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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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禪讓
5.1. 배경
5.2. 과정
5.3. 역사
5.3.1. 불분명한 시초
5.3.2. 불안한 부활
5.3.3. 피바다의 시작
5.3.3.1. 남조
5.3.3.2. 북조
5.3.4. 악순환의 연속
5.3.5. 선양의 붕괴
5.3.6. 선양의 회귀 및 소멸
5.4. 총평
5.5. 한국 역사 속의 선양
5.6. 기타
5.7. 미디어의 선양
5.8. 같이보기



1. 瀋陽[편집]


  • 중국의 도시 선양(심양·瀋陽) - 선양시 문서 참조.

2. 鮮洋[편집]



3. SunyanG(기업)[편집]



4. 선양(후한)[편집]







5. 禪讓[편집]



"옛날 , , , [1]

은 만고의 죄인입니다. 그들 때문에 뒷세상에 여우처럼 아양 부려 임금의 자리를 빼앗은 자가 선위(선양)를 빙자하여 신하로서 임금을 치고서도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러니 네 임금이야말로 도둑의 시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원생몽유록》,[2]

복건자[3]


선양()이란 혈통상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행위를 말한다. 중국의 고사에서 임금이 임금에게, 순 임금이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고사에서 유래했다.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에게 물려준다는 의미인 양위와는 다른 개념이었으며, 일단 선양이 발생하면 실질적으로 이전 왕조는 멸망한 것으로 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선양한다고 나와있다.

역성혁명처럼 기존의 통치자가 패배하고 새로운 왕조로 바뀌는 상황에서 군주의 지위가 새로운 인물에게 이양되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한 마디로 말해 기존의 군주가 자발적으로 평화롭게 권력을 후임자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다른 하나인 방벌은 무력을 쓰는 것처럼 강제로 군주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5.1. 배경[편집]


동양의 군주제는 신권주의(神權主義)와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하늘에서 부여받은 의무인 '천명'을 수행하는 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맹자의 그 유명한 이른바 역성혁명 이론이 등장하는데. 아무리 황제라도 천명을 잘 받들지 못하면 더 천명을 잘 받들 수 있는 자가 새로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새 왕이 이전의 왕보다 덕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받기만 하면 왕조의 교체는 동양사상적 관점에서 완벽하게 허용된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선양을 받기만 하면 질떨어지는 날조 명분을 유력자들에게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들을 모조리 생략하고, 이전 왕조의 구성원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정권 안정에 엄청난 도움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선양도 받지 못한 채 무력으로 권력을 뒤엎어버리고 명분없는 반란을 일으켜서 승리한 역사로 영원히 기록에 남기는 것은 후손들에게도 두고두고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민심을 잃고 다른 제후들에게 외면을 받았다는 점에서 현실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불리했다.

그래서 전임 왕조의 신하들은 모두 대숙청을 하더라도 적대관계가 되는 왕족만큼은 멸족시키지 않고 관대하게 대접하면서 그냥 살려두는 불문율을 지키는 미덕의 관습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으며, 아무리 잔혹한 학살을 저지르더라도 역사책에서는 "신임 왕조는 전임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포용했고 인품도 좋은 대인배같은 성군이었다"는 식의 미화된 거짓 기록이라도 남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또한 군주는 '덕성'이라는 것에 목을 메개 되어 아무리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더라도 대외적으로는 품위있는 왕으로 행동하는 위선을 떠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동아시아 역사에서 선양은 사실상 방벌에 가까운 것이었다. 혈연에 연연하지 않고, 최적임자에게 권력을 넘긴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겠지만, 생판 남에게는 밭 한뙈기 물려주는 것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세상인데, 나라와 종묘와 사직을 깔끔하게 물려주는 천사같은 왕은 동양사를 넘어 세계 역사를 손꼽아 거의 존재한 적이 없다고 봐야 한다 (조지 워싱턴이 왕이나 다름없는 초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것을 초인적인 자제력이라 부르며 찬양하는 것은 괜한 칭찬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에 수도 없이 기록된 선양은 모두 잘 포장된 찬탈이며 보여주기를 위한 정치적인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즉, 인간의 본능을 어기는 선양이라는 풍습이 진심으로 지켜질 수는 없었고, 다만 선양이고 뭐고 없는 것 보다는 학살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가 선양의 순기능이었을 것이다.

5.2. 과정[편집]


사실상 군주나 다름 없을 정도로 모든 실권을 장악한 권신과 그 신하들이 원래의 군주에게 꾸준히 압력을 넣어 왕위를 물려주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왕위를 물려받게 될 사람은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성질 급하다면 직접 나서기도 하지만 그러면 쇼맨쉽의 품격이 떨어진다.

또 다른 불문율로는 양위가 결정되었더라도 한 번에 낼름 받아먹으면 안 된다는 것. 예의상 3번 정도 튕긴 후에 4번째 요구를 받아서 "딱히 왕위에 욕심이 있던 건 아니지만 준다고 하시니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면서 받아먹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한고제 유방이 세운 전통으로, 항우를 토벌한 후 황제로 등극하라는 부하들의 권유[4]를 세 번 거절하고 네 번째에 즉위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후 유비, 조비 등 많은 황제들이 이를 따라했다.[5] 어떻게든 권좌에 욕심이 없었음을 강조하며 온갖 미사여구로 양위받은 상황을 포장하면 끝이다.

원칙적으로는 이왕삼각(二王三恪)이라 하여 보통 선대 왕조의 군주는 명예직과 함께 작위를 주어 여생을 보장해주기도 하는데, 이게 위진 시대에는 그럭저럭 지켜졌지만, 남북조 시대부터는 명성에 금이 좀 가더라도 위협을 뿌리까지 제거하는 게 낫다는 사상에 힘이 실리게 된다. 하여 유송부터는 선양하고나서 적당히 시간이 흐른 후 몰래 족쳤다. 주로 사용하는 죄목은 옛 신하들과 작당해 역모를 꾸민다는 역모죄였다. 뭔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선양을 한 결과 군주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아무리 이전에 군주였어도 현재는 군주의 부하나 신하에 불과하니 역모죄로 처벌받을 수가 있다는 논리였다.

그나마 북송 정권이 수립되면서 피를 보기 싫어하는 정권의 성향 덕분에 다시 온건한 쪽으로 선회했다. 어찌보면 진짜 중국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그나마 뒷탈없는 선양의 거의 유일한 케이스. 송으로 시작해서 송으로 끝났다 송나라 이후는 그냥 무력정복의 연속이라 더이상 선양 자체가 없었다.

앞선 정권이 너무 막장이라서 평판이 나쁘면 선양같은 작업이 없이도 정권교체가 별탈없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 양쪽 정권이 상하관계를 가지지 않고 수평적 관계일 경우도 선양을 하지 않는다.


5.3. 역사[편집]



5.3.1. 불분명한 시초[편집]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선양 사례는 아래와 같다.
칭송받는 선양의 대표적 사례지만 《죽서기년》처럼 일부 사서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적이었을 가능성이 있고,[6] 선양 후 옛 임금이 노구를 이끌고 전국순회를 한다든지, 갑자기 정글이나 다름 없는 미개척지로 갔다가 죽는 등, 뭔가 뒤가 구린 처리를 당해 정말 칭송받는 대로 자발적으로 평화롭게 선양이 이뤄졌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학자도 있다. 실제 당시 오제 시대와 하나라 시기 읍락국가 자체의 한계를 살펴보면 말도 안 되는 건 아닌 게, '천명'이라는 개념은 주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진나라처럼 하나의 강력한 왕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여러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의 수장을 대놓고 죽여버리면 당연히 내전이 일어나 공멸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테니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장의 권력을 빼앗은 다음 그 밑의 세력을 천천히 잠식하는 방법이 더욱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한고제 유방은 요순 그 인간들도 사실은 남 주기 엄청 아까웠을 거라는 촌평을 아들 한혜제에게 남겼다고 한다.


5.3.2. 불안한 부활[편집]


일단 우임금 이후 이 제도를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황제는 되고 싶은데 방법을 찾던 왕망이 고대 문헌에 적혀있던 선양이란 과정을 되살린다. 그리고 왕망은 고대 방식에 따라 유자영을 죽이진 않았다. 그리고 이 선례를 따라 서진까지는 선양한 황제를 죽이진 않았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비교적 평화로웠다.
문서 참조. 일시적으로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내란이 일어났고 제나라가 이 틈을 타 공격하는 바람에 망했다. 쾌는 유폐되어 있었으나 자지와 함께 제나라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평제독살하고, 유자영을 황태자로 세운 왕망은 섭황제, 가황제를 거쳐 실권을 장악했다. 형식상 왕망은 한고제영(靈)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 유자영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황태자의 자리에 그쳤다. 그나마 왕망은 유자영을 죽이진 않았으나 훗날 방계 황족으로 정통성이 유자영에 비해 낮았던 경시제 유현이 이에 한계를 느끼고 유자영을 살해해버렸다.
헌제가 조비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실제로 헌제는 조비보다 오래 살고 천수를 누려 동갑내기인 제갈량이 사망한 해에 사망했다.[7] 후대도 오호십육국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도 황제만 안 죽었을 뿐 황제의 측근들은 물론 황제의 어린 자녀와 황후를 죽이는 등 만만찮은 피바람이 불었다.[8]
원제도 대접받으면서 제 명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조모(삼국지)와 같은 피비린내가 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었고, 이것만 해도 말이 많아서 사마소가 곧바로 즉위를 못했다. 여하간 이것부터가 나쁜 선례였던 건 사실이고 《삼국지연의》에선 이를 얽어 헌제에 대한 조조의 핍박이 여기서 벌을 받는다고 대놓고 권선징악의 교훈담으로 써먹었다. 그래도 헌제를 죽이지 않은 것을 하늘에서도 감안한 것인지 조환은 헌제처럼 천수를 누리고 갔다. 헌제의 황후인 헌목황후 조씨는 조위가 사마씨에게 좌지우지당하던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본인의 아버지와 오빠가 지은 과오가 재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죽은 셈이다.[9]
사마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제왕들에게 제거당해 무효화되었고, 사마충은 멍청하기가 백치나 다름 없어 선양 직후에 죽일 필요가 매우 적어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사마륜은 황족이므로 양위에 해당한다. 단, 사마충은 후에 급작스레 죽는데 사마월에 의한 독살로 추정된다.
사마덕종은 모자란 백치황제로 유명한 사마충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래도 사마충은 인지능력이라도 있었지만 이 사람은 추위와 더위를 구별 못했고 말도 제대로 못했으며 자신이 황제 자리를 잃는 줄도 몰랐다. 나이가 어렸으면 몰라도 이때가 10대 후반이었다. 아무래도 지적장애 1급 이상이 의심되는 인물이었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아버지인 환온 시절부터 제위를 노리던 환현도 옛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환현은 잠시 동진을 찬탈하고 초나라를 세운 지 불과 수개월 만에 유유에게 진압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유가 더했다는 것이다.


5.3.3. 피바다의 시작[편집]


이때부터 선양한 황제가 목숨을 보전한 사례는 드물었다.

自是之後, 禪讓之君, 罕得全矣.

호삼성

하지만 위의 사례들과 달리 남북조시대대부분의 황제는 선양한 후에 일족과 함께 죽음을 당했는데, 이것은 남북조시대(육조시대) 남조송나라의 창건자인 무제 유유가 시작했다. 유유는 환현의 난을 진압한 다음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을 죽이고, 선양받은 이후 공제 사마덕문을 죽였으며 사마씨들을 거의 대부분 몰살했다.

이후로 남조와 북조 모두 살벌한 레이스가 진행된다.


5.3.3.1. 남조[편집]

유유는 환현을 제압하고 사마덕종을 복위시켰으나 북벌이 잘 진행되다가 실패하면서 위상이 흔들리자 사마덕종을 제거해버린다. 바보황제로 유명한 진혜제 사마충도 저리 가라 할 지적장애를 지녔던 사마덕종을 죽인 것은 역설적으로 사마덕종의 지적장애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사마덕종이 사마충 같이 최소한의 인지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유유는 선양이라는 쇼를 거쳐 사마덕종에게 제위를 받을 수 있었겠지만, 대소변도 못 가리는 자가 선양을 한다고 하면 대놓고 찬탈을 자랑하는 꼴이 되어버리니 유유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컸다. 사마덕종을 죽인 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형이 후사없이 죽으면 그 밑의 아우가 이어받는 것은 기본 원칙이었기에 그의 아우 사마덕문을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 그로부터 선양받았다. 하지만 정신지체인인 사마덕종과 달리 사마덕문은 정상인일 뿐더러 덕망도 얻고 있었다. 게다가 유송 왕조의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못한지라 만일 사마덕문이 유유를 공격한다면 유유가 역관광을 탈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유유는 사마덕문을 죽이고 사마씨를 멸족시키고 만다. 환씨들과 함께 북위에 투항하여 중용된 사마초지 등 방계가 살아남기는 했다.

유유가 사마씨를 멸족한 것은 살벌한 레이스의 시작이 됨과 동시에 후대 왕조의 창건자들에게 좋은 정당성을 주었다.[10] 실권자 소도성은 송나라의 내란을 틈타 후폐제 유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유욱의 아우 유준을 옹립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야심을 드러냈다. 소도성은 부하 왕경칙을 시켜 숨어있던 유준을 찾아내 선양받았다. 애초에 유송 왕조의 황족들은 자기네끼리 '남자 친척은 죽이고 여성 친척은 겁탈한다'(…)를 시전한지라 살아남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소도성이 별 위협도 안되는 유준을 포함한 유씨들을 도륙내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11]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전폐제 유자업북위에 투항한 문제 유의륭의 9남 유창 뿐이었다.

  • 제나라 화제 소보융양나라 무제 소연에게 선양[12]
명제 소란의 황족 도살과 동혼후 소보권의 폭정이 지속되고 소보권이 자신의 형 소의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 하자 소연은 소보권의 아우 소보융을 옹립하고 난을 일으켜 소보권을 죽였다. 실권을 장악한 소연은 소보융에게서 선양받았고 얼마 후 소보융을 비롯한 소도생(蕭道生)의 자손들을 멸족시켰다. 이때 살아남았던 사람은 명제 소란의 장남이자 장애인이었던 소보의와 소란의 6남으로 북위로 투항한 소보인,[13] 소보권의 아들로 보이는 소종뿐이었다.[14]

후경의 난을 제압한 진패선과 왕승변에 의해 옹립된 원제 소역서위의 공격을 받아 피살당하자 진패선은 소역의 9남 소방지를 세웠다. 이때 북제에 투항하려던 왕승변을 죽이고 북제의 침입을 막아낸 진패선은 실권을 잡고 소방지에게서 선양을 받고 그를 죽였다. 다만 소방지 외에 다른 소씨 황족들은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

공통적으로 이전 황제였던 유준, 소보융, 소방지가 모두 제거되었다. 다만 양나라의 소연은 제나라의 황족 방계에 해당되므로 소씨 전체를 죽이지는 않았고, 진패선은 소방지를 죽였으나 강릉에 위치한 서위의 괴뢰 정권인 후량은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소방지 외의 양나라 소씨를 죽이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진나라 마지막 황제 후주 진숙보수나라 양견에게 죽지 않고 진씨 일족 모두 서북 지방에서 땅을 받고 천수를 누렸다. 이때 후주는 선양이 아니라 육조의 첫 타자인 손호와 같은 경우로 정벌로 멸망한 것이다.


5.3.3.2. 북조[편집]

북조에서는 북위가 일단 동위서위로 갈라서면서 막장이 시작된다. 북위는 강대했지만 나중에 선무제 원각의 황후였던 호태후가 나라를 말아먹었는데, 호태후는 자신의 친아들인 효명제 원후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독살하고, 그의 딸을 아들로 속여 황제로 세웠다. 당시 이주영이 호태후와 '가짜 황제' 원소, 대신들 2천여 명을 황하에 처넣거나 처형하는 하음의 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다음 효장제 원자유를 세웠다. 이주영은 원자유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는데, 원자유는 이주씨가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거짓으로 소문냈고, 이것을 믿은 이주영이 입궐했다가 원자유에게 암살당했다.

두 달 후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가 군대를 이끌고 원자유를 생포해 유폐했다가 죽여버린다. 이때 이주영의 부장이었던 고환이 이주조를 토벌하고 대승상 대장군에 올라 권력을 잡았다. 당시 황제였던 효무제 원수는 고환에게 모욕을 당하자 말을 타고 홀로 수도 낙양에서 장안으로 도망가버렸다. 고환은 추격했지만 잡지 못 하자 그의 친척이었던 원선견을 황제로 세우니 이것이 동위 정권이었다. 한편 장안으로 달아난 원수는 관서 도독 우문태에게 의지하니 그가 권력을 잡는데 이것이 서위 정권이었다. 참고로 원수는 <북사>에서는 효무제라고 되어있으나 <위서>에서는 도망친 황제라고 조롱하는 의미에서 '출제'(出帝)라고 되어있다.

원수는 고환에게서 도망칠 때 사촌누이들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음란해서 그들과 마구 사통했다. 이것을 우문태가 자주 지적했지만 무시하자 우문태는 황제의 사촌누이들을 죽여버렸다. 이에 원수는 자신의 입장도 생각 안 하고 화를 내며, 빈 활시위를 우문태를 향해 당기고 책상을 손으로 강하게 치는 등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원수는 우문태에게 독살당하고, 우문태가 그의 친족 원보거를 황제로 세우니, 원보거는 16년간 그럭저럭 황제로 체면치례하면서 살다가 죽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인 폐제 원흠, 공제 원곽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그 후 동위의 원선견은 고환의 아들 고양에게, 서위의 원곽은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에게 선양하면서 동위는 북제, 서위는 북주가 되었다.

원선견은 의 뒤를 이은 고징의 부하에게서 '폐하, 대장군이 말 타고 빨리 가시지 말라 하셨습니다' 소릴 들을 정도로 도 마음대로 타지 못 하는 지경에 있었다.[15] 그나마 고환은 효무제 원수가 도망친 선례가 있어 겉으로는 나름 공손히 원선견을 모셨고, 그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으나, 고환이 죽고 장남 고징이 뒤를 잇자 원선견은 갖은 핍박을 받았다. 하루는 함께 술을 마시다 원선견이 ''이라고 하자 술에 취한 고징이 '개 같은 놈의 짐'이라고 하면서 조롱하고 부하를 시켜 구타했는데, 무력했던 원선견은 오히려 고징에게 사과하고 금과 비단까지 하사해야 했다. 원선견이 열이 뻗쳐 고징을 죽이려 하다가 발각되었고 고징이 분노해 이를 따졌으나 오히려 원선견은 극딜했다. 고징은 그 자리에선 일단 잘못했다고 빌었으나 얼마 후 원선견을 감금했는데, 고징은 마침 음식 나르던 노비 난경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때 원선견은 황권을 탈환할 기회를 얻었으나 고징의 둘째 아우 고양이 태연스럽게 워낙 뒷마무리를 재빠르고 깔끔히 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원선견은 모든 걸 포기하고 고양에게 선양함으로써 목숨을 구걸했지만 선양한 지 얼마 안 되어 피살당했다. 그후 고양이 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 장수에 던져버리는 부관참시를 행했다. 이때 동위 황족 원씨 700여 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피살했으며, 이들의 시체도 장수에 버렸는데, 장수에서 잡은 물고기에서 사람의 손가락이 나와 수도 업성 사람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 경우는 좀 재미있는데, 우문각은 우문태의 차남으로 사실 직접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문태가 죽자 우문각이 뒤를 이었지만 실권은 우문태의 조카인 진공 우문호가 쥐고 있었다. 우문호는 공제를 시켜 종제에게 양위하라 시키고 나중에 원곽을 죽였다.[16] 우문각은 얼떨곁에 황제가 됐지만 우문호의 횡포 때문에 그를 죽이려다가 다음 해에 역관광당해 죽고 만다. 그의 형 명제 우문육도 우문호를 죽이려다 역시 3년만에 독살당하지만 그들의 아우 무제 우문옹은 마침내 12년을 기다려 우문호를 주살하고 일족을 멸해버린다. 결국 원선견과 원곽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서위와 동위 모두 원씨 일가가 몰살당했는데, 특히 동위의 원씨 일족 700명은 일거에 몰살당했다.


5.3.4. 악순환의 연속[편집]


이때쯤 가면 선양 = 죽음이란 공식이 완성된다.

양견은 우문천의 외할아버지였지만 외손자의 목숨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문천의 친외할아버지는 양견이 아니었다. 우문천의 아버지 선제 우문윤은 황후가 5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 양견의 딸은 양황후였고, 우문천의 어머니는 주황후였다. 따라서 친외손자는 아니고 상징적인 외손자일 뿐이었다. 여하튼 우문천 역시 선양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수문제의 손자를 제외한 우문씨들과 함께 깨끗하게 멸족당하는 걸로 끝난다.

사실 수나라처럼 정권이 막장인 경우에는 굳이 번거롭게 선양을 거치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당나라의 창업군주인 이연은 수나라 황실과 어느 정도 인척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후자가 막장이어도 대놓고 빼앗기는 어려웠다. 양유는 양제(원래 시호는 명제) 양광의 손자였다. 양광의 아들 원덕태자 양소의 아들로 이연이 난을 일으켜 수도 장안에 입성한 후 강남에 고립되어있던 양광은 태상황으로 올려지고 장안에 남아있던 양유가 황제로 옹립되었다가 실권을 장악한 이연에게 선양한 후 죽음을 당했다. 같은 시기 양유의 형제인 황태주 양동낙양에서 왕세충에게 실권을 빼앗겼다가 폐위당하고 살해당했다. 양씨 황가는 양광이 우문화급에게 시해당할 때 화급과 친근하던 양견의 아들 3남 양준의 장남 양호(楊浩)를 제외하면 모두 피살당했으며, 이연 역시 양씨를 대부분 도륙했다. 양호는 우문화급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피살되었다. 그러나 양견의 5남 양량의 외아들 양호(楊顥), 돌궐의 가한과 정략결혼한 딸 의성공주, 양제의 딸 양씨는 살아남았다. 그 중 양씨는 이연의 4남 이원길의 부인이 되어 아들딸 잘 낳고 살다가 태종 이세민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자신의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죽일 때 남편과 다섯 아들들을 모두 잃어 과부가 되었다. 훗날 이세민의 첩이 되어 그의 14남 이명(李明)을 낳았는데 이세민은 장손황후를 잃고 나서 양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으나 제수였던 여자인지라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대신 이명을 이원길의 양자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절도사 주전충은 환관의 난을 틈타 수도 장안에 들어가 궁궐을 청소할 최소인력으로 어린 환관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수백명의 환관들을 모두 죽였다. 실권을 잡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장안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강제로 옮겼고, 소종 이엽을 사람을 시켜 살해했는데, 온갖 연기를 다 하다 그의 9남 이축을 세우고 그 형제들부터 씨를 말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선양받고 그 역시 살해했다.[17]


5.3.5. 선양의 붕괴[편집]


오대십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껍데기였던 선양은 제도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후량은 후당에게 정벌된 후 주씨 일족이 모두 주살당했고, 후당은 후진에게 멸망하는데 그 전에 내분으로 이씨 일족이 대부분 몰살되었다. 후진은 후당을 멸하기 위해 뒤에 요나라를 세우는 거란의 힘을 빌렸지만 그게 공짜가 아니라서 연운 16주를 넘겼다. 후진을 세운 고조 석경당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출제 석중귀가 제멋대로 설치자 화가 난 거란족이 후진을 쳐서 석중귀와 석씨 일족을 모두 포로로 잡아가 만주 변방으로 끌고 간 뒤 죽을 때까지 노동을 시켰다. 석중귀는 어린 딸을 요나라 황족에게 강탈당하고, 단칸방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후당의 뒤를 이어 후한이 세워졌지만 은제 유승우후주의 태조 곽위를 제거하려다 역관광당하고 살해당한 후 후주가 세워진다.
  • 남오의 실권을 장악한 서온의 양자 서지고는 제왕으로 책봉된 이후 양오의 마지막 황제인 양부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18] 제나라를 세웠다가 이후 본래의 성이었던 이씨 성으로 지고에서 이름을 변으로 개명하여 당(唐)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양부는 남당이 건국되고 그 다음 해에 최후를 맞이했으며 양행밀의 후손들도 남당의 2대 황제이자 이변의 아들인 이경에 의해 모두 멸족당했다.


5.3.6. 선양의 회귀 및 소멸[편집]


이 시기에 오면 선양 따위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선양을 받은 사람이 인간답게 일을 처리해서 그나마 유종의 미를 남겼다.
태조 곽위는 후한의 은제 유승우가 자식들을 모두 잡아죽이는 바람에 자손을 두지 못해, 대신 아내 시씨의 조카였던 시영을 양자로 삼았다. 시영의 아들 시종훈이 뒤를 이은 지 얼마 안 되어 진교의 변으로 조광윤에게 선양하는데, 조광윤은 시종훈을 정왕(鄭王)에 봉해 보호하고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장례도 제대로 치러주었으며, 그의 일족을 극진히 모셨다. 이를 상징하는 게 단서철권과 석각유훈(石刻遺訓).[19] 시씨 일족은 그 뒤부터 남송원나라에게 멸망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국가적인 보호 대상으로 대접받았으며, 그 때문인지 시씨 일족은 의리를 지켜 남송과 멸망의 순간을 함께 했다.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뒤, 금나라는 아직 과거 북송의 땅과 백성을 직접 다스릴 행정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초나라를 괴뢰 정권으로 세우고 송나라의 신하였던 장방창을 황제 자리에 앉힌다. 장방창은 황제 자리를 한사코 거부했으나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를 피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일단 황제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게 자신이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짐이라고 칭하지도 않고 신하들에게도 황제의 예를 갖추지 말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금나라가 철수하자 곧바로 정권을 송휘종의 아들인 조구에게 넘겨줘 신하의 위치로 돌아가고, 송나라는 남송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황제 자리를 헌납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렇게 처사했어도 어쨌든 과거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송나라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였고, 결국 장방창은 트집을 잡혀서 처형당한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엄연히 외성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 거라 선양이 맞아야 하겠지만 장초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인 이유로 인정되지 않고 그냥 송나라에게 권력이 돌아간 것으로 친다.


5.3.7. 선통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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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선통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는 후대가 공화정이라는 점에서 약간 특수하지만, 권력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보면 평화로운 선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 후 제정이 폐지되면서 중화민국에 평화롭게 정권을 인계한 선통제는 퇴위는 했지만, 1) 대청황제의 존호 유지, 2) 매년 400만 냥[20]의 세비를 중화민국 정부가 부담, 3) 자금성, 이화원 거주 허용, 4) 공사 중이었던 광서제 황릉 공사 지속 5) 청나라 황실 의식 허용 등의 특전이 있었다. 무혈로 순순히 물러난 보답으로 중화민국 정부가 예우를 해준 것이다. 일종의 "왕 있는 공화정(비주권군주제)"이라고 봐도 될 정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네 마네 할 때도 어린 황제는 자금성에서 중화민국과 무관하게 "청나라의 황제"로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선양의 피비린내 나는 선례에 따라서 자기 목숨도 위험하다는 생각에 불안해 했다고(청나라 소조정도 참조).

사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난 것은 푸이가 아니라 그의 생부[21]이자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감국섭정왕)의 결단 때문이었다. 당시 푸이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아이였고, 사실상 협상을 주도한 감국섭정왕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황실이 더 이상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순순히 물러나는게 황족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해 황실 폐지에 동의했다. 이후에도 이런 저런 복벽음모나 만주국 같은 곳에도 전혀 가담하지 않았고,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고 중국의 단합을 외쳤다. 그 결과 그는 중화민국 시기는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청나라 황족의 최고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후에 장훈(장쉰)의 복벽(왕정복고) 소동이 진압되었지만 공모자라 할 수 있는 선통제에 대한 예우는 계속되었다. 이런 복벽소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민국을 흔들었기에 푸이는 자금성에서 추방당하지만, 그래도 예우는 계속되어 매년 50만 원의 세비와 개인 재산은 보호받았다. 그러나 푸이는 불만을 느끼고 나중에 일본의 괴뢰국만주국 집정을 거쳐 황제로 집권한다. 거기서도 괴뢰 신세였던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일단은 황제였다.

국공내전을 지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푸이는 전범으로 기소되어 10년간 푸순(撫順)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처형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가 적백내전의 급박한 상황에서 쫒기듯이 사살당했다는 것이 컸다. 설립 당시부터 러시아 공산당에게 버려진 자식 취급이나 당하고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너네는 황제를 죽였지만 우리 중국은 황제까지 감화시켜서 공산당으로 만들었다." 같은 자부심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집권한 후 수많은 지배계급 인사들이 인민재판 후 처형당했지만,[22] 정작 우두머리급인 만주국 황제 푸이와 그의 동생 푸제, 장징후이(張景惠) 총리는 목숨을 건졌다.

푸이자아비판 후 1959년 출소, 저우언라이 총리의 배려로 처음에는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발령났다. 이건 처벌이라기보다는 노동 계급으로 환생했다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이며, 이 경력 때문에 자신이 황제로 살아가던 자금성에 정원사로 되돌아왔다는 영화 마지막 황제 속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후에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文史)연구위원회의 전문위원이 된다.[23] 그리고, 1964년에는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만주족 대표)에 선출되는데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비슷한 격이다.

이후 문화대혁명 당시엔 다른 사람들이 홍위병에 의해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등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건 푸이뿐만 아니라 공산당 개국공신에게도 다 해당되는 일이었으므로 전 황제라는 이유로 핍박받았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푸이의 경우는 어릴 때 실권을 다 내줘 본인 입장에선 딱히 아쉬움을 실감할 틈도 없었고, 이후엔 돈방석에서 지내 서민들 입장에선 핍박 운운하는 것도 좀 웃긴 인생이었겠지만...


5.4. 총평[편집]


선양은 원래 그 시초부터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고대적 의미에서는 힘이 있는 사람이 예절을 갖추어가며 전임자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이어받는다는 느낌을 살릴 수 있었으므로 없어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애초에 부활한 이유부터 형식만 차리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대로 넘어갈수록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절차로 격하되어 위선적인 제도로 낙인찍혔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고대적인 생각이 사라지자 더 이상 제도 자체가 있을 의미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그나마 송나라까진 유지라도 되었지만, 중국에서 그 이후 나라들은 대놓고 서로 싸우며 역성혁명을 하였기 때문에 딱히 선양이라는 형식을 취할 필요도, 관심도 사라지게 된다. 수나라와 당나라처럼 적당한 예전 왕조의 방계 혈족 하나를 억지로 제위에 올린 다음 조금 시간이 지나서 선양을 받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싶겠지만, 원나라의 경우는 남송을 멸망시키기 전에 이미 황제를 칭하고 있었고, 명나라는 원나라가 그동안 폭정으로 인해 인심을 얻지 못한데다 원나라 황실은 북원으로 존속하고 있었고 이민족이기까지 하여서 정통성이 떨어지는지라 굳이 원나라의 계승자를 자처할 필요가 없었으며, 청나라 또한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미 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이전에 칭제건원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겉으로나마 신하의 신분으로 전 왕조를 윗전으로 인정하다가 이양받기도 뭐했다. 대신 청나라는 이자성에게 멸망당한 명나라의 복수를 명분으로 하였고, 명나라에게서 빼앗은 게 아니라 명나라가 이자성에게 도둑맞은 걸 탈환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워서 어느 정도 정통성을 노리긴 했다. 형태는 다르지만 '정통성 있는 정권을 억지로 빼앗은 게 아니다'라는 퍼포먼스는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대체로 한 왕조가 선양받은 후 그 전황제와 일족을 살육하고, 그 자손들이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인과응보업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5.5. 한국 역사 속의 선양[편집]


한국사에서는 후삼국시대까지 전쟁으로 수도가 함락되거나 해서 무력으로 멸망하는 사례가 많았고, 왕족들이 중국으로 압송당하는 등 기본적으로 선양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의 천명사상이 한반도에는 제대로 전파되지 않아 한국사의 고대는 명분보다는 힘의 원리, 약육강식의 구도로 진행되었다. 다만 신라에서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이 죽게 되어 성골의 대가 끊기자 원래는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던 진골이자 당시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가 대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고 김춘추가 세 번 사양했다가 마지못해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양위라기보다는 절차상 선양에 가까운 과정이다. 왕족 계급이 정해져 있었다가 단절되고 새로운 인물을 추대해야 했던 신라 사회의 특수성으로 인해 나타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선양 개념과 유사한 형태는 먼저 신라경순왕고려왕건에게 항복한 사건에서 나타나나, 왕건은 이미 그 전부터 고려라는 나라의 왕이었고 경순왕이 한 일은 별도의 나라였던 신라를 고려에 들어다 바친 것일 뿐이라 선양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견훤이 왕건에게 위협하는 편지를 보내고 왕건이 견훤을 비판하는 답서를 보내는 과정에서 신라 왕실을 중국의 주나라한나라에 비유하고 신라 왕을 멋대로 죽인 견훤을 왕망동탁에 비유하거나[24] 서로 존왕(尊王)을 논하는 등 신라왕실을 고려나 후백제보다 명목상 일종의 한반도판 천자로 간주하는 의식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의식과 허례는 경순왕이 귀부를 청하기 전부터 없어져 있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을 청할 때 왕건이 몇 차례 거절했던 건 여러 차례 사양하는 선양의 구도를 따라한 것이지만, 대왕 신라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라왕이 대왕인 고려왕에게 나라를 바치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선양 개념에 가장 가까운 형태는 고려공양왕이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라 하지만, 선양은 협박에 의할지라도 왕이 스스로 물려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건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순순히 선양한 게 아니라 태후가 함부로 임금을 폐위한 다음 성이 다른 이성계에게 왕위를 전하는 전개였기 때문에 고려 - 조선의 교체 또한 어쨌든 전형적인 중국식 선양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된 뒤에는 선양한 공양왕을 비롯한 개성 왕씨 대다수가 나중에 조직적으로 살해당한다.[25]

최초의 선양은 오히려 조선 왕조 내에서 몇 번 이뤄졌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선양이 아니라 양위다. 우선 첫째 사례는 조선 정종태종의 관계. 다만 두 사람은 친형제 사이고 즉위 때부터 실권은 이방원에게 있는 형태였으며 즉위 2년 만에 곧바로 왕위를 넘겼기에 선양의 다른 사례와는 달리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정종과 태종의 사이는 선양한 뒤에도 매우 좋아서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는 '격구(擊毬)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극진히 즐거워하였으니 태상왕이 부른 것이다.'라는 기록이나 '태상왕(정종)이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태상왕께 헌수하고 춤을 추고 연구로 화답하며 매우 즐기다.'라는 기록도 남아있으니 정말로 사이가 좋았던 듯하다. 선양의 정의가 '혈연이 아닌 남에게 물려준다'이고 보면 선양도 아니고 그냥 양위다. 그 후엔 단종-세조의 교체가 있는데, 사실 세조는 단종의 숙부이기에 이 또한 선양이 아니고 양위.

다만 이렇게 실제로 양위의 형태를 띔에도 선양이란 표현을 쓴 것은 조선 깊숙히 자리잡은 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도덕적인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인의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때문에 한 임금이 평가를 좋거나 나쁘게 받는 기준은 도덕성과 인의였고, 다음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기준 역시 인의였다. 때문에 다음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물려주는 왕에게 인의가 있다는 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중국 고전에서 선양이란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선양이라 표현한 것이다.

선양은 협박에 의할지라도 왕이 스스로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전주 이씨 황족이 일제 황가로 편입된 것은 이완용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맺은 한일합방조약에 의한 것이었으며, 순종은 끝까지 합방조약에 반대했고, 원래 존재하던 다른 나라의 황가에 왕공족으로 편입해 들어간 것이므로 당연히 선양이 아니다.


5.6. 기타[편집]


베트남에서도 선양이 있었는데 대월 리 왕조가 진 왕조로 바뀔 때 소황 이불금(이천형)이 부군 태종 진경에게 선양했다. 베트남에서도 선양 후 이전 왕조는 수난을 겪어서 소황은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당했고, 리씨 황족들은 숙청당하거나, 성을 바꾸거나 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유럽에서도 로마 제국오현제나 독일(동프랑크 왕국)의 콘라트 1세-하인리히 1세, 스웨덴칼 13세-칼 14세의 사례처럼 혈통상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왕위를 자발적으로 물려준 사례가 여럿 있으나 이들은 모두 현임 군주가 사망한 뒤에 왕위를 승계받았기 때문에 현임 군주가 살아있을때 왕위를 물려주고 선양한 이전 군주는 명목상 제후로 대우해준다는 개념인 중국식 선양과는 약간 다르다. 뭣보다 오현제와 칼 13세-칼 14세의 경우엔 어디까지나 양자로 입양하고 즉위시킨 케이스고[26] 콘라트 1세-하인리히 1세는 아예 콘라트 1세의 의지와는 연관도 없었다.


5.7. 미디어의 선양[편집]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공작이 골덴바움 왕조 38대 황제 카타린 케트헨 1세에게 선양을 받아 로엔그람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카타린 여제는 생후 20개월이라 그의 아버지이자 섭정을 맡고 있던 위르겐 오퍼 폰 페크니츠 공작이 대신 선양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는 선양의 대가로 페크니츠 가문의 신변, 재산, 작위의 안전을 보장하고 카타린 여제가 죽을 때까지 매년 150만 제국마르크를 지급했다.
딸의 능력치가 엄청나면 왕이 딸에게 왕위를 선양한다. 특히 1편에서는 평가가 1200대로 매우 높으면 엔딩에서 마왕의 재침략을 막아낸 딸에게 왕이 스스로 왕위를 바친다. 4편의 마왕 엔딩은 딸의 혈통이 있기 때문에 선양보다 양위로 봐야 한다.
선조정원군의 삽질로 조선 왕실의 대가 끊기면서 광해군이순신에게 선양하여 '한(韓)' 왕조가 세워진다.
엘프리덴 왕국의 왕인 알프레토 엘프리덴이 이세계에서 소환한 용사인 소마 카즈야에게 선양과 비슷한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주어 카즈야가 왕이 됨으로써 이야기가 시박된다.
사라 캐리건자가라에게 저그의 통치자 자리를 물려준것과 비슷하다. 이런 정통성을 가지고도 자가라는 통치자 자리를 굳히는데 엄청 고생했다.


5.8.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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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나라의 건국자. 이 사람은 엄밀히 말해 선양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이 된 것이다.[2] 조선 선조 때 임제의 소설. 선비가 책을 읽다가 꿈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3] 소설 내에서 복건자가 이 말을 하자마자 임금(단종)은 '네 임금이 덕이 있었고 각자에 맞는 시대를 만났기에 네 임금의 선위(선양) 역시 옳은 것이었으며, 훗날 이를 빙자한 이들이 문제였을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후 복건자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불평이 쌓여 지나치게 분개했다며 임금의 반박을 수용한다.[4] 한신, 영포, 팽월초한전쟁 당시의 7왕.[5] 웃기게도 공화국의 총통이었던 장제스도 이를 따라하여 나중에 중화민국 총통 자리를 세 번 사양하는 척 하다가 받았다.[6] "요 임금의 덕이 쇠해지자, 순 임금이 요 임금을 감금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나중에 풀어주긴 하지만, 애초에 둘의 사이가 나빴다는 것.[7] 즉, 이 2명은 생몰년이 완전히 일치한다.[8] 대부분 조비 이전의 조비의 부친 위왕 조조가 주도했다.[9] 정작 헌목황후는 조씨임에도 망해가는 한나라 헌제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사자를 보내 인수를 달라고 했다. 이에 '유일하게 헌목황후만이 저항하였으며 몇 차례나 성을 내면서 주지 않았으나 끝내 막을 수 없을 것 같자 결국 옥새를 난간 아래에 집어던지고 나서 소리내어 울며 말하기를 "하늘이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치면서 통곡했다. 이후 조위 사직은 후한 말 헌제가 당한 것을 그대로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비참한 수모들을 겪으며 망조가 단단히 들고 말았다.[10] 실제로 유송의 마지막 황제 순제와 왕경칙의 대화에서도 이게 나온다.[11] 후세의 사학자들은 이 살육을 무쓸모라고 평가하고 있다. 오죽하면 소도성의 유송 황가의 학살을 두고 이미 후폐제가 저지른 막장 행각들로 천명이 유씨에게서 떠났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평가도 존재했다.[12] 그런데 소연제(육조)종친으로 촌수를 따지면 소보융의 4종숙부(11촌)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양위지만 국호가 바뀌어서 다들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13] 북위에서 제왕에 봉해졌고 관직이 삼공에 이르렀으나 모반 세력중 하나인 묵기추노에게 잡힌 이후 반란을 종용받다 이주영에게 토벌되어 죽었고 그의 자식들도 다른 죄에 휘말려 모두 죽어 결국은 멸족당했다.[14] 소종의 어머니 오씨는 소보권의 후궁이었고 소종은 소보권이 죽은 지 7개월 만에 태어났다. 하지만 소보권이 죽은 후 소연이 손에 넣었으므로 소연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는 하지만 소보권의 아들일 확률이 높다.[15] 이것은 고환에게 모욕을 당한 북위의 효무제가 말을 타고 장안으로 도망친 일이 또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16] 동위와는 다르게 일족 자체가 멸족되지는 않아서 당나라때 원씨는 명문귀족가가 된다. 애초에 당나라 황실에 원씨의 피가 섞여 있기도 하고.[17] 여담으로 주전충은 이와 동시에 당나라의 지배층을 아얘 제대로 도륙해버리는데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 지 한나라때부터 이어지던 문벌귀족의 역사가 이 때에 완전히 끝장났다. 새로이 들어선 통일왕조인 송나라가 과거제를 통한 새로운 지배계층을 세우고 할 수 있던건 사실 이렇게 주전충이 구 왕조의 지배층을 제대로 아작낸 덕도 있었다.[18] 사실상 이변이 제위를 찬탈한 것에 가깝다.[19] 돌에 유훈을 새기고 새 황제가 즉위하면 반드시 이를 보고 지키도록 했는데, 이것의 존재는 송 황실 최고의 극비였던 까닭에 아무리 총애받는 신하라고 해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결국 금나라송의 수도 변경(개봉)을 점령한 후에야 그 정체가 공개되었는데, 내용은 제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을 지켜줄 것과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 것', 그리고 '어기는 놈은 하늘이 조질 것'이었다고.[20] 1냥은 은으로 계산되며 현재 중국 돈 200위안, 한국 돈으로 4만 원 정도라고 한다. 현재 한국 돈으로도 1600억 원 정도이니 대단한 금액이다. 물론 황실이 거느린 시종 같은 인원이 꽤 많았던 데다 각종 행사에 지출되는 금액도 꽤 되었을 테니 퇴임 황제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이보단 적었을 것이다.[21] 푸이가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황위를 이었기 때문에 푸이의 법적 아버지(양부)는 광서제다.[22] 패왕별희에 보면 잠시 이 장면이 묘사된다.[23] 한국으로 비교하면, 국회 도서관의 연구원쯤 된다.[24] 왕망과 동탁 둘 다 신하로서 주군인 천자를 폐위하고 죽인 인물들이다.[25] 그래서 여기서 피하기 위해 왕(王) 자를 살짝 고친 전(田)씨나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위장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는 전씨나 옥씨가 가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해당 성씨 당사자들은 불쾌해하는 사람이 많음을 주의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성을 바꿔 숨어 지낸 사례는 분명히 있다. 다 그런 건 당연히 아니지만.[26] 다만 차이가 조금 있는데 오현제의 경우엔 왕조 이름이 바뀌지 않았지만 후자의 경우 아얘 왕조의 이름까지 바뀌었다. 이는 당연한데 오현제의 경우 네르바만 뺴면 직계만 아니지 집안은 동일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당시 로마는 직계자손이 없다면 친척 등에서 양자를 입양해 대를 이었기에 충분히 왕조 이름이 같을 명분이 있었지만 칼 13세와 칼 14세는 국적조차 생판 다른 남남이었다. 칼 13세는 당연히 스웨덴인이지만 칼 14세는 프랑스인에 그것도 평민 출신이다. 칼 14세라는 이름조차 스웨덴식으로 바꾼 이름이고 본명은 '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