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후회의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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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제안
3.2. 선후회의 조례
3.3. 선후회의 소집
3.4. 회의의 난항
4. 이후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편집]


1925년 2월 1일, 중화민국 임시집정 돤치루이2차 직봉전쟁 이후 중국의 정세를 토론하기 위해 소집한 회의이다. 1925년 4월 20일까지 총 22차례 대회가 열렸으며 4월 21일에 폐막되었다. 막대한 예산과 시간을 들였지만 기본적으로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의 존속을 위한 형식적인 회의에 불과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간체자로는 善后会议로 표기한다.


2. 배경[편집]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봉천군벌, 돤치루이안휘군벌, 펑위샹의 국민군이 합세하여 북경정변을 통해 대총통 차오쿤을 축출하고 직예군벌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펑위샹은 호경익, 손예 및 휘하 장령들과 연명으로 통전하여 정전과 전쟁의 뒷처리, 즉 선후 문제를 위해 전국의 인물들의 모여 대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했다. 펑위샹은 10월 26일, 돤치루이를 국민군 대원수로 추대하는 한편 중국 국민당의 영수인 쑨원에게 북상하여 국사를 공동으로 토론할 것을 제안했다. 쑨원은 이에 응하여 10월 27일 펑위샹과 돤치루이에게 곧 북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11월 1일 펑위샹, 돤치루이, 장쭤린이 조속한 입경을 청하자 11월 10일, 대원수 직은 후한민에게, 북벌은 탄옌카이에게 맡긴 후 자신은 북상선언을 발표하여 불평등조약의 폐지와 국민회의 소집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베이징에서는 장쭤린과 돤치루이가 연합하여 11월 15일,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하였고 돤치루이는 이에 응하여 11월 24일 임시집정에 취임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비롯한 10개 성이 11월 2일 차오쿤의 하야 이후 수립된 황부의 대리내각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통전을 보내고 있었고 옌시산 등은 돤치루이 추대를 주장하였다. 직예군벌의 잔여세력마저 돤치루이 추대를 주장하자 과두정을 구상하던 펑위샹은 자신의 주장을 접고 돤치루이 추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집정에 추대된 돤치루이는 회선 사건 이후 중화민국의 기존 법통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차오쿤 헌법, 임시약법, 국회를 소멸시켜 새로운 법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비상국회의 국회의원들은 대의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에 반대했다. 돤치루이의 임시집정 취임은 상당히 독재적인 정권의 출현과 더불어 국민당이 시국해결에 참여할 길이 사실상 막혀버린 것과 같았다. 돤치루이는 쑨원의 국민회의 소집 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한가지 방책으로 선후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3. 전개[편집]



3.1.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제안[편집]


11월 21일, 돤치루이는 통전을 발표하여 선후회의와 국민대표대회의를 소집하여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임시집정에 취임하겠다는 통전을 발표하여 11월 22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돤치루이의 통전은 크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1. 법통이 허물어져 철저한 개혁의 길만이 남아있는 이때 우선 중앙정부가 비어 있으므로 임시집정직에 취임, 임시정부를 조직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겠다.

  • 2. 국헌제정, 성헌보성, 군제개혁, 재정정리, 교육발전, 실업진흥, 교통개발, 민생구제 등의 대사업은 전국민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므로 앞으로 1개월 안에 선후회의를 조직하여 시국의 분규를 해결하고 건설방침을 마련하도록 하고 또 선후회의 3개월 안에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미국 필라델피아 회의처럼 일체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겠다.

  • 3. 이 회의가 완성되는 날 집정직을 사임하겠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제안이 쑨원의 북상선언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발표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쑨원의 국민회의 소집 주장에 맞서 법통대안과 취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변명으로 해석된다. 당시 전국적으로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시국을 수습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국내외에서 빗발치고 있었는데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제안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일각에서는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제안을 그저 군벌들의 이익 분배를 위한 야합으로 여겨 묵살하였는데 예컨대 중국 공산당은 임시집정 정부를 무시하고 예비회의를 소집하고 정권담당의 주체를 맡겨 민치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12월 7일, 92개 공단의 127명의 대표가 모였던 상하이 국민회의 촉성회는 이 주장을 채택했다. 하지만 돤치루이 정부 자체를 부인하는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 호응하는 이들이 적었고 쑨원이나 국민당도 일단 임시집정 정부를 인정하고 임시집정 정부로 하여금 국민회의를 단계적으로 소집하는 것을 촉구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힘을 얻진 못했다.

반면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주장이나 쑨원의 국민회의 주장이나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여 돤치루이에게 선후회의를 조속히 소집할 것을 요청하는 호응도 뒤따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돤치루이가 주도권을 쥐고 국민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지지할 뿐이지 돤치루이의 독재적인 권력을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3.2. 선후회의 조례[편집]


11월 24일 집정에 취임한 돤치루이는 취임 이후 안휘파의 세력강화에만 힘쓰며 3주일 동안 선후회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집정부는 이것이 봉천군벌이 선후회의조직대강에 대해 불만이 있으며 톈진에 도착한 쑨원이 병환으로 검토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1] 애초에 돤치루이가 선후회의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국민당은 임시집정 정부와 결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비판하진 않았으나 국민당원의 베이징 정부의 공직 취임을 금지하는 한편 국민당의 기반인 광동에서는 광동 촉성회를 중심으로 500개 단체, 2만명 이상의 시위대가 운집하여 선후회의 반대 시위, 약법부활 시위를 벌였다.

당연히 공약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권력 강화에만 힘쓰는 돤치루이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돤치루이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선후회의 소집을 준비하게 되었다. 돤치루이는 처음에 비상국회 국회의원들을 포함하기 위해 선후회의 구성요소에 회선을 거부한 의원에 대한 항목을 넣었으나 봉천군벌이 반대함에 따라 이들을 빼는 수정과정을 거쳐 1개월 안에 선후회의를 소집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12월 24일에야 겨우 선후회의 조례 13조를 발표하였다. 조례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 시국 분규해결과 건설방향의 주의(籌義)를 종지(宗旨)로 한다.

  • 2. 국가 유공자, 각 지방의 군민장관, 회선토벌의 각군 수령, 집정이 초빙 내지 파견하는 명사의 네 가지 부류로 조직하되 앞의 3부류는 대표를 보낼 수 있다.

  • 3. 국민대표회의의 조직방법, 군제개혁과 재정정리에 관한 사항 및 기타 집정이 제안한 안건을 의결사항으로 하고 집정이 제출한 의안을 우선적으로 토의한다.

  • 4. 전문위원회를 두어 대회에서 제교(提交)한 의안을 심사하고 대회에 출석, 보고하며 의견을 진술할 수 있게 한다.

  • 5. 회의는 1개월을 기한으로 하되 20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사실상 군벌과 정객들의 잔치일 뿐 각 민간단체들이 배제된다는 자인이나 다름없는 조례였다. 또한 불평등조약의 철폐를 천명한 쑨원의 북상선언과는 달리 열강의 승인을 얻기 위해 기존에 청나라와 민국정부가 체결한 모든 조약을 존중하겠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에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2월 27일 선후회의 조례에 반대하는 통전을 보냈지만 쑨원은 돤치루이의 임시집정 정부와의 결렬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선후회의 소집 자체는 인정하되 조례의 수정을 요구하는 태도를 취했다. 12월 31일에 베이징에 도착한 쑨원은 입경선언과 서면담화를 발표하여 구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이를 무시하고 2월 1일 이전에 베이징에서 선후회의를 소집하겠다고 발표, 국가유공자로 쑨원과 리위안훙을 지목하여 1924년 12월 30일에 이들을 초빙하는 전보를 보내고 1925년 1월 1일에 각군 수령, 각성 군민장관, 량치차오, 장병린, 천춘쉬안, 탕사오이 등과 베이징, 톈진, 상하이, 홍콩의 명사들에게 선후회의 참석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또한 허세영을 선후회의주비처 주비처장으로 임명하여 관련사무를 맡겼다. 허세영은 선후회의를 위해 총 44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허나 리위안훙은 통전을 보내 참여 반대를 명백하게 표시했고 천춘쉬안, 장병린, 탕샤오이 등의 구 국민당의 정객들도 호응하지 않았다. 이에 집정정부는 각군의 수령과 군민장관의 포섭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베이징대학후스와 상하이총상회 회장 우흡경(虞洽卿)를 비롯한 학계와 재계의 무당파 명사들을 초빙했다. 이에 호인정부론(好人政府論)을 주장하며 각성회의를 강조하던 후스는 선후회의를 선용(善用)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참여의사를 밝혔다. 우흡경도 재계의 정국 참여 권한을 확대하기 위하여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는 국민회의라는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있는 회의부터 실천에 옮겨 민치의 기반을 닦고 1919년 선후회의 이후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회의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도모하자는 베이징의 학계 지식인들의 희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1월 17일, 쑨원은 소위 <1.17 주장>을 발표, 선후회의라는 명칭으로 회의를 소집해도 좋으나 민의를 대변할 수 있는 <현대실업단체, 상회, 교육회, 대학, 학생연합회, 농회, 공회 대표>를 가입시키고, 군제, 제정 문제는 국민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처리하게 하자는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면 중국 국민당도 선후회의에 참여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1월 29일, 쑨원의 조건을 수락할 수 없으며 다만 전문위원 자격으로 각성 성의회, 교육회, 총상회, 농회의 수장 및 베이징, 톈진, 상하이, 한커우의 총상회회장을 초빙하겠다고 답변하면서 사실상 쑨원의 제의를 묵살했다.

일부 국민당원은 돤치루이의 답변을 양보로 해석하고 선후회의 참가를 주장했으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최종적으로 국민당의 불참을 정식으로 결의하고 언론을 통해 이를 당원에게 알렸다. 선후회의 참가파는 이것이 왕징웨이 등이 주도한 것이고 중태에 빠져 있던 쑨원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아주 일리가 없는 주장까지는 아니었지만 쑨원의 의사가 묵살된 것으로 보기는 무리였다. 국민당은 국민회의초성회를 조직하여 국민회의 소집 및 선후회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나 1월 29일에는 국민회의촉성회의 불참가 요구에도 불구하고 각성의 성의회, 교육회, 총상회, 농회 등의 수장들이 집정의 전문위원 자격으로 선후회의 참가를 선언했다.[2]


3.3. 선후회의 소집[편집]


2월 1일, 집정벙부는 선후회의 개회식을 가지고 이중에는 172명의 회원 중 86명이 참석했다. 대부분 군벌과 정객들이었으나 위유런을 비롯한 일부 국민당 인물들도 선후회의 회원 초대연에 응하였다. 돤치루이는 이날 <임시집정건설선언>을 발표하였다.

  • 1. 신해혁명 이후에도 계속 부분적으로 혁명이 연장되어 유형무형의 손실을 초래하고 있는 것은 국헌이 미정되어 있 기 때문이다.

  • 2. 그러므로 국헌제정은 국민회의의 최대 임무이고 국헌으로 성헌제정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 3. 실력파 대표의 선후회의에서 평화통일의 기초를 다진다.

  • 4.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총의에 의거하여 제헌을 한다.

  • 5. 헌법을 우선적으로 마련하여 통일의 기초를 다짐으로써만이 신해년 이후 거듭되어 온 혁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참여가 너무 저조하여 2월 3일 첫 담화회를 개최, 연명으로 <정부가 전국에 군사행동을 정지할 것을 통전하도록 요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했고 4일, 9일에 담화회, 예비회의 형식으로 몇차례 회합을 가졌으며 2월 5일 오후, 선후회의 개회 이전에 모든 군사행동을 정지하라는 통전을 발표했다. 또한 돤치루이는 <국민대표회의조례초안>을 발표하여 국민회의에서 헌법 및 시행부칙을 의결하자고 제안했는데 베이징에서 4명, 각 성에서 3명, 내외몽골에서 8명, 티베트에서 6명, 청해성에서 2명, 화교 16명 및 전국 각 대학에서 1~2명, 각 상업구에서 1~2명, 전국 실업구에서 1~2명, 회선을 거부한 국회의원들 중의 당첨자, 헌법기초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국회의원들을 모아 국민대회를 열어 헌법을 제정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참가를 통해 전민혁명을 달성하자는 쑨원의 주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으며 그나마도 계속 수정되어 남녀평등, 보통선거, 단체의 비중강화 등의 요구가 묵살되었으며 형식적으로 헌법을 만들기 위한 회의로 전락하였다.

이윽고 2월 13일이 되어서야 1차 대회를 열 수 있었다. 회장으로는 봉천군벌의 조이손(趙爾巽)이, 부회장으로는 전직 연성자치론자 탕의(湯漪)가 선출되었고 의사세칙이 통과되었다. 또한 전문위원회 인선을 위해 전직관료, 국회의원, 재계인물, 대학교수, 각성 단체대표들 중에서 추천된 1000명의 후보 중 법제위원 85명, 재정위원 65명, 군정위원 58명, 경제위원 113명, 교육위원 27명, 교통위원 15명 등 총 363명의 위원이 선출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민당은 기존의 입장에서 강경화하여 선후회의 반대와 독자적인 예비-국민회의 소집에 나서기 위해 베이징 촉성회를 수립하는 한편 전국적인 촉성회 연합을 추진하였다. 3월 1일에 전국 각지의 촉성회 대표들이 모여 베이징에서 촉성회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었다.


3.4. 회의의 난항[편집]


2월 19일, 2차 대회가 열려 본격적인 의안검토가 시작되었다. 돤치루이가 6건의 의안을 제출했고 각 회의원들의 제의안, 수정안, 의견서도 12건 제출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2월 24일의 3차 대회에도 마찬가지였고 이후 3월 16일의 7차 대회까지 마구잡이로 의안이 제출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너무나도 많이 쏟아진 의안들 때문에 의안이 제대로 검토되지도 않아 일거리만 쌓여갔다. 회기 종료일로 지정된 3월 16일까지 의안이 단 하나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자 여론이 이를 비난했고 이에 회원들은 선후회의를 20일 연장하기로 한 다음에 2주간의 휴회기를 두어 담화회 등의 형태로 의사소통을 하여 의안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2주간의 휴회기 동안 의원들은 연일 담화회를 열어 재정, 군사부문의 부문별 토의를 진행했고 또한 전문위원회연합심사회에서 각 수정안을 심사하게 했다. 3월 31일 8차 대회가 열려 선후회의가 재개된 이후는 덕분에 빨리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난항을 겪었다. 연성자치론자들은 저보성을 중심으로 선후회의에서 연치를 건설방침으로 정하게끔 노력하겠다는 조건으로 선후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들은 통일의 전제로 임시정부를 합의제로 개조할 것을 건의하는 <중화민국임시정부제 초안>을 내놓아 33인의 집정으로 구성된 국무원을 행정수반으로 하는 개조안을 제안했지만 돤치루이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리 만무했다. 과거의 연성자치론자 탕의도 돤치루이와 밀접하게 연대하여 선후회의가 이를 의결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합의제 개조 주장을 저지하여 저보성 등의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연성자치론자들의 제의는 정식으로 토론대상이 되지도 못했다. 이에 분노한 저보성과 호남성 대표 등 연성자치론자들은 선후회의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또한 선후회의의 지속적인 평화 호소에도 불구하고 2월 22일 하남에서 군벌들간의 무력충돌이 시작되었고 여론과 선후회의 회원들은 격분했다. 1925년 2월 20일자 시보는 <회의는 회의고 실력은 실력이니 170여인의 토론이 대국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라는 사설을 통해 선후회의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후스도 집정정부가 군벌들의 분쟁을 저지할 방도나 성의가 없다고 여기고 선후회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참여를 중단했다.

선후회의는 중요한 주제인 군사문제에서도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강절전쟁에서 강소독군 치셰위안의 공격으로 축출되었던 전 절강독군 루융샹을 다시 장강 유역에 정착시키기 위해 돤치루이는 1924년 12월 3일 루융샹을 직예군무선후독판에 임명했지만 봉천군벌의 반발에 부닥쳤다. 이에 돤치루이는 강소에서 치셰위안이 실각한 틈을 타 루융샹을 12월 11일 소환선무사에, 1925년 1월 16일 강소군무선후사의에 임명했다. 하지만 강소성에서도 루융샹의 남하가 전란을 야기할까 우려하여 반대기운이 높아지자 루융샹은 2월 27일 강소군무선후사의 직위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함으로 당시 중국에서 벌어지던 독군 폐지 운동에 동참했다. 이에 여론이 그의 주장을 환영하며 돤치루이에게 루융샹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지만 돤치루이는 이를 묵살했다. 반면 장쭤린은 동삼성순열사직을 폐지하고 강소, 강서의 독리군무직을 폐지하면서 이러한 주장에 호응했다. 물론 장쭤린의 폐독 역시 독판군무선후사의라는 이름만 다른 독군을 만들어 대체한 눈가리고 아웅한 격이었지만 그나마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돤치루이의 태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그나마 돤치루이가 2차 대회에 제출한 재병론 역시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서 더욱 그의 성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봉천군벌 등은 그 정도의 의안 역시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담화회에 불참했다. 결국 모든 군사문제는 선후회의 폐막 이후 조직될 군사선후위원회에서 다루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군사문제는 선후회의에서 완전히 보류되었다. 또한 돤치루이는 임시집정정부의 존속을 정당화하기 위해 <임시참정원조례> 9조를 발표하여 정식정부 성립까지 임시참의원이 직권을 행사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여론의 비난을 샀다.


4. 이후[편집]


이 와중에 3월 12일 쑨원이 간암으로 사망했고 4월 21일 선후회의는 별다른 성과 없이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집정정부는 성공적인 종결이었다고 자화자찬했다. 4월 30일에는 베이징 촉성회가 봉쇄되었고 상하이 촉성회 등 다른 지역의 촉성회에 대해서도 정부의 탄압이 가해졌다. 국민당은 쑨원의 사망과 내분, 그리고 5.30 운동을 비롯한 대외 문제의 발생으로 더 이상 독자적 예비회의 소집에 전념하지 못하게 되었다.

돤치루이는 국회를 해산한 후 5월 17일 국민대표회의주비처를 설치하고 허세영을 다시 주비처장으로 임명하여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선거를 준비했다. 돤치루이는 6월 30일 국민대표회의가 끝나는대로 10월 이전에 헌법을 제정하여 집정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7월 4일 각성 장관에게 위원 선거를 요구하는 전보가 보내졌으며 8월 3일 국헌기초위원회가 소집되었다. 하지만 선거령 동안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선거가 이루어졌고 주비처장 허세영도 재정권 문제 때문에 사직해버렸다. 12월 11일 국헌기초위원회는 헌법초안을 작성하여 돤치루이에게 제출했지만 국민대표대회가 끝내 소집되지 못하면서 초안에서 멈추었고 손봉전쟁, 반봉사건, 직봉풍전쟁 등 군벌들 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집정정부는 이를 전혀 막지 못하면서 결국 완전히 민심을 잃게 된다.[3]


5. 참고문헌[편집]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등 공저, 지식산업사.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동양학 49권 49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6.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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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돤치루이는 쑨원에게 선후회의조례초안을 보내 자문을 구하긴 했고 쑨원은 이에 대해 병환을 이유로 답하지 않았다.[2] 한편 쑨원은 1월 26일 협화의원에서 간암 진단을 받고 2월 18일에 구웨이쥔의 사저로 거처를 옮겨 투병 중에 있었다.[3] 예컨대 베이징의 서산회의파들은 린썬, 쩌우루를 중심으로 베이징의 각 대학교수들과 함께 돤치루이의 통치를 비판하며 관세자주 3원칙 발표, 서산회의 소집, 돤치루이 하야 요구 시위 등을 전개했다.