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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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해왕의 태자
석우로 | 昔于老

출생
(음력)

연대 미상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249년 또는 253년[1]
사로국 서라벌
재위 기간
(음력)

신라의 태자
209년 7월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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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석씨

우로(于老)
부왕
내해 이사금
자녀
석흘해
작위
왕태자(王太子)

1. 개요
2. 생애
2.1. 무인으로서의 전성기
2.2. 비참한 최후
3. 평가
4. 기타



1. 개요[편집]


신라 초기 석씨 왕가의 귀족, 장군.

제10대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자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큰사위였다. 기록이 모호한 신라 초기에서도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몇 안 되는 명장이다. 장인인 조분 이사금 시대에 대장군으로서 경상도 지역 안쪽의 신라 주변 소국의 반란이나 고구려, 의 침략을 방어해 내며 맹활약했다. 하지만 석씨 족단 내부의 왕위 계승 문제에 당시 신라가 처한 묘한 대고구려, 대왜 외교의 복잡한 역학 관계가 얽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2. 생애[편집]



2.1. 무인으로서의 전성기[편집]


아버지인 내해 이사금의 재위기에 석우로는 태자였다. 그러던 209년 7월, 가야(함안 안라국 혹은 김해 금관국)가 한반도 남부 8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자(포상팔국의 난)[2] 이음(利音), 물계자 등과 함께 6부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포상팔국의 연합군을 제압하고 적장을 죽이며, 가야인 포로 6,000여 명을 탈환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이후 약 20년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데, 230년 부왕 내해 이사금이 승하하자 왕위는 태자였던 석우로가 아니라 사위였던 조분 이사금(제11대)에게 돌아갔다. 당시 신라는 벌휴 이사금(제9대)의 두 아들인 석골정(장남)을 따르던 이들과 석이매(차남)를 따르던 이들로 나뉘어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내해 이사금의 사망으로 인해 석우로로 대표되던 이매계가 석조분으로 대표되던 골정계에게 알력 다툼에서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조분 이사금에게 왕위가 돌아간 이유는 석조분이 전 전왕 벌휴 이사금의 적장손이었던 점이 가장 컸다. 석골정과 석이매가 벌휴 이사금 시기 때 모두 태자에 올랐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그다음 왕위는 당연히 석골정의 장남 석조분에게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내해 이사금의 어머니 내례부인의 힘으로 인해 석조분보다 나이가 많았던 석내해가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석내해는 백부인 석골정의 딸, 즉 석조분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석골정의 사위 신분이라는 것도 이용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한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해 이사금은 사촌이자 처남인 석조분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켰고,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조분을 자신의 사위로서 왕위 계승 1순위로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석우로는 왕이 되진 못했지만 조분 이사금 즉위 직후 곧바로 대장군은 물론 최고 관직인 서불한에 임명되었고, 조분 이사금의 딸 명원부인 석씨와 혼인했다. 이로써 석우로는 부왕 내해 이사금 재위 당시의 석조분이 그러하였듯 왕위 계승 서열 1순위가 되었다. 하지만 조분 이사금의 승하 이후 왕위는 또다시 조분 이사금의 동생인 첨해 이사금(제12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231년 7월 석우로는 지금의 김천시에 있었던 소국 감문국을 정벌했다. 233년에는 동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의 침략을 영덕군 사도성에서 바람의 방향을 읽어 화공을 사용해 격파했다.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며, 거의 전멸에 이르는 피해를 입은 왜군은 한동안 신라를 직접 침공하지 못하고 외교 교섭에 나선다.

243년에는 고구려의 북쪽 변경 침략을 방어하러 출정했으나 여기서는 이기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245년 고구려가 또다시 신라 북쪽을 침입했을 때는 신라군이 고전해 마두책이라는 곳에 물러나 있었는데 이때 밤에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석우로가 몸소 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풀섶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줘 군사들 모두가 마음속으로 깊이 감격했다고 한다. 고위 귀족 출신이지만 그런 권위를 휘두르지 않고 신분 낮은 아랫사람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려고 하는 지휘관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247년 사량벌국(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의 소국. 사벌국沙伐國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의 난[3]에서 활약하였다.


2.2. 비참한 최후[편집]


제12대 첨해 이사금 재위 7년[A], 석우로는 일생일대의 말실수 혹은 의도적인 도발을 하고 마는데, 바로 왜국 사신 앞에서 왜왕('오오키미')을 모욕하는 발언을 한 것이었다. 때문에 분노한 왜는 신라와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서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첨해왕 7년 계유(서기 253)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방문하자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사신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피난해 있게 되었다. 우로가 아뢰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삼가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어찌 군대를 일으켜 이 지경까지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느냐?”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더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자신의 태도로 자초한 일이니 스스로 전쟁에 책임을 지겠다며 적진으로 갔지만 분노한 왜군에 의해 그 자리에서 붙잡혀 화형을 당한다. 왜 굳이 이런 거친 표현을 써서 화를 불렀는지는, 위에도 적혀있듯 석우로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왜군과 싸운 경력도 있는 만큼 평소에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다. 이후 후술하지만 왜가 또 다시 쳐들어오게 되는데, 이때는 첨해 이사금이 별 어려움 없이 거뜬하게 격퇴해서 석우로 당시의 망신을 설욕하게 된다. 즉 상식적으로라면, 신라가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대고구려전을 제외하면 많은 군공을 세운 자질 뛰어난 석우로 왕자를 굳이 희생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석우로가 그 사건 전에 한 발언도 일부 원인이 있었다. 석우로가 훗날 흘해 이사금(제16대)이 되는 어린 자신의 자녀의 자질을 크게 칭찬하고 가문의 앞날이 이 아이에게 있다는 식으로 발언했는데, 석우로 본인으로서야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첨해 이사금을 비롯한 골정계 입장에선 다음 왕위는 자기 아들에게 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력으로 받아들였을 개연성이 크다. 결국 나중엔 그렇게 되긴 했지만 첨해 이사금이 석우로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 당시에도 석우로는 그냥 왕족이 아니라, 상당한 공적과 군권을 가지고 있던 선대 내해 이사금의 장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석우로가 실언해서 왜군이 침략해 오게 되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고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압박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하지만 사건이 이걸로 끝나진 않았다. 이후 왜국 사신이 찾아오자, 이번엔 원한을 품고 있던 석우로의 처 명원부인 석씨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국 사신을 불태워 살해하는 복수사건이 일어났고, 왜국이 살해된 사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다시 쳐들어왔다. 그러다 신라 측이 막아내서 결국 돌아간다. 그야말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상황.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미추왕(味鄒王) 때 왜국 대신이 와서 예방하였는데, 우로의 처가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하게 되었다. 그가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가 장사(壯士)를 시켜 뜰에 끌어내려 불태워서 지난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몰려와 금성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서도 석우로가 일본 측에 붙잡혀 살해당하고, 그 부인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다는 큰 틀에서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신라 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뼈를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 죽은 왕의 처는 신라인과 공모하여 일본 대사에게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그대와 결혼하겠다"고 속여 왕의 시신이 있는 곳을 알자 곧바로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그때 대사의 시신을 왕의 시신 밑에 묻고 "존비(尊卑)의 순서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천황이 이 소식을 듣고 진노하여 신라를 정벌하러 군대를 보내자 신라인들이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여 일본군은 철수했다.

'우류조부리지간'에서 이름 부분에 해당하는 '우류'(宇流)가 (석)우로와 음운상 공통점이 크다. '조부리지간'은 신라 고유의 관등인 서불한의 음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다. 여기서 '신라 왕'이라 한 이유는 당시에는 왕이 국가수반뿐 아니라 귀족층들의 존칭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 예로 영일냉수리비에서 간지(干支)층의 귀족들도 '왕'(王)으로 칭하고 있는걸 볼 수 있다. 혹은 《일본서기》와 <신공황후기> 기록에 가필이 심하게 들어가 있다는 특성을 고려하면, 왜국에서 자신들의 전공을 선전하기 위해 석우로를 일부러 '왕'으로 높여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3. 평가[편집]


외국에 취한 태도와 달리 아군에겐 솔선수범하는 장수였고, 병사들에게도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를 보여주는 한 일화로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그걸 막으러 북쪽으로 갔을 때, 음력 10월인 겨울이어서 갑자기 한파가 불었다. 때문에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우로는 직접 나무를 해서 불을 피우며 병사들을 배려하고 거기에 병사들이 감격했다고 한다.

그가 비록 무례한 실언을 해 쓸데없는 전쟁을 하게 해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건 잘못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것만 갖고 석우로를 몰아붙이며 첨해 이사금측을 비롯한 골정계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까진 없다. 왜는 그 이전에도 걸핏하면 신라 변경을 습격하며 인구와 물자를 약탈하는 일이 잦았고, 그럼에도 사신을 보내서 왕의 딸을 달라는 등 되도 않는 강짜를 부리곤 했었다. 하지만 본인의 반왜적인 입장을 공식 외교 석상에서 당사자를 향해 내뱉는 바람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를 전쟁을 하나 더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전쟁을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지만 먼저 전쟁을 걸지도 말라"는 경구가 왜 있겠는가. 왕이 우유촌으로 피난 가야 했을 정도면 분명 위기가 틀림없었다.

일단 석우로가 전후 사정이나 6촌 형제이자 외가 쪽으로는 4촌이기도 한 첨해 이사금의 문책을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 목숨 걸고 책임져서 전쟁을 막은 건 대단한 일이란 걸 알아야 한다. 그 같은 경우 그때까지 쌓은 업적이나 위치를 봐선 저항할 수도 있었겠고 정 어려우면 고구려나 백제로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 깨끗하게 자기 목숨으로 책임진 것이다.


4. 기타[편집]


일부 기록에선 제16대 흘해 이사금이 석우로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년만 그대로 믿으면 석우로가 죽은 딱 그해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쳐도 죽을 때 100세를 넘는다는 말인데 아주 장수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흘해 이사금이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자체가 고고학[4]이나 중국 역사서와 교차 검증 시 연대 자체가 맞지 않고, 《삼국사기》 내에서도 인물들의 재위 기간과 수명이 지나치게 길다는 문제가 있어, 기년을 끌어올렸다는 의혹은 많다. 물론 김부식이 기년을 끌어올린 건 아니고, 김부식이 참고한 사료에서 연대가 늘어져 있던 것을 김부식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5]

기년 문제에 대해 더 말하자면, 석우로가 싸웠다는 고구려는 기년만 믿으면 조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당시 한참 떡실신당하고 있던 시절의 3세기 중반 고구려인데, 그 당시 고구려가 국내를 추스르는 건 고사하고 위나라의 강력한 위협에 대처하기 급급했다는 걸 보면 당시 아예 세력권에서 잠깐 이탈 중이던 동예를 거쳐 신라 서북변 일대를 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체로 대세는 《삼국사기》의 계보는 구전으로 이어왔고, 김씨 족단이나 박씨 족단의 다른 계보와 대조해 보면 적어도 말이 되기에, 기년 모순과는 무관하게 계보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그러므로 석우로는 흘해 이사금의 부친이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석우로에 대해 관련된 일은 적어도 4세기 초중반에 일어난 일이라고 봐야 여러모로 아귀에 맞다. 연대를 대조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 《일본서기》조차 하필 이 시점에 이주갑인상으로 시열대가 개판이 되는게 문제지만, 연대 대조에 참조가 되는 건 《일본서기》만 있는 건 아니라서 비관적이진 않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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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책의 <신라본기>에는 재위 3년(249) 4월이라고 적혀 있어 양자가 충돌한다. <본기>에 따르면 석우로는 244년 1월 서불한으로 임명되었고, 만 4년이 지난 248년 1월에 이찬 장훤(長萱)이 새로 서불한으로 임명되는데, 불과 15개월이 지난 시점에 다시 석우로가 서불한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15개월 사이에 장훤이 죽어서 석우로가 다시 서불한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열전>의 기록을 <본기>에 옮겨 실을 때 연도를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2] 사실 현대 학계 연구상으로는 어느 종주국에 반기를 드는 그런 난(반란)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여러 가야계 도시 국가들 간 국제적인 전쟁이라고 해석되는 편이다. 다만 임진왜란도 그렇듯이 전통적으로 사용돼 왔던 용어가 포상팔국의 '난'이라서 계속 사용하는 것.[3] 백제 쪽에 붙으려고 했다. 후삼국시대아자개에서도 다시 한번 재현되지만 상주시 지역은 고대 신라와 백제의 가운데쯤인 요충지라 단순한 지역 하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A] [4]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경주 월성의 《삼국사기》 기록상 초축 시기는 제5대 파사 이사금 22년인 기원후 101년이지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 월성의 초축 연대가 기원후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 있다.[5] 이 사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에 달린 주석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석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후한서》에는 태조왕이 안제 건광 원년(기원후 121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해동고기》에는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기원후 146년)에 태조대왕이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줬다고 한다.[6] 그나마 고대 신라의 영역 거의 전체는 현재 남한 내에 있기에,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그나마 사건 자체들은 딱딱 서로 간에 가계도와 함께 아귀가 맞춰 돌아가는 《삼국사기》 신라사와 대조하면 밝혀내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신라사는 박•석•김 세 족단이 왕위를 주고받은 게 《삼국사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그나마 낫지만, 백제사는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서로 다른 왕계임은 누구도 알아낼 수가 없었고, 고고학적으로 지배층 자체도 애초부터 이원적이었다는 증거는 무려 21세기 와서야 확증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