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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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seoferry03.jpg
해상사고 요약도
발생일
1993년 10월 10일
발생시각
오전 10시 10분
유형
운항 중 침몰
원인
과적, 무리한 출항
발생 위치
대한민국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인근 해상
탑승인원
362명
사망
292명
구조
70명
선종
연안 여객선
1. 개요
2. 상황
3. 정부의 무능한 대응
4. 오보 사건
5. 사고 이후
6. 기타
7. 관련 문헌
8. 유사 사고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0:27 ~ 0:34초 사이에 익사체들이 나오니 심약자는 시청에 주의 필요.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 인근 해상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선박 사고. 훼리호란 이름은 ferry의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지은 이름으로, 정식 명칭이다.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는 "페리"가 맞다.[1]

2023년 10월 10일은 사고 30주년, 희생자 30주기이다.

  • 당시 KBS 뉴스 동영상 링크
  • 당시 MBC 뉴스데스크 동영상 링크 1, 링크 2[2]

당시에는 뉴스에 모자이크 같은 기능이나 시스템, 법적 관련 규칙이 없어서 시신들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2. 상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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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훼리호는 (주)군산서해훼리(참고) 소속 여객선으로, 한국선박기술(코리아 머린 엔지니어링)이 일본의 낙도운항 유사 여객선 10여 척을 모델선으로 하여 기본 설계를 하였으며 군산시 소재 대양조선에서 건조하여 1990년 10월 진수하였다고 한다. 이 선박은 제조 검사를 받은 후 같은 해 10월 26일 관할 관청의 제1회 정기 검사를 받았다. 다음의 영상에서 침몰 전 운항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관련 문서는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우선 저 문서에서는 관련 업체들이 필터링되어 있으나 각주에다가 링크한 관련 신문 기사에 "한국선박기술(코리아 머린 엔지니어링)"과 "대양조선"이라고 나와 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관련 기사 4.

특히 이 사고는 안전사고 예방 대책을 소홀히 한 탓에 발생한 전형적인 인재(人災)로 손꼽히는데, 선박 출항 당시 기상 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출항을 감행한 것과 무리한 기기 조작이 사고의 원인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짐이 배 앞부분에만 가득 실려 있었기에 여객선 자체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뒤뚱거리는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무리한 키 조작이 결국 배가 뒤집혔다고 알려졌는데 다른 원인을 분석한 해경도 있다. 또한 당시 사고조사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수면에서 부유하던 어망과 나일론 로프 등이 프로펠러에 걸려 우현측 프로펠러가 동작 불능 상태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선체가 우측으로 선회하면서 파도를 맞은 것도 전복의 원인이라고 한다.

사고 당일 기상청에서도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항해 선박의 주의를 요한다'는 방송을 내보냈고,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초 여객선이 정상 운항을 할 수 있는 기상 여건이 아니었다고 한다. 출항 당시 초당 10~14m로 부는 북서풍 때문에 높이가 무려 2~3m에 이르는 파도가 쳤으므로 여객선이 출항해서는 안 되는 날씨였다. 게다가 정원 외에 무려 141명이나 초과 승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감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는 이 날 좋지 않은 날씨 탓에 운항하지 않을 예정이었는데 사람들 대부분이 출항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유는 후술하듯 당일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사고는 전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주말에는 계속 초과승선한 채로 운항했기 때문이다. 사실 서해훼리호가 처음 운항할 당시에는 주말에도 이용객이 얼마 없었다고 한다. 위도와 육지간 왕래객이 얼마 없는 탓에 하루에 왕복 1차례 운행해도 적자 나는 상황이었던 것. 하지만 이 배가 위도에서 육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기 때문에 운항을 멈출 순 없었고 결국 농어촌버스처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겨우겨우 운영하던 노선이었다. 이를 낙도보조항로(落島補助航路)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8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떠올랐다. 위도가 낚시 명소로 인기를 끌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낚시꾼들 때문에 이용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 주말에는 몇백 명씩 찾아오다 보니 더 이상 왕복 1회 운행으론 감당할 수가 없었다. 서해훼리호의 정원은 221명(승객 207명 + 승무원 14명)이었는데, 주말마다 찾아오는 관광객은 이를 압도했기 때문에 계속 초과승선시킬 수밖에 없었고 사고가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이곳을 찾아오던 관광객과 위도 주민들은 운항 횟수를 증편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보조금 받는 영세업체라며 증편 허가를 거부했다. 결국 주말만이라도 증편해달라고 했더니 이마저도 거부했다. 다만 이건 업체의 의지 문제일 수도 있다. 만약 정원초과로 운행하는 노선임을 정부에서 알았다면 증편을 허가하고 보조금 지급을 중지했을 것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굳이 정원 초과로 운항해도 그때까진 사고가 나지 않았고 증편하면 운항비가 더 들기 때문에 증편의 필요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꼬꼬무에서 장성규는 "설마 했겠지"라며 이들의 안전불감증을 비꼬았고 방송 말미에서 서해훼리호 이전에 발생했던 과거의 선박 사고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다시금 "'설마'가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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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운항 횟수를 늘릴 수 없는 상태로 계속 운항을 강행하니 늘어나기만 하는 더 많은 관광객들을 실어 날랐는데 이는 곧 대참사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으니 마침 또 김장철이라 위도 주민들이 만든 액젓을 내다 팔기 위해 멸치액젓 9톤, 그리고 자갈 7.3톤까지 실었다. 안 그래도 정원보다 141명이나 더 탔는데 무거운 짐까지 실은 데다 역대급 병크까지 저질렀는데 바로 이 짐들을 내리기 쉽게 하려고 화물칸에 두지 않고 배 첫머리에 두었고 이는 배가 중심을 잃게 만드는 주 원인이 되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날씨까지 안 좋은데 이렇게 운항하면 사고가 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데도 승객들이 탈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그날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3][4] 당시 사고 여객선 승객들 가운데는 직장에서 단체로 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왕복 1회 운항하는 탓에 그 선박을 놓치면 꼼짝없이 무조건 휴가 내서 하루 더 있다 와야 했다. 결국 사람이 많았어도 승객들은 출항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날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위도 인근 해상에는 어떠한 주의보도 발령되지 않았다. 천재지변 때문에 발이 묶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게다가 모든 선박의 바닷물 배수구 크기가 1.661㎡이상이 돼야 하나 서해훼리호는 0.267㎡밖에 안 됐다. 해운항만청이 만재흘수선[5]을 부적합하게 지정한 것 역시 한 몫 했다. 선박복원성 규칙에 따르면 선박 안전 운항을 위한 만재흘수는 1.912㎡가 돼야 하나 해운항만청은 2.311㎡로 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해훼리호는 화물 6.5톤을 실을 수 있도록 함에도 불구하고 40톤을 실을 수 있게 만재흘수선을 지정받았다고 한다.

또한 사고 직후의 대처 또한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선장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둘째치고라도 항해사가 당시 휴가 중이었던 터라 갑판장이 항해사의 업무를 대신했고 안전요원도 고작 2명 뿐이었다. 항해사 문제는 중요하다. 항해사가 선적하는 짐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진 전문직급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선장이 있으니 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보통 선장은 그저 보고 받고 사인만 할 뿐이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이 극도로 높았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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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 이전 서해훼리호의 내부 모습
승객들 뒤에 구명조끼들이 보인다
심지어 긴급한 상황에서 중요한 구명 장비는 제대로 동작조차 하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기우뚱거리다가 침몰해서 구명 장비를 꺼낼 틈도 없었다. 몇몇 사람은 침몰할 때 구명 장비가 있는 문 유리를 깨서 이용하여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었다. 또 사고 직후 위급 상황임을 알린 사람도 없었으며, 구조 요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인명피해를 더욱 키운 원인이 되었다. 먼저 인명구조에 나선 이는 사고지점 부근에 있던 낚싯배[6]와 어선들이었고 해양경찰, 119 구조대 등은 사고가 발생한 지 거의 1시간 만에 도착했다.

참고로 당시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지 않았다. 아날로그 휴대전화가 있긴 했지만 꽤 비쌌고 무엇보다 디지털 방식인 CDMA가 나오기 전이라서 민간에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침몰하는 선박은 유선 전화기를 쓸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이면 침몰 중이라서 유선 전화기가 작동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배의 내부에는 발전기가 있지만 침몰 중에는 발전기도 침수되기 때문에 전기가 끊긴다. 게다가 사실 배 또한 낼 수 있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항시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이 호위로 붙는 서해 5도 여객선 따위가 아닌 한 구조 요청 전화를 받았다고 현장에 몇 분 안에 나타날 수 없다.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났을 때 근처에 지나다니는 차량들이 대부분 민간 승용차들인지, 경찰 순찰차나 소방 구급차인지를 생각하면 편하다.

결국 탑승객 총 362명 중 무려 292명이 사망하는 처참한 결과가 일어났다. 당시 여객선사 측이 승객을 무리하게 초과승선시킨 바람에 시신이 무리지어 발견되는 등 워낙 인명 피해가 심했기에 한겨레 1993년 10월 12일자에 실린 박재동 화백의 만평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사신이 여객선을 바라보며 "이제까지 괜찮았잖아, 괜찮아 출항해 옳지, 옳지"하고 설득(?)하는 내용이었다. #

구명 장비가 없어 아이스박스에 매달려 목숨을 건진 사례도 있어 '배를 탈 때는 아이스박스를 가져가야 한다.'는 뼈 있는 유머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20년 전 남영호 침몰사고의 생존자 중에도 바다에 떠다니던 귤 박스를 부여잡고 매달려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7] 심지어 21년 후의 사건에서는 구명장비를 비치해 놓고도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작동하지 않아 많은 승객들이 사망하기까지 했으니 구명 장비의 관리 문제에서 정말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사실 저런 사고를 당했을 때는 아이스박스 같이 부력이 큰 물건에 매달려 있는 것이 한 가지 대처 요령이기 때문에 유머로만 치부할 일은 아니다.

3. 정부의 무능한 대응[편집]


사건이 일어나자 문민정부이계익 교통부장관과 노태섭 해운항만청장을 경질하는 한편 들끓는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것처럼 보였다. 우선 고위 인사들이 줄줄이 위도를 방문해 위도의 파격적인 개발을 약속했고 유족의 보상을 위해 정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다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2개월 후, 12월 14일자 MBC PD수첩 - <서해훼리호 침몰, 그 후 위도 사람들(백종문, 정성후 취재)> 편에서 당시 정부의 불성실, 언론의 무책임, 냄비 같은 여론 등의 추악한 민낯이 까발려졌다.

해당 방송에 따르면 정부 관계자가 유가족들의 국가배상 요구에 대해 "법정에 가봤자 유족들이 질 게 뻔하고 대법원까지 가다 보면 3~4년이 걸릴 텐데 왜 그래야 하냐"고 강압적으로 위협했으며 해운항만청 역시 PD수첩 제작진 측의 인터뷰 요청까지 거절했다. 당시 유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분노만 삭혔다. 심지어 정부 고위층 역시 위도 개발 약속을 지키지 않아 결국 위도는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기고 주민들도 떠나는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그나마 3년이 지난 1996년 1월 31일 서울지법은 서해훼리호 참사 희생자 10명의 유가족들이 국가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1인당 2~4억 원씩 총 24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도록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가는 운항 관리자를 사고 선박에 배치하지 않았고 한국해운조합 측은 사고 선박의 낙후된 무선 설비를 방치했으며, 서해훼리 측은 사고 당시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무리하게 출항시킨 책임이 있다"고 하면서도 "피해자들도 소형 낚싯배 등을 이용해 이미 만원이 된 사고 선박에 무리하게 승선해 출항을 강요한 과실(20%)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4. 오보 사건[편집]


이 사고는 한국 언론의 추악함을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서해훼리호 사건을 떠올릴 때 빠짐 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이 오보 사건이다. 대표적으로 2가지.

  • "선장이 혼자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간 것을 본 목격자가 있다"
나중에 시사저널 보도 살아있다던 백선장 사실은 지서장이었다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해당 목격자 최모씨는 위도 지서장을 백운두 선장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해당 목격자가 장기간 출어를 나간 사이에 위도에 새로운 지서장(장아무개 경위)이 부임해 왔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이 신임 지서장이 백 선장과 많이 닮았다고 한다.[8] 외모는 물론 체격과 키까지 매우 비슷하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날 입었던 옷차림조차 평소 백 선장이 즐겨 입고 다니던 옷과 모자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닮았다는 이야기는 위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했지만 약 2km 떨어진 식도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런 사정에 무지했다. 결국 지서장이 바뀐 것을 몰랐던 목격자는 사고 현장을 순시하던 지서장을 백 선장으로 오인했다.

  • "선장이 몰래 일본으로 밀항했다"
...는 것이었는데 오보였다. 심지어 검찰, 경찰도 이 오보를 믿고 수사대를 급파해 전경 3개 중대를 동원하여 위도와 식도 일대를 수색하는 한편 과실치사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릴 정도였다.

이런 오보가 왜 발생했느냐 하면 파장금 선착장에서 장지서장을 백선장으로 오인한 최 선장이 식도로 다시 돌아가 식도 주민들에게 백선장이 살아 있다고 전했고 이 말이 식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위도 주민들에게, 그리고 위도 주민과 친분 관계가 있는 전주지검 직원을 통해 검찰 관계자들에게, 다시 부안과 전주에 흩어져 취재하고 있던 언론사 기자들에게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고 당일인 10월 10일 오후부터 퍼지기 시작한 백선장 생존설은 다음날인 11일 지방석간인 <전북일보>가 사회면 1단으로 처음 전했고 그리고 또 한 방송이 오후 3시 뉴스에서 이를 보도함으로써 거의 전 언론으로 증폭되었다. 특히 <한겨레신문> 전주지역 기자 이모씨가 11일 오후 식도에서 최씨를 인터뷰한 기사가 12일 오전 한겨레에 보도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참사 발생 직후 속속 언론사 기자들이 도착하고 취재경쟁이 불붙었지만 소문을 확인하려는 경쟁도 만만치 않았으나 소문의 진원지인 식도로 건너가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았고 모든 배들이 구조작업에 나가 있었기에 배편마저 없었던 와중에 이 한겨레 기자는 용케 배를 구해 식도로 건너갔고 거기서 최선장을 만나 이 이야기를 들은 게 화근이 되어버렸다.

이 보도 이후 최선장 단독 인터뷰를 낙종한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남은 것은 백운두 선장 인터뷰뿐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백선장 생존설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여기서 갖가지 정황증거들, 예를 들어 UDT 대원들이 침몰한 서해훼리호의 조타실을 맨 먼저 수색했으나 백선장이나 다른 선원을 발견하지 못했던 점[9], 구명보트 한 척이 전남 영광군에서 발견된 점, 구조작업에 참여한 어선 중 한 척이 수상한 행동을 했다는 정보 등 갖가지 정황이 생존설을 그럴 듯하게 뒷받침하는 근거들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시민들의 무책임한 장난전화, 허위 제보가 더해져 ‘살아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살았다더라’로 바뀌고 심지어는 ‘내가 백운두다’라는 장난 전화까지 신빙성 있는 얘기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수사팀은 며칠을 수색해도 선원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자 위도지서의 경찰관들 사이에 조금씩 나돌기 시작했던 목격자 최선장이 목격한 사람이 장 지서장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백선장이 살아 있다는 것을 언론이 이미 기정사실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파급력을 갖지 못했다. 최선장 진술의 타당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던 검찰 수사팀은 10월 14일 재차 최선장을 방문하긴 했다. 검찰 수사관은 최선장에게 “위도 지서장을 잘 아는가?”라고 물었다. 지서장이 바뀐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최선장은 “물론 잘 알고 있다”고 했고 “당신이 본 사람이 그 지서장이 아닌가”라는 검찰 수사관의 질문에 당연히 펄쩍 뛰며 부인하는 바람에 수사관의 확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다. 확인 노력은 그걸로 끝이었다. 심지어 검찰 관계자들은 “생존 가능성이 1%라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한때 책임 있는 검찰 간부가 “백선장의 생존 가능성은 98%이다”라고 경솔하게 공언한 것도 생존설을 기정사실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최선장은 선장의 시신이 발견된 후에도 자신이 본 게 맞다고 생각했고 새로 온 지서장이 선장과 아주 닮았다는 위도 주민의 말을 듣고서야 의견을 굽혔다 한다. 결국, 시사저널의 취재 끝에 '신임 지서장 장 경위가 사고 지역으로 출동했다가 되돌아온 시간(오전 11시 30분경)이 목격자 최 선장이 백선장을 보았다는 시간과 대략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나 왜 이런 혼란이 발생했는지가 밝혀졌다.

생존설의 진원지인 최선장의 증언에는 처음부터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졌다가 나온 백선장의 옷이 전혀 물에 젖지 않았다고 한 점, 그리고 파장금항에 위도 주민들이 그렇게 많이 나와 있었는데도 최선장과 선원 두 사람 외에는 백선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이다. 언론과 검찰이 이런 의심스러운 점을 지나친 채 서로 상승작용을 한 게 문제를 크게 만든 원인이었다. 조금 더 면밀하게 증언을 검토하고 사고상황을 짚어봤더라면 예단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오보는 언론의 고질적 병폐인 상업주의적 경쟁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보이야기3 - ´서해`훼리호`백선장`생존’보도

아래는 당시 언론 오보를 정리한 이미지

파일:C2NloyA.jpg

위 이미지에 나와 있듯이 기자들이 도주했다고 보도한 선장은 사고 발생 5일 후에 무선통신실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날 선장과 함께 도피 의혹을 받고 있던 갑판장과 기관장 역시 같이 시신이 발견되며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발견 위치가 통신실인 점으로 미루어 선장은 도망은커녕 끝까지 구조 요청을 시도하다가 배가 전복되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 선장의 사망이 알려지자 언론들은 허겁지겁 사설 등으로 사과문을 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유가족들은 그 며칠간 억울하게 어마어마한 욕을 먹으며 큰 상처를 받은 뒤였고, 후술할 1998년 9월 22일자 MBC <PD수첩> 보도 내용에 따르면 백 선장의 아내는 사고 두달 후 위도를 떠났으며 사고난 지 5년 후 해당 프로 제작진 측이 몇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때의 상처 탓에 거절했다.

덕분에 이 서해훼리호 오보 사건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대한민국 최악의 오보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유족들이 선장의 시신이 발견된 뒤 찾아온 기자들에게 "당신들이 살아있다고 했으니, 이제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시오."라고 언론 오보를 꾸짖었고 '바른 언론을 위한 시민연합'은 1994년 10월 10일 1주기 때 연 심포지엄 '백 선장 생존설 오보, 한국 언론의 문제'에서 이 보도가 나온 날을 '언치일'로 선언했다. 당시 메이저 신문 중 예외적으로 중앙일보 선장 생존설을 입수해 위도 현지에서 추적 취재를 벌인 후 생존설을 반박했다.[10] 마이너 언론 중에서는 내일신문만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해당 인물이 선장이 아닌 위도 지서장이라는 것을 밝혀내 주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전술한 MBC <PD수첩> 1993년 12월 14일 방영분에서 보도되었고 1998년 9월 22일 '오보, 그 진실을 밝힌다!' 편에서도 후속 형식으로 같이 다뤘다. 2012년 3월 29일 XTM 남자공감랭크쇼 M16의 '대한민국을 뒤흔든 오보 사건'이라는 주제의 차트에서 12위에 선정되었다. 한편 언론의 오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선장의 행방을 추적하던 검찰, 경찰[11] 역시 톡톡히 망신을 당해야 했다. 또한 2014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피노키오>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가 있었음에도 한국 언론의 추악함은 달라진 게 없다. 2011년 아시아나항공 991편 추락 사고에서도, 같은 선박사고인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9년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에서도 여전했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5년에 있었던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의 기장이었던 타카하마 마사미(高濱 雅己)의 생존설이다. 오보는 아니지만 추락 당시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12] 많은 사람들이 기장이 도망쳤다고 생각해 기장의 유가족을 15년 동안 비난한 일이 있었다.[13] 2000년에 당시 상황이 기록된 녹음본이 알려지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5. 사고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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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로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는 간부급 직원 10명을 잃는 참변을 당했으며 전주시 서서학동사무소 역시 동장을 포함해 직원 9명을 잃는 참변을 당했다. 또한 대한민국 육군본부 역시 영관급 장교 10여 명이 사고 선박에 탑승했다가 참변을 당했고 그 밖에 한국통신, KBS노동조합(1노조) 전주지부, 충북대학교, 부안경찰서 소속 직원들도 단체로 여행을 왔다가 사고를 당했다. 한편 사고 초기에 구조 작업에 앞장섰던 위도 주민들 역시 60여 명의 이웃 주민들을 사고로 떠나보내는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도 실종자 수색 및 시신 인양 작업에 참여해 사고 수습에 협조했다.

선박 침몰 사고의 경우 사망자의 시신을 모두 수습할 확률이 매우 희박한데 이 사건은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사망자 전원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승선객들이 탈출할 틈도 없이 배가 뒤집혀 전원 배 안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뉴스를 본 사람들의 뇌리에 생생히 박힌 장면으로는 배 근처에서 짐과 쓰레기에 뒤섞여 둥둥 떠다니는 시신들의 모습이다.[14] 그러나 서해 특성상 거센 조류 때문에 시신이 유실될 가능성이 꽤 높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신을 인양 성공한 것은 상당한 천운뿐만 아니라 노력도 따른 것이다. 사실 유실된 시신까지 찾기 위해 당대 최대 인원을 광범위하게 투입한 것[15]도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 사고의 여파 때문인지 몰라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이후에 이 항로의 여객선 운항 횟수가 늘었다. 사고 직후부턴 비록 카페리가 투입됐지만 하루 왕복 2회로 증편되었다가 현재는 평일 왕복 6회, 주말에는 왕복 8회로 운항 중이다.

사고 당시 정확한 승선 인원 및 승선자 신원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던지라 사고 이후 그동안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던 승선자 인원 통보 및 신원 증명 규정이 강화되었다. 당시만 해도 출항 시간이 임박했을 때까지 승선권을 끊지 못했을 경우 먼저 승선한 후 배 안에서 승선권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승선권 선내 판매가 금지되었다. 또 모든 여객선은 운항 거리를 불문하고 출항 직전에 승선 인원을 통보하게 되었다. 여객선 승선권을 구입할 때 성명,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신원 정보를 반드시 기입해야 하는 것도 이 사고를 계기로 이루어진 조치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는 선박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일은 전혀 하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터진 게 세월호 참사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인적 사항이 전산 관리되어 신분증 없으면 배에 탈 수 없다고 한다.


6. 기타[편집]


  • 이 사고 8일 후에 1993년 한국시리즈가 열렸지만 29년 후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지는 않았다.[16]

  • SBS 예능 프로 '' 2013년 5월 16일 방영분에 서해훼리호 침몰로 부모님을 잃은 남자(성악가 남자 1호)가 출연하였다.

  • 위도 파장금항에서 면 소재지로 가는 길 중간 쯤에 서해훼리호 사고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 흔히 사고 공화국이라고 부르던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 사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1995년까지 매년 최소 1번 이상씩 참사가 터졌다.[17]


  • 사고의 교훈을 잊은 듯 21년 후에는 더 큰 규모의 배 침몰 사고가 발생했다.[18] 안전불감증이 없어지기는커녕 비록 인재였지만 끝까지 승객 대피를 위해 책임을 지고 선박과 운명을 같이 한 서해훼리호 선장 및 선원들과는 달리 그 책임마저도 지지 않았다. 또한 한국 언론의 악질성도 몇 술은 더 뜨는 수준이었다.[19] 심지어 2017년 3월 스텔라 데이지호 침몰 사고에서도 무능력한 대응이 재현되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1년 11월 4일 방영분인 3화 '그 배를 탄 사람들 - 1993 서해 훼리호'란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방송에서도 최후반부에 기존에 일어났던 선박 사고들을 언급했고 가장 최근에 발생한 해양 참사인 세월호 참사와의 유사점을 지적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생존자 중 한 분이 SBS 달리 채널에 업로드된 에피소드 편집본 영상에 직접 댓글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7. 관련 문헌[편집]




8. 유사 사고[편집]


발생년도
사고명
사망자수
1953년
창경호 침몰 사고
269명
1970년
남영호 침몰 사고
326명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304명
2017년
영흥도 낚싯배 전복 사고
15명


9. 둘러보기[편집]



역대 대한민국의 대형 사고 및 참사

[ 202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2022년 10월 29일

159
이태원 압사 사고

2020년 4월 29일

38
}}}
[ 201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2019년 5월 29일

27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

2018년 1월 26일

47
밀양 세종병원 화재 사고

2017년 12월 21일

29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2014년 12월 1일

27
501오룡호 침몰사고

2014년 5월 28일

21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화재 사고

2014년 4월 16일

299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2010년 3월 26일

46
천안함 피격 사건

}}}
[ 200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2008년 1월 7일

40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3년 2월 18일

192
대구 지하철 참사

2002년 4월 15일

130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2001년 9월 25일

25
제7호 태창호 사건

2001년 7월 24일

20
진주 관광버스 추락사고

2000년 10월 27일

22
장수 88올림픽고속도로 추돌 참사
[ 199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0일

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

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

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

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

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

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

101

1994년 10월 24일

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

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

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

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

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

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

78

1993년 1월 7일

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1년 11월 3일

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

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

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 198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7일

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

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7년 11월 29일

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

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

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

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1월 14일

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
[ 197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

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

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

76
창녕 남지읍 나룻배 전복사고

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41
서문시장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

31
서울역 압사 사고

}}}
[ 195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

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6년 1월 12일

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

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

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

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

66
행운환 침몰사고

1953년 1월 9일

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
[ 1940년대 ]
발생일
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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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 이상
우키시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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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나 당시 중앙일보 보도에선 '페리'라고 표기했다.[2] 시신을 인양하는 과정이 직접적으로 담긴 영상이므로 시청 시 주의 요망.[3] 아직 주 5일 근무 제도 도입 전이라서 토요일에도 오전까지 일하던 시절이었다.[4]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당시 탑승객은 대부분 직장인이라 다음날 출근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같으면 직장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휴가를 쓰거나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는 방법이라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휴가를 쉽게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5] 화물과 승객을 최대한 실었을 때 물에 잠기는 선.[6]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당시 처음 구조를 간 낚싯배 종국호 선장의 증언이 나왔다. 선장은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무전을 듣고 나서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낚싯배에 탄 손님들을 설득해서 구조에 나섰다고 한다. 낚싯배 손님들은 처음에는 자기들을 다른 섬에 내려주고 가라며 거절했으나 "우리는 일단 좋은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그분들(사고 피해자들)은 지금 바닷물을 먹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처지가 아니냐, 당신들이 그런 처지를 당했다 생각하고 날 믿고 가자"는 선장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이 움직여 다 함께 사고 현장으로 출발해 악전고투 끝에 무려 44명을 구조해 냈다. 이후 종국호는 정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일단 구조한 생존자들을 데리고 위도로 갔고 종국호에 미처 다 태우지 못한 나머지 26명은 뒤따라서 온 낚싯배와 어선들이 와서 구조했다.[7] 해당 사고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당시의 귤박스는 지금처럼 종이박스가 아닌 나무상자였다. 이 덕분에 사람 한 명 정도는 버티고 떠있을 수 있었다.[8] 실제로 이 신임 지서장은 나중에 사건의 여파가 잠잠해지고 나서 백운두 선장의 사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너무 닮아서.[9] 당시 조타실 내부가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안 좋아 초기 발견에 실패했다고 한다.[10] 1995년에 편찬된 <중앙일보 삼십년사> p306에도 해당 비화가 나온다.[11] 다만 검찰과 경찰은 팩트 체크를 정확히 하고 수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목격자 증언 하나에 선장을 악마로 만든 건 큰 잘못이다. 이게 단순히 검찰과 경찰의 무능으로도 볼 수 있지만 또 다른 시각으로는 서해훼리호는 애초에 정부의 무능한 대처, 증편을 요구했는데도 증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쌓이고 쌓여서 일어난 사고인데 선장 한 명을 악마로 만듦으로써 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여론을 선장 쪽으로 돌렸다는 측면도 있다. 말 그대로 여론을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선장이란 희생양이 생기니 그냥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모든 수사를 선장 쪽으로 했다는 것.[12] 기장의 시신은 아예 불타 버려 유전자 감식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그나마 치열이 확인되는 아래턱뼈로 신원이 겨우 확인되었다.[13] 당시 사람들이 기장의 가족에게 519명을 죽여 놓고 뻔뻔하게 잘도 살아남았다는 비난을 했다고 한다.[14] 그 당시의 방송은 이에 대한 모자이크 처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방영되었다.[15] 대한민국 해군 SSU, UDT/SEAL 등이 대거 투입되었다.[16] 훗날 일어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에도 공식적으로는 선포하지 않았다.[17]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18] 세월호 사건은 국가가 늑장 대응을 해서 벌어진 비극인 데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불특정 다수인 데 비해 세월호는 특정 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까지 희생되었다.[19] 90년대 초반에는 PC통신 이용자가 그리 많지 않았던 데다 속도도 느렸기에 그나마 기사 낚시질은 잘 벌어지지 않았다. 또한 같은 이유로 인해 기사의 주 보도 방법이 신문이나 방송국들의 경우 뉴스밖에 없었고 특히 신문은 일단 팔려나가면 일단 그날은 오보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고 그 다음날 신문이 돼야만 정정 보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한 번이라도 사실 확인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때는 네트워크가 발전된 영향 때문인지 기사 낚시질 같은 트래픽 장사질+상업, 선정적인 보도 행태+침소봉대적인 보도 행태+기사 베껴 쓰기+제대로 확인 안 하고 보도, 인터뷰하기+이걸 다른 방송, 기사랑 착각하여 확인 안하고 2차 오보 양산하기 등등의 종합 선물 세트 현상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