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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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민정부 최고인민법원장
한문
沈鈞儒
한국식 독음
심균유
영문
Shen Junru

병보(秉甫)

형산(衡山)
출생
1875년 1월 2일 청나라 저장성 가흥현
사망
1963년 6월 11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일본 호세이대학 졸업
직업
문학자, 정치인
종교
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신해혁명에 참여하다
2.3. 군벌에 맞서다
2.4. 구국회의 7군자
2.5.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
2.6.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3. 사상
4.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문학자. 젊은 시절 일본에 유학가서 호세이대학에서 공부했고 신해혁명에 참여했으며 1912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해 중국의 민주운동에 투신했다. 5.4 운동 시기 신도덕 운동, 신문화 운동을 제창했으며 국민당의 공산당 토벌에 반대해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에 공동으로 대항하자는 민중 시위를 주도했다가 7군자 체포 사건 때 동료 6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 풀려났다. 중일전쟁 시기 중국 민중의 항일 투쟁을 독려했고 국공내전 시기 공산당의 민주집중제 제안에 호응해 공산당과 협력하여 국민당의 독재를 타도하고자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 민주연맹 중앙 주석,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최고인민법원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선쥔루는 1875년 1월 2일 저장성 가흥현의 지역 유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7살부터 시를 지었으며 13세에 정식으로 시인이 되었다. 또한 15살에 수재에 응시해 장원 급제했다. 그러다가 19살 때인 1894년,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는 걸 목도한 그는 세상사에 관심을 가져 시 몇 편을 써서 기울어가는 국운과 비탄에 빠진 세상에 대한 격정을 드러냈다.

1900년, 부친 선한(沈翰)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선쥔루는 친형 선바오루(沈保儒)와 함께 숙부 선웨이지(沈卫之)에게 의탁했고 산시성 삼원학서에서 책을 읽었다. 그는 산시성에서 삼원인서국을 만들어 다수의 저서를 복사해 또래들에게나눠주며 유신혁명(维新革命)을 논의했다.

1904년, 선쥔루는 향시를 합격해 거인(举人)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진시가 되어 형부 구이저우성 지부 주사(主事)가 되었다. 이후 선쥔루는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에 유학가서 그들의 성공 원인을 파악한 후 암울한 현실에 놓인 조국을 발전시킬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1905년 가을 청나라 정부의 승인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가서 호세이대학 법학부 정치과에 입학하여 1908년 4월에 졸업해 중국으로 귀환했다.

1908년 9월, 선쥔루는 저장성 자의국(谘议局) 주판처(筹办处) 총참의를 맡았다. 이듬해 봄, 그는 완성존(阮性存), 추푸청(褚辅成), 진경제(陈敬第) 등과 함께 입헌국민사를 조직해 저장성에서 입헌운동을 추진했으며 10월 저장성 자의국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선쥔루는 장쑤성 자의국에서 발의한 국회 청원대표 대담회에 참석했고 베이징에서 의회를 설립할 것을 세번이나 청원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그는 청나라의 입헌제 도입 제안은 이름만 그럴듯할 뿐 실상은 청나라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술책이라는 걸 깨닫고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수립하자는 쑨원의 주장에 공감했다.

2.2. 신해혁명에 참여하다[편집]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선쥔루는 진시하(陈时夏)와함께 저장성 봉기의 구체적인 작전을 설계하고 봉기를 성사시키는 데 일정부분 기여했다. 1912년 초, 선쥔루는 저장성 교육회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저장성 임시 대표의원이 되었으며 2월에 저장성 교육국장을 맡아 저장성내 학교를 정비하고 교육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그후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성립되자, 그는 연말에 각종 행정직을 사임하고 국회 참의원 저장성 후보의원에 당선되었다.

1912년 4월, 통일공화당 참의원에 선출된 선쥔루는 5월 주추펑의 소개로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8월에 국민당원이 되었다. 1913년, 그는 국회의 위안스카이 탄핵을 지지했고 천단 헌법 초안 작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민당의 2차 혁명에 호응했다. 그러나 2차 혁명은 9월에 실패로 끝났고, 선쥔루는 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16년 6월, 리위안훙이 황제를 칭하다가 각지의 반발에 못이겨 취소한 뒤 병사한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었다. 서쥔루는 저장성 대표로서 베이징에 가서 리위안홍과 국책을 함께 상의했다. 이후 그는 1917년 3월 사법부의 비서를 역임했고 장요증(张耀曾), 이근원(李根源) 등과 함께 정학회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북양군벌 내부의 정치 암투에 질려버린 그는 법무부 비서관 사임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8년 6월, 광저우 국회는 선쥔루를 정식의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그는 광저우에서 참의원 활동을 하며 헌법제정에 참여했으며 1919년 9~10월 돤치루이 정부의 남벌 계획을 막기 위해 저장성으로 가서 저장성 군벌이 단치루이에게 협력하지 않고 중립을 택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1920년 9월 호법군 검찰청 총검장을 맡았으나 10월에 사직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카를 마르크스자본론을 연구하고 창작을 생업으로 삼아 <가정신론(家庭新论)>을 저술해 중국인의 가정 문제를 논했다.

2.3. 군벌에 맞서다[편집]


1922년, 선쥔루는 중화신보의 주필을 맡았으며 같은해 6월에 베이징으로 올라가 상원 사무총장이 되었고 8월에는 헌법 초안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23년 6월 회선 사건을 일으켜 대총통이 된 차오쿤의 전횡에 반발해 사무차장 직을 사퇴하고 상하이로 가서 차오쿤의 불법 부정선거를 폭로 및 성토했다. 그러다가 차오쿤이 대총통 직에서 사임하자 다시 국회로 복귀했지만 1924년 11월 돤치루이 임시 정부의 선후회의를 비판하고 돤치루이 정권의 뇌물을 거부한 의원들과 함께 연합선언을 발표해 국회비상회의를 성립시켜 선후회의에 대항하여 <임시약법>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국회비상회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의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1926년 9월, 선쥔루는 추푸청, 션언푸(沈恩孚), 황옌페이(黄炎培) 등과 함께 3성 연합회를 발족하고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호응하고 군벌 쑨촨팡 등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장제스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했을 때, 그는 공산주의자로 오인되어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했지만 중간에 오해가 풀린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1927년 상하이 법과대학 교무장을 맡은 그는 법과대학을 민주적인 학교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노력했고 학술의 자유와 자유 결사를 주장하며 샤첸리(沙千里), 임형원(林亨元) 등 여러 법학자들과 함께 많은 법학 전문인력들을 양성했다.

1933년, 선쥔루는 정행 여자중학교를 설립해 이사장을 역임했고 1935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상하이에서 변호사로서 여러 피고들을 변호해 탁월한 변호실력을 발휘해 변호사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1933년 중국 국민권 보장 동맹에 참가하여 상해지회 법률고문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후 상하이지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4월에는 국민정부에게 체포된 천껑(陈赓) 등을 구출하기 위해 쑹칭링,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7명과 함께 민권보장동맹 정치범구출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당국을 압박해 체포된 이들이 풀려나게 했다.

2.4. 구국회의 7군자[편집]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선쥔루는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중화민국난 구호회를 설립해 난징의 국민정부에게 여러차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국민정부가 일제와 무력으로 대항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비저항 정책을 유지하자, 선쥔루는 각 단체 구국연합회 조직에 참여해 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던 1936년 11월 8일, 상하이의 일본인 방적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는 파업을 실시했다. 선쥔루는 이에 호응해 장나이치, 왕자오스 등과 구국회 회원 700여 명과 함께 상하이 정안사로에 위치한 교회 고아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에 국민정부는 11월 23일 구국회 지도자 체포령을 하달했고, 선쥔루는 장나이치, 쩌우타오펀, 왕자오스, 리궁푸, 샤첸리, 스량과 함께 체포되어 위해민국 긴급치죄법에 의거, '비합법 단체를 조직하여 적비와 결탁하거나 파업, 동맹휴교, 불매운동을 선동하고 은밀하게 치안의 요란을 계획하여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죄'로 수감되었다. 선쥔루는 감옥 안에서 최연장자(당시 61세)로서 리더 역할을 맡았다. 그는 동료들과 서로 지지하고 격려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글을 절대 쓰지 않고, 애국 무죄를 고수했다.

여론 또한 선쥔루를 비롯한 7인을 '7군자'라고 호칭하며 애국지사로 떠받들었고 각지에서 그들을 석방하고 일제에 대항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초공작전을 담당하던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 또한 서안을 방문한 장제스에게 칠군자를 석방시키고 공산당과 타협할 것을 호소했지만 장제스는 듣지 않고 공산당을 즉각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장쉐량, 양후청 등은 1936년 12월 12일 서안 사건을 단행했고, 결국 장제스는 초공 작전을 중단하고 공산당과 손잡고 일제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선쥔루는 1937년 6월 11일 동료들과 함께 쑤저우 고등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는 내내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고 검사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그는 심리가 끝난 후 퇴정한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

지도가 변색한 듯, 6천만 동포가 깊은 수렁에 빠져버렸으니,

나에게 약간의 힘이라도 남아있다면,

내 가족과 동포를 위해 싸울 마음이 있다네!

나는 오늘 기도한다.

내 피가 하늘과 흰구름 바깥 수천리까지 흘리기를,

우리의 뼈를 다른 토양 깊숙히 묻히기를,

이것이 우리의 승리다! 우리 민족의 승리이자 국가의 승리다!

나는 다시는 다른 승리를 원하지 않는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한 직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선쥔루 등 7인은 7월 31일에 정식으로 석방되었다. 선쥔루는 그들의 석방을 환영하는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을 찾자면, 우리가 감옥에 있던 것처럼 감옥에서 석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옥에 있거나 출옥할 때나 변함없이 우리의 취지를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며 과거처럼 민족해방의 최전선에 나설 것입니다."


2.5. 중일전쟁 및 국공내전 시기[편집]


선쥔루는 출옥 후 항적구망총회를 기획하여 의장을 맡고 <전민주간>, <전민항전> 잡지를 창건했다. 1938년 10월, 선쥔루는 충칭에서 국민정부의 항일투쟁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타협투항론을 단호히 거부하고 끝까지 일본과 맞서 싸우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당과 장제스의 독재에 비판적인 입장을 바꾸지 않아 국민정부와 여러차례 갈등을 빚었고, 이 때문에 1942년 7월에 발표된 국민 참정회의 제3기 참정원 명단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1939년 9월 초. 선쥔루는 추도분(邹韬奋), 장나이치 등과 함께 충칭에서 통일건국동지회를 설립했다. 그러다가 1941년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충돌을 조정하기 위해해, 통일건국동지회는 제3당 성격의 중국민주정단 동맹으로 개편되었다. 1944년 9월, 중국 민주정단 동맹은 중국 민주동맹으로 개편되었고 선쥔루는 중앙 집행위원,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12월, 국가구원위원회는 중국인민대표대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선쥔루는 중국인민대표대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그는 중국민주동맹의 대표자로서 정치협의회에 참석하여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중국 공산당 대표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그러던 1947년 10월 27일 국민정부가 민주연맹을 '불법 조직'으로 선포하고 연맹 조직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발표하자, 선쥔루는 민주연맹 본부를 해산하기로 결정한 후 11월 26일에 비밀리에 상하이를 떠나 홍콩에 가서 1948년 1월 장보쥔, 저우신민(周新民) 등과 함께 제3차 중국민주연맹 총회를 이끌고 장제스를 비난하고 민주연맹의 노선과 정책을 재정의했다.

1948년 5월, 선쥔루는 민주연맹을 대표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의 신정치협상회의 개최 호소에 호응하여 홍콩을 몰래 떠나 9월 29일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대표와 신정치협상의 성격, 임무 등에 관해 협의하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1949년 2월 베이징에 가서 신정치협상회의 대표와 신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 상무위원회 부주임에 참석했다. 또한 9월 21일에 열린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과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2.6.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편집]


선쥔루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제12,3기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초대 중앙인민정부 최고인민법원장을 역임했으며, 중국민주동맹 제1차 중앙부주석, 제2,3기 중앙주석을 역임했다. 1957년 반우파 투쟁으로 그와 함께 민주운동을 이끌었던 동지들이 우파로 몰려 숙청당했지만, 그는 '혁명원로'로서 존중받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는 그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별다른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고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실을 묵인했기 때문이었다.

1963년 6월 11일, 선쥔루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향년 88세.

3. 사상[편집]


선쥔루는 초창기엔 입헌구국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입헌제도를 도입함으로서 청나라의 봉건 전제제도를 변화시키고 민주정치를 부분적으로 도입해 백성이 정치에 참여함으로서 사회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청나라가 끝내 입헌제도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자, 그는 마음을 바꿔 쑨원의 공화정치 주장을 따랐다. 신해혁명 후, 그는 봉건 군벌 통치에 반대하며 민주정신 관철과 입헌 정치를 주창했다. 그가 주도한 구국회의 정치강령에는 민주제도 확립이 각 당파의 철저한 협력의 기본 요건이며 결사, 집회, 언론, 출판의 자유이며 연합전선에서 양보할 수 없는 요구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는 중일전쟁 기간에 항일투쟁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더 많은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후 국민정부가 권위제도를 계속 실시하여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법치를 파괴한다고 비판하고 국민참정회에서 2차례에 걸쳐 인민의 권리를 확실히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안건을 제출해 많은 참정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그는 <민주주간> 잡지를 창간해 국민당이 또다시 공산당 토벌 작전을 감행해 내전을 일으킨 것에 반대하며 국민정부가 비민주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민은 국가의 주인으로서, 펜으로 국민의 공의를 반영하고, 민주정신을 발양하여 민주 생활상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선쥔루는 법치 실행 역시 국가의 강약성쇠에 중요한 요소라고 봤다. 그는 한비자의 말을 인용해 "법을 신봉하는 자가 강하면 나라가 강하고 법을 신봉하는 사람이 약하면 나라가 약해진다."고 주장했다. 북양군벌 치하에서, 선쥔루는 <임시약법> 수호를 위해 군벌과 맞섰고 "오늘날 중국은 법체계를 세워 법치를 실현하고 군벌의 난립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30년대 국민정부 치하에서, 그는 국민정부가 민주인사를 짓밟는 것을 비판하며 옥고배상운동을 전개했으며 옥고 배상법 초안을 제정하여 국민당 중앙당에 제출했다. 비록 이는 통과되지 못했지만, 그의 이같은활동은 비교적 광범위한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그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보다 더한 독재정치를 실시하고 동지들을 탄압하는 와중에도 침묵을 지켰고 공산당이 자신을 '혁명원로'로 대접하며 노후를 편히 지내게 배려하는 것에 만족해 공산당에 대해 별다른 비판을 가하지 않아 말년에 몸을 사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4.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