데 지목만 안했다 뿐이지 서재응을 겨냥한 말이었다. 서재응이 선수 시절에 SK와 김성근 감독에게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유가 이 발언을 들어서일 가능성이 있다.[16] GQ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서재응은 100% 안된다고 봤다'라며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참고[17] 이름의 두 번째 자와 세 번째 자의 영문 표기를 띄어쓰기로 구분하는 케이스에서 이런 경우가 종종 나온다. 박지성이 절친인 파트리스 에브라에게 '지'(Ji)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다보니 현재는 띄어쓰기 없이 붙여쓰거나, 가운데 하이픈(-)을 넣어서 표기하는 것이 권장되는 편.[18] 한화는 선수협에 단체훈련이 가능한지 요청을 했다. 선수협은 규정상 안 된다고 했고 한화는 이를 받아들였다.[19] 실제 수상은 서재응 못지않게 고통받은 류현진이 수상했다.[20] 9승은 2003년, 2010년, 2012년. 8승은 2005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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