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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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제의 추존황후
孝欽顯皇后 | 효흠현황후


파일:attachment/Empress-Dowager-Cixi2.jpg

출생
1836년 1월 17일[1]
산시성 루안부(潞安府) 창지현(長治縣)[2]
사망
1908년 12월 8일[3] (향년 72세)
경사 중난하이 의란전[4]
봉호
의귀비(懿貴妃) →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
시호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
(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
능묘
청동릉
재위
청의 황태후
1861년 11월 11일 ~ 1908년 11월 15일
(47년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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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예허나라(葉赫那拉)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
신장
153cm[1]
부모
부친 혜징(惠徵), 모친 부찰씨(富察氏)
형제
3남 2녀 중 장녀
부군
청 문종 현황제
자녀
청 목종 의황제


1. 개요
2. 칭호
3. 생애
3.1. 후궁에서 황태후로
3.2. 권력 독점
3.3. 무술정변과 의화단 운동
4. 평가
4.1. 사치 행적
4.2. 이화원 문제
4.5. 총평
5. 창작물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청나라 말기의 황태후.

청나라의 제9대 황제 함풍제의 부인(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5]이자 또한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에게는 큰친할머니가 된다.


2. 칭호[편집]


서태후는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칭으로, 공식 명칭은 햐오슝아 깅우지 일어투 황허오(ᡥᡳᠶᠣᠣᡧᡠᠩᡤᠠ ᡤᡳᠩᡤᡠᠵᡳ ᡳᠯᡝᡨᡠ ᡥᡡᠸᠠᠩᡥᡝᠣ, Hiyoošungga Gingguji Iletu Hūwangheo), 한국식 한자로는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이다.

성은 '예허나라'(ᠶᡝᡥᡝ ᠨᠠᡵᠠ, 葉赫那拉)씨다.[6] 그 외에도 자희태후(慈禧太后), 노불야(老佛爺)[7] 등의 이명이 있다.

시호는 다 써놓자면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孝欽慈禧端佑康頤昭豫莊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로 줄여서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보통 자희태후(慈禧太后:츠시타이호우)라고 하며, 영미권에서는 보통 이를 영역한 'Empress Dowager Cixi'라고 부른다. 'Cixi'(츠시)는 위의 시호 중 '자희'(慈禧)의 중국 발음.

본명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상술했듯이 별명은 저렇게나 많은데 정작 본명이 확실하지가 않다. 펄 벅의 소설 《서태후》에서 본명이 예허나라로 나오긴 하지만, 이건 이름이 아니라 성씨다.

심지어는 출신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안후이성 우후설,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설, 산시성 창치설의 3가지 출신설이 있다. 그 외 서태후의 부친인 예허나라 후이정이 당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베이징의 피차이 후통(劈柴胡同)이 출생지라는 주장도 있다.

부친은 만주 양람기인(鑲藍旗人) 예허나라 후이정(叶赫那拉惠徵, 엽혁나랍 혜징)이고, 모친은 푸차씨(富察氏, 부찰씨)이다. 훗날 친정은 만주 양람기에서 만주 양황기(鑲黃旗)로 편입되었다.[8]


3. 생애[편집]



3.1. 후궁에서 황태후로[편집]


본래 의귀비(懿貴妃)란 직첩을 받은 후궁이었지만, 함풍제의 총애를 받고 유일한 아들 동치제를 낳으면서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 그러다 2차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붕어하고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와 같이 황태후 자리에 오른다.[9][11]

그러나 함풍제는 죽기전 아들 동치제의 섭정을 태후인 자신과 동태후가 아닌 8대신에게 맡겼으며 특히 서태후는 8대신 중 한명인 숙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지라 서태후로선 이런 상황이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동태후와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과 연합하여 8대신을 몰아내고 자신과 동태후, 공친왕 섭정 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상 정변이다.

공식적으로 2명의 태후가 섭정하는 것이지만 글을 몰랐던 동태후를 대신해 글을 읽고 쓸줄 알았던 서태후가 다했기에 사실상 서태후 단독 섭정 체제였으며 이후 자신에게 방해가 될 공친왕도 권력을 약화시키면서 서태후는 청나라의 1인자가 되었다.


3.2. 권력 독점[편집]


그러나 거리낌 없던 서태후의 섭정도 아들 동치제가 친정을 할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사실 동치제는 자신에게 엄격한 친어머니가 아닌 다정하게 대해준 양어머니 동태후를 더 따랐다보니 서태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런 둘의 갈등은 동치제가 동태후가 추천한 황후를 간택하면서 더욱 커저간다.[12]

아들에 대한 애정보다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이간질 하는 것은 물론 현실에 지친 아들이 환관들의 꼬임에 넘어가 여색에 빠져 기생집을 돌아다닌 걸 알면서도 거의 방치하였다. 결국 이런 어머니의 학대와 방치, 방탕한 생활로 동치제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며 아내 효철의황후는 서태후의 강압에 못이겨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서태후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재빨리 자신의 여동생과 순친왕 혁현[13][14]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이종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인 4살 재첨을 양자로 맞아 즉위시키는데 이가 바로 광서제다.

그뒤 1881년에 눈엣가시였던 동태후가 급사하면서 사실상 서태후는 청나라 황실에서 유일한 황실 어른이자 실권자로서 4살 황제를 방패로 청나라를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 친정을 시작했지만 햇병아리에 불과한 아들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혁현이 앞장서 서태후의 섭정을 연장하자고 청하고 광서제의 황후를 아예 서태후의 조카로 정하는 등 서태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3.3. 무술정변과 의화단 운동[편집]


사실 2차 아편전쟁 이후 서태후는 공친왕과 이홍장 등 여러 대신들을 통해 양무운동을 벌여 군사,무기 정비는 물론 해외 유학생 지원과 서양식 교육제도 정비 등 제국 내 대대적 개혁을 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 대패하게 되면서 양무운동은 한계가 있음을 지적당했고 청나라는 아시아의 종이 호랑이라는 것만 증명하고 말았다.

이런 현실을 본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었고, 이들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일본처럼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광서제가 자신의 군대를 가지려고 하고 자신의 권력위치까지 흔들려 하자 처음에는 그를 지지하던 서태후도 곧 지지를 철회했다. 변법파는 반발하여 서태후를 제거하려고 했고,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하여 이를 서태후에게 알렸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청,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15]

그뒤 서태후는 자신을 방해하려는 외세 세력에 반감을 품고 반외세 운동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들을 살살 구슬려서 청나라를 부흥시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구호를 바꾸게 했다. 이후 서양 열강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전포고를 했다가, 헛소문임이 밝혀지자 부랴부랴 취소했다. 하지만 이미 성질이 뻗친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으로 베이징을 점령했으며, 서태후는 시안까지 도주했다가 불평등조약 크리.[16]


3.4. 죽음[편집]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이었다. 말년에 가면 서태후는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특히 노쇠해졌어도 여전히 극심한 사치와 향락을 즐겼는데 이것이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며칠 간 계속되는 만한전석 형식으로 연 본인 생일잔치에서 과식한 뒤 서태후는 이질에 걸렸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 간 유폐되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누군가 보낸 독약을 먹고, 38세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훗날 21세기에 광서제의 유해를 확인하기 전까지 광서제의 독살은 병사로 은폐되었다.

황실을 조종하던 서태후가 광서제를 직접 독살했거나 혹은 독살에 동참[17]했을 수 있다. 서태후는 조카인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듣고도 매우 담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즉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18]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였다.

거기에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광서제가 사망하기 전날 이미 푸이를 궁궐로 데려오고 순친왕을 섭정으로 세우라는 유지를 광서제의 이름으로 반포했다고 한다. 당시 광서제가 서태후의 허수아비였음을 생각하면, 서태후는 이미 광서제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후계자 선정을 공식화한 셈이다. 반대로 같은 날 광서제 본인은 치료를 위해 전국에 의사를 구하는 유지를 내렸으므로 광서제의 병세가 절망적이진 않았다. 적어도 죽음을 준비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후대에 시신을 조사해본 결과 독극물인 비소가 다량 검출되어서 사인이 독살로 확인되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심한 대로, 서태후가 광서제 독살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관련 블로그)

세 살짜리 푸이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인 1908년 11월 15일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생을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였다. 사후 장례가 치러졌는데 청나라 조정이 120만냥의 거금과 수천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서태후의 장례식 행렬에는 진시황릉처럼 종이로 만든 신하들 모양의 인형은 물론, 신식 군복을 입은 종이 병사들, 종이 시계, 종이 자동차, 종이 유럽식 이륜마차 등을 포함해 온갖 이색적인 부장품이 함께했고, 이들은 모두 화장되었다. #

그로부터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했다.

노쇠하였지만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니 당시로는 상당히 오래 산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도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4. 평가[편집]


국내외 가릴것 없이 청나라 몰락의 원흉으로 꼽히는 인물로서 이 때문에 서태후는 중국내에서 아직까지도 여후, 측천무후(또는 가남풍)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의 3대 악녀 중 하나로 꼽힌다.[19]


4.1. 사치 행적[편집]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C5%C2%C8%C4_%B9%B0%B3%EE%C0%CC.jpg
이화원에 있는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

사실 대부분의 왕실 사람은 품위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적당한 사치는 필수였다고 하나, 서태후는 그 선을 훨씬 넘었으며 당시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치를 벌였기에 지금도 회자되다 못해 그녀가 가장 까이는 행적이기도 하다. 우선 진귀한 음식에 관심도 많고 식탐 또한 대단했기에[20] 한 끼에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100냥이었으며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1,000여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21]이자 이를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2000년 전후의 한국을 기준으로 약 8,000만 원 정도다.

그리고 서태후는 대식가로 하루에 4끼를 먹었다. 특히 절대 같은 음식을 3번 이상[22] 않았으며 어떤 때는 관상용으로 호화스런 음식을 가득 차려서 따로 내놓거나 아예 과일을 요즘의 디퓨저 마냥 소비하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23] 특히 음식들 중에서 오리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육식을 무척 좋아했으며 서태후는 한 번 먹은 음식은 두 번 다시 입에 대기를 꺼렸지만, 오리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로 만든 요리만큼은 매끼마다 빠진 적이 없었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리고 돼지고기 요리 중에서도 동파육을 특히나 좋아해서 '향령'(響鈴)이라 이름을 붙이고 매번 즐겼으며 고기 외에도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고 후식으로는 과일과 사탕, 떡을 즐겨 먹었다. 이러다 보니 서태후가 전용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서 4칸이 주방이었고, 서태후의 식사 준비를 수행하는 요리사만 50~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실제 그녀의 식생활과 관련된 야사가 있었는데피난 생활로 인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서태후 일행이 곤란을 겪자 청나라 백성들이 평소 먹던 옥수수 빵을 바쳤고, 허기에 지친 서태후는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하루는 자금성으로 돌아온 서태후가 그 때 그 맛을 떠올리고 황실 요리사들에게 옥수수 빵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황궁으로 돌아와서 다시 입맛이 고급이 된 서태후에게 그 옥수수 빵을 그대로 올려봐야 피난 시절 때 허기진 채 먹었던 그 맛이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요리사들은 궁리 끝에 견과류와 설탕을 넣어 맛을 더한 옥수수 빵을 만들어 바쳐 서태후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옥수수 빵이 중국에서 흔히 먹는 워워터우(窝窝頭)라고 한다. 선조도루묵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 하지만 해당 음식이 명나라 시절의 기록에도 언급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더불어 비슷한 이야기는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에게도 있는지라[24] 진실은 저 너머에.

특히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버린 영향 때문인지 미용에 누구보다 신경을 썼다고 한다. 매일 옥용산이라 불리던 새똥으로 늘 세수를 하고 각종 꽃과 약초를 넣은 목욕물을 이용해 목욕을 하고 돼지기름과 계란 흰자를 이용해 마사지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진주와 모유가 피부미용에 좋다고 믿어 노년이 될때까지 진주를 갈아 마시거나 외모가 아름다운 젊고 건강한 산모들을 처소까지 불러서 신선한 모유를 매일같이 마셨다고 한다.[25]또한 매일 머리 치장을 하는데도 공을 들여서 환관들은 서태후의 명을 받아 궁정 밖을 나가서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찾아서 매번 서태후에게 선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서태후는 자신의 위엄이 훼손됨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보니 당시 서태후에게 젖을 주는 산모는 무릎을 꿇은 채 서태후에게 젖을 물려야 했으며, 그녀의 머리 치장을 담당하는 궁녀들은 늘 살얼음판으로 머리를 단장했으며 실수로 머리가 빠지거나 그녀를 아 프게 하면 모진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이화원에 거주할 때도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건방지게 누워서 통화하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다.[26] 심지어 서태후의 운전기사도 예외가 아니라서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차를 운전해야만 했기 때문에 서태후가 탄 차는 늘 잔사고가[27] 많았으며 그나마 전용열차의 경우 초창기 증기 기관차는 아예 서서 운전하게 되어 있어서 자동차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C5%C2%C8%C4_%C0%C7%BA%B9-1.jpg
서태후의 복장을 재현한 모습

이런 그녀의 사치는 옷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옷이 무려 3,000여 벌이나 되었으며 옷을 담는 박스가 700박스가 넘었으며 옷은 물론 버선과 신발에도 굉장히 신경을 써서 서태후의 옷, 버선과 신발을 만드는 데만 매년 3,000명 가량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10,000냥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음식에도 그랬듯이 옷이나 버선,신발도 한번 신거나 입고 나면 그대로 버렸으며 심지어 그녀가 쓰고 한번 버리는 목욕수건에도 수가 놓이는 등 그야 말로 사치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또한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아예 과일 모양의 특이한 보석의 경우 환관들을 시켜다가 자물쇠로 늘 지키게 했고 이들 중 일부는 그녀의 무덤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특히 비취진주를 가장 좋아해서 진주,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반지야 말할 것 없고 비취로 장식한 호갑투(손톱 보호대)와 머리장식, 진주,비취로 만든 망토[28] 심지어 식기들과 악기도 비취로 만들었다.

이게 청나라 황실에 할당된 예산 하에서 이루어진, 원래 쓰던 정도의 사치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라가 망국지란의 위기에 있는데 이런 사치를 부림은 좋게 볼 수 없는 게 사실. 밑에서 설명할 이화원 문제만 봐도 그러하다.


4.2. 이화원 문제[편집]


서태후가 가장 욕 먹는 이유. 북양함대의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떠돌았지만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러시아를 막기 위해 북양함대의 예산 일부를 육군이나 광둥 해군 예산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하지만 이화원에 쓴 은전 3,000만 냥은 당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의 30%에 달하는 수치로[29] 이 막대한 돈이 정원 건설에 낭비된 점은 분명하다. 해군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건대 외국과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이런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방에 힘을 써야 했다. 마땅히 정원 따위에 쓸 돈이 있었으면 국방비로 돌려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결단이었다.[30]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직접적인 원인은 총체적인 청군의 난맥과 지휘관들의 무능 때문이었지만, 이 돈이 헛되이 낭비된 것도 청일전쟁에서 피를 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는 점은 중일 양국의 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바이다.

특히 이건 절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 서구 열강도 갖지 못한 최신식 장비로 무장한 청의 북양함대는[31] 수병의 숙련도만 어느 정도 받쳐주면 일본의 함대 따위는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은 정작 훈련할 포탄과 연료 부족으로 수병들의 훈련 상태가 바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32] 전함은 전장에서 쓰는 가장 거대한 기계이고 자동화가 되기 전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모든 함선은 수병의 숙련도가 절대적이었다. 특히 포술의 발달로 포의 사거리가 점점 길어지던 시기였기에 이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이 국운을 걸고 전 함대를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에 비해 청나라의 전시 준비는 말 그대로 개점휴업 상태였다. 이런 군대의 무능은 거국적인 시야와 통찰력 없이 권모술수만으로 정치적 생명만을 연장시켜 온 서태후의 책임이 매우 크다. 다시 말해 평균도 못해 먹었다는 거다. 특히 동북아에서 청일전쟁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면 서태후가 저지른 횡령은 당시 시대상황상 국방비와 근대화에 집중 투자해도 모자랄 귀중한 백성의 피땀을 이런 식으로 마구 낭비해버리는 건 어떻게 봐도 변호할 수가 없다.

당연히 청일전쟁을 국치 중의 국치로 생각하는 현대 중국에서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안 좋다 못해 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중국 CCTV에서 2003년에 방영한 근현대사 TV 드라마인 <주향공화>(走向共和)에서는 이 부분을 묘사하면서 서태후를 신랄히 디스했을 정도다.


4.3. 의화단 운동 관련[편집]


의화단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의화단, 의화단 운동 문서로. 여기서는 주로 서태후에 관해서 기술. 이화원 다음으로 비판받는 실책이다.

서태후가 의화단을 얼마나 지지하고 지원했는지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리나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진압할 의도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의화단 활동이 거세지자 1900년 4월에 서양 세력들이 두 달 안에 의화단을 진압하지 않으면 연합군을 편성하여 진압하겠다는 밝혔는데 서태후는 방관했다. 그 결과 의화단은 오히려 수도인 베이징에 들어와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사실 광서제를 중심으로 청나라 조정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여 서양과 강화하자는 의견도 많았고, 이홍장이나 위안스카이는 적극 의화단을 진압하려 했으나 서태후는 오히려 의화단을 옹호했다. 좋게만 보자면 서태후가 의화단을 평화적으로 해산시키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를 일이나, 이미 상황의 심각성은 그 정도를 한참 넘었다.

결국 1900년 6월 10일 연합군 선발대 2,000여 명이 베이징에 들어오자 의화단의 반격으로 이를 저지해 톈진으로 후퇴했다. 이에 고무된 서태후는 사태 파악 못하고 서양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하는 조서를 내렸다. 게다가 독일과 일본 공사가 의화단의 습격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이에 빡친 서양 8개국 연합군이 7월 말에 파견한 병력이 무려 군함 54척과 병력 50,000여 명이었다. 1, 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군 20,000여 명을 상대로도 탈탈 털린 청나라가 막을 수 있을 리가...당연히 개전 두 달 만에 베이징이 점령당하고, 서태후는 시안으로 피난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 결과 맺은 것이 신축조약이었다. 이때 청은 배상금으로 무려 4억 5천만 냥을 물어내야 했고,[33] 외국 군대의 베이징 주둔을 허가했으며 기존의 통상조약에 불만이 있으면 열강들이 마음먹은 대로 고칠 수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 전에도 청나라가 열강들에게 이권을 강탈당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는 사실상 열강들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다.[34] 거기다 처음에는 뒷배를 봐준 의화단을 이때부터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숙청했다. 의화단이 외국 열강들을 배척한다는 사상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이들은 잘 조직되고 규율잡힌 투쟁단체가 아니라 무질서한 폭동이라 민간인, 외국인들을 마구 강간, 학살하는 상황이라 결국 진압하지 않으면 외세가 개입할 것은 분명했다. 이 때문에 어차피 진압해야 하는 상황인데 서양 열강들이 개입하기 전에 진압했다면 이렇게까지 청나라의 사정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신축조약의 배상금 4억 5천만 냥은 청나라의 4.5년치 예산이다. 여기에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물어야 하는 배상금 2억 3천만 냥을 합치면 무려 7년치 예산을 빼앗기는 상황이었다.[35] 이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고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로 위안스카이, 쑨원 등에 의해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정작 위 문단에 나오는 서태후의 사치가 가장 심해진 땐 의화단 운동 이후다.

실제로 청나라와 뒤를 이은 중화민국은 배상금을 열강들에 비교적 성실하게 납부하였는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배상금 지불을 중지했다. 1920년 러시아가 소련으로 바뀌자 역시 배상금 지급을 정지했는데 1923년 소련이 러시아를 승계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으나 결국 소련 정부가 배상금 지급을 포기했다. 미국은 1908년 조건부로 감액을 하여 학교를 세워 미국의 유학생을 원조하게 했는데 그 결과 세워진 것이 오늘날 중국 최고 명문대중 하나인 칭화대학이다. 미국은 1924년에는 600만 달러 분을 반환해주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 대한 지급도 정지했다.

최종적으로 중국이 열강들에 납부한 금액은 약 6억 5천만냥이며 1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들이 배상금을 반환해주거나 다른 용도로 전환해서 실제로 중국이 납부한 금액은 약 5억 8천만냥 정도 된다. 이 배상금은 중화민국의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주어 중화민국 정부가 군벌들과 중국공산당 상대로 고전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4.4. 사후에 당한 재난[편집]


청나라가 멸망한 지 얼마 안 된 1920년대에 중국 북부에 군벌이 난립하면서 북경 인근에 있던 청나라의 황릉은 여러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도굴을 당했다. 서쪽에 청서릉, 동쪽에 청동릉이 있었는데 심양에 있던 천명제숭덕제의 무덤을 제외하면 역대 황제와 황족의 무덤은 모두 여기 있었다. 결국 순치제를 제외하면 이 지역에 있던 무덤은 죄다 도굴당했다. 왜 순치제만 안 털렸냐면, 애초에 부장품이라곤 부채와 신발밖에 없다고 전해져서 그렇다.

이때 시범 케이스로 군벌 쑨뎬잉이 맨 처음으로 정동릉(定東陵)을 털면서 갖은 수모를 다 당했다. 쑨뎬잉은 중국 국민당의 북벌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덤을 도굴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덤에는 늙은 묘지기 하나만 지키고 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파고들어가던 도중 입구가 돌로 막혀 있자 아예 대놓고 폭약으로 입구를 폭파해버리고 들어갔다. 쑨뎬잉이 부장품을 무진장 챙길 때 서태후의 시신은 옷이 벗겨짐은 물론, 도굴하던 군인들이 입에 넣어진 야명주를 꺼내기 위해 시신을 입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세로로 갈라버린 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36] 쑨뎬잉과 그의 참모들이 먼저 자신들의 몫을 챙긴 다음 쑨뎬잉은 부하 장병들에게 나머지를 약탈하도록 허가했다. 결국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서로 싸우고 밟고 엉망진창으로 약탈하다가 밟혀 죽은 사람들도 있을 정도. 쑨뎬잉은 약속한 약탈 시간이 다하자 자신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죽은 부하들의 시체를 가지고 갈 정도였으나, 이 사실은 선통제에게도 알려져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선통제는 분노하여 위령제를 올리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특히 광서제효철의황후, 그리고 진비를 동정하는 쪽에서는 서태후가 그들을 학대하였고 죽게 하는데 원인제공을 하여 서태후를 결코 좋게 보지 않으며, 이들은 상술한 것처럼 동릉 도굴 사건으로 서태후의 시체가 처참히 훼손된 것에 대해서도 서태후가 광서제와 효철의황후, 그리고 진비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한 업보로 여긴다. 실제로도 서태후의 그러한 악행은 전근대 기준으로도, 근현대 기준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이다.

그러나 위의 도굴 사건만 보고 당대 중국인들이 모두 서태후를 증오했다고 보는 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당대 청나라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생전의 서태후를 청나라의 상징이자 자신들의 보호자로서 사랑했다. 물론 이는 당시 청나라 국민들이 서태후가 저지른 악행들을 몰랐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지금의 나쁜 이미지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 서태후가 저지른 악행들이 모두 드러나면서 생겨난 것이다.

쑨뎬잉은 도굴을 얼버무리기 위해 국민당 간부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쳤는데, 물론 거기에는 서태후의 무덤을 포함한 청나라 황릉에서 나온 보물들도 끼어있었다. 심지어 서태후의 보관에 박혀있던 진주가 쑹메이링(장제스의 아내)의 신발 장식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선통제 푸이는 이 일을 계기로 국민당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고 일본에 협조했다.


4.5. 총평[편집]


서양에서 이미지가 굉장히 나쁜 듯하다. 의화단 사건에서 의화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데다 죽을 때까지 통상 개화에 소극적이었고 동양식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보여준 인물이니 아무래도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특히 선통제의 영어교사를 맡고 나중에는 절친한 친구가 된 레지널드 존스턴은 자신의 책에서 이 사람이 청나라 황실을 말아먹은 사람이라고 맹렬하게 깠다. 또한 서태후가 달라이 라마와 만났는데 이에 중국 민중들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둘이 만났으니 하나는 곧 죽을 것이라 했는데, 서태후가 곧 죽었다며 깠다.[37]

서태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 서태후가 문제가 많은 인물인 건 사실이고, 서태후 생전에도 아편 전쟁으로 인해 청나라가 불안불안했지만, 썩은 기둥이나마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듯 서태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가 완전히 분해되지는 않았다.[38] 또한 양무운동과 동치중흥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서태후 덕분이다. 서태후는 인권(특히 여성인권)과 교육, 전족 등 악습을 폐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서양 문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황실의 웃어른이었기 때문에 서태후가 시작하면서 유행하거나 알려진 패션 등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사치와 정치적인 면과는 별개로 당대 청나라 백성들에게는 많은 존경을 받은 모양이다. 서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펄 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골 농촌 같은 곳에서는 서태후가 아직도 살아있는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농부들은 서태후가 사망한 지 수십 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알고 '이제 우리를 누가 돌봐줄 것인가?'라고 외쳤다고 한다.[39]

그러나 위의 사례들을 들어서 서태후가 재평가될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은 금물이다. 당시 청나라를 포함한 전근대 중국에서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당연히 천자여야 하고, 국가의 구심점 역할도 당연히 천자가 맡아야 한다. 태후가 황제의 어머니든 뭐든 천자는 아니므로, 천자가 어릴 때 잠깐 후견을 맡는 정도라면 모를까 자기가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중국의 각종 제도와 역사는 천자가 통치를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태후라고 하나 중국의 공인된 통치자도 아닌 사람이 섭정의 수준을 넘어서 대놓고 통치를 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 차라리 성신황제처럼 본인이 천자를 했으면 모를까 천자는 안 하겠다고 하면서 천자의 통치를 전제로 한 조직을 계속 움직이려 들었으니 모순이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당장은 서태후라는 썩은 기둥이라도 있어서 청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상은 이미 그 전에 멀쩡한 천자 체제를 태후의 통치라는 썩은 기둥으로 바꿔치기한 서태후의 잘못이 훨씬 더 컸다. 청나라는 서태후 덕분에 버틴 게 아니라 서태후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서태후가 단기적으로는 청나라의 버팀목이 되어줬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청나라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셈이다. 오죽하면 서태후가 청나라를 말아먹음으로써 누르하치가 이끄는 아이신기오로 씨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한 조상(예허나라 씨족 추장)의 원수를 갚은 셈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게다가 광서제가 황제로서 매우 무능했다면 모를까, 광서제는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는 등 황제로서 나름대로 개혁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서태후라는 엄청난 걸림돌 때문에 광서제 본인의 유능함이 무의미해졌고 더 나아가 광서제 본인이 독살당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기까지 한 것이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권력과 사치에 집착하는 섭정이 선량하고 유능한 황제를 죽여버린 시점에서 서태후는 이미 옹호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다.

결국 이제 막 기다 걸을 나이의 선통제가 황제가 된 후 서태후가 급사하자 권위 있는 어른이 없는 청나라 황실은 권력의 진공상태[40]에 빠져들었다. 서태후의 뒤를 이어 황태후가 된 융유태후는 인간성 면에서는 서태후보다 아주 살짝 나았지만 황후 시절에 광서제의 후비들을 핍박하고 남편 광서제를 감시하며 오만하게 대했을 정도라 거기서 거기였고, 인품 대신 카리스마와 권모술수를 휘두르자니 이쪽은 서태후에 비해 한참 떨어졌기에 황실을 지킬 수가 없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이원복은 서태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사실 이원복이 지적한 1차 사료의 문제는 이미 이전에 나온 이야기이고, 문제는 휴 트레버 로퍼(1914~2003)와 같이 1차 사료의 허구성을 지적한 학자들도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서태후의 이미지를 대단히 나쁘게 본다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서태후는 좋게 평가받지 못한다. 서태후가 의화단 운동에 불을 지폈으니 반서방주의 때문에 미화한다는 낭설도 있으나, 중공의 정통 사관에서는 오히려 외세에 굴복하여 의화단의 통수를 치고 탄압했다고 여긴다. 즉 의화단을 미화할지언정 서태후를 미화하지는 않는다. 혁명을 추구하는 중공 입장에서 변법자강운동을 탄압한 서태후는 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수구꼴통 봉건주의 세력이라는 점 때문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 서태후에게 탄압을 받은 캉유웨이조차도 공화제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문화대혁명 때 시신이 능욕을 당했을 정도니...


5. 창작물에서의 등장[편집]


  • 《한제국일본침략사》에서는 공친왕 혁흔의 언급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공친왕과 증국번 등을 매국노라고 매도한다.


  • 만화방과 후의 카리스마》에서는 서태후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복제인간이 주인공의 클래스메이트 중 하나로 등장. 1권에서 색기담당역할을 맡았고 그 뒤로는 묻혔는지 계속 안 나온다. 일단 미모만은 확실히 절륜하게 묘사됐다.

  •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중국계 미국 배우 리사 루(Lisa Lu, 盧燕)가 맡았다.[41] 시작부터 어린 주인공 선통제를 불러다 그의 천진난만함을 지켜보며 "남들이 다들 노불야라 두려워하며 죽기만 바라는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쳐다보는구나."라며 흐뭇함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대사를 한다. 그리고 푸이를 만나자마자 곧바로 사망하고 훗날 군벌 쑨뎬잉의 손으로 토막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 야명주를 입에 물게 된다. 실제로 서태후는 선통제가 즉위한 지 며칠 후에 사망하고 비록 잠깐 나왔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이 영화 <마지막 황제>가 한국에서 대박을 거두자 부랴부랴 중국에서 만든 <서태후>란 영화가 <마지막 황제> 연관작처럼 홍보되어 개봉했으나 1989년 당시 관객 집계조차도 없을 정도로 쫄딱 망하고 막을 내렸다.
  • 위의 <마지막 황제>의 드라마판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드라마 <말대황제전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선 선통제가 무거운 분위기에 못이겨서 울먹이며 자리를 피하려 한다. 서태후는 사탕을 주며 달래보려 하지만, 결국 푸이에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저 어린 아이가 황제라니...'라는 식으로 바라보며 안쓰러워 한다. 이 드라마에선 위안스카이가 광서제뿐만 아니라 서태후 역시 독살했다고 묘사한다.

  • 장서희가 출연했던 중국 드라마 <경자풍운>(庚子風雲; 庚子西京記)에서도 악역으로 등장.

  • 서태후가 주인공이었던 작품인 홍콩 드라마 <소녀자희>(少女慈禧)도 있다. 다만 액션신이 들어있는 등 각색이 많다.

  • 파일:Gz9sccI.jpg
<신 중화일미>에서는 최종 보스는 아니고 유마오신카이유의 마지막 대결의 심판으로서 등장한다. 작가의 그림체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회춘. 뒷요리계 최종 보스 카이유의 "인격지배독선요리 파마팔진"으로 산송장이 될 뻔했지만 유마오신(비룡)의 만리장성까지 냄비로 응용한 '어머니의 태양볼' 요리로 기력을 회복한다. 마오의 요리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지 이 작품에선 내내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오는데 작가의 후속작인 푸드 헌터에선 기존의 이미지대로 음험한 실루엣으로 나온다. 달랑 한 컷뿐이긴 하지만.

  • 펄 벅의 소설인 《연인 서태후》에서는 고뇌에 찬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도 연인인 환관(환관이 되기 전) 영록대부와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로 나온다. 의화단 사건이나 무술정변은 한때의 잘못된 생각이 되었다. 말년에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기품 있게 늙어가면서 중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노인으로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이다.[42]

  • 홍콩배우 구숙정이 주연한 에로영화 <외전 혜옥란>[43]이 바로 서태후 라이징을 다룬 영화다.[44] 여기서 서태후는 황제[45]의 승은을 입지 못하다가 유곽에서 고도의 성관계 기술을 배워 결국 황제의 승은을 얻었고, 황제가 병석에 드러눕자 황제의 동생[46]을 유혹해 불륜 관계를 가지고 임신하여 출산까지 한다. 이후 그를 이용해 조정을 장악한 다음 그마저 토사구팽하고 절대권력을 손에 넣는다.[47]

  • 확산성 밀리언아서에서는 희우형 서태후라는 기사 카드로 등장. 이 게임 카드들이 대개 그렇듯 미소녀 버전으로 능욕 변신 당했다. 이 게임에서 실존 인물들 중 기사 카드로 등장한 것은 서태후 외에도 잔 다르크, 마리 앙투아네트, 어우동 등이 있으나, 그 캐릭터들과 비교해서도 서태후는 미소녀 이미지와 괴리가 지나치게 심하다(…).

  • <천공의 옥좌>라는 일본만화에서는 서태후는 아니지만 가상의 중국왕조 덕나라의 황태후가 나온다. 내용을 보면 미녀에다 사치하는 것까지 완전히 서태후 판박이다. 남편인 선황 사후 자기 친아들을 황제로 세우지만 12년후 그 아들이 죽고 만다. 결국 옛날에 향중독으로 독살당한 남편의 후궁 소생의 황자를 황제로 세운다. 이 황제가 평범한 민가에서 살다가 후계가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황제가 즉위하게 되는데, 황제의 나이가 어리고 병약하다는 상황을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다. 이 작품에서 황태후를 서태후로, 죽은 황태후의 친아들을 동치제로, 주연격 황제는 광서제로 비교하면 실제역사와 거의 똑같을 정도로 들어맞는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광서제는 도광제의 7번째 아들 순친왕의 소생이다.

  • 영화 <8인 최후의 결사단>에서는 잠깐 1~2분 분량이지만 쑨원이 잠시 홍콩을 들린다는 소식을 듣자 극중 보황파(만청황실세력)의 암살단 두령에게 위의 일화처럼 옷을 갈아입으면서 장막 속에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쑨원을 죽이라는 명을 내리는 포스가 압권이다.

  • 시오노 에토로지의 괴작 오토코노코물 만화 <브로켄블러드>에서는 레오타드 격투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설정도 있다. 전설의 레오타드 중에 서태후가 입었던 레오타드도 있다는 언급으로...


  • 2010년 중일합작 드라마로 <창궁의 묘>가 있다. 서태후 역을 다나카 유코가 맡았으며, 서태후와 가장 외모가 비슷한 배우로 꼽힌다. 감독은 비록 일본인이지만 서태후와 이미지가 매우 흡사해 캐스팅했다 밝혔지만, 중국 내에서 워낙 이미지가 안좋은 서태후다보니 중국 배우들이 캐스팅을 하나같이 거절해 일본인 배우를 수입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도 파다하게 돌기도 했다.[48] 일본인이 주역을 맡았다는 소식에 중국 본토에선 떨떠름한 반응이 주를 이뤘지만, 서태후와 흡사한 외모에 배우의 연기력으로 이내 논란은 불식되었다.

  • 2016년 드라마 <반요경성>에서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서태후의 시위였다. 요괴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라서 서태후는 요괴들의 힘을 빌려 열강으로부터 청나라를 지키려 했다.

  •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능가하는 대사업의 최대주주가 된다. 그 대사업에서 사재까지 털면서 지분의 절반을 홀로 차지할 수 있는 자본을 대면서 대륙의 기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실제 역사와 같이 의화단 운동의 시발점으로 등장한다. 그러다가 점점 소식이 끊기더니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고 만다.
[1] 음력 1835년 11월 29일[2]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창지시 상당구 샤친촌[3] 음력 1908년 11월 15일[4]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시청구 중난하이[5] 큰 이모이기도 하다[6] 서태후 일족이 예허나라씨가 아닐 가능성을 중국 사학계에서 제기했다.[7] 풀이하면 높으신 부처님(老爺주인마님 + 佛부처)이다. 청대에는 태상황제와 황태후에게 그런 극존칭을 썼는데, 그래서 중국드라마(ex: <황제의 딸>)에서 '숭경황태후'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자막이 자주 등장해서 한국인들이 어리둥절해 했다.[8] 황후와 황태후의 친족은 원칙적으로 정황기나 양황기 둘 중 하나여야만 했다.[9] 청나라에서 후궁의 소생이 황제가 될 경우, 정실 황후는 당연히 '모후황태후'가 되지만 황제를 낳은 후궁도 그에 준하는 지위인 '성모황태후'가 된다. 물론 같은 태후라고 해도 선황이 더 높은 지위로 인정했던 모후황태후 쪽이 보다 높은 쪽으로 여겨진다.[10] 한족 주불대사인 유경과 프랑스인 어머니의 딸로 어렸을 적 프랑스에서 자라 서양에 정통했기 때문에 말년의 서태후가 불러 궁녀로 일하면서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서태후가 자신과 동생인 유용령(나중에 중국 최초의 현대 무용가가 된다.)을 친왕의 딸급인 군주라고 봉하여 궁내에서만 통용하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보통 덕령공주, 덕령군주 등으로 불리지만 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공주는 아니다. 또한 자신이 만주족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한족이 명백하다. 이후 궁을 나와서 미국으로 이주한 뒤 회고록을 썼는데 소설식의 회고록이라 픽션이 섞여있긴 하지만 말년의 서태후와 청나라 황실을 그리는 중요한 자료로 취급된다. 이 자료는 그간 서양열강의 여러 자료에 악녀로 왜곡된 서태후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11] 실제로 서태후와 유덕령[10]을 포함한 궁녀들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위의 액자에 '대청국 당금 성모황태후 만세만세만만세'라고 쓰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12] 서태후가 동치제가 어린 시절 동태후에게 양육을 떠맡긴 것도 있었던 것도 있다지만 서태후는 자식 농사는 완전 수준 미달이었다. 특히 광서제를 대한 것을 보면 학대라 할 수준이었다.[13] 사후에 '賢'(현)의 시호를 받아 '순현친왕'(醇賢親王)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냥 순친왕이라고 불리기보다는 이렇게 시호를 붙인 작위명이나 본명 혁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아들 재풍, 그리고 재풍의 아들 부의가 역사적으로 워낙 유명한지라 구분이 필요해서 그렇다.[14] 혁현은 함풍제와 공친왕의 동생이라 서태후는 형수이자 처형인 셈이다. 그러나 유일한 아들 재첨이 부모조차 영문도 모른채로 입양되었다는 소식에 혁현 부부는 서태후의 권력욕에 몸서리를 쳤다. 특히 혁헌은 통곡하다 실신까지 했고 아들의 안위를 위해 서태후의 예스맨이 되어 설설 기어야 했다.[15] 위안 스카이의 배신이 결정적이었다 하나 당시 청나라는 18~19세기에 인구가 폭증했지만 행정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상당한 행정공백이 있었기에 이런 상태에서 광서제와 지지 세력이 생각하는 만큼 '개혁'에 성공하기란 불가능했다.[16] 이때 서태후를 보좌하여 신임을 얻어 양광총독까지 승진한 사람이 훗날 중화민국의 정학회 정객의 거두 천춘쉬안이다.[17] 독살은 위안스카이가 주도했다는 설도 있다. 위안스카이는 광서제를 배신한 터라 광서제의 증오를 받았고, 위안스카이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18] 다만 청나라의 황위 계승 원칙에 따르면 황제가 붕어할 경우 그 아랫 항렬에 해당하는 황족이 황위를 계승해야 했기에 이 원칙에 따르면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이 아니라 조카인 푸이를 즉위시키는 것이 오히려 법도에 맞았다. 광서제를 즉위시킬 때 이미 이 원칙을 한 번 무시한 상황이라 또 원칙을 깨고 같은 항렬의 황족을 즉위시키는 것은 곤란했을 것이다. 일단 계승 자격이 있는 황족 중에서는 푸이가 가장 가까운 황족이었다. 또한 광서제의 다른 조카들도 푸이보다 한두 살 많은 정도라(제일 나이가 많은 조카인 푸궁은 1904년생이었다.) 계승 윈칙을 지키려면 어린 황제를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19] 다만 통설적으로 악녀라며 가남풍과 측천무후, 서태후를 싸잡아 매도하기엔 좀 애매한 감이 있다. 여자가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유학자들에게 지나치게 매도됐다. 공포정치나 사치 향락 등 문제점이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시대상으로 참작되는 부분도 있고, 재평가될 만한 구석도 분명히 있기 때문. 특히 무후는 기어오르는 반동세력을 마구 때려서 누르며 국가 안정에 힘썼는데 시대상을 생각하면 과하게 절하되는 감이 있다.[20] 이때문에 서태후는 과식으로 인해 복부팽창, 위 기능 저하, 이질에 항상 시달렸다. 최후도 생일잔치에서 과식을 하다가 이질에 걸려서 죽었다. 또한 탈모도 심했는데 40대부터 탈모가 발생하여 60대부터는 머리카락이 얼마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래서 서태후는 탈모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탈모를 치료하려고 많은 애를 썻지만 실패하여 결국 가발을 쓰고 다녔다. 실제 노년의 서태후 사진에서는 머리가 풍성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수리에 꽃을 붙이고 가발을 쓴 것이다.[21] 어떤 설에서는 백만 냥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터무니없이 부풀린 금액이다. 1차 아편전쟁 후 청에 부과된 배상금이 백은 1,200만 냥, 2차 아편전쟁 배상금은 800만 냥이었고, 청나라 최고전성기 때인 1803년의 1년 세수가 3,800만 냥을 조금 넘겼다. 조선이 병자호란 후 청에 바친 세폐가 백은 1,000냥이다. 조선 후기의 소설 《허생전》에서 조선의 산물을 매점매석 하는데 필요한 돈을 백은 10,000냥으로 잡았다. 당시 중국 농민의 1년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면 더더욱 100만 냥일 수가 없다.[22] 자신의 선호 음식을 알지 못하게 해서 독살의 우려를 없애려 했다는 말도 있다.[23] 이런 서태후의 식성을 간파한 환관들이 주방 인원들과 짜고 횡령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서태후가 관상용으로 차려만 놓고 절대 손대지 않는 메뉴들을 파악해두었다가 이 메뉴들은 상한 티가 나기 직전까지 재활용해서 상에 올리고, 그만큼 부식비를 착복했다.[24] 거지 시절, 먹다 남은 여러가지 채소를 끓인 찌개가 그렇게 맛있어서 황제가 된 후 찾았다는 이야기. 사실 국가나 특정 세력 등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어려웠던 시절 맛있게 먹은 음식을 그리워하여 다시 찾거나 계속 즐겨먹는다는 건 종종 찾아볼 수 있다.[25] 하지만 모유는 면역물질처처럼 아기에게 필요한 성분이 특히 풍부한 아기 특화 식사일 뿐이다. 즉, 아기가 아닌 서태후가 모유를 먹는 것은 하등 쓸모없는 뻘짓이었다.[26] 비슷한 시기에 고종삼년상을 전화로 퉁쳤다는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사실 고종은 한국사에서도 유명한 얼리어답터 군주였다.[27] 당시 자동차가 포드 모델 T처럼 손으로만 운전하는 방식이기에 망정이지 1940년대부터 보편화된 발도 쓰는 차량이었으면 아예 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28] 중국 사극들 중 청나라 시기를 배경으로 한 궁중사극들을 보면 극중 비주얼을 위해 시대적 고증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과 '대랍시'란 머리 스타일이 많이 나오는데(예: <옹정황제의 여인>, <환주격격>), 이런 의상과 대랍시는 청 말기에 서태후가 주로 즐겨 입거나 꾸미던 의상과 머리 형태였다. 오히려 옹정제건륭제 시기에는 황실 차원에서 사치를 금하면서, 의상과 머리가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수수한 편이었다. 이런 검소함은 궁녀는 물론 황제의 후궁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 <보보경심>과 <연희공략>이 이런 옹정~건륭 시대의 의복을 잘 고증한 편이다.[29] 1874년 기준으로 청나라 예산은 1억 냥이었는데 4,000에 해당한다. 2022년 8월 은 시세가 그렘당 844원 정도하므로 약 3조 3억원이 넘는다. 청일전쟁 이후 청이 일본에 지불한 배상금이 2억 냥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받아낸 랴오둥 반도를 서양 열강들의 반발(삼국간섭)로 중국에 다시 돌려주는 대가가 딱 3,000만 냥이었다.[30] 한무제만 해도 흉노, 고조선, 남월과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대토목 공사를 벌여 국가재정을 파탄내는 원인 제공을 했다.[31] 당시 청나라가 독일 조선소에 발주한 정원급 전함은 독일 해군도 발주 못한 최신예함이었다. 괜히 대륙의 기상이 아니다.[32]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일본 장교가 청나라 함대를 방문했을 때 두 가지 놀란 게 있는데 하나는 배와 포가 엄청나게 거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 사이로 널린 빨랫감들이 보였다는 일화가 있다. 이 당시 전함에서는 포 사이에 빨랫감을 너는 것을 금지했다.[33] 당연히 한번에 지급할 능력은 없었으므로 연리 4%로 39년간 분할납부로 했는데 이자포함 은 9억 8천만냥이다. 1905년 은의 가치가 하락하자 열강들은 청 정부를 압박해 으로 납부하기로 바꾸었는데 이는 약 금 37,000에 해당한다.[34] 배상금 외에도 2년간(옵션으로 2년 추가) 무기 제조 및 수입 금지, 베이징에서 해안까지 포대 모조리 철거. 12개 지역에 외국군대 주둔, 외국인에 피해를 끼친 곳에 5년간 과거제도 시행금지, 향후 통상항해조약을 열강에 유리하게 개정가능 등 이 쯤되면 국가의 주권이라는게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35] 알기쉽게 말하면 2020년대 대한민국 정부 예산이 약 500조원이니 정치가의 삽질로 국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낸 혈세 3,500조원을 그대로 외국에 빼앗긴다고 가정해보자. 나라가 뒤집어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36] 항간에는 야명주가 입 안에 있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시체가 빼자마자 순식간에 썩어버렸다는 말도 전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쑨뎬잉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야명주가 시신의 부패를 막아준다고 하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썩어있었다.'고 한다.[37] 존스턴은 입헌군주국가인 영국 출신으로 변법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니 변법운동의 원수인 서태후와 위안스카이를 열심히 깔 수 밖에. 물론 이 인간은 청나라를 멸망시킨 쑨원도 미워했다.[38] 하지만 서태후의 막장 행보는 오히려 청나라의 멸망을 앞당긴 결과를 낳았다.[39] 다만 전근대 피지배층들은 기본적으로 상위층 특히 왕가에 대한 복종의식과 존경심을 당연히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서태후가 특별히 뭘 잘해서 이런 존경을 받은 것은 아니다.[40] 여러 왕조, 황실에서 반란, 권력 분산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방계를 다 죽이지 않는 이유가 이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명망있고 지도력을 갖춘 방계는 황제 개인에게는 눈에 가시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이 다른 마음만 안먹는다면 황실의 권위가 되어주고 이런 위기에도 황가의 구심점이 되어준다. 서태후 치하에서 이런 황실 어른들이 다 죽거나 몰락했다는 것.[41] 1927년생으로 현재 나이가 무려 94세나 된다. 남편인 중국계 미국인 셀링 홍은 1996년 11월에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남편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자식들이 3명으로 현재 손자, 손녀들까지 보았다. 여담으로 리사 루는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도 유창하게 잘해서 중국 방송에도 출연한적이 있으며 현재 상하이의 대학교에서 연기를 강의하는 자문 교수로 활동한다.[42] 펄 벅이 당대에 페미니즘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여성 지배자상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 심하게 각색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43] 원제: <慈禧秘密生活>(자희비밀생활)[44] 감독이 유위강으로 훗날 <무간도 시리즈> 감독을 맡았다.[45] 함풍제 역은 우영광이 맡았다.[46] 황제의 동생인 공친왕역을 양가휘가 맡았다.[47] 단순 에로 영화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권력을 탐하다 나중엔 권력의 화신이 되어가는 서태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된 영화다. 마지막에 공친왕을 잊지 못했는지 그냥 버렸는지 모호한 표정을 짓는 구숙정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양가휘는 이 영화에서 섹시함을 유지하며 우직하고도 냉정한 공친왕 역할을 절제된 연기로, 구숙정은 단순히 '섹시스타'라고 불리우던 기존 고정관념을 이 영화로 무너뜨렸을 정도로 열연했다.[48]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중국인이 직접 언급했을 정도니 중국 내에서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지 보여주는 대목. 신문기자에 캐스팅된 심은경과 결이 비슷한 루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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