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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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랴오닝성의 성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심양'이다. 인구는 약 907만 명, 중공업과 군수공업이 발달하고 지리상 중국 내륙에서 둥베이와 한반도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둥베이의 심장인 격이다.
2. 상세[편집]
이 지명은 시 주변을 흐르는 훈허 강(渾河)의 옛 이름 선수이 강(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뜻인 '심수지양(瀋水之陽)'에서 유래한 것이다. 발해가 심주라는 이름을 쓴게 최초로 이 지역 지명에 '심'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며, 이후 심주, 심양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원나라 시기 고려 국왕이 겸임으로 봉작되었던 심왕위의 '심'이 이 지역이다.
과거에는 고조선의 수도 장당경이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고조선-연 전쟁 이후 중국 요동군 후성현(候城縣)이 되었다가 시간이 흘러 고구려 영토가 되었고 개모성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로는 당나라가 이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이후 발해가 이곳을 차지하여 심수(혼하)의 이름을 딴 심주(瀋州)를 설치하였다. 발해 이후로 줄곧 심주(瀋州), 심주(瀋陽) 등으로 불리며 현재의 선양(瀋陽)에 이른다. 이후 명나라 대까지 선양으로 불리다가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이때 '묵던'(ᠮᡠᡴ᠋ᡩᡝ᠋ᠨ, Mukden)[2] 이란 만주어로 도시 이름을 고쳤다. 묵던은 중국식으로는 성경(盛京)으로 불렸다. 이때 세운 궁전이 선양고궁인데, 영어명이 '묵던 팰리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와 소현세자가 끌려간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후 1644년 청군이 베이징에 입성한 후 수도로서의 위치를 상실한 성경은 1657년 다시 봉천부(奉天府)로 개명하며 사실상 만주족의 고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만주 일대를 신성시하는 청국 조정의 방침에 따라 한족의 출입이 엄금되었으나, 이후 열강들이 만주를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땅을 뺏기게 된 청나라가 급하게 출입금지를 해제하여 사람들을 만주에 살도록 하자마자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봉천으로 흘러들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1900년 전후로 간도와 만주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대한제국이 봉천 일대에 군대를 보내 만주 지역의 청군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히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3]
20세기 초에는 장쭤린-장쉐량으로 이어지는 봉천군벌의 근거지가 되었다. 1929년 6월 3일, 국민당의 2차 북벌이 행해지고 북양정부의 수도 베이징이 위협당하자 장쭤린은 펑톈을 북양정부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여 며칠 동안 중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장쭤린이 6월 4일 열차 폭파로 비명에 가고 동북역치가 일어나면서 무의미해 졌다.
참고로 당시 이 도시의 이름인 선양-펑톈의 지명은 알자스-로렌처럼 정치적 떡밥과 맞물려 개명이 반복되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국에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기존에 있던 청나라의 봉천부(奉天府)는 봉천현(奉天縣)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13년 4월 상위 행정구역인 봉천성과 명칭이 같다는 이유로 봉천현은 승덕현(承德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한 달 뒤인 5월에는 선양현(瀋陽縣)으로 재차 변경되었다.# 이어 봉천성 남로도(南路道)에 속하게 되었다.
1923년 5월 3일 봉천시정공소주비처(奉天市政公所籌備處)가 성립되어 같은 해 8월 봉천시정공소가 정식으로 성립되고, 선양현은 봉천시(奉天市)가 되었다. 정식으로 수립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1929년 2월 5일 봉천성의 명칭을 랴오닝성으로 개칭하였으며, '봉천시'라는 명칭도 같은 해 4월 2일 선양시(瀋陽市)로 개칭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뒤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다시 봉천시로 개칭되었다.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만주족에게 역사적 상징성이 높았던 선양을 수도로 삼고 만주국 건국을 선포하고자 했으나, 일본 측은 푸이의 뜻과 달리 선양 북쪽의 창춘시를 수도로 삼았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중일전쟁이 끝나자 다시 '선양시'라는 명칭을 회복했다.
선양과 그 주변도시는 평안도/경상도계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시타(西塔)란 곳에는 한국인가게, 북한(조선)식당(평양관-모란관) 등 간판이 한글로 표기된 상가가 가득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2016년 이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으로 이른 바 한한령이 단행된 뒤 기존에 4~5만 명에 육박했던 한국인들이 빠져나가면서, 한인상가도 많이 쇠퇴했다. 그마저 남아 있던 곳들도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거의 사라져 한국인 상권이 사실상 붕괴했다.
3. 여담[편집]
- 여담으로 중국 인근 국가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공들이 비자가 만료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북한이 북중세관을 걸어잠그는 바람에 현재 비공식으로 4~5만 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시타, 북한 대사관 인근에 많이 상주하고 있다. 이곳 조선족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중학교까지 중국조선말로 언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조선족이 많은 원인으로 많은 탈북민들도 선양에서 은신하며 살고 있다.[4] 탈북민이 가게 모델로 활동할 만큼 탈북민에 대해 타 지역보다 우호적이다. 딱히 탈북민이 아니더라도 북한 사람들이 많이 살기도 한다. 충칭에 이은 중국의 5번째 직할시로의 승격을 노리고 있는 중이다. 현재 중국에선 新一线城市 (신1선도시)로 불리고 있다.
- 중국 동북 3성이 대부분 그렇듯이 여기도 만주다운 끝내주는 대륙성 한랭건조한 기후를 자랑한다. 1월 평균기온이 -11.2℃로 매우 춥고 -30℃ 이하로 내려간 적도 있다. 현재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옛말이다. 여름에도 40℃ 가까이 찍은 적이 있는 등 시원한 동네는 결코 아니다. 지열이 뜨겁기 때문에 덥게 느껴지지만 건조한 기후인 관계로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고 인근에 큰 산이 하나도 없어, 종종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유입되면 비교적 시원해진다. 또한 최근엔 강수량도 많이 증가해서 열을 많이 식혀준다.
-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한 첫 의과대학인 중국의과대학이 선양시에서 세워졌고 현재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중국 공농홍군(工農紅軍) 군사의학원을 모태로 만주의과대학과 봉천의과대학과 같은 만주의 의과대학들을 흡수하면서 세워졌다.
- 북한 자본으로 운영되는 호텔인 '칠보산 호텔'도 선양에 있는데, 납북 위험이 매우 크므로[5] 대한민국 국민은 이곳에서 숙박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이 호텔은 원래 목적부터가 북한 근로자나 북한식당 종업원의 숙소 역할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선양 속의 작은 북한이나 다름없다. 주변의 중국인들도 숙박할 수 있었으나, '스파이 호텔' 정도의 수상쩍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다. 객실마다 설치된 TV도 중국 쪽 채널 일부를 제외한 외신 채널들은 죄다 막혀있으며 검은 화면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칠보산 호텔은 대북제재를 받으면서 잠시 문을 닫았으나,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중국인 명의로 소유를 바꾸고 중푸 국제호텔(ZF International Hotel)로 간판까지 바꿔서 여전히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 시설은 중국 자본이 인수하면서 매우 개선된 듯하다. 2층은 식사칸, 3층은 개별 방, 4층은 회의장이며, 호텔 내부에 고려항공 사무실이 있다.
- 2014년부터 한중간에 매년 실시되고 있는 6.25참전 중국군 유해반환으로 중국으로 돌아간 유해는 선양의 '항미원조열사릉원'에 안치된다.
4. 교통[편집]
지하철은 선양 지하철이 있고, 이곳의 관문인 선양 타오셴 국제공항에는 고려항공이 취항하고 있다. 즉,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과 더불어 평양행 항공편이 있는 몇 안 되는 공항이다.
선양시를 지나가는 주요역과 노선은 다음과 같다.
- 선양역(沈阳站): 하다고속철도(哈大客运专线), 징선고속철도(京沈客运专线), 선다철도(沈大铁路), 선산철도(沈山铁路), 선단철도(沈丹铁路)
- 선양난역(沈阳南站): 징하고속철도(京哈高速铁路), 선단고속철도(沈丹客运专线)
- 선양베이역(沈阳北站): 하다고속철도(哈大客运专线), 징하철도(京哈铁路), 선지철도(沈吉铁路), 선다철도(沈大铁路)
5. 군사[편집]
중국 인민해방군 북부전구 사령부와 북부전구공군 사령부가 이곳에 있다.
이전에는 북부전구육군 사령부도 있었다.
6. 출신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1. 우호 협력 도시[편집]
[1] 간화자에서는 瀋이 沈으로 병합됐는데, 아예 지명이 개정된 것으로 봐서 정체자로 적을 때도 沈陽으로 쓰는 경우가 없진 않은 것 같다. 선양시 공식 웹사이트의 정체자판에서도 일단 沈陽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대륙 본토 밖에서는 대개 예전 표기인 瀋陽으로 쓴다. 선양의 첫 글자가 沈이 된 것은 어차피 《간화자총표》에 瀋을 폐지하여 沈으로 통합하게 했기 때문이지 별도로 지명 개정 절차를 밟은 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어떻게 보면 沈陽으로 쓰는 건 근거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간화자총표》 부록에는 간단한 글자로 지명을 개정한 케이스들을 표로 나열하고 있으나 선양은 이 표에 안 들어 있다. 대신 표 아래에 한자 간화 과정에서 (자동으로) 변경된 지명들도 있다면서 그 사례 중 하나로 선양을 들고 있다(此外,还有以下两种更改地名用字的情况: (1)由于汉字简化,例如辽宁省瀋阳市改为沈阳市; (2)由于异体字整理,例如河南省濬县改为浚县。). 한편 沈의 본래 뜻인 '잠길 침'은 이체자인 沉으로 쓰고 있다.[2] 194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로 이 도시를 나타낼 때는 Mukden이라는 표기가 일반적이었다.[3]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약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북방 지역의 대한제국군은 도적 토벌, 의화단 잔당 토벌, 국경 분쟁 등으로 실전에 잔뼈가 굵은 강군이었다. 이러한 군사를 대한제국이 무려 15,000명이나 만주에 증파하고 간도지역의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하자 청나라는 이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4] 덕분에 선양은 탈북 과정이나 은신중인 탈북민들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에는 거의 100% 확률로 언급되는 곳이다.[5] 탈북민 전혜성도 이곳으로 유인당한 뒤 보위부에 납치되어 납북되었다는 정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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